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민수기 톺아보기" with 발락과 발람 / 강정규 목사

2023-05-21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톺아보다. 샅샅이 훑어가며 찾아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긴 호흡으로 설교한 책을 다시 되짚어 살피는 설교를 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다섯 번째 톺아보기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2021년 10월 _ 출애굽기 톺아보기 2022년 2월 _ 요한복음 톺아보기 2022년 6월 _ 사무엘상 톺아보기 2022년 10월 _ 사무엘하 톺아보기 오늘이 민수기 여덟 번째 설교입니다. 올해 1월과 4월 5월에 나눠서 묵상해왔지만, 민수기가 한 권의 책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오늘 설교를 통해서 민수의 전체적 흐름을 연결하고, 또 각 설교 후 결단하며 불렀던 찬양을 다시금 고백하며 오늘도 은혜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민수기 전체의 결론은 다음 주에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 민수기는 재밌습니다 (민 1-4장) 민수기는 ‘백성의 수를 세다’라는 의미에서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지만, 인구조사가 책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공동체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배경은 광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는 ‘민수기’가 아닌 ‘광야에서’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세우기를 시작하십니다. 요셉의 때, 애굽이라는 당대 최강대국을 요람 삼아,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애굽에 살면서 한 민족을 이룰 만큼 번성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애굽의 정권교체로 인해 히브리 민족은 노예화되고, 그 후에 때가 되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로 출애굽 시키십니다. 광야의 첫 여정은 시내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됩니다.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그 백성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전쟁에 나갈 준비도 시작합니다. 아무런 체계가 없는 오합지졸 백성들이기에, 지파별로 시스템을 만들고, 모세를 중심으로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등을 세우는 등 체계를 갖추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두 노예였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들을

향한 중요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래야 땅을 차지한 후에도 질서 있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예로만 살았던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이었고,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크고 작은 여러 문제들이 계속 발생합니다. 그래도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훈련하십니다. 어찌 보면, 민수기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 훈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레위지파를 구별하는 것도 그 중 한 가지였습니다. 지금 이들은 전쟁에 나가는데, 싸움을 위해 12지파가

나가는 것과 레위지파를 포함하여 13 지파가 나가는 것 중 무엇이 유리한지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안에서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내 생각과 맞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죠. 13지파가 나가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것입니다. 싸움은 12지파로 나가고,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그 순종의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살겠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안식일 법이나, 십일조 명령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기준과 생각으로는 7일의 노동이 6일보다 풍요를 가져오고, 10의 1을 하나님께 드리면 부족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가르침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인구조사를 행하며, 그들은 중요한 것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민족을 이루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따라, 얼마나 신실하게 그 일을 해오셨는지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을 이룰 만큼 번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 앞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그분께 있기를 바라며 함께 찬양합시다. 2) 언약 백성 (민 5-6장)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위는 ‘언약 백성’입니다. 그럼 지금 여러분의 지위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첫 번째 언약의 백성이 이스라엘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맺은 새 언약의 백성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언약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깨닫는 중요한 원리가 됩니다. 언약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공식적인 하나님과 함께하는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가장 많이 비유하는 것은 결혼한 부부입니다. 우리가 처녀, 총각 때와 결혼 후의 행동이 같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소속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소속됨 앞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때 그 가정이 아름답습니다. 평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완벽하지 않은 우리는,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언약을 맺은 이후에 범하는 잘못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허락해주십니다. 그래야만 언약이 깨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결법’입니다. 정결법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정결 명령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다시 돌이킬 기회조차 없는 것입니다. 나실인 규정도 이 부분에서 다루었습니다. 하나 질문을 드릴게요. 나실인은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선택하는 것일까요? 나실인은 각 사람이 서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나실인은 하나님께 헌신 된 삶을 스스로 다짐하여 그 기간 동안 더욱 충실히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나실인 서원 기간 동안 요구되는 규정은 대제사장의 규정과 유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나실인 서원이 어쩌면 우리교회가 추구하는 사역 지원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결단하여 정해진 기간을 서원합니다. 원하면 재헌신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 제가 제사장처럼 아예 구별된 삶을 사는 목회자라면, 여러분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결단하여 섬기는 것은, 성도가 제사장이 되어 교회를 세워가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를 여러 모습으로 섬기는 분들에게 이 시간을 빌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그 헌신은

나실인의 헌신처럼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여러분은 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아름답게 섬김으로 교회를 세워갑시다. 섬김의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며, 예배 안에서 회복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 적응하며 자라가는 여러분들도 늘 응원합니다. 이 예배 안에서 우선 충만해지고,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이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도 언약적 의무를 다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자기

백성인 우리와 동행하며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그분을 함께 노래합시다. 3) 신앙의 원리 (민 7-10장) 우리가 수천 년 전의 상황을 담은 민수기를 삶의 지표로 삼는다는 것은 그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위해 동물을 잡거나,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에 담긴 원리들을 이해하여, 나의 상황과 환경에서 그 원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민수기를 살펴보면 그런 장면이 많습니다.

민수기 7장에는 이스라엘의 지휘관들이 헌물을 드리는 모범과 그것을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배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리더들이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서 먼저 헌신의 본을 보여야 하는 원리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누는 지혜의 원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나 나의 기준을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분배도 세상의 원리와 다릅니다. 언뜻 우리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누어줘야 공평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특히 남보다 뭔가 불합리하게 받으면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그분의 뜻이 중요합니다. 내 기준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도 많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의 마음으로 주인 되신 하나님께 듣고자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첫걸음은 내가 지혜롭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민수기 8장에는 레위인으로 이스라엘 모든 장자를 대신하게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장자의 수가 22,273명인데, 하나님께 헌신한 레위인의 총수는 22,000명입니다. 273명만큼의 헌신이 부족합니다. 제가 이야기했죠. ‘하나님께는 네고가 없다.’ 하나님은 273명에 대해서 속전을 내도록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좀생이가 아니라, 한 영혼도 대충 계산하지 않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1+1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동하는 모습 속에도,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행진의 원리가 있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이란 주님의 속도와 주님의 방향과 주님의 때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내 속도와 방향에 주님을 맞추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민수기에는 모든 백성이 한 나팔소리를 듣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보고 따라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주님을 따라 살아갈까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한 분 하나님의 영이 거하기에 그분을 따르는 절대적 순종이 있을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습관을 노력하십시오. “하나님, 제게 말씀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 제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주님을 따라 일상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지키시는 은혜가 함께하실 것입니다. 4) 실패의 첫 번째 원리 (민 10-12장) 민수기 10장부터는 출애굽 1세대의 실패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실패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11-12장에서 보여주는 첫 번째 원리는 ‘불평’입니다. 불평에 관련된 이슈를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평이 얼마나 큰 나비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실패하게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여러분. 광야에 사는 것의 현실은 매우 고단할 것입니다. 특히 계획표가 있어야 마음이 놓이시는 분들에게 광야는 정말 힘든 곳입니다. 내게 주도권이 없어요.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춰야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광야 전체가 고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죠. 인생이 광야를 만나지 않을 길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광야를 피할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삶과 불평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불평은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하나님도 오래 참으십니다. 불평 한번 했다고 진노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끊임없는 불평은 다루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일이기에 분명히 다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불평은 전염되기 때문에 방치하면 일이 더욱 커져 버립니다. 민수기에서도 한명 두명 부정적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감정에 휩싸여서 과장하고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불평은 지도자 모세를 너무 힘겹게 했습니다. 모세가 말하죠.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70명의 리더들을 붙여주시고, 음식 불평을 하는 백성들에게 메추라기를 먹여주십니다. 동시에 불평의 주동자들은

심판하십니다. 해결할 것은 해결하시고, 벌할 것은 벌하십니다. 그런데 그다음 나타난 불평 관련 사건은 이스라엘 지도자 그룹 안에서의 문제였습니다. 특히 모세의 누나였던 미리암, 어린 시절 모세를 갈대상자에 담아 보낼 때, 쫓아갔던 그 누나. 그런데 그 미리암이 공개적으로 모세의 영적 리더십에 반기를 듭니다. 모세의 결혼에 대한 것을 꼬투리 삼고 전면에 내세우지만, 사실상 영적인 권위 질서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내비친 것이죠. 만약 저는 모세가 정말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 부분은 바로잡으셨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하나님은 미리암의 악함을 지적하시고 그녀를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남들이 어떻게 여긴다고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가 되십시오. 야생마가 길들여진 상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상태. 주님이 나를 바라보시듯 나도 나를 이해하는 그 마음 말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환경 탓, 사람 탓, 남 탓하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드려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실패의 두 번째 원리 (민 13-14장) 이런저런 여정 속에 이들은 결국 가나안 땅 근처에 위치한 ‘가데스 바네아’ 지역에 도착합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최종적 준비를 위해 12지파에서 지휘관을 파견합니다. 40일 동안 약속의 땅을 탐방하고 돌아오는 것이 목적입니다. 12명의 지휘관들이 정탐하러 다녀온 후, 그

내용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보고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말합니다. 그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백성들이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무엇보다 아낙 자손도 있었습니다. 아낙 자손은 거인족인 네피림의 후예를 의미합니다. 이 부정적 기류가 느껴지는 보고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까 염려한, 믿음의 사람 갈렙은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며 말을 꺼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10명의 정탐꾼이

갈렙의 말에 거세게 반박합니다. “우리는 도저히 못 합니다. 그 백성이 우리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의 생각의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사실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장이 달라요. 주장의 근거가 10명은 ‘자기 생각’이었고,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0명에게는 우리가 못 이긴다는 점이 다가왔고, 갈렙과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라는 것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실패의 두 번째 원리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바로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에 빠지면, 다른 의견 앞에 지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반박하고, 여론화합니다. 언제나 공동체 안에는 부정적 이야기가 더 힘을 발휘합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면, 나의 못된 습관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변해야 합니다. “주님 제 혀가 옳지 못합니다. 제 입술이 거룩하지 못합니다.” 이 사건은 사람들 안에서 다수결이 때론 위험하다는 것도 잘 보여줍니다. 부정의 힘이 거세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메뚜기’라고 말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주님이 함께하시니’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외칩니다. 우리의 생각이 행동에 차이를 만듭니다. 같은 세상을 살지만, 전혀 다르게 삽니다. 같은 신앙 안에 있지만, 전혀 다르게 삽니다. 같은 예배 안에서도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그 연약함은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 미약한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함께하는 나라면 능히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욱 의지하고 붙들며 살아갑시다. 우리는 연약할지라도 그분은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6) 광야 40년의 훈련 (민 15-19장) 가데스 바네아 사건으로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유지되었지만, 연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다시 교육하십니다.

15장은 제사의 규정을 가르치시는데, 제사가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려야 한다는 점, 모든 수확물의 첫 것을 드리는 태도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사실상 우리도 하나님의 것을 먼저 구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라고 나의 가장 첫 계획으로 예배를 원칙 삼아야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왜 실패하게 되었는지 이미 이전의 사건들을 통해서 잘 압니다. 안타깝게도 광야 40년의 세월

속에도 그 일은 반복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구별된 그룹인 레위지파의 고라자손의 반역 사건은 가장 큰 반역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 250명이 고라의 반란에 동조합니다. 그들이 고라를 중심으로 ‘당을 지었다’는 표현이 성경에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이들을 ‘고라의 무리들’로 부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역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면,

그리고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가 세상에 속한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 그런 목적,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고라 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고라의 심판을 보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에게 와서 따집니다.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었다.” 하나님이 이 일에 분노하십니다. 그래서 백성들도 심판하십니다. 그때 아론은 백성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을

속죄하며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섭니다. 고라 무리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했고, 모세와 아론은 공동체를 지켜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은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아론의 싹 난 지팡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아론에게 있었던 여러 일을 함께 바라보면 은혜를 느낍니다. 아론을 고쳐 쓰신 하나님. 아론은 황금송아지 사건에 가담했고, 미리암의 반역에도 가담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론을 계속

만져오셨고, 이스라엘 제사장으로 그를 붙들어 세워가십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다.’ 세상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쳐 쓰십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고쳐가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예배 안에도 저는 하나님이 고치시고 회복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가득하길 축복합니다. 7)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3가지 질문 (민 20-21장) 저는 성경을 읽을 때 질문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민수기는 역사적 이야기이기 때문에 특히 그런 질문들이 많이

생기는 본문이죠. 우선 우리는 죄에 차이가 있는지를 다뤘습니다. ‘고의적인 죄’와 ‘비고의적인 죄’를 구분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약해서 짓는 죄와 악해서 짓는 죄. 몰라서 짓는 죄와 알면서 짓는 죄. 회심하기 이전의 죄와 회심한 이후의 죄. 이스라엘이 민수기에서 더욱 잘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악한 마음 때문입니다. 더이상 몰라서 짓는 죄가 아니죠. 그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실패합니다. 사실상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의 진짜 적은 가나안 원주민이나

광야의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완고한 마음이 진짜 적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부의 적에게 지지 마십시오. 민수기에서 우리를 고민하게 하는 두 번째 질문은 므리바 사건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 일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잃게 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심각한 잘못인가?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무엇입니까? 출애굽 1세대의 잘못을 모세와 아론이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고의적인 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짓는 죄. 또한 하나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제한 자기 생각대로 행한 죄. 마치 자신들이 기적의 주체인 것처럼 내뱉은 말 등은 민수기 내에서 출애굽 1세대가 행했던 죄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1세대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이 그 일을 책임지도록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광야에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안에서 세대교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다시 불평하는 옛 습관대로 행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불뱀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은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모두가 죽을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인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 앞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 순종을 선택한 사람이 죽음을 이기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은 하나님의 결정인가, 우리의 행동인가? 모든 구원은 하나님의

결정하심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행동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것까지 우리의 결정과 무관하다고 보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기계적인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는 늘 최선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늘 신실하십니다. 그러나 언약 백성이 실패하게 된 원인은 출애굽 1세대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가?’ 이것을 단순히 지적 동의로 생각하면 대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 본다면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이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충성은 내 마음 위에 하나의 중심을 두고 사는 ‘충성의 삶’입니다. 내 마음 위에 중심이 2개가 되면, ‘근심 환’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만이 주인 된 삶을 결단할

때, 그 마음에 근심이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메시지) 발람과 발락 (민 22-25장)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이곳에 진을 쳤다는 것은 이제 광야의 여정이 마무리되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곳에 이르기 전에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쟁에 승리하기 시작합니다. 실패를 극복하고 한 걸음씩 나가는 회복의 여정입니다.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은 거듭된 이스라엘의 승전보를 들으며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향한 두려움으로 군사적으로 정면 대응하기보다는 ‘복술’이라고 하는 영적 행위를 의지해보고자 합니다. 쉽게 말해 ‘부적을 써서 저주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입니다. 어리석은 일이죠. 발락은 당대에 유명한 무당인 발람을 섭외하고자 사람을 보냅니다. 두둑한 복채를 챙겨 보냈다고 기록합니다. 그날 하나님이 발람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 사신들과 함께 가지 말라. 이집트에서 나온 그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니 저주하지 말라.” 발람은 하나님의 그 개입을 이해하고

발락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발락이 포기하지 않고 더 좋은 대우로 발람을 섭외하려고 사람을 보냅니다. 그때 하나님은 따라가는 것은 허용하시지만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은 금지 시킵니다. 이 얘기는 하나님이 다른 용도로 발람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발람이 발락에게로 가는 과정에 우리가 알고 있는 나귀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나타납니다. 나귀를 통해서 발람에게 뜻을 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에 대해서

생각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 방편으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상황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계략은 물거품이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을 무엇을 하려고 하고, 사술로 무엇을 하려고 했던 발락은 많은 현대인들을 대변합니다. 돈을 삶의 해결책으로 삼거나, 점과 운세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이 발락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도리어 발람은 하나님의 개입의 경험자이자 목격자로서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축복까지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그가 축복을 말하였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발적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발람이 선포한 네 가지 축복이 어떤 내용인지 아십니까? 첫 번째 축복은 자손, 두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세 번째 축복은 땅에 대한 약속,

네 번째 축복은 열방을 향한 약속입니다.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일으키시겠다는 마음을 갖고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처음 약속하셨던 내용입니다. 자손을 주겠다. 땅을 주겠다. 내가 너를 보호하겠다. 내가 너로 모든 민족 가운데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 발락과 발람의 에피소드는 바로 민수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하였고, 그리하여

40년의 세월을 돌아왔지만,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분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있는 이스라엘은 모압 왕 발락의 저주는 피했지만, 모압 여인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당시에는 신전에서 합법적 음행을 하면서 민족의 신들을 섬기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우상숭배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2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외부의 주술보다 더 강력한 공격은 내부의 음행이었습니다. 외부의 공격은

하나님이 막아주셨어요. 문제는 내부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적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져도 내가 안 받겠다고 하면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의 거대한 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다 앞서는 내 욕망의 손을 내가 잡을 때가 우리의 진짜 위기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반역이 민수기 내에서 계속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언덕 위에서 발람의 저주의 입술을 막고 계시지만, 언덕 아래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지만, 그의 백성이 반역하면 그 결과를 직면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따라는 것은 오늘도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매일 매일의 선택이 모여서 우리의 인생의 경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우리의 인생 경로를 한 걸음

더 주께 향하게 하거나, 혹은 잘못된 길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기회의 시간입니다. 아직 주님이 사랑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