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고의(故意)" / 강정규 목사

2023-05-28 · 민수기 25-3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은 민수기 마지막 설교를 전하는 날입니다. 지난주 톺아보기 마지막 메시지였던 ‘발락과 발람’ 이야기가 민수기 25장인데, 민수기는 36장이 끝입니다. 즉, 26~36장까지 11장 분량의 메시지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 부분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는 이야기들 뿐이라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부분도 아닙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도 이 부분을 한번 다루지 않으면, 여러분이 이 부분에 대해 설교를 들을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깊이 다루기에는

분량 대비 시간이 제한적이므로, 오늘 저의 목표는 이 부분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우선 성경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발락과 발람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은 외부의 저주는 하나님의 보호로 이겨내지만, 모압 여인들을 앞세운 유혹에 넘어가 음행하는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민 25: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무는 동안에, 백성들이 모압 사람의 딸들과 음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이스라엘 진영 안까지 이방 여인을 데리고

들어와 음행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를 본 이스라엘의 제사장 비느하스(아론의 손자)가 그들이 들어간 막사에 들어가서 창으로 음행하는 그들을 찔러 죽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이 마치 가데스 바네아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했던 것처럼 여기십니다. 비느하스의 열심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내리시던 진노를 멈추십니다. 저는 신앙이 좋아지는 것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알고, 내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비느하스의 의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렸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도 주님께 위로와 헤아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6장부터는 모압 평지에서 행해지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인구조사 장면입니다. 앞서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24,000명의 사람들이 전염병의 심판을 당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지만, 뒤이어 시행되는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언약 실행의 의지를 보여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배신과

실패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로막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 자신이 하신 약속을 이뤄가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성경의 약속 이행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몸의 부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약속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저는 두 번째 인구조사 부분을 묵상하며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플랜 B의 하나님” 저는

플랜B의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제가 최근에 예정론에 대한 설교를 몇 번 나눴는데, 혹시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면 저는 예정론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제가 반대하는 것은 예정론을 오해하여 잘못 사용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하심, 선택, 결정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래 계획, 선택 등은 언제나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저에게 오히려 은혜가 되는 것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기계적으로 다루시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중 플랜A가 본래 의도하신 바라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십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우리가 여러 이유로, 우리의 약함과 악함으로, 플랜A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정론을 숙명론처럼 오해한다면, 플랜A가 망가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우리의 세계에서는 종종 발생합니다. 선악과 사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먹지 않기를 바라셨죠. 그러나

막지는 않으십니다. 결국 선악과를 먹지 않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길로 갑니다. 민수기에서도 출애굽한 백성을 가나안으로 보내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플랜A에 따라서 이스라엘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순종을 애쓰며 나아갔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나님은 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결정적인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플랜A가 망가집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된다’는 말의 의미를 기계적으로 이해하면, 플랜A가 망가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정탐꾼의 생각을 조정하거나 백성의 마음을 바꾸시는 기계적 개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우리의 잘못된 선택도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플랜A가 망가집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플랜A를 망가지지 않도록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플랜A에 대하여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당황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하는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플랜 B가 늘 있습니다. 플랜 B에서

실패하면 플랜 C가 있습니다. 제가 믿는 것은 이것입니다. 플랜A로 간 인생이 플랜B보다 더 좋은가? 그럴 수도 있지만, 인생에서 선택의 길은 수없이 발생합니다. 한번 플랜A로 가더라도 그다음 문제에서 다른 선택을 하여 돌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제가 믿는 것은 우리의 그 실패를 하나님은 감당하시고 일하신다는 믿음입니다. 다만 우리도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플랜A의 문제에서 경험한 실패의 교훈을 통해, 플랜B로 가다가

만나는 그다음 문제, 또 그다음 문제, 인생의 그 수많은 문제 앞에서 우리가 깨달은 만큼, 차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분별하여 나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내비게이션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목적지를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있기에 우리는 내비게이션의 원래 경로에서 벗어날 자유, 혹은 실수할 위험성도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차를 멈추거나 내비게이션을 꺼버리면 그때부터 정말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인도하심을 믿고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조금 늦어져도, 조금 돌아가더라도 말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플랜A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 이후 다른 경로로 접어듭니다. 그리고 38년의 광야생활을 더 겪게 되는 우회경로를 가야 하죠. 그러나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 우회경로에서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셨느냐? 그렇지 않죠. 하나님은 늘 인도하십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된 길을 계속 걸어가도

하나님은 그곳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인도하시기에, 그 인도하심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목적지로 가게 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저는 그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삶이 지속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난 것으로 봅니다. 그럴 가능성도 우리는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선택도 하곤 합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플랜B의 우회경로, 38년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모압 평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두 번째 인구조사를 합니다. 40년 전, 계수한 첫 번째 인구조사에서 전체의 인원수는 603,550명입니다. 이들을 기반으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를 세우려고 하셨던 것이죠. 40년이 흘렀습니다. 그사이에 무수한 일이 있었습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이며, 척박한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심판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불뱀 심판도 있었고, 바로 앞에서 24,000명이 전염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모압평지에서 계수한 출애굽 2세대의 전체 인원수는 601,730명입니다. 1,820명의 차이가 있지만,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었는데 비슷한 숫자를 유지한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돌보심의 결과입니다. 플랜B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너의 씨를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처럼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은 신실하게 지키시는 것입니다. 생존 자체가 고민인 광야에서 하나님이 플랜 B에 함께하시며 일으키신 놀라운 일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정말 많이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저희 가정이 지금 불행한 것은 제가 혹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에게 잘못 형성된 신학적 사고의 틀은 우리의 신앙을 위협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만나서 결혼한 사람이 플랜A인지, B인지, C인지 모릅니다. 그냥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고 결혼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믿는 것은 플랜 A,B,C 중 무엇을 선택해도 그곳에서

최고의 길을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플랜A로 갔다고 하더라도 그 길에도 난관을 만납니다. 어느 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한번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나의 인생길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따라가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 후에는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십니다. (민 26:53) 땅은 사람 수에 따라서, 그들의 유산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 (민 26:54) 사람이 많으면 유산을 많이 주어야

하고, 사람이 적으면 유산을 적게 주어야 한다. 유산은 등록된 사람 수에 따라서, 각기 나누어 주어야 한다. (민 26:55) 유산으로 받는 땅은 오직 제비를 뽑아 나누어야 하고, 그들은 그것을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지파의 이름으로 물려받아야 한다. 즉, 두 번째 인구조사를 통해 병력의 수도 확인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땅을 분배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김칫국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언약 실행 의지가 강력하신 것입니다. 땅

분배 과정은 이렇습니다. 먼저 지파별로 나와서 제비를 뽑아 지역을 정합니다. 그 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의 명수에 따라 지파의 몫 안에서 땅을 분배합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지파의 땅이 없습니다. 나머지 열두 지파의 땅 안에서 48개의 성읍을 유업으로 받아 흩어져 살아갑니다. 저희 예배당 입구에 저희가 예전에 사용했던 표어가 있죠. ‘모여서 함께 최고의 예배를, 흩어져서 삶으로 거룩한 흔적을’ 레위 지파가 12지파 사이에 흩어져 살았던 것은 그들 안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예배를 세워가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죠. 세상에 대하여 여러분의 사명이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흩어진 삶에서 거룩한 흔적을 남기며 삶의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큰 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다 했는데, 언제나 디테일이 중요하죠. 26장에서 두 번째 인구조사와 함께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면, 27~30장까지는 그 새로운 명령에 따르고자 할 때, 고려되어야 할 제도적 보완책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땅 분배 명령이 주어진 후, 예외 조항에 대한 논의가 발생합니다. (민 27:3) "우리의 아버지는 광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거역하여 모였던 고라의 무리 속에 끼지는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만 자신의 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는 아들이 없습니다. (민 27:4) 그러나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가족 가운데서 아버지의 이름이 없어져야 한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의 남자 친족들이 유산을 물려받을 때에,

우리에게도 유산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악한 일로 심판을 받아 죽었다면 땅을 상속받지 못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고라의 반란에 동참했다면 땅을 상속받지 못합니다. 이들의 아버지 슬로브핫은 출애굽 1세대의 일원으로 광야에서 일반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죠.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땅을 아들들이 상속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슬로브핫은 딸 다섯만 남겼는데, 이 경우에 가문의 땅은 어떻게 되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산 문제이기도 하지만, 땅은 이스라엘

가문의 이름으로 상속되기에, 슬로브핫 가문의 이름이 잊혀질 위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슬로브핫 딸들의 요구는 정당하게 받아들여 집니다. 1세대가 보인 무조건적인 불평과 결이 다른 합리적인 질문이죠. 모세 또한 여인들의 의견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관행이나 전통을 앞세워 묵살하지 않고 잘 들어줍니다. (민 27:5) 모세가 그들의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다. (민 27:6)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이 문제를 주님께 물었고, 주님은 여기에

대한 디테일한 규정을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 시대의 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다못해 성경에 ‘보이스 피싱 범죄’ 같은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요. 성경에서 죄라고 언급되지 않았다고 그것이 죄가 아니냐? 시대와 문화가 다르기에 발생하는 예외적 일들이 우리 안에는 많습니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께 물을 수 있어야 해요? 이것을 해도 될지, 하면 안 될지…. 우선 하나님께 잠시라도 물어보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 하다못해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물어보세요. 그걸 어떻게든 여지를 만들어서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하기 이전에, 하나님 제가 오늘 가길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물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린 제일 중요하잖아요. 술에 대한 저의 견해는 제 블로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일 뒤에, 모세의 죽음 예고와 후계자 준비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가

세워집니다. 모세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가데스 바네아에서 참된 믿음을 보인 여호수아를 하나님은 세우십니다. 물론 모세가 아직 은퇴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예고되었을 뿐, 아직 모세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이어지는 28~29장은 제사 제도에 대해 보완하는 말씀들입니다. 이제 이들의 예배 환경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교의

정의는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선교는 꼭 해외에 나가서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예배의 삶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얻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은

유월절과 무교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등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다시 가르치십니다. 누군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니라, ‘시간의 종교’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드리는가에 의해 우리가 구별됩니다. 교회라는 장소에 들어와 있어서 우리가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구별된 시간을 드리기에 예배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삶에서 그

시간의 구별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물질은 주어진 것이 모두 다르기에 드릴 수 있는 헌신도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물질보다 조금 더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시간입니다. 물론 이것도 환경마다 당연히 차이가 있겠으나, 그래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중, 내가 그 쓰임을 선택할 수 있는 부분들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잘 보여주지 않을까요? 저도

열심히 ‘시간을 내어’ 사랑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예배와 그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 외에도, 심방도 하고, 상담도 하고, 양육도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고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간을 내어 교회에 와서 섬기는 분들의 수고를 평일에도 주말에도 지켜볼 때가 있습니다. 저는 스쳐 지나가듯 보지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그 시간들은 그분의 눈앞에 쌓이고 있을 것입니다. 민수기 30장은

개인이 하는 서원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길을 가게 된 것도 6학년 때 한 부흥회에서 서원한 영향이 큽니다. 그런데 성경의 재미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지만, 책임을 면제받는 서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계적이지 않으세요. 아주 디테일한 분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하기 전의 딸이 혼자 서원을 했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동의하지 않고 말리면 서원이 취소됩니다. 저희 부모님은 저를 안 말리셨습니다. 또 다른 예외로, 결혼 후에도

남편이 아내의 서원을 바로 말리면 무효가 되지만, 시간이 지난 후 파기하면 그 파기의 죄를 남편이 책임지게 됩니다. 이런 디테일한 규정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안에 질서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보고 싶은 이야기는 요단 동편 지파들에 대한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가야 하는데,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요단강을 건너기를 거부하고 요단 동편 땅에 남겠다고 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민 3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는

가축 떼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들이 야스엘 땅과 길르앗 땅을 둘러보니, 가축 떼를 놓아 먹이기에는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민 32:4) 주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 앞에서 정복하신 땅으로서, 가축 떼가 많은 우리에게는 목축하기에 알맞은 곳입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갑자기 2지파가 가나안 땅이 아닌 다른 땅에 거주하겠다니 매우 충격적이죠. 거기다가 이유가 땅이 비옥해서라고 하니, 하나님보다 땅을 더 의지하려는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 대신 편안하게 땅을 차지하려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1세대의 잘못된 판단을 거론하며,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 것을 권합니다. 그러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도 자신들의 생각을 조금 바꿔서 이런 의견을 제안합니다. 요단 동편에 성을 쌓은 후, 어린아이와 아내들은 그곳에 남겨두고, 자신들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선봉에 서서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지파가 가나안 땅에 약속된 기업을 차지할

때까지, 자신들도 함께 싸우며 요단 동편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재산으로 상속받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들은 약속대로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는 동안 다른 형제들보다 앞장서는 선발대로 활약했고, 약 6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자기 땅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큰 갈등이 생길 뻔한 사건에서, 이들은 대화와 소통, 그리고 양보와 희생을 통해서 갈등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출애굽 1세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은 2세대의 달라진

면모입니다. 민수기 마지막 부분은 출애굽 40년의 여정을 정리하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35장에는 도피성에 대한 명령이 주어집니다. 민수기의 마지막인 36장은 슬로브핫 딸들과의 약속이 다시 나오므로 도피성 이야기가 가장 마지막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레위 지파가 열두 지파의 땅에서 받게 되는 48개의 성읍 중에서,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각각 3개씩 총 6개의 성읍을 도피성으로 부릅니다. 그럼 도피성의 목적은 무엇인가?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죄를 지은 자가 피의 복수자로부터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피할 수 있는 피난처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살인이 벌어지면, 살해당한 자의 가까운 친족(고엘)이 죽은 자의 복수를 할 권리가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을 ‘피의 보복자’라고 부릅니다. 즉, 이 복수의 칼날에서 보호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부지중이란 비고의적 죄를 의미합니다. 민수기에는 이렇게 3가지 경우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1) 무심코 사람을 밀쳐서 죽임, 2) 무심코 물건을 던져서 죽임,

3) 무심코 돌을 굴려서 죽임. 이 3가지 경우에 조사 결과 진짜 고의성이 없다면, 도피성에 가서 보호를 받으며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습니다. 죽인 사람이 도피성으로 향합니다. 도피성 성문 입구에서 도피성 장로들이 판결하는데, 만약 고의로 살인한 자가 올 경우는 즉각 체포하여 뒤따라오는 ‘피의 보복자’에게 넘겨줍니다. 그러나 비고의적인 사건일 경우에는 그를 도피성 안으로 받아들여서 거처를 마련해 줍니다. 끝이 아닙니다. 그 후에

비고의적 살인을 주장하는 자는 고향 땅의 성읍에 되돌아가, ‘피의 보복자’와 함께 서서 회중 재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도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것으로 판단이 되면, 그는 다시 도피성에 사는 것이 확정됩니다. 그에게 완전한 자유는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주어집니다. 그때가 되면 완전히 사면된 것으로 여겨,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세워진 도피성 여섯 개는 지역마다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어디서든 이곳으로 피신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이 도피성의 혜택은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그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고대 국가들은 피의 복수가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또 서로를 죽이는 세상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고대의 국가들은 생명을 죽인 대가로 ‘돈’을 지불하고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살인에 대해서는 고의든 실수든 ‘돈’을 내고 무죄가 되는 경우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보복과 복수가 무차별적으로 허용되지도 않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피성에 담긴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정의를 고민하고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우리는 민수기에서는 ‘고의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김을 다시 보게 됩니다. 행동의 결과보다 내면의 동기가 하나님께는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마음을 정확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고의’의

정의는 ‘일부러 하는 생각이나 태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렇게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예배도 ‘고의’ 였으면 좋겠습니다. 즉, 마음을 담아서 하는 행위였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랑도 ‘고의’ 였으면 좋겠습니다.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마음을 드려서 행하는 일이기를 바랍니다. 그럴만 해서가 아니라, 그럴만 하지 않은 순간에, 이 마음은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고의’로 행하는 죄악을 싫어하시고, 여러분이 ‘고의’로 행하는 순종을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민 36:13) 이것은 주님께서 여리고 건너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신 명령과 규례이다. 민수기의 마지막 절입니다.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시켜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오늘 이 예배 안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저를 시켜서, 또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 예배 안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흩어진 삶에서 누군가에게는 예배를 세우는 레위 족속이요, 누군가에게는 위로하고 품는 도피성이 되어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