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순결선" / 강정규 목사

2024-04-21 · 신명기 29~30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나라에 IMF 금융위기가 98년도에 찾아왔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면 그 시기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당연히 던지는, 아니 던져야 하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을까?’ 그것을 이해해야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면하는 어려움도 견뎌내야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명기와 그 뒤에 나오는 역사서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를 받았지만, 왜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 역사를 통해 다시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결론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믿었다.” 망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경고를 받아도 무시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믿고 살았더니,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구나. 나는 믿는 줄 알았는데, 사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었구나.” 포로기에

이것을 깨닫고 돌아보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신명기 입니다. 신명기 신학은 사실상 성경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뿌리와 기원은 신명기 앞에 놓인 책을 통해 확인하지만, 사실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기준은 신명기의 가르침이 그 이후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체결한 세대입니다. 그들은 당사자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죠. 그런데 그들을 빼고는 모두 언약의 계승자입니다. 그러니 출애굽 2세대부터 오늘 우리까지는

모두 시내산 언약을 직접 경험한 세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언약백성이 될 수 있는가? 언약백성으로 살 수 있는가?’ 신명기가 그 답을 주는 것입니다. 신명기가 계속 말하고 있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과 기준을 잘 듣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어디에서 듣든지, 어느 시대에 듣든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평생 시내산과 이스라엘을 보지 못해도 상관없고,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그 말씀이 오늘 나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그 삶을 누리고 경험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신 18:15)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신 18:18)

나는 그들의 동족 가운데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는,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일러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말씀의 전달자를 두시고 일하십니다. 그것을 모세가 하기도 했고, 여호수아가 하기도 했고, 그 이후 시대에도 여러 예언자가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가르치셨고, 그분의 사역을 통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하심으로 이 시대 안에서도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설교가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성령께서 이 시간에 저에게도 또한 여러분에게도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온전히 우리를 이 예배의 제물로 드리고, 마음을 쏟으면, 주님께서 이 예배 안에서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교회를 처음 나오신 분이 아니라면, 신명기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아마도 다

기억을 못 하시겠지만, 제가 신명기 첫 설교 제목을 ‘또 그 뻔한 이야기’라고 잡았습니다. 예진 전도사님이 붙였던 설교 제목 가운데는 ‘잔소리’도 있었죠. 그러니까 신명기는 전혀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요. 너무 뻔하고 당연하고 지겹도록 들어왔던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단순해요. ‘결국 하나님 배신하지 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라.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라.’ 신명기가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를 다양한

상황에 빗대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봤어요. 어린 시절에 부흥 강사님들이 맨날 하는 설교의 말씀입니다. “네가 순종하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도 복을 받고,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꾸어주더라도 꾸지 않을 것이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사실 우리는 이런 설교를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이런 설교가 좋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염증이 있어요. 그리고 말씀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우리의 신앙을 기복적으로 만드는 데 한몫했죠.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복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복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 ‘복’이 ‘성공주의’처럼 사용되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면, 그러지 않은 사람은 ‘복’에서 소외된 것 같은 상처를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복’을 오히려 오해하고 왜곡시키고 격하시킨 것이죠. 특히

한국에서는 ‘성공’은 곧 ‘돈’이니, 돈을 많이 벌어야 복 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려면, 소위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분이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논리 안에 갇혀서 너무 시야가 좁아진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에 그것이 최고일까요? 최근에 발표된 국가별 직업 위세 인식 조사 자료를 봤는데, 각 직업에 대한 사회적 지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국회의원’과 ‘소방관’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5개 분야로 나눴을 때, ‘국회의원’이 1등이고, ‘소방관’이 11위입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돈 잘버는 순으로 평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독일에서는 ‘국회의원’이 12위와 10위에 머물러 있었고, ‘소방관’이 모두 1위를 차지했습니다. 소방관이 그 나라에서도 돈을 잘 버는 직업은 아닙니다. 그 이상의 다른 가치를 개인과 사회가 부여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사회의 인식 자체가 ‘성공’한다는 것은 높은

권세를 가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는 환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이 모두 그렇게 말한다고 하여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그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존중’받고 ‘성취감’을 갖는 사회도 제법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난 부분은 우리가 바꿔가야죠. 기독교인이 먼저 그 틀에서 벗어나서 다른 가치관을 추구해야죠. 보여줘야죠. 물론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열심히 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제력에 따라, 어떤 지위에

따라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게 뭔가 힘이 있고, 돈이 있으면 그것은 내게 주어진 책임감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혼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러 의미의 약자들을 돌보고 지켜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 15:4) 당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당신들이 참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이죠. 하나님의 통치가 땅에 임한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면 그 통치안에 머무는 것이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 꿈꾸시는 세상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시작될까요? 그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입니다. 그것이 결국 신명기가 꿈꾸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것은 오직 순종을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줍니다. 신명기 29~30장도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압 평야에서 하나님이 1세대와 하셨던 언약을 2세대와 갱신하는 장면입니다. 몇 부분을 읽어봅시다. (신 29: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신 29:12) 당신들은 오늘 여기에 서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세우시는 그 언약에 참여하게 됩니다. 당신들은 그 언약에 들어 있는 의무를 지켜야 합니다. (신 29:15)

이 언약은, 오늘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 우리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자손과도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신 29:29)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언약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해야 하고,

언약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이 언약은 자손들에게도 이어지고, 영원히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신명기에서 모세가 입이 아프도록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 아는 얘기죠. 다 아는 얘기니까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이런 질문을 성경에 대고 던져보겠습니다. Q1. 왜 꼭 뭔가를 해야 하나요? 뭔가를 해서 복을 받거나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 구원론’이 아닙니까? 여러분. 신명기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해서 유대인들이 하루에 두 번 드리는 기도가 있죠. ‘쉐마

이스라엘’에 대한 부분입니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러분. 이 명령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축약하면 2가지입니다. ‘들으라, 사랑하라 ’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요약하면 이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신명기에 나타난 모세의 설교도 결국 이 두 가지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구조입니다. 1) 들으라 그럼, ‘쉐마’라고 하는 ‘들으라’는 어떤 의미일까요? 히브리어 쉐마가 가진 의미는 단순히 청력을 이용해 듣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쉐마에는 ‘듣고 반응하다’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듣고도 무시하면 듣지 않은 것이죠. 집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밥 먹으러 와.’ 그런데 아무도 안 와요. 그럼 쫓아갑니다. “너 엄마 말 들었어, 안 들었어?” “들었어.” 아직 방에 있지만 들었다고 대답합니다.

듣긴 들은 것이죠. 청각으로요. 그러나 반응하지 않으면 듣지 않은 것입니다. 듣고 반응하다. 이것을 줄여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죠. ‘들으라’는 순종을 포함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순종에는 행동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가서 듣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듣고 반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 때, 다른 것에 다 귀 막고 살 수 없습니다. 세상도 공부하고 배우고 세상의 소리도 들어야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그 외의 다른 것이 갈등할 때, 그때 무엇을 듣느냐가 내 신앙입니다. 2) 사랑하라 ‘사랑하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히브리어의 ‘사랑하라’는 것은 단순한 감정과 느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고 싶을 때만 사랑하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내 마음에서 하고 싶은 사랑을

하는 것은 오히려 애쓰기보다는 그 감정을 억누르기가 어렵죠. 이 얘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내 기분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내가 뭘 하든지 날 사랑하실거야.” 그런 사람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니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요?” 저는 모르겠던데요. 저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기로 결단하시고 때로는 참고 기다려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제 모습이 마음에 드시지 않고 사랑하지 못할 모습도 있지만 사랑하기로 결단하고

기다려주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언제까지 기다리실지, 어디까지 참아주실지는 제가 함부로 예측할 수는 없죠. 하나님은 제가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제가 다 마음에 들어서, 사랑해주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도 있지만, 의지와 결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을 한 단어로 ‘헌신’이라고 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사랑으로 헌신하기로 약속하는 관계인 것이죠. 사랑스러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만약 들어도 반응하지 않고, 어떠한 헌신의 모습도 없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태도와 반응에 대해서 ‘행위’라고 표현한다면, 저는 그 행위가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반대하는 행위는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을 해야만 된다는 주장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들으라’와 ‘사랑하라’는 서로 연결됨을 알게 됩니다. 사랑해야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일하신다고 해서, 우리와 하나님이 50:50으로 협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책에서는 이것을 ‘비대칭적 신인 협력’이라고 표현하는데, 하나님의 힘이 90, 우리의 힘이 10으로 되기도 하고요. 하나님 99, 우리의 힘은 1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그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몫을 항상 남겨두시고, 우리의 순종으로 그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30장의 말씀도 보겠습니다. (신 30:15)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신 30:16)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신 30:17)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신 30:18)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신 30: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신 30:20)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땅에서 당신들이 잘 살 것입니다. Q2.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 칭찬하고 복을 주시는 것은 이해하겠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에게 피해 안 끼치고 평범하게 사는 사람에게 심판과 저주가 있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요? 신앙은 왜 중립이 없이 극단적입니까? 누군가에게는

신이 너무 괴팍해 보이는 것이죠. 자기를 안 믿으면 그냥 안 믿는 것이지, 그것을 벌줄 필요까지 있나? 이런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중립을 좋아하고, 중도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정치나 이런 부분은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완전한 선과 완전한 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뒤섞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15절과 19절에 보면 생명과 사망이 나옵니다. 완전한 대비이죠. 성경이 자주 말하는

빛과 어둠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립이 어려운 개념들입니다. 생명과 사망 외에 속한 영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으면 사망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둠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왕권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성경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고 따르고 있던지, 아니면 그분의 통치를 거부하고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곧 생명이고

빛이고 사랑이고 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모세도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택하면 생명을 택한 것이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택하면 망한다, 살지 못한다, 즉 죽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심판해서 죽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벗어난 모든 것이 곧 죽음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생명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면, 신이 나를 심판해서 죽음으로 보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나에게 생명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내게 찾아온 은혜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계관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현재 있는가? 사람들은 죽음과 생명을 우리의 육체적 개념의 것으로 이해하니, 지금 내가 생명 가운데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병들고 죽음에 이른 자입니다. 죽음 가운데 있는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제가 이번 주에 어떤 자료를 보는데, 저는 새삼 놀랐습니다.

한국에서 한 해에만 13,400명이 자살로 죽습니다. 세계에서 압도적 1위 입니다. 그중 노인 자살률은 대부분 빈곤의 문제였고, 이것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외의 젊은 세대 자살률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유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심리적인 이유가 크다고 연구 결과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가난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어서 죽습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런 삶의 위기가 있는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마음의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깨어졌고, 그 세상의 깨어짐이 곳곳에서 우리를 힘겹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이 있는데,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과 사랑과 평안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로 그 빈자리를 채우지만, 하나님이 아닌 것은 영원하지 않고 더 목마르게 할 뿐입니다. 그 어둠의 영향력이 우리를 점점 더 힘겹게 만들곤 합니다. 그래서 다 상처 투성이입니다. 다 불안하고 다 두렵고

다 외롭습니다. 더 잘 사는 나라가 더 좋은 나라인가? 많은 사람들은 삶이 나아지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발전할수록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근원적 해결점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내 삶이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있고, 부유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이 답이라고 믿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표현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가 살아갈 힘과 위로가 주님께 나아가면 우리에게 주어져 우리를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내가 어떤 안전한 중간지대에 있어서 어떤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그런 선택을 하든 안 하든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왜 내게 선택을 강요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곳이 곧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장소, 거친 파도가 넘실대고 있는 망망대해 한 가운데 표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제가 가끔 예로 듭니다만, 민수기의 놋 뱀 사건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모세에게 요청해서 여호와께 구하여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쳐다보면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은혜이죠.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고 심판하고 죽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떠나서 있는 우리의 삶이 끝없이 외롭고 불안하고 절망적이고 괴로운데, 그곳에서 생명으로 나오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 거기에 있으면 저주에 머무는 것이야. 내게로 나와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좋은지 안 좋은지는 여러분이 판단하셔야 합니다. 다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저는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것이 진짜 좋은데,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든 설명해주고 싶고, 어떻게든 이 삶으로 초청하고 싶은데...

제가 누리는 만큼 이것을 전하고 초청하기가 참 쉽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말로, 제 지혜로 전하는 것에는 많은 한계가 있지만, 제가 경험한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은, 진짜 맛본다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점은 제 삶을 걸고 진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신명기 29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는 이 초대장을 모두에게 보내셨음을 보여줍니다. (신 29:13)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약속하시고,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당신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주님께서 몸소 당신들의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입니다. (신 29:14) 이 언약과 맹세는 주님께서 당신들하고만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신 29:15) 이 언약은, 오늘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 우리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자손과도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신명기 30장의 메시지에 새겨진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택하여 살아가는 그 은혜가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기회로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신 30:1) 나는 당신들에게 당신들이 받을 수 있는 모든 복과 저주를 다 말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쫓아내신 모든 나라에 흩어져서 사는 동안에, 당신들의 마음에 이 일들이 생각나거든, (신 30:2)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명령한 주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십시오. (신 30:3)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고, 당신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그 여러 민족 가운데로 흩으신 데서부터 다시 모으실 것입니다. (신 30:4) 쫓겨난 당신들이 하늘 끝에 가 있을지라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거기에서도 당신들을 모아서 데려오실 것입니다. 혹시 이 시간에 나는 주님께 두었던 나의 다짐과 결단과 마음에서 조금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나는 혹시 지금 주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되고,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괜찮다고 용납하고 받아주실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저는 주님의 마음으로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해 결단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결정이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가장 위대한 결정이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기적일지도 모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1%도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은 기뻐하시고, 우리의 그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그 마음을 이 시간 주님께 고백합시다. 듣고 순종하십시오. 사랑하기로 결단하십시오. 생명의 길을 선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