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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이고 신학적인 3가지 질문" / 강정규 목사

2023-05-07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어느덧 민수기 7번째 설교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던 일들을 키워드로 정리해보면, 출애굽 – 홍해 – 시내산 언약 – 인구조사 – 가데스 바네아 – 정탐꾼 – 보고 – 원망과 불평 – 하나님의 심판 – 40년 광야 생활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 또한 40년 광야 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민수기는 아주 오래전 삶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메시지가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민수기 내용 중, 우리가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질문을 3가지 던져보려 합니다. 그리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것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고, 그 질문을 통해서 성경을 더 깊이 있게 살펴볼 때, 우리는 말씀의 진리 안에 한 걸음 더 깊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출애굽 1세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광야에서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의 죄는 용서받지 못한 것일까요? 그래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1. 죄에는 차이가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는 죄일 뿐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죄도 특성이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교리적이거나, 교파적인 차이가 아니라, 성경에서, 아니 적어도 우리가 보고 있는 민수기 본문을 중심으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저는 죄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설교들을 통해서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출애굽기에도 광야 생활이 나옵니다. 애굽에서 나온 직후, 광야 생활이 시작되자마자 이들은 먹을 것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이 출애굽기의 이 불평에 대해서는, 해결해주시는 은혜를 무조건 베푸셨습니다. 이때의 불평은 문제 삼지 않아요. 출애굽기 17장에서 물이 없어서 르비딤에서 불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도 하나님이 바위에서 물을 내어주시는 은혜를 주실 뿐입니다. 그러나 민수기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다루시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때는 영적으로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요. 그러나 민수기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 사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배우고,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잘못을 하더라도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대하시는 방식이 다릅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이것이 죄의 2가지 속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고의적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범하는 죄입니다. 꼭 그런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 실수, 불가항력 등의 죄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의 죄는 이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고의적으로 저지르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희생 제사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속죄의 방식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도 심판의 조건이

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따른다면 비고의적인 죄는 해결이 가능합니다. 둘째, 고의적인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즉, 작심하고 짓는 죄,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 시내산 언약을 맺습니다. 그들이 공식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하신 일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셨기에 주시는 것입니다. (민 13:2)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불평하고 반역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하여, 출애굽기 때와는 다른 죄로 간주합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면서 반항하는 것입니다. (민 15:30)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즉, 이스라엘이 민수기에서 저지르는 죄는 ‘고의적인 죄’입니다. 몸에 배어 있는 습관적인 죄가 있죠. 이들에게 언약식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율법’이 주어집니다. 이제 이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요. 이제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뻔히 싫어함을 알면서도 짓는 죄, 엄히 다루십니다. 여러분. 어찌 보면,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약함’과 ‘악함’ 사이에 서 있습니다. 처음에는

‘약함’의 영역에 있어요. 그때 하나님은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기다려주십니다. 그러나 그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기다렸는데도 달라지지 않으면, 그때는 약함이 아닌 악함의 문제로 여기십니다. 특별히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깨달음, 회심의 경험과 간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것이 반복될 때, 하나님은 엄히 다루십니다. 여러분, 누구나 우리는 잘못할 수 있어요. 죄를 짓기도 하고 용서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죄와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로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걸맞게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잖아요. 인간 사냥꾼이었다고요. 잡혀가면 고난도 당하고 심하면 죽게 되는 위협이 있죠. 또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돌 던지는 사람들 옷을 들어주고 있었던 사람이 바울이었다고요. 그런데 어쨌든, 그가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기 이전, 바울의 회심 이전의 그 모습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사도로서 사역하는 중에 변심하여 그런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그것도 용서하여 주실까요? 물론 회개의 기회는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 죄에 대해서 책임도 묻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이죠. 다윗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맛본 이후에, 밧세바 사건을 저지릅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용서는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서 다윗에게서 책임도 물으시죠. 그리고 다윗의 삶은 밧세바 사건 이후로 영적으로나, 맡겨진 사명의 내용으로

볼 때, 분명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면서도, 경험했으면서도 반복되는 죄, 고의로 짓는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민수기 속 이스라엘의 실패는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우리 신자들이 더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38년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광야 생활 말미에 다시 물에 대한 불평이 이어집니다. 민수기 20장 사건이죠. 이번에도 그들의 특기인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참, 이스라엘

백성도 지독하게 자라지 않습니다. 1세대의 실패의 원인은 그들의 돌 같은 마음에도 분명히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사람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 앞에 따라가면 모두 변합니다. 속도가 느려도 변해요. 안 변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주인 됨이 실상 없는 것입니다. 말로만 있는 경우죠. 그래서 변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실상 마음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대적하는 상태에 있는 경우입니다. 하나님께 지기 싫은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바로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죠. 열 재앙 속에도 그는 하나님에게 지기 싫어서 완고한 마음을 꺾지 않았습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바로의 완고함은 마치 출애굽 1세대의 현 모습과 같습니다. 민수기의 중요한 포인트가 이것이죠.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의 진짜 적은 누구인가? 가나안 원주민인가? 답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자신입니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적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이 항상 눈앞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 광야의 빈약한 환경조건 등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저것들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틀렸죠. 어쩌면 여러분 중에서도, 끊임없이 외부에 있는 환경, 사람들을 보며, ‘저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야, 우리 신앙의 문제야’ 말하고, 저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정확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에서 주는 하나님의 답은 그 사람이나, 그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진짜로 믿고 따르면, 그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신다고 약속하셔요. 그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게 하셔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것을 믿었잖아요. 하나님을 그들은 신뢰했어요. 이스라엘의 진짜 문제는 사실 그들 내부에 있는 것이죠. 그들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적은 이스라엘입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그 책임을 돌릴 대상을 찾아서 남 탓하고, 희생양 하나를 만들어내서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는 악함. 그것이

민수기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죄입니다. 죄를 정말 이기려면, 자신을 보셔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약함이 악함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봅시다. 두 번째 질문은 20장의 므리바 사건 속에 있습니다. 광야에서 마실 물이 떨어졌고,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비방하려고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지팡이를 잡아라. 너와 너의

형 아론은 회중을 불러 모아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에게 명령하여라. 그러면 그 바위가 그 속에 있는 물을 밖으로 흘릴 것이다. 너는 바위에서 물을 내어, 회중과 그들의 가축 떼가 마시게 하여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들에게 물을 내어주시고자 합니다. 변함없으신 은혜이죠. 하나님은 어쩌면 여전히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성경을 잘 보십시오.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민 20: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첫째, 그의 말이 문제였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둘째,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위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라, 바위를 두 번 칩니다. 혈기이죠. 자, 분명히

잘못했죠.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우리를 당혹게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이것입니다. (민 20:12)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총회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신명기 마지막에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지만, 그 땅을 허락받지 못합니다. 그때도 말씀하시는 이유는 ‘므리바 사건’입니다. 2.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잘못을 했는가? 모세가 잘못한 것은 2가지 부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의 문제와 행동의 문제였죠.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큰일인가? 지금까지 모세가 보여왔던 충성된 모습과 ‘가나안 땅’이 가진 신학적 의미를 보자면, 므리바 사건으로 인해 내려진 하나님의 결정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결정이기에 우리가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왜 하나님이 이런 결정을 내리셨을까?’ 이것이죠. 우선

모세가 감정적으로 혈기를 부린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명령만 하면 될 것을 두 번 친 것도 다 혈기죠. 그러나 이 일의 핵심은 감정적으로 행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부분은 이 말입니다. “우리가 물을 내랴?” (시 106:32) 그들이 또 므리바 물 가에서 주님을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이 일로 모세까지 화를 입었으니, (시 106:33) 그들이 모세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모세가 망령되이 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1세대의 실패와 가나안

땅을 밟게 된 여호수아와 갈렙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입니다. ‘자기 생각이냐, 하나님의 생각이냐.’ 1세대의 모습을 다른 말로 ‘불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런데 모세의 모습에 1세대의 그 모습이 비친 것입니다. 물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십니다. 모세가 기분이 나쁘든, 기분이 좋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면 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여호와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지켜주신 그 지팡이를 들고, 모세가 하는 말이 ‘우리가 너희를 위해서 물을 내랴?’였습니다. 이것이 시편이 지적하는 모세의 잘못, 망령된 말입니다. 우리가 계속 민수기를 보면서 공동체를 깨는 위험 요소, 실패의 원인을 말했습니다. 백성들의 잘못은 잘못대로, 지도자의 잘못은 잘못대로 다루시는데, 특별히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동참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임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민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이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앞서 민수기 14장 정탐꾼 사건에서 1세대에게 하셨던 표현과 같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1세대의 잘못을 동일하게 행한 것입니다. 1세대의 실패를 반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일을 다루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모세가 바위를 내리치려고 ‘팔을 높이 들었다’라는 표현은 민수기 15장에서 ‘고의로’라고 번역된 표현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행위가 ‘고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이죠. 민수기에서 그토록 경고하는 죄, 고의적 죄입니다. 이것은 엄하게 다뤄집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깊이 경험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 책임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모습처럼 책임을 지도록 하신 것이죠. 그러나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혈기 한번 부린 것인데, 이것을 과하게 다루신 이유가 있다면, 무엇보다 모세가 1세대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1세대의 잘못을 반복한 그는 1세대와 같이 광야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통해 모세는 1세대를 책임지며,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 동안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출애굽 2세대와 함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고백한 ‘여호수아와 갈렙’이 됩니다. 그리고 20장 후반부에는 이스라엘이 에돔 땅을 통과하여 약속의 땅에 가려다가 거절당하는 장면과 아론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20장 1절에서 이미 미리암의 죽음을 기록했고, 20장 끝 절에서는 아론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죠. 그 사이에 모세가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결정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20장은 본격적인 광야의 세대교체를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론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백성이 일반적인 7일의 애곡보다 훨씬 긴 30일 동안 애곡했다는 것은, 그가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삶을 마무리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아론이 광야에서 죽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에 신실하신 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끝으로 세 번째 질문은 던져보겠습니다. 이어지는 민수기 21장의 내용을 통해서 던져보고자

합니다. 에돔의 거절로 인해서 먼 길을 우회하여 가게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또다시 불평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앞서 므리바 사건에서는 적어도 하나님이 백성들의 불평에 대해서는 참아주셨거든요. 오히려 그 일로 모세와 아론만 심판을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실 원인 제공은 백성들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백성들이 또다시 불평하는 것입니다. 제가 민수기 강해를 하면서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불평은 습관입니다. 그래서 레퍼토리가 비슷해요.

‘먹을 것, 마실 것, 애굽 선망, 모세 원망.’ 이 4가지 레퍼토리가 또 시작됩니다. 아직도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최대의 장애물이 자신들의 태도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광야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가만히 살펴보면, 늘 같은 것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내게 습관적으로 나오는 어떤 죄의 모습, 늘 반복되는 나의 안 좋은 습관이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우리 대부분 자신의 약함을 알아요. 내 문제가 뭔지, 내가

무엇에 약한지 압니다. 문제는 사탄도 여러분의 약점을 잘 알아요. 그래서 조심해야 해요. 만약 말씀을 통해 깨달았으면, 이제 그것을 주님과 함께 넘어서 보십시오. 그래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1장은 이 불평 사건을 기록하기 전에 시작 부분에서 가나안 족속과 전투를 벌인 장면을 기록합니다. 그때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께 믿음을 보이며 서약합니다. (민 21:2) 그 때에 이스라엘이 주님께 다음과 같은 말로 서약하였다. "주님께서 이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면, 우리는 그들의 성읍들을 전멸시키겠습니다." (민 21:3)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시니, 이스라엘이 그들과 그들의 성읍들을 전멸시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호르마’는 38년 전 정탐꾼 사건 당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을 때, 불복하고 올라갔다가 패배하여 도망친 곳입니다. 호르마.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에 대한 믿음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 바로 직후에, 이번에는 늘 넘어지던 그 문제에 대해 다시금 불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죄에 대하여 불 뱀을 보내어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심판만 하시지는 않으시고, 심판 속에서 구원의 은혜를 함께 주십니다. (민 21: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민 21:8)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민 21: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3. 구원은 하나님의 결정인가, 우리 행동의 결과인가? 이 질문은 제가 사귐의교회를 목회하면서 참 많이

받은 것입니다. 참 많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계속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장로교 계통, 칼빈주의 전통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이야기를 깊이 새긴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하나님의 전지적 시점에서 이 이야기는 맞고,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의 이해 시점에서 이 이야기는 맞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성경은 특별히 교리적 차원에서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면, 우리의 시선에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시선에서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측면이 상당히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결정입니까? 우리 행동의 결과입니까? 한번 마음속으로 답을 해보십시오. 이어서 다음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결정이라면, 구원을 받지 못한 자로 정해진 사람이 놋 뱀을 봤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 사람은 구원받지 않기로 결정되어 있으니 놋 뱀을 쳐다봐도 그 사람은 죽게 될까요? 그 사람에게는 놋 뱀이 안 보이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까요? 반대로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결정한 사람이 놋 뱀을 안 쳐다보면, 그래도 사나요? 여러분, 이것은 상식입니다. 성경을 보면, 놋 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고, 그 행위대로 결정됩니다. 적어도 민수기 본문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행위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본다면, 이런 말씀들은 다 무시하고 넘어갈 것인가요? 만약 쳐다봤는데 구원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분명히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살 기회를 주시지만, 그 앞에 보인 이들의 반응에 따라 갈렸어요. 이들의 행동이 결과를 결정했습니다. 구원의 은혜라는 측면에서 보면, 출애굽 1세대는 열 재앙 심판, 홍해 등에서 구원을 경험한 세대이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세대이며, 원래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앙으로 실패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장로교, 성결교, 칼빈, 웨슬리, 이런 것이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진리는 성경입니다. 교리가 성경을 앞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 너무 강하면, 성경을 보면서도 외면할 수 있어요. 성경을 통해서 답을 찾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으로도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번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이미 결정되었으니까 괜찮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은 무엇입니까? 언약 백성으로 선택받았음에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 백성에서 탈락합니다. (창 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신 1: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여러분, 믿는 것은 곧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는 순종은 안 해도, 예수님을 믿으니까 괜찮아”라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를 구원자로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나의 왕이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언약 관계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 하는 약속이 있는 상태입니다. 서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언약은 깨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인도하시고, 그들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사랑과 충성과 순종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하지 않았어요. 언약 이행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언약적 관계가 깨어집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후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불신앙과 불순종의 모습으로 살면 구원으로부터 탈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불신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불순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우리를 조작하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우리를 조작하거나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말씀들은 사탄의 참소 앞에, 우리가 흔들리고 나약해질

때,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믿음의 삶을 견지하도록 하는 말씀들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간구하시고 진리로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도 없이 그저 구원에 대해 자만하고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면, 그 신앙은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말하자면, 회심하는 것이 새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언약에 대한 서로의 신실함이

중요합니다. 자기중심성이 아닌, 하나님 중심된 삶을 결단하고 살다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주인 되면요? 끝까지 그렇게 다른 것을 우선하며 살다 죽으면요?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지 않도록 돕고, 깨닫게 하고, 돌이키도록 일하시지만, 결국 끝내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적 시선에서만 가능한 표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시작과 끝을 모두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의 구원을 원하시기에,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고 심판하시지 않아요. 그보다 내 마음의 방향, 내가 의지하는 방향을 보시고, 진실한 마음을 우리의 최선으로 받아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도의 견인’ 교리를 오해합니다. 성도를 구원에 이르기까지 이끄신다는 교리인데, 여기서 ‘견인’을 견인차의 ‘견인’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견인차가 고장 난 차를 끌고 가듯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견인차의 견인(牽引)은 ‘이끌 견’, ‘당길 인’을 씁니다.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에서 견인(堅忍)은 ‘굳을 견’, ‘참을 인’입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내하며 기다리세요. 깨닫게 하십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도와주세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어떻든지, 무조건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순종하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순종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적어도 저는 이 말씀을 다 무시한 채 구원의 확신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당연히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민수기의 놋 뱀 사건도, 애초에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가 없으면, 놋 뱀을 바라보고 살 기회조차 없는 것입니다. 놋 뱀을 주시는 결정, 그 은혜를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 우리는 ‘저것을 보면 살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갖고 쳐다보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반응, 믿음의 행위이죠.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행위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결정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애초에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우리는 표현함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은혜에 반응하는 것과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아무리 놋 뱀을 만들어줘도 그것을 믿지 않고 쳐다보지 않는 사람은 죽는 것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의 구원은 은혜에 의하여 시작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선물을 믿음에 적용해서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해서, 나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갑자기 내 안에 ‘믿음’을 넣어주신다고 생각하면 성경을 오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기계로 만들지 않으셨어요. 인격은 우리를

존중하신 하나님께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분이 주시지 않으면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손을 내밀어주셨어요. 그것에 대한 받아들임, 그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선물을 주셔도 받지 않으면 우리 것이 아닙니다. 언약으로 초청해주신 분을 향한 우리의 충성, 우리의 순종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예수님은 민수기의 놋 뱀을 자신에게 비유하십니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놋 뱀을 믿음으로 바라본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충성하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보면, 늘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의

반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앞에서 우리도 신실한가? 헬라어 피스티스는 지적인 믿음이 아닌 ‘신실함’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우리도 신실함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약속 안에 머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주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과 열망을 갖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죠. 그러나 그 은혜가 주어졌다고

하여도, 그 은혜 앞에서 주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 신실한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그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는 자가 되어주십시오. 약함을 핑계 삼고 악함에 머무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내 삶이 하나님 안에 속한 삶으로 살아서 주님의 평안에 힘입어 살 것인가, 세상에 속한 삶을 살아서 근심하며 살 것인가? 사실 간단합니다. ‘근심 환(患)’은 ‘가운데 중’이 두 번 ‘마음 심’ 위에 놓여있습니다.

여러 가지 중심을 마음에 두고 있으면 근심이죠. 반면, 내 안에 중심 하나가 마음에 자리 잡게 될 때, 그 단어는 ‘충성 충(忠)’이 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여러 가지 것들이 가득하면 언제나 근심합니다. 예배드리면서도 근심하고, 예배 후에도 근심합니다. 아직도 싸우기 때문이에요. 내 마음과 하나님 마음, 세상의 여러 가지 가르침과 말씀이 함께 있으면 근심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오직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지혜, 말씀이 머물 때, 내가 오직 그것을 구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내 인생의 주도권을 넘겨줄 때, 그 충성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봅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를 받는 것이니까요. 그 나라의 백성이 되면, 그 나라의 보호를 받고, 그 나라의 백성에게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듣고 깨닫고 따라가서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 회복의 삶,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