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12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11번의 하나님 나라 설교를 나눴고, 하나님 나라 시리즈의 전반부를 끝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장 최근 설교는 큰 틀에서 전반부 하나님 나라 시리즈를 정리하는 설교를 나눴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것은 이런 주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 나라의 어원과 개념 하나님 나라의 설계도인 성경 (에덴 신학)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 (예수, 바울, ACTS 29) 하나님 나라로
구약 읽기 (언약 신학, 땅)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 (프토코스, 전적 의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방법 (다 팔아, 선택) 제가 2017년과 2019년에 하나님 나라 설교와 특강을 했을 때도 여기까지는 비슷한 흐름으로 다뤘습니다. 비슷하지만, 이번 하나님 나라 시리즈가 신학적, 신앙적, 목회적으로 가장 내용이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설명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2017년에 비하면 지난 6년 동안, 저는 신학적으로도 더 많은 공부를 했고,
신앙적으로도 여러 지체들과의 양육을 통해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이 크고, 목회적으로도 경험이 쌓이고, 공동체의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며 더욱 실제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더 보충해서 설명한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다룰 후반부는 더욱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11주 동안, ‘하나님 나라 이해 / 하나님 나라의 시작’,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나눴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큰 주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사명’에 대한 것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 중에서 저에게도 보다 깊어지고 넓어진 측면은, 이 후반부의 주제들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사명이라고 하면, ‘개인적 경건과 순종의 삶’에 대한 부분이 중요하다고 이해했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의를 쫓아 살아야 한다는 부분들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그것이 ‘시작점’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개인의 회복과 구원은 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개인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너무 좁은 의미의 회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정말로 하고 싶으신 일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씩 나누어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일,
하나님이 우리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가 몇 번 설명해 드렸다시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연구는 50년도 넘게 진행된 일입니다. 한국에 관련된 서적이 번역되어 소개된 것도 1980년대부터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조지 래드’가 쓴 <신약신학> 한국어 번역본 초판이 1984년입니다. 그 후, 17년이 지난 2001년이 되어 개정증보판 1쇄가 인쇄되었고, 18년이 지난 2019년에는 15쇄가 발행되었습니다. 즉, 1980년대부터 한국에도 소개되었지만,
2000년대를 넘어서 본격적으로 이 주제가 중요한 관심 속에 다뤄졌다는 것입니다. 2000년대 이후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신학적 연구와 이해는 큰 폭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톰 라이트’를 필두로 해서, 여러 국내와 국외의 학자들이 좋은 책을 통해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신학의 발전이 최근에 빠른 것은 당연합니다. 예전에는 학문적 연구도 사실 쉽지 않은 환경에 있었죠. 어떤 단어가 성경에 몇 번 등장하는지 찾으려면 과거에는 성경 전체를 읽어가며
그 단어가 있는지 분석해야 했습니다. 그 작업만 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죠. 지금은 몇 초에 끝나는 일입니다. 신학이 최근에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학문적 자료를 공유하기 쉬운 시대가 되었고, 그 논리에 대한 검증도 빠르고, 연구를 위한 작업 도구와 환경도 잘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회자로서 저는 그런 신학자들, 또한 선배 목사님들의 그러한 노력의 산물을 연구하고 이어받아 현장에서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최근에는 검증도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유행이 되다시피 한국 교계에 퍼져나가면서,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관점을 가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 나라’는 사회정의라는 측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 나라’라는 이름을 붙이고 활동하는 단체 중에도, 사회개혁 내지는 정의로운 세상 만들기를 실천하는 쪽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우리로 따지면 <풍삶초>에서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 해당하는
것들 말입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나 단체는, 개인의 구원과 회복은 건너뛰고, 공동체적 부르심도 건너뛰고, 무작정 세상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인 것처럼 이해하고 외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 누군가는 오해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다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주제를 꺼내면, 누군가는 굉장히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회정의나 사회운동을 한다고 저와 여러분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의 한 요소로서 세상에 관한 우리의 부르심이 있다고 믿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정의 일부이자 최종적 과제이죠. 반면, 제가 처음 이해하게 된 ‘하나님 나라’는 개인의 경건성과 신앙적 측면에 집중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뤄왔던 것도 분명 그런 부분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저는 그 부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삶, 제자도. 누가 대신해줄 수 없고 각 사람 안에 바르게 세워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본인의 삶에 하나님이 주인 된 진정한 회심과 회복이 일어나지 않으면, 개인이 먼저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비전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처음 신학교에서 하나님 나라를 배울 때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교회를 개척하고, 영혼들을 만나고, 세상과 부딪혀 살아가며 더욱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제 안에 있었던 인식이 확장되고 보완되고 수정되는 시간들을
저 또한 보냈습니다. 저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의 그림에서, 첫 단계는 개인의 회복입니다. 개인의 참된 회심, 회복이 없으면, 그 이상의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저는 불행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구원과 회복이 일어난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것으로 신앙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본다면 그것에는 반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풍삶초’는 우리의 사명에 대한 부분이 무엇인지 굉장히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정말 쉽게 잘 정리한 책입니다. 우리 성도들
대부분이 이해하다시피 그 책에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있을 뿐, 회복하면 누릴 수 있는 창조의 계획과 목적을 의미하죠. 4가지 관계에서의 풍성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누군가는 ‘사명’이라는 단어를 ‘과제’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일에 함께하는 것 자체가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라고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불러서 우리를 도구로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개인의 구원과 회복이 시작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그 삶은 곧 허무해집니다. 우리가 풍삶초를 할 때, 가장 중요한 행복의 2가지 조건이 ‘무조건적인 사랑’과 ‘삶의 의미와 목적’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개인의 구원이라면,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와 세상과 나눌 때, 하나님 나라는 더욱
풍성하고 행복해집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은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며, 내 삶이 의미 있게 사용되는 보람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만 받는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애쓰면서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행복까지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공동체적 차원에서 더욱 풍성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도 혼자 하나님과 사랑하는 것보다, 서로와 주고받을 때, 더욱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명들도 개인적 차원으로도 주어지지만, 주님은 교회라는 공동체에게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 그 일에 함께 헌신하길 기대하십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너희’입니다. ‘너희는 가서’,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자체가 점점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이 세상의 풍조와 역행하는 일입니다. 혼자서 조용히 편하게 신앙을 하고 싶은 이 시대의 모습과 역행합니다. 저는 역설적으로 그러하기에 하나님 나라 복음이 이 시대에 굉장히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개척 당시, 하나님 나라의 신학 위에 교회를 이루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때의 제 마음은 이런 측면이었습니다.
기존의 한국교회에 널리 퍼진 구원관에는 여러 오해가 섞여 있고, 특별히 사후 천국 중심의 구원관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동기부여가 생기지 않기에, 건강한 신앙을 가진 개인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 신학’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이상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복음’이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세대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지 않으면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심각한 위기입니다. 사실 사귐의교회에 속한 저와 여러분은 이 위기감에서 멀리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날마다 살아있음이 느껴지는 일들도 많고,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 아니 주님의 거룩한 우주적 교회 안에서 우리의 형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다른 교회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고민하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고민합니다. 지역마다 있는 보편적인 중대형 교회들이 왜 고민합니까? 개척교회는
어느 때나 생존을 고민하지만, 건물 있는 중대형 교회들은 10년 20년 후를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적 교회에는 60세 전후의 성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교회에는 젊은 세대의 비율이 정말 적습니다. 윗세대의 신앙과 젊은 세대의 신앙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같은 기독교 안에 있지만, 사실상 초점이 완전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윗세대의 신앙에 맞는 설교를 전하면, 젊은 세대가 못 버티고 떠납니다. 목회자들의
큰 고민거리입니다. 윗세대의 신앙의 초점과 지금 세대의 신앙의 초점에 세대 차이가 있음을 저도 느낍니다. 우리 윗세대까지만 해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대표되는 이야기가 전도 구호로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윗세대는 내세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소망함이 컸던 세대였어요. 지금 예수를 믿어서 내세에 영원한 천국 가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삶에서 헌신해서 내세의 영원함이 주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신앙생활을 했다고요. 그래서 그 구원이 얼마나 잘 유지되는가?
그것에 관심이 컸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세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보세요. ‘교회 나올래?’ ‘왜?’ ‘천국 가야지.’ ‘왜?’ ‘지옥 가면 안 되잖아.’ ‘가도 되는데? 어차피 죽은 다음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야. 귀찮아. 그냥 지옥 갈래.’ 지금 세대는 내세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세를 바꾸기 위해 현세를 희생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 복음을 전할 때, 그런 식으로 전하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복음의 전부면 타협할 수 없죠.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죽음 이후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가 아닙니다. 저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이 죽음 이후에 어디를 가느냐에 대한 초점도 있지만, 현재적 구원을 의미하는 측면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고 느껴요.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적 삶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신학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 이런 표현이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전통적인 교회 안에는 그런 이해가 거의 없습니다.
당연히 현재적 구원의 부분이 잘 전해지지 않습니다. 사실 저에게도 ‘하나님 나라 신학’을 만나며 회복된 구원은 바로 현재의 삶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은 자로서 더이상 이 땅에서의 삶이 무의미해 보이고 허무하게 느껴졌던 저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면서 회복된 것은 ‘현재적 삶의 의미’였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만약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죽어서 천국 가는 문제라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것처럼, 죽기 전에만 믿으면 되겠죠.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잃어버린 모든 삶이 이미 심판받고 있는 삶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그 삶을 떠나서 하나님께 나아와 생명을 누리는 것은 매우 소중하고 긴급한 문제라고 말해요. 이 세상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이 엄청난 손해라고요. ‘지옥, 심판’이라는 개념도 죽음 이후의 언어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의 깨어진 모든 삶이 사실상 이미 심판받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고, 그것에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삶에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론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을 회복시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이뤄진 일들을 보며 우리는 완성을 소망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 윗세대의 신앙인들에게 이것을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그들의 구원관은 이미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진리로 다져졌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그분들 세대 나름의 신앙적 색깔이 있으니 저는 인정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세대와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구원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갖고 계셔야 합니다. 복음을 사후 세계 이후의 문제로 다루는 복음은 저는 반쪽짜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므로, 죽음 이후에 어디 머물지를 바꿀 뿐, 현재 나의 삶은 그대로 살아야 한다면, 저는 그것이 진짜 우리에게 ‘복음’일까? 고민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현재 삶의 변화라는 것이, 내가 성공하고, 내가 바라는 것이 다 이뤄지고, 이런 인본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욱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에서부터 우리의 참된 회복이 일어난다고 저는 믿어요. 우리가 왜 ‘복음’이라고 부를까요? ‘기쁜 소식’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해볼게요. 지금 내 삶이 망가져 있어요. 외로워요. 우울합니다. 소망도 없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간다고 해요. 지금 삶은 그냥 포기하고, 그렇게 살고, 대신 나중을 기대하며 살라는 것을 ‘복음’으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계속 살펴봤듯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인생을 건 결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는 문제는 ‘다 파는 것’이잖아요. 내 모든 것을 걸고 하는 결단입니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왜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 다 팔 정도의 각오를 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주인을 바꿔야 하는지…. 그 가치를 우리가 먼저 확신하고 전하지 않으면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요? 복음을
잘 설명해주지 않으면, 복음을 결단할 수도 없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그 복음을 맛보며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을 바꾸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의 지식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복음을 아셔야 해요. 가짜 복음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온전한 복음은 힘이 있어요. 여러분도 설득되지 않는 복음을 여러분이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먼저 잘 알고, 누려야 해요. 하나님 나라는 이론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주시러 우리에게 오셨다고요. 그리고 그가 외치기 시작합니다. (막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아직 오지 않았고 미래에 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안에서 이 단어가 쓰인 구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막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막 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님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는 그 순간 도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그 순간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 위해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건너오라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하나님과 관계없는 그 삶에서 하나님께
속한 삶으로. 그래야만 그 삶이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삶에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나중에 받을 ‘어음’이 아닙니다. 나중에 언젠가 누리게 될 복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설명을 보십시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매우 유명한 말씀이죠. 우리가 이 말씀을 가장 오해하는 것은 ‘영생’을 영원한 생명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그렇게 생각하니까, 죽음 이후의 다시 태어난 삶에서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하며, 구원을 미래의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삶입니다.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지적인 앎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말하죠.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유대인들에게 ‘앎’은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사귐입니다. 그럼 영생은 무엇입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귐을 우리의 삶에 주기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이라고 말해요. 공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 나라를 주기 원하시고, 영생을 주기 원하세요. 이유가 있죠. 말씀을 봅시다.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우리가 구원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여기면,
동시에 심판도 미래에 받을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죠. “믿지 않은 사람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들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빛이 세상에 왔는데도 어둠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미 심판받은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깨어진 세상 속에서, 깨어진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실존 자체가 ‘심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것을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 하나님의 부재가 우리 깨어짐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그 어두움 가운데 놓여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골 1:13)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삶에서 하나님께 다시 속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아들의 나라는 죽음 이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하신 일입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구원의 감격이 별로 없을까요? 2가지 정도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신의 삶이 처한 위기를 모를 때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무엇인지 모를 때입니다. 즉, 이 2가지를 모른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과 무관한 내 삶이 얼마만큼 메말라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모른 척 덮어놓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아주
작은 행복의 요소들에 헛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마약을 하면 잠시 행복한 감정이 들죠. 그러나 그것이 가짜 행복일 뿐입니다. 세상이 주는 잠시간의 행복을 누리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것으로 진짜 행복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의 창조 계획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때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죄의 유혹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없어도 너 괜찮아.’ ‘왜 너처럼 완벽한 존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질구질하게 살려고 해.’ 하나님 중심된 삶을 살아가도록 창조된 우리가, 하나님을 이탈하여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것이 죄였고, 그 죄의 결과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를 비롯한 행성이 공전하는 것이 창조의 법칙입니다. 그 질서를 따라 살 때, 가장 평안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된 삶을 살
때 평안하고, 주님이 주신 생명을 누리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공전의 축으로 삼는 인생이 될 때, 더이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그분의 풍성함, 그분의 사랑, 그분의 생명력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고갈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복음이고 생명입니다. 소망입니다. 구원자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회복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통해 자신들이 쫓고 있는 것이 결코 자기 삶의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여러분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복된 그리스도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구원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의 존재는, 그 ‘존재 자체가 복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신이 없다’하는 이 시대입니다. 무신론의 논리로 완고한 사람, 다른 철학과 가치관으로 견고한 탑을 쌓아 올리고 가드를 올리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힘은 사실 그런 지식적 논쟁에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설득력은 ‘신이 함께하는 사람’, 바로 그 생명의 삶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우리도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추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를 수 있고, 달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에베소서
2:1-7, 10> (엡 2:1)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엡 2:2)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엡 2:3)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엡 2: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엡 2:5)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엡 2: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엡 2: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엡 2: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