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11번째 설교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다뤘던 10편의 내용을 큰 틀에서 한번 정리하며 그 핵심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 혹은 ‘하나님 나라 관점’이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성경의 씨줄이자 성경을 이해하는 세계관입니다. 기독교인의 진리의 기초인 성경을 총체적으로 관통하는 렌즈로서 이야기 되는 관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성경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구약은 오실 메시아,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관점으로 읽는 것이 대표적이 방식입니다. 보통 이 부분이 구속사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혹은 ‘언약 신학’으로 성경 전체를 보는 방식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성전 신학’으로 전체를 조망하는 것도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포괄적이고, 좋은 렌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저의 신앙과 삶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그전까지 제 신앙에 결핍된 부분이나, 오해 속에 빠져있던 부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나라 신학을 나누는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신학은 발전되고 보완됩니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듣게 되는 첫 번째 메시지는 ‘구원’이야기입니다. 자연스럽게 성경을 ‘구속사 관점’으로 배우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신앙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도 구호로 풀어낸 것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구속사는 중요하고, 하나님 나라
신학 안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매우 중요하지만, 구속사적 관점으로 신앙을 이해할 경우, 해결되지 않는 몇 가지 질문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매우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질문이죠.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가?’,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사는가?’ 신앙생활의 목표가 구원이 되면, 자연스럽게 ‘구원의 확신’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구원을 확신을 갖게 되면, 그 이후로 우리의 신앙은 목표를 잃어버립니다. 이미
달성했기 때문이죠. 신앙을 단순히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게 되니, 그리고 그 구원을 이미 얻었으니, 구원에 머무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예배하고 헌금하고 헌신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봅니다. 이런 신학적 사고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반대급부로 구원받았다고 믿는 자들의 동기부여를 이끌어내고자 ‘상급론’과 같은 이상한 신학이 추가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구원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추가로
더 얻어야 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다시금 오해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됩니다. 또한 구원을 죽음 이후의 내세에 천국가는 것 정도로 이해하니, 교회에서 구원을 강조할수록 현재적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몇 번 나눴지만, 저도 그 심각한 고민 속에 빠져 있었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진리인가? 이것이 복음인가? 저는 복음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삶을 일정부분 망가뜨린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이런 오해들이 성도님들에게 있는 경우를 봅니다. 첫째, 구원을 죽음 이후에 천국 가는 티켓 쯤으로 보는 오해. 둘째, 구원을 완료형으로만 이해하여 한번 받으면 끝인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 셋째, 천국이 내세에 가게 되는 어떤 장소로 여기는 오해. 이런 오해는 성경을 꼼꼼히 보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런 오해를 반박하는 구절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님이 코끼리 한부분만을 만진 후, 그것이 코끼리라는 인식 속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이, 일부분에 대한 이야기만을 듣고, 거기에 관련된 구절만 선택적으로 읽다보니 성경이 말해주는 구원, 천국,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말합니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구원의 확신도 그렇습니다. 이미 받았다고 말하는 과거형도 있지만, 받고 있는 중이라고
현재형으로 말하기도 하고, 받도록 힘쓰라고 미래형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처럼, 구원도 ‘이미와 아직’입니다. 삼중시제(과거-현재-미래)를 말합니다. 그리고 천국은 어디에 들어가는 장소적 개념이 아닌 관계적/통치적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히 내가 구원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한 주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에 있으며, 그 비전이 우리의 비전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함께 그것을 해나가자고 말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지난 10편의 설교를 통해서 이런 오해들을 정리해왔습니다. 아직 이해가 안된 부분이 있으면 듣고 또 들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 와서 물으십시오. 설명해달라고 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휴거’, ‘종말’ 등 다양한 부분에서 선입관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면 진짜 그 말씀이 있는지 찾아보고, 그 말씀이 진짜 그런 의미인지 찾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믿으셔야 합니다. 적어도 제가 연구하고, 믿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 우리가 영만 둥둥 떠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오는 것,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다루지 않고 남겨두고 있습니다. 일단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적어도 3가지 공부는 필수적입니다. 역사적 배경, 문화적 배경, 지리적 배경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이해하기에
앞서, 성경의 첫 번째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신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문화권, 다른 시대, 다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공부하지 않으면 사실상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되는데, 그러면 성경의 진리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위해 ‘어원’부터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기초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천국(하늘나라)은 우리가 조선
시대 왕을 ‘용’에 대체하여 불렀던 것처럼 ‘완곡어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부르지 않기 위해 ‘하늘’에 빗대어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 나라’를 대체하여 사용하는 용법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에서만 주로 사용합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은 ‘하늘나라’라고 하면 공중을 생각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런 사고의 틀이 없으니, ‘하늘나라’를 구름 위에 있는 어떤 장소, 공중에 있는 어떤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용안’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왕의 얼굴’ 대신 진짜 ‘용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라’에 대한 오해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를 의미하는 단어 ‘바실레이아’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적 개념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 보다, 내가 누구의 통치 아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주권’의 문제라는 것이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꾸 하나님 나라를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입니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성경의 세계관, 성경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오독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내가 읽고 마음이 좋은 것에 밑줄 긋고 외우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렇게 보는 것은 분명 어느 순간에는 방해가 될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의 역할 속에 크게 보면 2가지 키워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목양자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교사입니다. 제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분에게 성경을 잘
나누어 성경을 따라 살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이 우리에게 잘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정리할 뿐이죠. 하나님 나라 시리즈의 첫 설교 제목이 <하나님 나라의 설계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죠. 그 설계도는 창세기에 나오고, 그 완성은 계시록에 나옵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 나라 인클루지오’입니다. 인클루지오는 그 안에 있는 이야기의 핵심이 처음과 마지막에 요약되어 있다는 문학적
구조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 나라 이야기임을 성경 자체가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왜 사실상 현세계와 무관한 에덴을 보여주겠습니까? 그 설계도를 이해해야 우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목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 원형인 ‘에덴’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계. 그 안에서 죄가 없던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했고, 그 관계 안에서 무엇을 추구하셨는지, 그런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미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지음 받았는지, 어떤 사명이 있는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풍삶초로 양육을 합니다. 풍삶초는 하나님 나라 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양육교재입니다. 그곳에서 다루는 ‘풍성한 삶’이 바로 하나님이 원래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삶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린 후의 세상을 사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회복할 미래를 꿈꾸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삶을 누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중심된 삶’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나의 주권자, 나의 주인, 나의 왕으로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충성’입니다. 신실함이죠. 인간에게 찾아온 첫 유혹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너의 나라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너도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질서를 깨고, 하나님과 동동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분의 일부로서, 세상을 돌보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며, 세상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반역으로 인간 자체가 깨어진 존재가 되었고, 우리에게 주신 세상도 그 질서가 깨어지고,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깨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존재로 살게 되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러면서 말해주는 것이죠. “그러나 원래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 이 사실이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의 삶에서 겪는 것이 최선이고 전부라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통치적 개념입니다. 우리가 어떤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서 구원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며 실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땅에서 살지만,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내가 주인 된 삶이 아닌, 다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어디에 머무는지, 내가 어떤 피부색을 가진 사람인지, 이런 요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 자녀가 됨, 입양됨, 구속하심, 영생, 죄 사함, 거듭남, 그리스도 안에 속함, 그리스도와 연합됨, 하나님과 화해함,
구원 등.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다시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표현들입니다. 사실상 모든 것이 같은 개념입니다.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께 속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변화, 관계적 개념으로 천국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가진 깊은 오해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치 구원의 확신을 천국행 티켓쯤으로 여기는 깊은 오해 말입니다. 그래서 확신할수록 나는 이미 티켓 받았으니, 내 삶에 대해서 더욱 불성실해지는
그 신앙의 지독한 죄성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만들어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금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것이 ‘관계적’, 즉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충성은 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 곧 구원은 현재성과 미래성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나 균형을 잃어버린 잘못된 예정론에 빠져 있으면, 우리는 구원이 이미 끝나버린 사건처럼 표현해버립니다. 구원이 하나님에게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전지적 관점에서 한 이야기를,
모든 것이 우리의 자유의지나 우리의 신실함과 관계없이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처럼 여기는 것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어차피 이미 게임이 다 끝난 것이니까요. 전도도 필요 없고, 예배도 필요 없게 됩니다. 이것이 예정론을 잘못 배운 크나큰 오해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은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결정하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그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발휘할 기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가? 아닙니다. 믿음은 곧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신실함에 대한 것입니다. 나는 그분 앞에 신실함을 갖고, 그분의 일하심에 동참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회심했다고 하여도, 만약 그 충성을 버리고 다른 것에 충성한다면, 즉 변심한다면 여러분이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주인 삼은 것은 ‘영적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언약 관계라는 것이 부부에 비유된다면,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멀어지게 되고, ‘영적 간음’ 상태가 지속된다면,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이 내 삶에서 계속 고백 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되었음을 믿으며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음을 신뢰하며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깨어진
세상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삶에 회복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 나라를 주는 것에 있다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행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께 사명을 받아서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의 사역 또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잘 보면, 바울은 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쳤고, 특별히 사도행전 마지막 로마의 감옥에서도 그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즉,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하나님 나라를 전한 이야기를 1장 첫 단락에, 바울이 삶의 마지막까지 하나님 나라를 전한 이야기를 28장 마지막
단락에 배치함으로 사도행전 전체가 인클루지오로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를 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그 나라를 나눠주셨습니다. 이제 그 안에서 회복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전하며 깨어진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여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회복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경이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책인데, 답은 당연히 성경에 있습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깨어진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회복의 대상으로 이사야서 61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모두 ‘가난한 자’가 그
초청의 대상으로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에 반응할 수 있는 대상은 ‘가난한 자’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을 지배하는 세상 나라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세상 가치를 따라서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주 살펴본 ‘부자의 실패’는 이 이야기의 정석과 같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을 얼마 버는가? 가진 재산이 어느 정도인가?
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는 ‘무엇으로 사나? 무엇을 위해 사나?’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가난함 속에 무엇을 의지하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세상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함’이란 큰 의미에서 ‘결핍’을 말합니다. 이것이 물질적으로 보자면 가난이고, 관계적으로 보자면 소외됨이고, 정서적으로 보자면 공허함입니다.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결핍이 깨어진 세상의 부산물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진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이 복음 선포의 대상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반응’입니다. 가난해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세상의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소외됨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사람이나, 공허함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이것은 모든 세상적 가치를 따라가지 않고, 그와 역행하는 복음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기본적으로
부유한 자는 아예 배제되고 있는데, 부유한 자는 복음 선포 자체를 듣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가득 차 있는 상태가 ‘부유한 자’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돈’의 이야기로 이것을 설명합니다. 물질만능주의라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가장 라이벌이 되는 것이 돈입니다. 돈과 하나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것이 실제로 충성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구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선택은 두말할 것도 없죠. 돈이죠. 그래서 그 선택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간주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는 것은 당당히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이것은 모든 결핍을 ‘가난’으로 대표하여 설명하기에 ‘돈’의 문제로 대표하여 설명하는 것일 뿐, 다른 것이 우선시 되는 삶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사람이 하나님과 라이벌이 됩니다. 그것이 연인이든, 자녀이든, 혹은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이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관계중독, 일 중독, 인기에 집착하는 사람,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 이들은 모두 돈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상이 다를 뿐이죠. 실상은 같습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이 아니고, 자신의 삶의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는 모습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에게 복음은 예수님이 아니죠. 구약 성경은 이것이 실제적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에
대해서 언약하여 주시고, 약속의 땅에 하나님이 주인 된 나라, 제사장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언약 안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깨는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지 않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다뤄지는 문제가 하나님 말씀과 재물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시험대에 오릅니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자가 생겼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기억한다면,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서
가난한 자가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에게 있는 재물을 더 사랑하게 되면, 그 말씀을 따르지 못하거나 매우 소극적으로 하는 척만 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약속의 땅에서 겪게 되는 부와 가난의 문제, 그것이 어쩌면 제2의 선악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가, 어기는가?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면, 주어진 땅 안에 그 형제들의 어려움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실제적 순종이 진짜 하나님께 충성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일단 그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나서는 배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다른 우상도 함께 믿기 시작합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하나님도 믿으면서도 다른 여러 가지를 함께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최소한의 언약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예배’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은 매우 소극적으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너희의 찬양과 제사가 역겹다’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에게 도움을 청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착취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하나님께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생사여탈권을 하나님께 드린 상태. 절대적 가난과 전적 의존. 프토코스.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한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뜻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것처럼, 부와 성공을 탐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리셋하시죠. 그것은 이스라엘 모두를 ‘가난한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사랑의 회초리이죠. 이스라엘은 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 안에 부와 가난한 자가 평등해집니다. 모두 포로가 되었으니까요. 결국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야 그들은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프토코스가 되었기에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다시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탕자가 다른 것을 우선시하는 삶을 살다가, 가난한 자가 되고, 세상 사람들도 의지해보지만, 더욱 어려움에 빠져서, 마지막 생존을 위해 아버지께 돌아오기로 결정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걸고 고백하며 돌아온 자들을 하나님은 받아주십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죠. 자기중심성을 내어버리고, 하나님이 중심된 삶으로의 전환 말입니다. 의지하는
방향의 전환이죠. 우리는 왜 신약에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함께 시작된 회심공동체였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 공동체 안의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모습으로 그려지는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을 때만 나오는 실제적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행 4:32)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행 4: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행 4: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행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진짜 모두 가족이 되었기에 자신의 것, 남의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욕심 없는 모습은 자기중심성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된
삶, 성령이 주인 된 삶, 그 충성과 순종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의 주권,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권 포기, 소유권 포기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죠.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세상에서 조금 부한 자나, 세상에서 조금 가난한 자나,
모두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 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다른 방법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실제 모든 재산을 처분하라는 것으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실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청지기’로 살아가는 결단을 하는 것으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문제는 결단을 흔드는 여러 요소들입니다. 교회 안팎에 많습니다.
교회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세속화 되어서, 세상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말씀들도 타협해 왔던 성경해석의 흔적들을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 이야기로 설명해 드린 바 있습니다. 당연히 교회 밖에는 더욱 거센 세상의 가치가 여러분을 흔들 것입니다. 그 안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해답은, 진리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자신의 공허함을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외로움을 통해 결단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의 ‘결핍’은
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로 향하게 하는 통로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나라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다가가시고,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다는 마음은,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결함이 하나님을 찾는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물질이 내게 제공해주는 것과 하나님이 내게 제공해주는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안전하고 영원하고 행복을 주는가? 여러분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살살 꼬드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이 질문에 직면하게 만듭니다. 복음은 듣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 번째 나눈 설교가 그 선택에 대한 교훈입니다. 복음은 듣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응답은 삶의 결단입니다. 다 팔게 되더라도 따라갈 것인가? 당연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모태신앙의
문제는 이 고민을 본인이 하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이 하나님 안에 속해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수많은 세월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망대를 세우는 건축자 비유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활용하여 신중하게 이 결정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에 나가는 임금 비유를 통해 이 결정이 신속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선택의 시간이 항상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선택이 늦을수록 회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고, 그 나라를 선택한 사람은 회복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기 시작하고, 그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의 삶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의 심판을 계속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선명하게 이해한 사람일수록 깨어진 세상을 잘 이해합니다. 그때 비로소 새로운 삶을 위해 ‘결단’할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지금껏 다룬 하나님 나라 시리즈에 대한 요약과 정리입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나누는 것은 이것이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방식과 노력입니다. 진리 안에서 우리 함께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든 안 느끼든, 그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우리를 초청합니다. 복음은 그 나라가 이 땅에 와서, 깨어진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자유케 하고 풍성케 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 기쁜 소식을 나누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오늘 제가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다시금 나누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미 그 삶을 결단한 분들은 다시금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나아가시고, 아직 고민하고 계신 분들, 풍삶초로 보자면 ‘탐구’를 선택한 분들은, 이 말씀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또 주변의 형제자매를 통해서 도전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