설교 · 주일

"시작" / 박예진 전도사

2024-02-11 · 마가복음 1~3장 · 박예진 전도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는 앞으로 어 7주간 어 마가복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그 복음에 대해서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이 과연 어떤 책인지 먼저 알아야겠죠. 어 신약 성경은 크게 역사서와 서신서로 구분됩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은 어디에 해당하는 책일까요?네 네, 맞습니다. 마가복음은 역사서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자세하게 분류하게 되면 역사서 중에서도 복음서라고 하는 장르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복음서는 총네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책인지 아시나요? 네, 신약 성경 중에 뒤에 복음이라는 책이 다 복음서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바로 복음서에 해당하겠죠.이네 이네 권의 책 중에서 특별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따로 묶어 공간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마가복음은 신약 성경의 역사서 중에서 복음서 그리고 그 복음서 중에서도 공간복음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름이 왜 마가복음인지 알고

계시나요? 이유는 되게 간단해요. 마가가 기록한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모두 한 가지의 복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여러 명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이죠. 다만 저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에 따라 또는 저자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 독자에 따라 어 책마다 약간의 문학적 특성이 다르거나 표현 방법이 다를 순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같은 복음 한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 마가복음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 책일까요? 어,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책의 저자인 마가에 대해서 먼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가 대체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어, 몇몇 사람들은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일 것이다라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 사도들과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었죠. 혹시 여러분 마가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으신가요? 네. 아마 많은 분들이 마가다락방을

생각하실 것 같아요. 맞아요. 바로 그 마가다락방의 주인공이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입니다. 어 그 당시에 어마다 다락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그런 작은 다락방이 아니라 그냥 건물의 2층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성경이 들어올 때 우리나라는 그런 고층 건물이 많이 없었잖아. 2층에 있는 건물이 많이 없으니까 그냥 다락방이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 장소에 120명 가까이 사람들이 모였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말은 마가의 집이

꽤 넓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고 집이 넓다는 것은 그 당시에도 좀 부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가에 대해 좀 여러 자료를 살펴봤었는데요. 실제로 마가는 좀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거 같아요. 어, 예루살렘은 우리가 서울의 강남, 강북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도 하부 도시와 상부 도시가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강남 아래쪽이 좀 잘 산다고 하잖아요. 근데 예루살렘 반대로 상부 도시가 잘 사는 사람들의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다락방에 있었던 마가의 집은 예루살렘의 상부 도시, 그러니까 부자 동네에 있었던 어 집이었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마가가 좀 부유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마가는 부잣집, 금수저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가는 그 당시에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에 속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여러분 마가의 이름이 두 개라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하나는 요한이라고 하는 히브리식 이름이 있고 다른 하나는 마가라고 하는 헬라식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마가를 요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 마가의 이름이 왜 두 개였을까요? 왜냐하면 마가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헬라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어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청년부의 예빈 자매님은 영어 이름이 있거든요. 왜냐하면 저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자매님은 영어를 사용하고 그 문화권과 소통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가는 헬라어 교육을 받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극소수의 어 사람이었는데요.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건 그가 글을 쓸 수 있는 그를 기록할 수 있는 극소수 엘리트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주로 이런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따라다니면서 베드로의 통역과 역할을 한 것이죠.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그가 그것을 다른 어러 헬라어로 번역하여 주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니 마가는 당시에 가장 권위 있다고 말하는 그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가장 가까이에서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내용을 바탕으로 그가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가가 기록한 마가복음의 특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각 복음서마다 그 저자가 의도한 또는 그 저자의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특징들이 있는데요. 마가 또한 마가복음에서 드러나는 복음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대표적인 것은 마가복음에는 곧이라고 하는 단어가 아주 많이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봤을 때 비교적 전개가 빠르다라고 느껴지죠. 그리고

마가는 역사적고 하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역사적 현재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일을 현재 일어 일처럼 묘사하여 기록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시제를 현재로 기록해서 마치 지금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기록하는 것이죠. 그렇다 마가 왜 이러한 방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독자가 그 복음서를 읽었을 때 그 이야기를 통해서 더욱 생동감 있게 느끼게 하고 마치 그 일이 과거에 있었던 죽은 사람인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야기로 느낄 수 있도록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문학적 기술을 사용해서 독자들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빨리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그가 빨리 예수를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마가가 어 사도 베드로와 함께 일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이 복음서도 성격이 꽤 급한 책인 책인 것처럼 보입니다. 또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처음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책입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를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만약 만약 어떤 사람에게 보고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이 동시에 보고서를 가져왔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A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가져왔어요.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A라는 내용의 몇 가지 내용이 더 추가된 보고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그 보고서 두 개를 동시에 받았을 때 누가 보고서를 제일 처음했었다라고 생각할까요? 맞아요. A의 내용만 가진 봉어사가 처음 쓰였다고 생각했겠죠.

왜냐면 그 내용을 가지고 두 번째 사람이 몇 가지 내용을 추가한 보고서를 쓰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 가장 짧은 책이에요. 옛날에는 성경을 두루마리라고 하는 것을 기록을 했는데 마가복음은 두루마리 한 장 분량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다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마가복음에 있는 내용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복어서의 A와 같은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된 다른 에피소드이 추가된 형식으로 마태와 누가복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가장 처음에 쓰였지만 가장 정돈되지 않은 책이기도 합니다. 가장 처음에 썼기 때문에 참고할 자료도 또는 수정할 자료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신학대역은 시절에 저에게 공간복음이라는 과목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마가복음은 가장 처음 기록된 책으로 날것 그대로의 정수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날것 그대로의 정수가 기록된 마가복음은 언제 쓰인 책일까요? 마가복음이 언제 쓰였는지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지 다릅니다. 그렇지만 대다수학자들은 베드로의 순교 이유일 것이다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후 65년경에 순교했고 마가복음은 그 이후인 65년에서 73년 사이에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아마도 베드로를 비롯한 복음을 가르쳐 주던 많은 사도들이 순교하게 되자 그들이 생전에 가르쳤던 그 복음 예수님께서 전해 주셨던 그 말씀을 기록하고 보존해서 후대에도 계속 전달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또 정확하지 않지만 초기 전통에 따르면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라고 보는데요.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근거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빌론에 있는 자매 교회와 나의 아들 마가가 여러분에게 무난합니다. 여기서 바벨론은 어 구약에 나오는 바벨론이 아니고요. 로마를 가르키는 표현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구절에 의하면 당시 베드로가 마가와 함께 있었고 어 로마에서 어 마가는 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1차 독자들은

로마에 있었던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라틴어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예수님의 아람어머어 또는 히브리 표현이나 유대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문화권을 설명하는 보충 설명이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방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왜 그런 문화를 가진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증 설명을 해 주는 것이죠. 이렇게 마가복음에 대해 아주 짧게 정리를 한번 해 봤는데요. 좀 이해가 되시나요? 네. 어렵지

않죠? 이제부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마가가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했던 그 복음 그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시작. 마가복음의 시작은 매우 파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뭐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렇게 파격적이지 않다라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이것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신의 아들이다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황제뿐이었어요. 그리고 복음이란 단어 또한 황제와 관련된

것에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황제가 탄생하거나 아니면 그가 어떤 전쟁에서 승리를 얻거나 아니면 어떤 업적을 일했을 때만 그것이 복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마가는 그런 로마 한복판에서 그것이 어 이게 신의 아들이고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믿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성경을 시작합니다. 당시의 세계관과 정면으로 충돌라는 이야기죠. 마가는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가 따르는 황제는 진짜 신의 아들이 아니야. 진짜

복음이 따로 있어라는 것을 마가는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게 당시에 보통 배장으로는 어 외칠 수 없는 말이에요. 강력한 로마 제국이 통치하고 있는 그 시대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냥 죽기를 자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책의 시작과 동시에 가장 첫 문장에서 이렇게 무언가를 기록했다는 것은 그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무언가가 진짜 있었다는 것이겠죠. 목숨이 위태로 올 것을 알고도 그가 첫문장에 그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에게는 그렇게

외칠 만한 어떤 가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전하고자 했던 예수님은 대체 어떤 분이셨으며 어떤 일을 하신 분이었을까요?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이 요 잡힌 후 예수께서 다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내가 찾고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들이 강음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땅에 들어가 바르시매 두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이는 가르치는 것이 원이 있는 자와 같고 서기들과 받지

아니함이라 다 놀라 서운더이 이는 어찌이냐 있는 새 교훈이로다. 귀신들에게 명한 줄 순종하도다 하더라. 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정리해 보면 사실 간단 명료합니다. 그분은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신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 매우 놀라워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들을 가르쳤던 그 가르침과는 무언가 달랐다는 것이죠. 그냥 보통의 사람이 들어도 아 저 사람은 뭔가 다르구나. 저 사람의 가르침에 뭔가 있구나라는

것을 그들도 느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단번에 고치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복음이 선포되었고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이 땅에 오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너무 쉽게 읽기 때문에 이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상시의 사람들에게는 어땠을까요? 그야말로 핫 이슈였겠죠. 엄청난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 장모에 어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소문이 순식간에 온 갈릴리 지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 이후부터는 거의 뭐 예수님의 금쪽 상담소 같은 이야기들만 진행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또 그의 가르침이 어 뭔가 다르다라는 그런 소문이 퍼지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 또 어떤 가르침을 얻고자 했던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그냥 집에서 좀 쉬고 밥 잘 먹고 약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낳는다고 하면 그런 병으로 예수님까지 찾아왔을까요? 물론 찾아온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보다 더 위급하고 정말 그런 기적이 아니면 도무지 자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그런 답이 없는 사람들이 아마 그 자리에는 많이 몰려왔을 거예요. 저는 이러한 대표적인 예시를 마가복음이 1장과 2장을 통해서 먼저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나병 환자와 중풍병자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나병 환자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나병이 무슨

병일까요?네 네, 맞아요. 문둔병 또는 한병이라고 불리는 병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정하다라고 명하신 것이 어 몇 가지가 나오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나병이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나병 환자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저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부정하다라고 하신 사람입니다라는 뜻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레위기에 보면 그들은 부정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진 바깥에서 혼자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우리 성경을 함께 볼까요?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아성 비명에 걸린 사람은 이옷을 찍고 머리를 풀어야 한다. 또한 그는 자기 꼬미 시험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한다. 병에 걸려 있는 한 부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므로 그는 인정하다. 그는 집 바깥에서 혼자로 살아야 한다. 나병한 자는 병이 낫지 않는 한 그는 계속해서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부정한 사물이나 사람을 만지거나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부정함이 자신에게로 전가된다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러니까

나도 부정해지면 안 되니까 그런 것들을 극도로 경계하는 그런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병 환자에게는 반절된 삶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삶의 거처를 옮겨야 했고 사람들과도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플 때 혼자 있으면 더 서러운 거 아시죠? 근데 이 사람 평생 혼자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혹시 다른 사람과 실수로라도 슬칠까 봐, 나의 부정함이 그게 전가될까 봐, 나병 환자들은 지나다닐 때 스스로 나는 부정합니다. 나는 부정합니다라고 외치며 다녀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을 피해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거죠. 나병이라는 병은 한 사람을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또 물리적으로도 고립시키는 아주 외로운 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병환자의 삶이 어땠을까요? 우리가 다 진작할 수 없겠지만 병에 걸린 것도 서로운 그는 아마 단절된 외로움에 더 몸부림쳐야 했을 것입니다. 스스로도 자신이 부정하고 저주받았다고 외쳐야 했고 또 그렇게 생각하며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나병한 자가 정말 답이

없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그 삶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거예요. 마지막 지푸락이라도 잡는 그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사람이 예수께서 그 앞에 물 꿇고 간청하였다. 선생님께서 하시면 나에게 뜻하게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려 그에게 드시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주아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나병한 자가 얼마나 사람을 만나는게 껄끄러웠겠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뚫고 그가 예수님 앞에 와서 정말 간절하게 요청하는 거예요. 선생님, 제발 저를 고쳐 주십시오.이 이 나병을 낳을 길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두말하지 않으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며 손을 내밀러 그를 어루 만지십니다. 내가 깨끗하게 되기를 원한단다.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의 그 손길 한 번 말씀 한 마디에 그를 괴롭히던 나병이 고쳐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 혹시 발견하지 못하셨나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셨다는 것이죠. 부정하다 여겨지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면 손을 댄 그 사람 또한 부정해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전혀 반대의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병환제의 부정함이 예수님에게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정결함이 나병 환자에게로 옮겨가 그도 정결하게 바꾸어 버린 것이죠. 여러분,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가 붙을 수 있는 복음의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손을 대시고 얼음 만지시는

분이십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저주받았다고 여겨지는 그런 부정한 것들 만지라고 주어도 만지고 싶지 않은 것이 정상인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더럽고 부정해. 너희 때문에 나의 깨끗하고 거룩한이 손을 더럽힐 수 없어.라고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세요. 주님 앞에 나아왔을 때 그냥 우리를 만져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아픈 그 환부를 어루만지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시죠. 내가 깨끗하게 되기를 원한단다. 깨끗하게 되어라. 그리고 그분의

정결함은 곧 우리를 정결케 하고 우리의 부정함을 아주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렇게 회복된 나병 환자는 자신의 정결함을 입증하러 제사장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를 살펴보고 그 사람에게서 정말 나병이 나왔다라는 것이 확인되면 그가 다시 종교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 용납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복되었다라는 것, 그가 병이 나왔다라는 것은 그냥 아, 피부병이 나왔구나. 나를 괴롭히던 병이 나왔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이루는 그 공동체에 그가 다시 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도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립되고 외로웠던 그 나병 환자에게 지금 복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중풍병자입니다. 예수님이 갑나움에 머물고 계실 때 그 머무 집까지 사람들이 막 셀 수 없이 몰려 들어왔어요. 그것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 모였겠죠. 아프거나 병들거나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을 가진 고통받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많은 인물

중에서 다시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나눌 중풍병자 이야기죠. 마가복음 2장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많은 사람이 이어들어서 마침내 눈앞에 붙잡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한공경 환자를네 사람이 데리고 같다. 우리 때문에 예수께로 괴할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에 지을 걷어내고 어서 중풍 환자가 누어 있는 자리를 달아내렸다.네 중풍도 나병처럼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질병 중에 하나입니다.

혹시 중풍이 어떤 건지 알고 계시나요? 어, 중풍은 뇌의 문제가 생겨서 몸에 마비가 오는 질병을 뜻합니다. 어, 뇌의 혈관이 막히거나 아니면 터지거나 그러면 몸에 마비가 오는 것이죠. 지금도 현대 의학이 이렇게 발달한 현재에도 뇌에 관련된 질병은 완치가 매우 어렵고 또 후유증이 많아서 무서운 병이다라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중풍이 열렸다. 뇌의 문제가 생겨서 마비가 왔다라는 것은 앞으로 완치될 가능성이 정말 희박한 고쳐질 수 없는 절망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질병인 것이죠.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이 중풍병자도 아마 그런 절망 가운데 갇혀 있던 사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의 병증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침상채로 들고 왔다라는 기록을 보았을 때 아마도 그가 거동조차 하기 불편한 아주 증의 환자이지 않았을까 한번 추측해 봅니다. 어쨌든 이 거동조차 어려운이 환자를 고쳐 보겠다고. 이웃인지 가족인지 친구일지 모르는 그네 사람이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근데 문앞까지 사람이 가득한 거예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어디로 갔죠? 옥상으로 올라가요. 그 당시에는 집마다 보통 바깥에 이렇게 평평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거든요. 아마 이들도 그 계단을 통해서 옥상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의 집 지붕을 뜯기 시작합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이 당시의 옥상은 목재로 된 지붕에 진흙을 발라 놓은 구조였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그것을 이렇게 뜯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담하게

남의 집 지붕을 함부로 뜯고 그곳으로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서 내립니다. 그런데 저는 문득이 부분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이 환자는 어땠을까? 분명히 그를 친하겠다고 데려왔던 그네 사람의 간절함과 노력은 칭찬할 만하죠. 저도 그래서 이 본문을 가지고 어릴 때 이런 설교를 되게 많이 들었어요. 이런 사람의 이들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치료함을 받았다고. 그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실제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린 다음에 야

우리가 성공했어. 예수님을 만났어라고 좋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그 침상에 누워 있던 그 병자도 그것이 그들만큼 육쾌했을까 하는 것이죠. 저는 어쩌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간단한 병이 아니잖아요. 온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 있습니다. 말을 할 수도 대소변을 스스로 가릴 수도 없는 처지인 그가 그의 치부를 많은 사람들 앞에 드러내야만 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등장하면 그나마 낫겠는데 지붕이 뜯어지더니 갑자기 내려오는 거예요. 사람이 얼마나

그가 그 상황이 힘들었겠어요. 그의 마음은 단순하게 아 이제 예수님 만나는구나. 나도 고침받을 수 있겠구나 하고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이 병자가 그동안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도들을 했을까요? 아마 용화단 의사를 다 찾아가 보고 좋다는 것은 다 먹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가 경험해야 했던 것은 더 큰 상실감이었습니다. 이것도 안 되네. 저것도 안 되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그의 현실에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절망하며 낙담하며 보냈겠습니까? 어쩌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깨달아 갔을 거예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이제 남아 있지 않구나. 이렇게 계속 기대하고 실망하느니 그냥 포기하고 살겠다.이 장면에서도 잘 보면 분주한 것은이네 사람뿐이에요. 중풍병자 보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예수님 앞에 그저 누워 있을 뿐입니다. 그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누워 있었는지는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오늘 그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의 온갖 치부를 다 드러내고 치료자이신 예수님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모습 그대로 그저 누워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복은 자신의 아픔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나만의 그 치부를 드러낼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내가 숨기고 포장하고 아무리 꽁꽁 싸매고 있어도 내가 주님 앞에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2장 17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건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나 정도면 괜찮다라고 혹시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삶에 예수님이 꼭 있어야 한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아픔, 상처, 지난날의 실수와 잘못들을 그분 앞에서 다 까발려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내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주님, 저는 여기가 아파요. 저는 이런 문제가 있고 저는 이런 죄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치료자이신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주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렇게 그분께 다 내보이는 사람이 나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보였던 그 중풍병자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명한 자에게 사아 내려가서 말씀하셨다. 불법 어이게 자에 따라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하는 하나님 한복하게 자를 용서할 수 있는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마음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듣고 있느냐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한 살에

내 용서받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내 자리를 걸어서 걸어가라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라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시다. 예수께서 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게 말한다. 일어나서 내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거둬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치료하셨죠. 그런데 치료하는 중에 내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을 하신 거죠. 이 사람은 지금 병을 고치기 위해서 왔는데 뜬금없이 죄를 용서했다라고 말씀하신 말입니다. 심지어이 말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굉장히 위험한 말이었어요. 서기관들이 마음속으로 자 자신들이 생각했던 이유도 바로 이 말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데 예수 저 사람이 뭔데 죄를 사했다고 하는가? 이것은 신성 모독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들 안에 있는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나마 다인 건 예수님이 아직 유명해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또 많은 사람들 때문인지 몰라도 그들이 대놓고 예수님을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이상한 예수님께서 굳이 그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시죠. 그들의 생각을 굳이 문제를 삼으셔서 논쟁을 버리시는 일을 키우신 일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굳이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왜

미움받을 짓을 골라서 하시는 걸까요? 거긴 그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겠죠. 그 이유는 바로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자신이 단순히 병만 치료하러 온 것이 아니라 문제만 해결해 준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왜 이런 일을 하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어요.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거든요. 그들은 그저 내 병을 고쳐 주길,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길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본질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죄를 용서하러 왔단다. 우리 눈에 보이는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깊은 곳에 얽혀 있는 본질의 문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난 중풍병자는 더 이상 절망의 침상에 누워 있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어나서 걸어갑니다. 애완과 눈물이 묻어 있는 한숨과 신음이

스며 있는 육체와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았던 그런 슬픔의 악취가 되어 있는 그 침상을 그는 들고 일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그저 누워 있었던 중풍병자에게도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병만 고치시진 않으셨습니다. 내면의 깊은 상처와 아픔까지도 돌보시는 분이었습니다. 어 당시에는 멸시와 천들을 봤던 세리와 죄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세리는 로마 제국과 함께 백성들의 세금을 걷어들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그들을 좋아하진 않았겠죠. 어, 좀 느낌이 다를 수 있지만 마치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 이렇게 일본과 같이 협업해서 일을 하는 사람 보면 그래 먹고 살려면 그럴 수 있지라고 이해하면서도 마음에서 뭔가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처럼 그들도 아마 그런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들은 로마를 위해서 일한다는 이유로 반역자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회당에도 출입할 수 없게 금지당했습니다. 게다가 세리들의

집은 부정한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도 않고 그들과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께서 세리장이었던 사게오의 집에 가셨다는 건 굉장한 사건인 거죠. 어떻게 부정한 자의 집에 갈 수 있지? 어떻게 저런 사람이랑 어울릴 수 있지?라고 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보편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또 세리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이 죄인이라는 표현은 어 크게 보면 율법을 지키지 못한 말씀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좁게 보자면 창녀를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죄인은 사람들이 어울리고 싶지 않은 같이하고 싶지 않은 그런 불류의 집단이었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과 기꺼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세요. 우리 성경을 함께 읽어 볼까요?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진하시다가 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예수에 나를 받아라 하시니 하느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 많은 세계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르라. 바리새인의 정 예수께서 그과 함께 추시는 것을 보고 그 예수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제과 함께 먹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한 자에게는 사가 쓸데 없고든 자에게 쓸 때 있느니라 나는이를 불러오지 아니하 죄를 불러다 하시라 아멘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전도하심을 지나가시다가 레위를 를 만납니다. 그래서 레위에게 너 나를 따르거라고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그 말을 듣는 레위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길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레위가 나중에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가 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고 그의 삶에 복음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사람들의 멸시와 천들을 받던 세리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변화하였습니다. 과연 레이만이 이런 경험을 했을까요? 저는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세리와 또 죄인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던 그들도 모두 이것을 경험했으리라고 믿습니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던 그들 사이에 주님은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과 같이 먹고

마십니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를 위해 왔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예수님 때문에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오랫동안 골마 있었던 그 상처와 아픔이 나아가고 회복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어 저는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한 한두 달을 아 두 세 달을 되게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아주 못된 친구가 있었거든요. 중학교 공부에서 고등학교 공부를 하려니 공부도 어렵고 아침 일찍 가서 야자까지 하고 돌아가려니 이런 생활도 적응이 안 되고 근데 그 와중에

혼자 미움을 받고 있으려니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매일 울면서 하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이에요. 엄마 아빠를 만나면 제발 전화시켜 달라고 때를 쓰며 빌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다가와 준 친구가 한 명 생겼습니다. 버스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저 이렇게 딱 보더니 안녕 하고 인사를 하는 거예요. 정말 뜬금없이요. 넌 어디 살아? 넌 이름이 뭐야? 이렇게 질문을 하더니 우리 집이랑 가깝네. 같이 다니자.라고 하고 그다음날부터

학교를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급식을 같이 먹었고 같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그 친구가 제게 해 준 것은 그게 다였어요. 어떤 특별한 것을 해 줘서 저의 그 미움을 그 미움을 주던 그 친구들을 해결해 주진 않았습니다. 그냥 저와 같이 걸어 가지고 대화를 해 주고 밥을 먹어 줬죠. 그런데 신기하게 도망가고 싶고 숨고 싶었던 제가 학교에 가는게 재밌어지는 거예요. 학교에 갈 힘과 용기가 다시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일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마치 제 친구와 같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것을 해 주지 않아도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말을 섞으며 대화를 하고 그들의 집에서 함께 잔치를 버리는 것. 아마 이들이 모두가 자신을 미워해도 자신을 아껴주던 그 예수님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세상을 살아갈 힘, 자신들을 멸시하는 그들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를 그가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복음이 시작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함께하는 것을 비난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오히려 마가복음 2장 17절로 반문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아, 너희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내가 너희는 고칠 수가 없단다. 너희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내가 너희들과는 함께할 수가 없단다. 그래서 너희에게는 복음이 시작될 수가 없단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이야기는 모두 갑나움이란 곳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갑어나움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아주 큰 도시였고 예수님의 3년

사역 중에 무려 2년 반이란 시간을 보내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어 가보나움의 이름 뜻은 이런데요. 바버나에서 나은 나 선지자의 이름과 같은 단어로 위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나 선지자의 이름이 위로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갑보나움은 위로의 마을, 위로의 동네라는 뜻을 가진 어 곳입니다. 얼핏 보면 꽤 괜찮은 이름처럼 보이죠. 왠지 위로 잘해 줄 것 같고 사랑과 격려가 넘칠 것만 같은 그런 어 왠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그 속을 조금만 파헤쳐 보면

사실 그렇지 않아요. 가보나움이라는 것, 위로의 동네라는 것은 위로가 필요한 동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위로가 많다는 것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고 그랬다는 것은 병들고 지치고 굶주이고 버림받은 이들이 그곳에는 가득했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 예수님은 주로 계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치료자이며 위로자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주받고 부정하다 여겨지 여겨져 홀립 홀로 고립되어 있던 그 나병 환자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는 중풍병 환자를 주님은 치료하고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완전히 따돌림 당해서 그들과 전혀 함께하지 않는 그 외로움 속에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위로자가 되어 주셨어요. 나랑 같이 먹자. 나 오늘 너희 집 갈래. 나랑 이거 같이 하자.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다는 것이죠. 사귐의 가족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치료와 위로가 필요한 예수님이 필요한 갑어나움이 있습니다. 죄와 죄에 따른 죄책감, 열등감, 부정함, 우울, 질병, 온갖 상처들이

난잡하게 뒤섞여 있는 갑옷나움이 우리의 삶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죠. 때로 우리의 모습이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 하찮고 못 나서 일어나도 될까? 나는 해도 안 되나?라고 하는 생각이 문득문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어. 네가 그렇게 아프기 때문에 네가 그렇게 하찮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로 왔단다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2천년 전에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함께 먹고 마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고 주의 사람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부활하라. 내 어 내 온장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보내 죄요 자매요 어머니. 예수님 주에 있는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다 못난 사람들 뿐이었어요. 어디가 아프거나 아니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문제가 많은 그런 사람들이요.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 우리 모양새가 비록 이렇지만 내 꼴이 비록 이렇지만 저는 주님이 그래서 더

필요합니다.라고 외치며 그분을 따라오는 그들을 보고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가족이다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식탁에 함께 앉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복음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복음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는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시작하면서 읽었던 1장 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하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여기서 복음은 승리를 뜻하는 요한겔리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작했다라고 하는 이 시작은 불완전하고 미흡한 출발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는 출발을 의미하는 아르케란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복음은 지금은 미흡하지만 앞으로 점점 완전해질 거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전한 복음, 흠없으신 예수님 그 자체가 시작되었다라고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멘. 사귐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에 있습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아직 복음을 또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저는 오늘이 설교가

그분들의 복음의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는 분명 주님을 따랐었는데 분명 내 삶에도 복음에 시작했던 그 시간들이 있었는데 문득 뒤를 돌아보니 나는 주님과 저만치 멀어져 있는 것만 같은 예수님이 내 삶에 계시지 않는 것만 같은 그런 사람들이 계시다면 그분들도 다시 주님께로 향하는 출발점이 되시길 다시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제가 인상깊게 읽었던 조정민 목사님의 어 성숙 무엇이 성숙인가라는 책의 한 대목을 읽고이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돌아서라. 천국이 가깝다. 가던 길을 돌이켜라.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바로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도 아니고 멀리 있다도 아니고 죽어서 간다도 아닙니다. 우리가 돌이키는 순간 하나님 나라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았다면 돌아서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내 곁에 있지 않으면 아무리 돌아서도 갈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귐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아멘. 여러분의 삶에 복음이 시작될 것입니다. 아멘. 세상을 향해 따르던 걸음을 돌려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복음이 시작되고 승리가 선포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깨끗하게

고치시고 다시 일어나 걸어가게 하시며 여러분을 기꺼이 제자와 가족으로 세워 가실 것입니다.이 이 시간이 마음을 가지고 함께 찬양하며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