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귐의교회 창립 6주년 감사예배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뭔가 특별한 행사를 기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평소와 조금 다른 스타일로 오늘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모세가 신명기 말씀을 통해 출애굽 1세대의 여정을 돌아본 것처럼, 저도 지난 사귐의교회의 여정을 돌아보며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갖고 있었던 질문이 있었어요.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천국과 구원에 관해서
배웠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고, 천국 가기를 소망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린 저의 눈에 천국은 반드시 가야하고, 너무나 좋은 곳이고, 이 세상은 떠나야 좋은 곳이라면, ‘나는 여기에 살아서 무엇하나?’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자살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하니,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참 불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저 주님이 날 천국으로 불러주실 때까지 살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곳처럼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죽으면 천국 갈 것이니 믿고 기다리며 살라고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일찍 믿은 저로서는 그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이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지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뭔가 너무 열심을 다하면 뭔가 세속적인 것 같은 마음도 있고, 그냥 큰 죄를 짓지 않고 적당히 살자는 것이 초등학교 고학년쯤 제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삶에 대해 그리 적극적이지도 않고, 결코 신앙에 대해서 엇나가지도 않았지만, 저에게 삶은 허무하고 재미없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제가 썼던 글이 당시 학급 문집에 남아 있는데,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목 : 과연 내 생활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 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과연, 내 생활에 재미있는 게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하는 대로 해왔다. 아이들은 다과회, 학예회, 무슨 여행을 하면 재미있다고 하지만 난 재미가 없다. 그래도 내 삶에서 가장은 아니지만 강아지와 노는 것, 자전거 타는 것, 책보는 것이 좋다. 그냥 나는
다른 아이가 하는 대로 할 뿐이다. 이것이 제가 6학년 때 쓴 글입니다. 엄청나죠? 이 우울함과 공허함. 지금 봐도 ‘허무주의’가 가득한 모습 아닙니까? 저는 삶에 대한 소망 자체가 그다지 없는 사람이었어요. 하루하루 그냥 남들 하는 것만큼만 하면서 사는 거예요. 물론 이것은 천국과 구원에 관해 제 안에 교회의 가르침이 잘 정리되지 않아서, 잘못된 이해가 제 안에 자리 잡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당시 믿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관과
다르지는 않았죠.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것을 기다리는 삶. 다만 죽음 이후의 막연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현재의 삶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태도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목적 없는 삶을 살던 저에게 한가지 희망의 길이 보였습니다. 제가 가진 신앙의 기준에 부합하면서도 가장 멋지게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은 ‘순교’였습니다. 당시 제가 읽었던 책이 선교사님들의 책이었는데, 그들의 목숨을 건 선교사역 이야기들을
보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이 이것이다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특별히 ‘오지 선교사’였죠. 어린 저의 눈에도 한국에는 너무 십자가가 많고, 굳이 나까지 이 땅에서 목회를 해야 할까? 나처럼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땅에 가지, 누가 가겠나? 그것이 저를 신학교까지 가도록 만든 저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대학에 갈 때까지 아주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대학입시도 제가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으니, 신학대학에 갈 정도는 충분했기에 비교적 편하게 보냈습니다. 삶의 여러 부분에서 저는 별로 굴곡은 없었고 평탄했는데,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내 삶에는 엄청난 고난이 준비되어 있으니, 하나님이 지금 평안함을 먼저 맛보게 하시나 보다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제가 청년 시절에 선교 훈련에 참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죠. 필리핀에서 6개월 정도 선교사님 댁에 머물며 간접적으로 선교사의 삶을 엿보기도 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선교단체에서 하는 6개월 코스의 선교훈련에 참여했습니다. 3개월은 국내에서 교육을 받고 3개월은 선교지에 나가서 실습하는 형태였습니다. 저희 기수 50명 정도가 5개의 국가로 흩어져서 선교훈련을 나갔는데, 그 후보지가 국내, 중국, 인도, 몽골 그리고 분쟁지역인 팔레스타인이었습니다. 제가 어디로 지원했겠습니까? 당연히 가장 위험해 보이는 팔레스타인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다 저처럼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 팔레스타인으로 너무 많이 몰렸어요. 그래서
제가 그 팀으로 참여를 못 하게 됐고, 어쩔 수 없이 저는 마음에도 없는 몽골팀으로 배정되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그 팀에서 아내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참 재미있는 이끄심입니다. 마음을 고쳐먹고 제게 주어진 선교지인 몽골과 러시아로 3개월 선교활동을 갔습니다. 그때도 저는 주님께서 제가 필요하다고 하시는 곳에 제 삶을 드리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몇 번 하나님께 묻곤 했습니다. ‘지금 이곳에 남으라면 저는 바로 남아서 선교사로 살겠습니다.’ 실제로
그런 고민을 하면서 선교사님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신학대학 3학년이었으니, 아직 대학과정도 다 마치지 않은 때였죠. 마음의 열정은 있었으나, 말씀을 가르칠 실력이 없었던 때였죠. 선교사님들의 조언도 그렇고, 6개월의 선교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제게 깨닫게 하신 것은 진지한 ‘신학공부’의 필요성이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섬길 수 없다는 마음이 저에게 크게 왔죠. 그런데 저는 그전까지 ‘공부’를 단 한 번도 열심히 해본 적이 없었어요. 뭔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내 유익과 성공을 위한 삶처럼 여겨졌거든요. 나는 내 유익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저였기에, 신학교에서도 공부보다는 예배와 봉사활동, 선교사역에 에너지를 썼을 뿐, 가장 멀리하던 것이 공부였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통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 있다는 마음이 DTS 내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 이것이 세상의 방식이라면, ‘공부해서 남 주자.’ 이 마음을
얻게 되면서, 저는 선교지가 아닌 신학교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대학교, 목회대학원과 신학대학원까지 약 7년 동안, 제가 가장 열심히 한 것이 신학공부였습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교수님을 피해 다니는 것이거든요. 그전에 저는 그랬고, 교수님들을 적대시했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공부를 해나가면서 교수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고, 지금 저의 목회를 격려해주시는 소중한 은사님들도 그때 저에게 큰 도움을 주셨던 분들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니,
처음으로 내가 공부에 소질이 있나? 생각도 해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잘하게 되니, 주변에서 ‘교수’를 해보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저도 유학을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제 안에는 선교의 꿈이 여전히 있었기에 신학생보다는 믿지 않는 영혼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모교회를 벗어나 한국교회라는 목회의 현장을 마주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제가 경험하게 된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제 모교회는
너무 평탄하고 좋은 교회였거든요. 그러나 제가 사역을 나가서 마주한 교회는 대체로 깨어진 교회, 상처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눈앞에 처참한 교회의 실상을 보게 되면서, 그 안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보였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어요. 그 시간을 보내면서, 말 그대로 한국교회가 이제 선교지구나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삶을 계속 다루어가시면서, 아무런 열정도 없이 살던 때를 지나,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신학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그리고 참된 교회에 대한
열정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오해 속에 어떤 것에도 가슴이 뛰지 않았었는데, 신학교 시절에 영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고, 선교를 꿈꿀 때는 ‘열방’이라는 단어를 보면 가슴이 뛰었고, 그다음에는 신학공부를 해나가며 ‘성경’이라는 단어를 보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부교역자 시절에도 정말 ‘얘는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사역했죠. 부교역자들이 많이 혼나는 것이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인데, 저는 오히려 너무 ‘주인의식’을 가졌다고
할 정도로 미쳐서 사역을 했죠. 그렇게 9년 동안, 부교역자로 여러 교회를 섬기며 30대가 되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며 살아갔죠. 저에게 분명 필요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9년의 사역을 마쳤을 때는 더 이상 제가 이 일에 에너지를 낼 수 없겠다 싶은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던 제 안에 점차 성경을 통해 ‘성경적 교회’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지게 되었고, 오히려 그러면서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참된 교회의 그림이 있는데, 기존의 교회 안에서는 그것을 꿈꾸기보다는 자꾸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보다 윗세대의 목회가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도 전통교회의 목회자였고, 저도 그 안에서 자랐는데요. 다만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회일까? 새로운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담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점차 교회의 사역이라는 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느껴지는 일들도 많았고, 부교역자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제한적이거나, 제 마음을 다 쏟기에 어려운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성경적인 교회, 성경적인 공동체를 이루려면, 기존 교회에서 부교역자로서 그것을 할 수는 없다고 느꼈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대안이 하나 존재했습니다. 그쯤 모교회의 후임 제안이 온 것이죠. 아마도 아버지가 그 교회의 목사님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그곳으로 갔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 제가 간다는 것은 제가 추구해왔던 삶의 모습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졌어요. 그렇다고 또 다른 대안이 있어서 배짱을 부린 것도 아니었어요. 부끄러운 A 학점보다는 떳떳한 C 학점이 낫다는 그런 마음이 제게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2016년 여름, 제가 만으로 33세였습니다. 목회의 세습은 제 가치관과 부딪히고, 더 이상 부교역자로 살아가는 것에 제 시간을 보내기는 아깝고, 저와 비전이 맞는 교회를 찾는다는 보장도 없었죠. 후임으로도 안 가고, 부교역자도 안 하고, 목회를 하는 길은 교회를 개척하는 것뿐인데, 개척은 그때까지
제 인생에서는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어요. 제 부친께서 개척을 하셨고 저는 그것을 보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개척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이 많았던 것은, 저는 개척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알아서 무서운 것이었죠. 그런데 부교역자 시절에 많은 곳에서 교회의 아픔과 깨어짐을 보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가나안 성도가 발생하는 현상을 보며, ‘이렇게 교회에서 떠나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누군가는 이들을 품고 회복할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 고민 또한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제가 뭔가 대단한 것을 할 수 없음은 잘 알았지만,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영혼을 위해 버틸 수 있는 뚝심은 제게 있었으니까요. 당시에 <비전의 사람>이라는 책에 나오는 ‘나가노 목사님’의 이야기를 되뇌며, 한 사람을 위해서 한평생을 사용할 수 있는 목회자로 살고 싶은 도전도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음 거취를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여러 방식으로 저에게 사인을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다양한 방식이
일종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부르심 중에는 지금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는 비취 자매님이 제게 개척에 대한 기도요청을 한 것도 있었고, 비슷한 일들이 당시에 많이 발생했습니다. 개척을 앞둔 모든 목회자가 한 번씩 통과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시에 고민이 깊으니 잠이 잘 안 오고, 새벽에 깨어 창밖을 내다보게 되었습니다. 창밖으로 십자가가 많이 보였습니다. “하나님, 이 도시에도 이렇게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굳이 개척의 소명도 없던 저까지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맞을까요?” 그런데
그때에도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대안교회에 대한 마음을 주셨어요. 마치 학교 교육에도 일반 학교들이 있지만, 그것이 안 맞는 사람들이나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안학교’가 있는 것처럼. 기존의 전통적 교회는 그 교회들이 할 역할을 한다면, 저는 새로운 교회의 울타리가 필요한 그런 사람들을 위한 교회, 대안교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개척을 결심했고 이것을 교회의 비전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시작할 때는 기존의 교회들이 하지 않는
역할을 변두리에서 조금 담당하는 대안이 되는 공동체를 추구했지만, 그 사이 한국교회 안에는 지각변동이 많이 있었고, 오히려 지금 시대에는 저희의 모습이 하나의 보편적인 모델교회가 되었음을 느낍니다. 지금 저희 교회를 탐구하고 모델로 삼는 목회자와 교회들도 점점 늘어가기 때문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제가 생각하는 교회는 특별하거나 특수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저 성경이 말하는 그 교회를 그대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교회는 건물도 중요하지 않고, 정말
예배의 마음 하나로 살아가는 공동체였기에, 아무것도 준비된 것도 없고, 보장된 것도 없지만, 무모한 도전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한번 그런 공동체가 정말 가능한가 도전이라도 해보자. 도전도 안 해보면 알 수가 없으니까요. 결국 양주에서 개척하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가장 먼저 나눈 사람은 태희자매 였습니다. 당시 태희 자매가 제 가장 가까운 주변에 있는 가나안 성도였거든요. 제가 양주에서 개척하기로 결심했다고 하자 곧바로 자기가 ‘1호 교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2016년 9월부터 사귐의교회를 개척하기까지 약 4개월 준비기간 동안, 주일마다 다른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탐방했는데, 태희는 저와 함께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얼마 후, 다은 자매도 합류하여 함께 다니게 되었죠. 사귐의교회의 시작이라는 게 그냥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저와 아내와 그 두 청년이랑 ‘우리는 어떤 모습의 교회를 할까?’ 를 이야기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2월쯤 경수 형제님 가정이 함께하기로 했고, 첫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사귐의 공동체 공식적인 첫 예배는 경수 형제님 집 거실이었습니다. 그렇게 사귐의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장모님도 함께하겠다고 양주로 이사를 오게 되셨고, 이 공동체에 합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둘,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개척 후 2년이 지날 때까지도 청장년 스무 명도 안 되는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그조차 청년의 숫자가 더 많았죠. 부교역자 시절 내내 저를 다듬어 주셨던 하나님은, 저에게 외적인 크기보다 진실한
공동체를 꿈꾸게 하셨고, 개척을 준비하던 제 마음에 있던 것도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대안학교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했기에, 저는 우리 교회가 항상 비주류로서 다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처럼 우리교회를 오히려 모델로 여기저기에 소개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죠. 그러므로 이 비주류의 교회는 긴 생존의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라 여겼고, 그런 작은 공동체에게 목회자의 삶을 의탁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것이 제가 개척을 준비하면서부터 곧바로 평일에는 일을 하여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준비부터 하게 되었던 이유입니다. 저희는 분립개척이나 지교회 등으로 목회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5년 반 동안 일을 하면서 이중직 목회를 했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목회를 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정말 쉽지 않은 생존의 싸움을 치러야 했습니다. 개척을 결심하고 ‘우리는
교회입니다’라고 하며 시작했지만, 사실 그냥 허허벌판에 깃발만 꽂은 것 같았습니다. 정말 ‘광야’에 나온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저희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차츰차츰 세워가셨습니다. 오늘이 창립 6주년이 된 이유는 첫 1년 동안 저희는 교회였으나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교단에 속한 정식교회로 창립하기 위해서는 ‘건물’과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건물도 없었고, 사람도 세례교인 12명이 되지 않았으니, 정식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창립은 2018년
1월에야 했습니다. 사실 교회로 인정받지 않아도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진짜 믿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배당이 필요할 수 있지만, 예배당이 없어도 교회라는 사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다.” 정말로 이것을 믿는다면 무엇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저와 둘이 예배해도 교회이죠. 그래도 오히려 하나님이 저에게 함께하는 몇 사람을 주셨으니, 오히려 감사한 것이죠. 첫 예배는 경수 형제님 가정에서 드렸고,
그 후에는 섬유지원센터의 작은 회의실을 주일에만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루 4시간 25,000원. 한 달 10만원이면 운영되는 형태로 교회를 세팅한 것입니다. 저는 하루 14시간씩 일을 했고, 주일도 새벽 2시 퇴근이었어요. 그래서 저희는 6개월간 주일예배는 오후에 드렸습니다. 개척했을 때, 건하가 돌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아내는 육아를 해야 했고, 제가 생계를 오롯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노동’에 대한 신성함과, ‘삶’의
무게를 참 많이 배웠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정신없이 보내고, 주일을 기다립니다. 주일 점심이 되면 저희는 캐리어에다가 예배에 필요한 물품을 싸서 회의실을 빌린 공간으로 갑니다. 회의실 앞에다가는 배너를 하나 세워둡니다. “이곳은 사귐의교회입니다.” 그곳에서 유하와 예주, 2명의 아이를 놓고 먼저 30분 정도 비취 자매님이 인도하여 아동부 예배를 드립니다. 1시 20분부터. 그리고 2시에 사귐의예배를 드립니다. 7살, 8살 정도 된 두 아이는 예배를 견디지
못하기에 회의실 밖 복도에서 뛰어놀았습니다. 당시가 1월이었는데요. 나중에는 작은 텐트를 하나 복도에 쳐주었습니다. 그곳이 유아실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저렇게 시작했나 싶기도 한데... 가장 낭만이 있던 시절 중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진짜 교회를 향한 낭만. 6개월을 지나며 조금씩 주변 사람들이 보내주는 선교비와 자체 헌금 등을 모으니, 60만원 월세는 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찾았습니다. 월세 60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그렇게 고읍동 끝자락에
30평 공간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보증금, 인테리어비 등은 제가 감당을 해야 했기에, 저는 개척하며 전세를 월세로 옮기었고, 그 차액을 헌금으로 드려서 그런 일들을 해나갔습니다. 물론 이 일이 쉬웠냐? 당연히 한순간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원래 흔들거리며 자라가는 것 아닙니까. 교회에 대한 확고한 비전이 있기에 시작했지만, 현실의 장벽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개척했던 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유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왜
우리 교회에는 사람이 없어?” 팩트 폭행을 당했죠. 그래서 딸이 전도 포스터를 스스로 그려서 절 주기도 했습니다. 너무 막연하고 끝이 없는 길을 걸어가는 기분이었어요. 제가 일하면서 목회하는 삶을 5년 반 동안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목회와 일을 같이 하는 것도 힘들지만, 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개척하고 제일 힘들었던 싸움은 남들과 비교하는 스스로의 싸움이었습니다. 제가 엄청나게 센 척하면서 이야기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으니까요. 소신
있게 패기 있게 개척을 시작했지만, 고된 날이 많았죠. 특별히 비슷한 시기에 개척했던 사람들의 삶과 제 삶을 괜히 비교하는 스스로의 시험에 빠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는 분립개척을 해서 많은 성도를 데리고 시작한 사람도 있었고, 지교회로 지원받아서 그래도 조금은 좋은 형편에서 시작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저와 달리 일을 하지 않고 목회만 하고 있었지요. 저는 매일 일터로 향해서 새벽까지 일하고 집으로 들어올 때면,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이 맞나?’
고민이 들기도 했습니다. 남들은 지금 다 교회에서 부대끼며 뭔가를 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는 평일에 텅 비어 있고, 나는 일터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고... 힘을 내서 하다가도 문뜩문뜩 지치더라고요. “정말 이 길이 나에게 맞나?” 왜 이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어느 날, 그런 실의에 빠져 있는 저에게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정규야. 너 만약 평생을 지금 있는 성도들과 이 정도 규모로 목회를 해야 해서, 지금처럼 매일 일하면서 목회를 병행해야 하면
할 수 있겠니?” 잠시 고민을 하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네. 감사하며 해보겠습니다.” 그게 제게 맡겨진 길이라면, 몇 명의 사람이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평생 해나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진심이었고, 지금 보면 그것이 하나님이 저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고 믿어요.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사람들을 하나둘 보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의 시간을 지나며 제가 가장 많이 고백한 것은 광야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광야에 나가면 만나를 먹는다.’ 저는 주변의 친구들에게는 잘 베푸는 사람이었으나, 유독 인색한 것이 교회에 대한 소식들이었습니다. 바쁘고 빠듯한 형편 속에 경조사도 그렇게 잘 챙기며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는 것에도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개척하고 아는 목사님들 찾아가서 부탁을 드리면 조금이라도 선교비를 받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으려고 했죠. 그래도 하나님은 제 예상보다 늘 사랑과 긍휼로 저희를
돌보아주셨습니다. 개척 초기부터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알음알음 선교헌금을 보내주기 시작했어요. 일회성인 경우도 많았으나, 돌아가면서 필요한 때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제가 경험한 엘리야의 까마귀였습니다. 지금 제가 개척교회나 목회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시절에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큰 힘과 위로가 되었거든요. (신 2:7)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시고, 이 넓은 광야를 지나는 길에서, 당신들을 보살펴 주셨으며,
지난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계셨으므로, 당신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광야에 부족한 것이 왜 없었겠습니까? 저희교회의 여정에도 왜 없었겠어요. 부족한 것을 찾으면 투성이죠. 그러나 정말 그 시간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셨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제가 하나님께 서운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첫 예배당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어진 재정 안에서 예배당을 구하느라 고민이 많았습니다. 50~60만원
월세를 기준으로 10평 자리를 고민했던 적도 있습니다. 다 무너질 것 같은 곳도 가봤습니다. 공간이 마음에 들면 재정이 부족해서 선택하기 힘들었죠.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목회하면서, 이제 예배 장소를 구하고자 하는데 이렇게 안 도와주십니까?’ 그런데 계속 잘 안 됩니다. 그러다가 정말 가격과 넓이가 딱 맞는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와, 여호와 이레! 그런데 또 이번엔 같은 건물에 교회가 있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먼저 지하에 들어와 있는 목사님이 완강히 반대하셨어요. 억지로라도 밀어붙이면 되겠지만 그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마음이 들지만, 주님이 주신 곳이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만 그들에게 허락된 것임을 배워야 했습니다. (신 2:9)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압을 괴롭히지도 말고, 싸움을 걸지도 말아라. 그 땅은 내가 너에게 유산으로 주기로 한 땅이 아니다. 아르 지역은 내가 이미 롯의 자손에게
유산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장소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목회칼럼에 그 당시 서운함을 적기도 했고, 제 블로그에 ‘하나님께 삐졌습니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미뤄지고 갈피를 못 잡던 예배당 구하기가, 갑작스럽게 연결이 되어 고읍동 첫 예배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처음 놓쳤던 장소를 지나갈 때면 “지금 보니, 내 뜻대로 저기에 들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 가장 좋은 자리를 주셨어.” 자주 고백합니다. 그것은 두 번째 예배당인
옥정에 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곳이 저희의 1순위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알아보던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은 잘 진행이 안 되고, 그 중간에 지금 이 장소를 소개받게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역시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사실 목회하면서 많이 배웁니다.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주시지 않으시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제가 하려고 하는 일들은 막힐 때도 있으며, 막혀서
속상해하다가도, 또 주님께서 다른 길을 내셔서 하시는 일을 보면 감탄하게 됩니다. 제가 믿었던 사람이 도리어 저를 속상하게 할 때도 있고, 정말 좋은 공동체가 된 것 같다가도, 어떤 한 부분을 보면 여전히 낙담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개척할 때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여전히 목회는 때때로 두렵습니다. 여전히 광야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신하는 것이 있다면, 제가 광야에 있다면 주님도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신 3:22)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
우리의 하나님이 너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어느덧 사귐의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예배한 지 7년. 창립으로부터 6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공동체의 숫자는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하셨던 일을 모세와 함께하셨죠. 애굽에서 성장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모세와 함께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신 1:8) 내가 너희 앞에 보여 주는 이 땅은, 나 주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이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그 땅을 차지하여라." (신 1:9) "그 때에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을 지도할 책임을 나 혼자서 질 수 없습니다. (신 1:10)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불어나게 하셔서, 오늘날 당신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신 1:11) 주 당신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천 배나 더 많아지게 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신 1:12) 그러니 나 혼자서 어떻게 당신들의 문제와 당신들의 무거운
짐과 당신들의 시비를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신 1:13) 당신들은 각 지파에서 지혜가 있고 분별력이 있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뽑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들을 당신들의 지도자로 세우겠습니다.' (신 1:14) 그러자 당신들이 나에게 대답하기를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1:15) 그래서 나는 당신들 가운데서 뽑은, 지혜가 있고 경험이 많은 사람을 당신들 각 지파의 대표로 세워서, 그들을 각 지파의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으로 삼았고, 각 지파의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공동체를 그 규모에 맞게 조직하고 함께 일할 사람들을 세웁니다. 어쩌면 사귐의교회도 이 과정에 있는 듯합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제가 뭘 하자고 했을 때 10명을 모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도원결의’를 할 비전에 동참할 동역자를 찾았는데, 그런 사람 10명만 있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어느덧 그런 동역자들이 세워져서 함께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은 어쩌면 이제 막 사역의 한텀을 돌았고, 저는 짧게나마 안식월을 갖습니다. 만약 안식월을 가질 수 없었으면 병가라도 내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생각이 꽉 차 있고, 몸도 마음도 추스를 겨를이 없이 살아왔기에 잠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안식월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사실 여러 복잡한 감정이 있습니다. 우선, 제가 너무 교회를 좋아하거든요. 과연 내가 얼마나 교회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뭔가를 하고 있지 않은 저에 대해서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실 최근에 주변의 목회자들로부터는 안식월 기간에 교회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너무나도 많이 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개척 전의 시간이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는 시간이라면, 어쩌면 이번 안식월은 십계명을 받으러 홀로 올라가는 모세의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모세가 떠난 사이 아론과 함께 황금송아지를 만들며 무너졌지만,
저는 이 시간이 저에게도 사귐의교회에게도 하나님 안에서 더 성숙해지는 시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의 마지막 사귐의교회에 대한 꿈은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귐의교회를 위해 이미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나 마음적으로 드렸고, 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왔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만큼 순종하며 그렇게 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작이 ‘하나님이 주인인 교회’를 꿈꿨듯, 사귐의교회가 창립
16주년, 26주년... 그 어떤 때라도 저와 여러분으로부터 그 고백 앞에 떳떳한 교회로 존재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제가 이 공동체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만큼, 항상 주님이 원하시면 비워낼 마음도 먹습니다. 안식월도 저에게는 그런 훈련의 시간입니다. 제 존재가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에 비하여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시간을 기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는 신명기 3장에서 퇴장합니다. 그가 원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간절히 원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순간이 모세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3:25)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요단 저쪽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신 3:26)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들 때문에 나에게 진노하셔서, 나의 간구를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아라. (신 3:27) 너는 이 요단 강을 건너가지 못할 것이니, 저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너의 눈을 들어,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아라. (신 3: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너의 직분을 맡겨서,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용기를 주어라. 그는 이 백성을 이끌고 건너갈 사람이며, 네가 보는 땅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줄 사람이다.' 모세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는 80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고, 12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퇴장합니다. 오지의 선교를 꿈꿨으나,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곳은 이곳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따라, 잠시 또 다른 채우심과 훈련을 통해 잘 준비해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이 교회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늘 여러분의 삶의 주인 되시고 등불 되십니다. 우리 각자의 삶의 여정에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주님의 부재는 아니며... 광야를 사는 것 같은 두려움과 적막함이
있지만, 광야에서 주시는 만나가 있음을 믿으며 굳건하게 걸어가 주십시오. 특송 _ 목회자 부부 _ 기나긴 항해를 떠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