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저희 교회만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는 교회는 드물 것입니다. 저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장시간 시리즈로 3번 정도 다뤘습니다. 가장 최근에 다뤘던 것이 20주간 시리즈로 작년 10월에 마쳤습니다. 6개월 만에 제가 다시 하나님 나라 시리즈를 시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더라도 제가 하는 모든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키워드이기
때문입니다. 설교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인 것은 당연하죠. 만약 제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깨닫고 정리하지 못했더라면, 저는 30대에 빨리 개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교회 개척을 하게 된 큰 이유도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천국이죠. 천국 복음이 곧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든 신앙인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또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엄청나게 다른 이해 안에 있기도 합니다. 단어의 의미는 같은데 그것이 적용되는
신앙의 모습, 삶의 모습은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저는 2010년 전후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지금의 이해와 비슷하게 접하기 시작했고, 저 또한 처음에는 ‘이게 뭔 소리야?’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천국에 관한 이야기와 충돌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니까요. 우리의 신앙적 태도는 사실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일관적인 것이 꼭 좋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변해가고, 계속 다듬어져 가는 것이죠. 저도 그랬습니다. 다양한 신앙적 색깔을 경험하면서 다듬어져
왔는데, 가장 큰 만남과 변화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죠. 그런데 2010년만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는 신학에 아주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제가 아주 자연스럽게 제가 2010년부터 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경험하고 좋으면 전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문제는 눈치가 조금 없었습니다. 당시에 신학을 잘 나누는 교회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교회는 아직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생소하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저는 제가 깨달은 너무나 좋은 복음을 빨리 전해주고 싶은 것이죠. 그래서 2013년쯤부터 제가 사역하는 곳에서 신나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가 10년 전만 하더라도 어떤 교회에서는 굉장한 파격이었기 때문에, 담임목사님께 경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가 발견한 진리를 잘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큰데,
때로는 설교의 내용으로 제지도 받고, 눈치도 보이는 상황이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복음이라고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거나, 성도들의 요구에 맞춘 설교를 하기에는 전하는 제 스스로가 그 사역에서 기쁨을 누리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제가 진짜 진리라고 믿는 가르침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사역을 꿈꾸며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죠.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그쯤부터는 ‘하나님 나라’가 이제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키워드가 되다시피 한 것입니다. 물론 그전부터 많은 곳에서
이미 이것을 다루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와 교제하는 사람들 안에서는 이미 이것이 주류였으나, 정작 각자 사역하는 교회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온전하게 가르치기 어려웠다면, 이제 거의 모든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렇게 주류가 되었으니, 이제는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수 있어서 참 편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에서 작년에 맡았던 강의 제목 자체가 ‘예수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말 그대로 저는 이제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디서나 제가 좋아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다른 아쉬움도 더러 있습니다. 이것이 대세가 되니까, 오히려 너무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진짜 중요한 의미를 담아내는 표현으로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라는 단어도 그렇죠. 진짜 공동체성을 가진 교회도 있고, 사실상 문화센터처럼 관리만 하는 교회도 있는데, 어디서나 ‘공동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 단어가 가진 의미가 약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신학적 의미들이 오히려 약화되는 현상도 느낍니다. 그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중심 메시지를 모르거나, 관점이 빗나간 몰이해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저 ‘마음에 오는 평안함’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죽어서 가는 천국을 여전히 말하면서 단어만 ‘하나님 나라’로 바꿔 사용하기도 합니다. 혹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하니, 이 세상의 ‘사회정의’와 인권이 회복되도록
‘사회운동’을 하는 것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작 개인과 교회 안에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없는데, 밖에 나가서 자꾸 어떤 운동하는 것에만 치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 같이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데, 이제는 그 적용이 다른 것이죠. 누군가는 마음의 평안함을 갖는 것을 추구하면서 자신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사회정의 운동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고 하고. 이럴 땐 뭘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감사하게도 ‘기준’이 있잖아요. 성경이죠.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가 뭔지를 봐야 하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추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지라도, 부담스러울지라도 그래야 하는 것이죠. 저희 교회가 하나복에서 만든 ‘교재’로 양육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었어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저는 하나복을 만나기 전부터 꾸준히 가르쳐왔는데,
그것으로 양육할만한 도구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기초해서 ‘풍성한 삶 시리즈’가 만들어졌기에, 그리고 제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와 김형국 목사님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와 무엇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같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교회 양육교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라는 책이 좋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신앙의 기초를 이해하고 점검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책은 사실 기독교 신앙에 여러 장애물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회유하는 안내서 같은 책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은 아예 불신자나 교회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변화구로 복음을 나누며 초대하기에 좋습니다. 복음을 선명하게 하기 위한 도구가 하나 더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이 <하나님 나라의 도전>입니다.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은 풍삶초와 같이 복음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설명하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삶 가운데 붙들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직접적으로 권면하는
책입니다. 물론 이 책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제가 먼저 이 책을 소화하고, 우리 공동체에 맞는 방식으로 이것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깨어진 세상 ‘원래 이런 거야~’와 ‘원래 이런 거야?’는 다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원래 이런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을 딱 펴서 읽으면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세상을 이렇게 안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성경의 처음부터 나오고 있으니까요. 저는 엄청난 비밀에 접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엄청난 장기 기억상실증으로 원래의 모습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 자기의 원래 모습을 깨닫는 것과 다름없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실 우리에게 끝없이 ‘단념’하게 만듭니다. ‘해도 안 돼.’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를 자꾸 다른 방식으로 흔들어댑니다. ‘행복하고 싶니?’ ‘이거를 가져봐. 네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부족해서야.’ ‘부족해서’라는 것은 정답입니다.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인지 우리에게 한 끗이 다르게 가르치죠. 원래 사탄이 하는 일이
늘 그런 것이죠. 제가 보기에 대중매체와 광고는 이 시대의 선악과와 같은 유혹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선악과가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마음을 다른 쪽에 집중하도록 만들어서, 결국 하나님을 놓치게 했잖아요. 이 시대도 같은 전략을 쓰는데,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사탄의 유혹이 아니라, 대중매체와 상업 광고가 부추기는 분위기라고요. 유튜브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가 없으면 우리가 굉장히 불안하고 부족함을 느끼도록 만들어요. 이런 것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은 SNS 때문입니다. SNS는 우리를 더욱 부추깁니다. 나 빼고는 다 누리고 있는 것 같고, 나 빼고는 다 잘살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악마의 놀이터죠. 우리를 비교 의식 속에 빠져들게 하는 곳이죠. 사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경쟁으로 초대해서, 자본주의 사회를 돌리는 도구죠. 사실 SNS 플랫폼에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교묘하게 뒤에 숨어서 더 친근하게 우리에게 접근하여 꼬실 뿐이죠. 세상은 우리에게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보여줍니다. 더 좋은 차, 아파트, 옷. 그 외에도 여행과 먹거리로 우리를 꼬십니다. 여기에 가면 행복해지고, 여기에 가서 이걸 먹으면 행복해지고. 제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그것을 먹고 싶고 경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경험했음을 자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실 우리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빠져든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불행한 것은, 우리 대부분의 수입은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것을 모두 누릴 정도로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소유는 우리가 꿈꾸는 행복한 조건에 비해 언제나 역부족입니다. 그러니까 내 벌이로는 부족해서, 그 이후 어떤 생각으로 빠져듭니까?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코인이든 대박 나서 돈벼락 맞아봤으면 좋겠다.’ ‘왜 우리 부모는 부자가 아닌 거야?’ 부모의 재산, 출생한 지역이 계급이 되어가는 더 불행한 사회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선생님이 한 아이에게 “장래 희망, 꿈이 뭐니?”라고 물었더니, “재벌 2세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곧 표정이 어두워져서 이유를 물었더니, 그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빠가 노력을 안 해요.” 아빠를 보니 아이가 직감한 것입니다. 내 꿈은 망했구나. 어린아이들조차 충분히 소유하면 무엇이든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민낯입니다. 누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쳤겠습니까?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돈’이 최고구나. 세상이 분명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윗세대의
어른들은 ‘요즘 세상 정말 좋아졌다’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분명 편해지고 좋아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인정해야죠. 그런데 저도 자녀를 낳고 이제 제 나이가 세상의 중간쯤에 위치하다 보니, 저는 도리어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미안함이 큽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발전된 세상을 살아갈 것은 자명하지만, 그들이 더 행복한 세상을 살아갈 것 같지는 않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인도 좋아하고, 한국도 좋아해서, 해외에 살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살아가는 삶이 참 만만치 않다는 생각은 여러번 해봅니다. 일단 우리는 사회 자체가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많지만, 그들 중 극히 일부만이 소위 명문대에 들어가고 성공의 사닥다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또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또 경쟁하는 것입니다. 대기업에 들어가면 끝나나요? 그 소수 엘리트의 삶도 들여다보면, 30대에는 그런 노예가 없다 싶을 정도로 혹사당합니다. 그러다가 40대쯤 되면 ‘내가 왜 이렇게 사나’ 하는
회의에 빠지는 것이죠. 소위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여겨요. 그래서 뒤늦게 부모한테 막 따지기도 하죠. 부모가 가르치는 대로 죽어라고 해서 그 직업을 가졌는데, 사실 자기가 행복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부모는 자녀의 세상적 성공을 위해 희생이 심하다 보니, 결국 자녀를 마음에서 독립을 못 시킵니다. 자녀의 성공에 이바지했으니, 이제 자녀가 보답하기를 기다리게 되는 당연한 보상 심리가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갈등이 커요. 서로 자기가 희생되었다고 하고, 서로 행복과 멀어져 있다고 합니다.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곳에도 여러 문제와 갈등이 많아요. 그런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대다수 젊은이는 세상이 말하는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늘 애씁니다. 그냥 삶 자체가 평범한 것이어야 하는데, 세상이 정한 평범함이 이들을 늘 짓누르거든요.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 되었어요. 결혼 적령기에 있는 사람들도 배우자의 조건으로 ‘그냥 평범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평범함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못 이룬 것들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안정적인 직업에 연봉은 어느 정도, 평범한 작은 아파트 정도에서 시작하고, 평범하게 외모는 어느 정도, 그래도 차는 있어야 하고요.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평범함에 이르기 위해, 이성 교제도, 결혼도, 출산도 미룹니다. 제가 안식월에 통계를 진짜 많이 봤거든요. 2002년에 월드컵 할 당시에 산부인과에서 출산하는 엄마의 평균 나이는 20대였습니다. 지금은 평균은 당연히 30대이고, 이미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 40대 여성이 20대 여성보다 더 많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평범하지 않은 삶으로 아주 빠르게 가고 있는 곳이 한국입니다. 또 노년에도 평범하게 살기 위해 가장 늦은 나이까지 일하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의학이 발달하여서 수명은 엄청나게 늘어났어요. 그런데 그만큼 더 일해야만 합니다. 수명이 늘어난 만큼 노년의 삶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습니다. 노년을 함께 보낼 친구나 가족이 있기나 할지 두려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늘어난
인간 수명으로 누리는 장수의 복이 홀로 되는 두려움과 늘어나는 의료비를 예고하며 온갖 걱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적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가면 목사에 의해 가스라이팅 당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맹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분별해서 성경의 진리를 기준 삼아 생각해야죠. 그런데 반대로 교회 밖은 어떤가요? 우리가 세상에 있으면 세상에 의해 가스라이팅 당하기 더욱 쉽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연 그것이
진리인가? 오히려 비판하지 않습니다. 절대다수가 얘기하면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행에 휩쓸리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평범함을 추구하다가 세월을 다 보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빨리 깨닫고 고민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삶 속에 즐거움도 있고 환희도 있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이 세상에는 고통이 상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우리의 삶을 ‘숙명론’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다 정해진 것이야.
바꿀 수 없어. 그냥 따라야 해.’ 그러나 사실 이런 숙명론이나 결정론은 기득권층이 자신의 기득 권력을 합리화하고,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회가 종교를 그런 통치의 방법으로 그릇되게 사용하기도 했죠. 그러나 우리는 그냥 받아들이기보다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세상인가?’ 인간이 이룩한 노력도 역사를 보면 참 많습니다. 우리가 그런 역사의 흔적들을 보면서 그것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감사해야죠.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룬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과학의 발전은 의료나 기술 모두에 영향을 주어서, 생산성은 극대화되었고, 기술혁명이 일어났으며, 인류의 수명 또한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의 위협이 커졌고, 이제 마음만 먹으면 온 세상은 한 번에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금 핵폭탄이 공식적으로만 12,000개가 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옛날 칼 들고 싸우던 시대의 공포와 위협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정보와 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초등학생들도 이미 ‘야동’을 섭렵하고 왜곡된 성 의식이 형성되어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마치 경제가 더 좋아지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글쎄요. 이미 세상은 모두가 잘 사는 것은 불가능한 곳이 되었습니다. 내가 잘살면 누군가
그만큼 불행한 것입니다. 풍선과 같이 모두 연결된 세상이라서 한쪽의 긍정적 효과는 다른 쪽의 부정적 효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따면 누군가 잃은 것입니다. 내가 풍족해지면, 사실 누군가는 더 어려워진 것입니다. 교회의 규모에 대한 부분도 그렇습니다. 우리교회에 사람이 늘어난 것은 다른 곳에서는 사람이 빠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이 무겁고, 작은 교회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전도서의 지혜자는 인간사를 살펴보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
1:3)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전 1: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전 1:13a) 하늘 아래에서 되어지는 온갖 일을 살펴서 알아 내려고 지혜를 짜며 심혈을 기울였다. 괴로웠다. (전 1:14)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그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이 말씀으로 우리가 삶을 회의적으로 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세상에 대해서 한 번 더 질문해보고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가 힘들어하는 개인의 여러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끔이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그리고 이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매우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삶을 소중하기에
더 진실한 고민을 갖고 답을 찾아봐야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잘 전해줘야죠. “그냥 열심히 살라”거나 “사는 건 다 그런 거야”라거나 “너 자신에게나 충실해” 같은 별 도움도 안 되는 말보다는 더 의미 있는 것을 우리는 전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 이유, 제가 설교를 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저는 사실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돌보고, 진리로 초대하고, 무너지면 다시 일으키고, 함께 이 나라를 누려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니까요. 제가 하나님 나라를 배우며 가장 좋았고, 그리고 가장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깨어진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야 가는 곳이니까요. 그 이야기는 다시 말해서 지금 현재의 삶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신앙을 가질수록 허무해졌고,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의 삶을 회복시켜서
이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우선 경험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실재를 붙들고 부활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끝까지 살아갈 힘과 용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올 하나님 나라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시작되어 우리에게 주신 그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도 우리는 삶을 떠난 것이 아니기에 여전히 아프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가 박힌 곳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기에, 같은 삶을 살아도 다른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그런 힘을 주십니까? 우리를 봐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을 결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라도 위로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힘들게 살아가다가 교회에 온 나에게 격려해주고 위로가 되는 말씀을
해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와서 듣는 모든 이야기가 위로보다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리니까요. 가뜩이나 힘겨운데, 교회에 와서도 내게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니, 그런 설교는 듣기도 싫다고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부류의 위로 설교를 거의 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위로 설교가 주는 위로가 진짜 위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암에 걸린 사람이 왔을 때, 지금 당장 치료하면 나을 수 있는 확신이 있는데, 안정제
정도만 처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힘들어도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싹 바꿔서 항암치료를 하면서 살자고 말하겠죠. 그냥 지금의 삶을 잘 살아가도록 위로하면, 그것은 방치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삶의 모습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느끼거나, 아니면 죽음 이후에나 천국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할 수 있는 것이 위로뿐이겠죠. 이 깨어진 세상에서 당신이라도 조금 더 잘살아 보라고 축복하는 설교를 하겠죠. 제가 믿는 기독교의 진리는 그런 하찮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면하는 어려움을 서로 돕고 하는 일은 교회 안에서 여러 방면으로 위로도 하고 돕기도 하며 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질문과 도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으니, 지금의 삶의 방식에서 돌이켜 이 나라에 합류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나라에 합류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벗어나면 다시 찾아가서 돌아오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것이 이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