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설교가 2023년의 첫 설교였지만, 개인적으로 우리교회는 매일성경의 흐름에 따라 설교를 하다 보니, 민수기로 새롭게 책이 바뀐 오늘이 마치 2023년의 첫 설교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2023년 매일성경 표를 보고 개인적으로는 좀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1월부터 6월까지 자그마치 6개월 동안 우리가 만나게 되는 책이 단 3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3권의 책에 집중하여 나눌 수 있는 물리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죠. 우선 1월 중순까지는
<민수기> 1-10장을 보고, 그 이후에는 <마태복음>을 1-28장까지 이어서 묵상합니다. 부활절까지 약 3개월은 우리가 <마태복음>에 빠져서 살 예정입니다. 4월 10일부터는 다시 <민수기>로 돌아와서 5월 26일까지 민수기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5월 27일부터 6월 말까지 한달은 <로마서> 전체를 묵상합니다. 즉 반년 동안 민수기, 마태복음, 로마서를 만납니다. 우리는 2019년부터 매일성경으로 설교를 해 왔고, 매일성경은 6년에 걸쳐 성경 전체를 일독합니다.
6년간 매일성경의 흐름을 따라 설교하면 우리도 성경 66권을 모두 다루게 되는 것이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우리는 4년간 성경 66권 중 46권을 설교했습니다. 민수기는 우리가 만나는 47번째 성경입니다. 전반기에 3편의 책만 다루는 것이 좋은 이유는, 강해식 설교의 특성상 성경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설명해줘야 하고, 그 안에 담긴 신학적 개념도 설명해야 하고, 본문을 찾아가며 말씀의 의미도 설명해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지까지 논리의 전개도 필요한데, 짧은 책은 설교의 기회가 적기에 충분히 다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23년 전반기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단순합니다. 민수기, 마태복음, 로마서. 그리고 금요기도회를 통해 다루는 하나님 나라. 우리 교회에는 설교가 몇 번 없습니다. 그만큼 이 시간은 소중합니다. 제게 설교자의 사명은 가장 행복한데, 그 준비하는 시간은 가장 괴롭기도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목회의 경험이 늘어나며
나날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중심에 둔 설교를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제가 최근 강해설교와 성경공부로 알려진 다른 목사님의 글을 보게 되었는데, 제목은 <은혜집착주의>에 관한 것입니다. 대략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한국교회 설교강단을 어지럽히는 주범은 ‘은혜집착주의’입니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은 은혜를 끼치기 위해 애를 쓰고, 성도들은 은혜를 받기 위해 집착합니다. 은혜를 받기 원하는 성도들에게 부합하고자 목회자들이 힘쓰면서
설교가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도들이 말하는 은혜가 지극히 주관적 잣대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보통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느끼는 때는, 감동을 받았거나, 자기 생각에 동의되는 말씀이 선포되거나, 위로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경우입니다. 쉽게 말해 자기 사고의 틀 안에서 동의되거나 지지될 수 있는 말씀을 들으면 은혜받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의 이해 속에서는 자신의 사고와 신앙적 범주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의 틀을 은혜로
규정하다 보니, 자기 생각과 다른 메시지 앞에서는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원하는 은혜를 받게 하려다 보면, 목회자가 거기에 맞는 설교를 하려 하고, 그렇게 설교가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진실되고 참된 설교는 이 시대의 죄악과 여전히 동행하는 잘못을 단호하게 꾸짖고, 깨우치게 하는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배우는 학습의 시간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의 동역자로
자신이 부름 받았음을 자각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 시대의 트렌드인 소비자 중심, 청중 중심의 목회에서 목회자들은 과감하게 돌이켜야 합니다. 자신을 목회자로 세우신 파송자 하나님 중심의 목회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우리가 부름 받았음을 설파하고, 하나님의 통치안에 순복하는 것이 참된 구원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동역자로 부름 받았음이 진정한 은혜임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물론 이 동의에는 약간의 용기가 포함되어야 할 경우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피해야 하고, 혹은 싫어한다고 해도 전해야 합니다. 저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듣기 좋게 설교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인간적인 위로는 설교 밖에서 제가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의 설교는 이 설교 안에서 저도 아프고 여러분도 아플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들의
고민이었고,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저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진짜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점차 이해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오히려 이 시간에 설교자가 전하는 가벼운 위로는 잠시 기분 좋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내 삶을 바꿀 수 없으며, 도리어 조금은 나를 고민하게 만들고 아프게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잘 깨닫고 주님을 만나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위로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무엇보다 강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올해도 저의 설교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위해 힘쓸 것이며, 저도 인간이기에 여러분을 보지 않을 수야 없지만, 설교 시간만큼은 저는 하나님 편에 늘 서 있을 것입니다. 대신 설교 밖에서 저는 여러분의 편에 서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위의 글을 인용해서 짧게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설교는 성도들의 필요(need)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다. 그들을 은혜받게 만들어줘야 하는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필요(need)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은혜. 그것이 진정한
은혜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김에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가지만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좋은 안내자일 뿐, 저는 주술가가 아닙니다. 설교 시간에 여러분을 어떤 마력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도 없고, 세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성경을 잘 설명하고 권면하며 초대할 뿐입니다. 즉 반응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어떻게 해주기만을 기대하며 앉아 있지 마시고, 여러분이 이 설교를 함께 준비하고, 함께 되새기며, 최선의 노력으로 반응하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왜 변하지 않는가, 나는 왜 은혜가 없는가, 나는 왜 고갈되는가?’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곳에 은혜의 강물이 흘러도 그것을 길어 올려 마시지 않으면서 목마르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잘 설명하고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고, 저는 적어도 제가 이 설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흐르도록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기 위해, 그 말씀 앞에 반응하기 위해 각자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노력이 곧 예배에 대한 진심입니다. 가끔 설교가 어렵다고, 설교가 잘 안 들린다고 고민하며 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귀한 마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귀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채우고 싶은 갈망함으로 나온 것이니까요. 저는 그런 도움을 청하는 분들을 보면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기 위해 애씁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해드리는 이야기는 거의 동일합니다.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하시고, 설교 후에 그것을 되새기는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적어도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10시간을 쓰면, 여러분도 설교 시간 외에 1시간은 써야 할 것 아닙니까. 저는 10시간 이상 씁니다. 저는 월요일 하루도 온전히 쉬면 직무유기인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밤부터는 설교에 필요한 강의를 찾아 듣기 시작합니다. 좋은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게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특별히 지금 내가 말씀이 잘 안 들리는 분은 더 쓰셔야
합니다. 설교를 위해 본문을 먼저 읽어보시고, 설교 시간에 이해를 못 한 부분은 설교를 계속 다시 들으십시오. 영어를 위해 귀를 열어야 하는 것처럼, 성경과 설교가 멀리 있다고 느끼는 분들은 일단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게 쌓여야 들을 귀가 열립니다. 목회자로서 저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정말 의미 있는 삶을 드리며, 여러분을 통해서 또 누군가가 함께 변하여 가는 그 기쁨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마치 새해의 첫 설교와 같이 그런 굳은 마음으로 결단하시고 올 한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맛보고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민수기는 어떤 책인가? 올해 더 많은 분들이 매일성경을 구독하신 것 같습니다. 감사하죠. 부디 그 책이 조금은 헌책이 되기를 바랍니다. 민수기를 펴서 읽기 시작한 분들이 조금은 당황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민수기 1~4장을 읽으며 이런 마음이 드셨을 것 같아요. 여기서 어떤 은혜를...? 그런데,
민수기는 재미있는 책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우리 사귐의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1월에 민수기를 만나게 해주셨다고 믿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필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거든요. 일단 민수기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왜 민수기가 민수기일까부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는만큼 보이고, 아는만큼 누리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뜻이 무엇입니까? ‘백성의 수’(Numbers)입니다. 이 제목은 칠십인역 성경에서 붙인 것인데, 그래서인지 우리는 민수기 하면 ‘인구조사’
밖에 기억을 안 합니다. 민수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광야에서’입니다. 제가 보기에 조금은 더 낫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말하고 싶은 핵심을 역시 잘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저는 민수기를 여러분에게 쉽게 이렇게 소개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방법과 세우는 방법’ 스터디바이블에서는 이렇게 제목을 제안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와 신실한 세대에 관한 이야기’ 민수기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하고 실용적이며 적용점이 확실한 책입니다. 특히 누구에게요?
우리 사귐의교회에게 말입니다. 왜 그런지 알려드릴게요. 지금 민수기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매우 유사합니다. 창세기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시작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같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가족이 하나님 백성의 시작이 됩니다. 출애굽기는 이제 정말 그들이 백성을 이룰만한 숫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현실은 지금 남의 나라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신
것이죠. 그리고 때가 되어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당시 최강대국 애굽으로부터 나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그들을 하나님이 부르신 곳은 ‘시내산’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기 위해서입니다. 언약은 서로가 앞으로의 삶을 걸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약속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요’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은 ‘내가 너희와 함께하며 보호할게’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결과물로 이스라엘에게 ‘율법’(십계명)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뜻에 따라 살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동행과 보호의 약속은 어떻게 시행됩니까? 성막이죠. 이스라엘은 완벽한 민족이 아닙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 만나서 언약 맺는 동안도 황금송아지 만들고 우상숭배하고, 못난 모습투성이였습니다. 완벽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서 사람은 온전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온전함이란 주님 닮는 것이죠. 김형국 목사님이 예화로 나눈 내용이 하나 떠오르는데요. 믿지 않는
친구를 전도하는데, 친구가 말합니다. “교회는 위선자들 투성이인 것 같아.” 그래서 이렇게 말했데요. “맞아, 내가 봐도 교회 안에는 여전히 그런 모습들이 있지. 위선자들이 교회에 모였으니까. 그래서 너도 꼭 와야 해.” 교회는 위선자들이 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위선자로 끝까지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변을 보세요. 우리는 아직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 허물이 많고, 남 탓하기 좋아하고, 이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으로 살지 않기 위해 힘쓰고, 평생을 변해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도 바로 그 하나님과의 동행, 하나님의 뜻에 함께하는 삶의 기회를 부여받고 이제 그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출 19:5)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출 19: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
전반부는 출애굽하여 시내산까지 가는 이야기, 언약을 맺은 후, 율법을 받고, 성막을 짓는 이야기가 후반부입니다. 우리가 살펴봤던 <레위기>는 어떤 책입니까? 그 율법에 근거하여 우리가 어떻게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성막은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동행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책이죠. 그리고 민수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언약 이전에는 오합지졸이었고, 하나님을 어렴풋이 알고, 모세 외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적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제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속죄의 은혜도 누리며, 성막으로 상징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본격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민수기입니다. 창세기는 개인 혹은 가족 공동체였고, 출애굽기는 우당탕탕 번성기였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라면, 민수기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식적으로 불릴만한 공동체가 그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사명을 갖고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금 우리의 이야기와 유사하다고 느끼는 지점이 이것입니다.
저희도 처음에 다 모여야 10명이던 시절에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자고 말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가족입니다. 친해지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사정도 다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그러다가 공동체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10명이 20명으로 20명이 50명으로, 50명이 100명으로, 이제는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귐의교회라는 공동체로 묶여 있습니다. 이러면 뭐가 필요합니까?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도 그러했습니다. 가족 모임에서 나라 공동체로 나아가며, 지파별
모임도 필요하고,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이 세워집니다. 리더들이죠. 언제나 공동체에는 리더십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은 공동체는 복잡하지 않아요. 그러나 공동체가 커질수록 유기적이고 헌신적인 리더십이 잘 세워져야 합니다. 저희교회도 늘 그것을 고민합니다. 직분제 교회는 보통 직분에 따라서 리더십을 줍니다. 목회자 중심의 교회는 목회자에게만 리더십을 줍니다. 우리는 그 두 가지와 다른 방식의 리더십을 추구하는 것이죠. 우리는 어떤 리더십을 세울 것인가.
예배인도자, 팀장, 교사, 팸 리더, 공동체 대표, 간사, 목회자. 다 교회 공동체가 부여한 리더십이고, 우리는 그 리더십을 인정하고 믿고 따라줘야 합니다. 리더십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공동체를 위해 더 많은 사랑의 수고와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적 공동체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리더들을 사랑해주십시오. 또한 리더들은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기 위해 힘쓰셔야 합니다. 문제는 좋은 시스템이 좋은 공동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그 자체가 공동체를 아름답게 유지하지 못합니다. 시스템은 도구일 뿐,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우리는 민수기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이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무너뜨리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내 모습이 있을 수 있어요. 제가 가끔 사역하는 사람들한테 점검합니다. 고민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보통 제가 보기에 더 잘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항상 고민이 있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만 느끼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위험한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이고,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 제가 그래서 개척하기 전에 찾아뵈었던 김영봉 목사님이 제게 해주셨던 말이 이것입니다. ‘신자는 죽을 때까지 나를 점검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이 멈추는 순간 부패한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시스템은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입니다. 율법과 성막에 대한 모든 구절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다 가르치십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모세를 통해서입니다. 민수기의 모든 규정들도 마찬가지로 리더들을 통해 가르치도록 하십니다. (민 4:27) 게르손 자손이 해야 하는 모든 일, 곧 짐 나르는 일과 그 밖의 일은 모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지시를 받아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게르손 자손이 짊어지고 갈 모든 짐을 그들에게 일러주어야 한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요. ‘그들에게 일러주어야 한다.’ 제가 사귐의교회의 목사로 있는 때까지 하나님은 저를 통해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실 것입니다. 제가 뭔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부르심이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저를 위해 기도하시고, 저를 사랑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저를 사랑하지 못하게 되면, 저에게서 여러분에게로 흘러가야 할 것이 막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저는 목사의 자리를 물러나면, 저보다 나이 많은 모든 성도님을 ‘형님, 누님’으로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사명 안에 있을 때 저는 여러분의 영적인 부모이고 스승이 되기 위해, 저도 여러분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다 가족이었죠. 심지어 모세는 아론의 동생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공동체 안에 질서를 세우고 한 공동체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사명을 위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것이 민수기입니다. 2. 민수기로 배우는 공동체와 시스템 우리가 민수기의 첫 부분을 읽으면 곧바로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만나게 됩니다. (민 1: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 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 1: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쉽게 말해 인구조사를 하나님이 시킵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에게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는 언제나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귐의교회 사명선언문> 사귐의교회는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날마다 추구한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경험하고 드러낸다. 이것이 우리교회 사명선언문입니다. 교회는 이 사명과 이 비전에 함께 하기로 다짐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지, 그저 사교적인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경험하고 드러낸다.’ 우리의 이 사명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 이유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는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전하는 사명이죠. 세상에 대하여 거룩한 백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백성을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표현한 것이고, 제사장 나라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을 뿐, 우리의 사명이 곧 이스라엘의 사명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비어있는 땅이 아닙니다. 그 땅을 전쟁해서 차지해야 합니다. 전쟁에는 누가 나갑니까? 20세 이상의 남자들이 나갑니다. 그래서 인구조사는 20세 이상의 남자들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매님들이 이 말씀을 보고 기분이 안 좋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민 1:4)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곧 한 가족에서 지도자가 한 사람씩 나오게 하여 너희를 돕게 하여라. 그리고 이것이 일종의 시스템이죠. 모세와 아론이 목회자라면, 각 지파에서 팸 리더를 세워서 함께 공동체를 돌보게 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어떻게 일일이 다 돌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안에도 지파장이 있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디테일하게 내려가면 십부장, 즉 10명을 돌보는 리더까지 세워지는 것이죠. 생각해보십시오. 인구조사 총합을 보면 이들이
20세 이상의 전쟁에 나갈 남자만 603,550명인데, 여자, 아이, 노인 합치면 200만은 넘겠죠. 그것을 모세와 아론 둘이서 인구조사하면 평생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저희 팸 리더들에게 제가 제일 많이 부탁하는 것이 인원 파악인데, 그것은 그러므로 매우 ‘성경적이다’라고 항변하며, 그것이 곧 지도자를 돕는 것이라 말씀드립니다. 이들이 지금 인구조사를 하는 곳은 시내산입니다. 이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율법을 배우고, 성막을 다 지은 후, 그곳에서 이제
출발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구조사에서 구별되는 지파가 있습니다. 즉, 전쟁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레위지파이죠. (민 1:47) 그러나 레위 사람은, 조상의 지파별로, 그들과 함께 등록되지 않았다. (민 1:48)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분부하여 이르셨다. (민 1:49) "레위 지파만은 인구조사에서 빼고 이스라엘 징집자 명단에 올리지 말아라. (민 1:50) 그 대신 너는 레위 사람을 시켜,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을 보살피게 하여라. 모든 기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비품을 그들이 관리할 것이다. 그들은 성막을 옮기는 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를 옮기는 일을 맡을 것이다. 그들은 성막을 돌보며, 성막 둘레에 진을 치고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지파는 원래 야곱의 열두 아들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열두 아들 중 하나인 요셉의 지파는 두 몫을 차지합니다.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 대신 삼촌들과 같은 서열에 서게 됩니다. 야곱이 이미 말한 것이기도 하지요. (창
48: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신학적으로 보자면, 요셉이 르우벤 대신 야곱의 아들 중 장자가 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장자는 2배의 몫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즉, 야곱의 아들은 12명인데, 여기서 레위는 하나님을 섬기는 특별한 역할로 빠지게 되고, 대신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12+1 지파로 운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지파로서 말할 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0.5씩 따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레위지파의 구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공동체가 갖는 매우 독특한 특성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대하여 싸워야 할 사명도 이스라엘에게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만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최선을 다하면서 그 일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2지파보다 13지파가 모두 전쟁에 나가면 유리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습니다. 그러나
13이 나가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13이 아니라 12로 나가면서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며, 그 힘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하겠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전반에 매우 실제적인 요소로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 준수가 그런 것이죠. 7일 일하면 6일 일하는 것보다 더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주말 안 쉬고 일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고백으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일조의 원리도 그렇습니다. 저는 헌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성과 기쁨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명령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생존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다짐이 있다면, 그러한 다짐은 매우 실제적인 물질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집니다. 의미는 같죠.
10을 갖고 살면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산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힘으로 살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십일조의 일부는 레위지파의 생계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12지파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고, 레위지파는 그 물질로 삶을 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방식이었죠. 이것이 아시다시피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중직을 지지하지만,
전제는 공동체가 작고 약할 때입니다. 공동체가 목회자의 삶을 책임질 수 없을 때. 사도바울도 이방선교 중에 텐트를 지으며 복음전도자로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공동체가 목회자의 삶을 책임질만한 준비가 되면 목회자는 목회에만 전념하는 것이 저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경험하여 왔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이 있다면, 여러분의 헌금에 담긴 눈물과 땀입니다. 밖에서 일해보니, 돈을 번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경험하며,
저는 여러분의 헌금이 얼마나 귀한 믿음의 고백인지 배웁니다.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물질을 드려 헌금하는 것이 쉽지 않죠. 그래서 값진 것이고, 그런 고백을 우리 주님이 더욱 잘 아실 것입니다. 즉, 민수기에 있는 기록은 의미를 깨달으며 읽어가면 모두가 의미가 있습니다. 인구조사도 단순한 숫자 계산이 아닌 것이죠. 그 자체가 맡겨진 사명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원리들을 발견하며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모든 시스템이 세상의
일반적인 방식과 달랐다는 측면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가 고민해봐야 합니다.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동일한 현실, 동일한 시간 속에 머물지만, 그 안에 있는 구별됨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구별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사는 방식이 달라야 하고, 회심하기 전의 내 자신과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민수기
첫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저는 민수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민 2:3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민수기를 읽어보시면 하나님은 매우 실제적인 부분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그것을 따를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중에는 우리의 생각에 ‘굳이 이것을 이렇게?’라고 하는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따르는 이유가 있다면 단 하나겠죠. 그 말씀을 하신 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가진 기준을 하나님이라는 존재 앞에 내려놓고, 그분의 기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결단입니다. 물론 그러한 결단을 하게 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그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다 이해할 수 없는 기준들, 내 생각과 다른 기준들이 작은 요소들에는 늘 많습니다. 목사인 저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실까?”라는 생각을 수없이 합니다. 그러나 믿고 따르며 경험합니다. “역시 하나님이시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구조사를 하면서 한가지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던 그 약속이 현실이 된 것을 그들은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리라는 것도 그들은 믿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을 보고, 그가 하고 계신 일을 묵상하며, 그가 하실 일을 믿고
기대하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이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세상의 거센 파도와 바람이 여러분을 향해 불어닥치겠지만, 그 하나님을 바라보시는 믿음으로, 오늘도 하나님의 제사장 되어 살아가시기를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