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금요기도회 설교

2025-08-22 · 마태복음 5장 38~48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가 마태복음을 계속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이자 정수는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침입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 말해줍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난한 자 같아 보이고, 핍박받는 자 같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말하지요. 예수님은 우리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참된 의’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치는 것이 율법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지 않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부정하는 분이 아닌가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왜곡하며 자기 기준을 세워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왜곡을 바로잡으시고, 하나님의 본래 뜻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아무것이나 열심히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바르게 믿느냐가 핵심입니다. 잘못된 것을 열심히 믿으면 오히려 진리를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보다 먼저 계셨던 분으로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율법은 깨어진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기준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성령을 힘입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하나님의 온전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기준도 바꾸십니다. 살인이 아니라 분노의 문제로, 간음이 아니라 음란한 생각의 문제로, 더 나아가 그런 죄에 대하여 얼마나 철저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존 스토트] “어떤 영화가 나에게

음욕을 일으킨다면, 마치 발이 없는 것처럼 가지 않는다. 눈이 없는 것처럼 보지 않는다.” 영적 생명이 살기 위해서 죄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철저한 결단이 필요한지 보여주는 말씀.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잘 싸우고 계십니까? 제가 가끔 동성애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이런 메시지를 낼 때가 있지요. “동성애나 다른 모든 죄나 모두 죄다. 우리가 동성애에 대해서만 유독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특별한 잣대를 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잘못 해석해서

죄 자체에 대해서 관대하게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적용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동성애를 약하게 보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까지도, 분노하는 마음까지도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엄중히 대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최근에 음식점에 갔는데, 중년 남자 대여섯 분이 오셔서 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는데, 대표기도를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신가보다. 그래도 좀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기도는 조금 작게 해도 좋을텐데...” 이러면서

식사를 했습니다. 제가 있는 곳까지 너무 기도 소리 하나하나 잘 들리고, 중간에도 ‘아멘’ 하는 소리도 들리고, 끝나고는 다 같이 ‘아멘~!!’ 이러길래, 열정적인 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끝나자마자, “소주 3병, 맥주 1병이요,”라고 해서, 오히려 제가 좀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랑 저랑 “저기가 아까 기도했던 분들 맞지?”라고 서로 물어봤습니다. 제가 예전에 부교역자 시절에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술 마셔도 사랑한다.” 여전히 제

마음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저는 술 마시는 것이 그리스도인, 특별히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은 신앙인에게 어울리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치 ‘거짓말’이나 ‘질투’ 등이 그렇듯, 잘못된 것임을 알지만, 아직 그 문제에 대하여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 대해서는 기다리며 승리를 응원합니다. 저는 술에 대해서는 온전할 뿐, 저도 아직 다른 것들과 싸워야 할 때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싸워야

합니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보다 치열함이 필요합니다. 만약 자신에게는 치열하고, 타인에게는 조금은 관대하게 기다려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더 좋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깨우쳐주십시오. 제가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은 죄에 대한 허들을 낮추고 “그러니까 우린 다 약해요”하고 같이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 주를 더욱 의지하며 서로를 지켜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만큼 연약한 것을 아시지만 부인하지 않기를 원하셔서 권면하셨고, 간음한 여인을 향한 공격에서 지켜주셨지만, 여인이 그 삶에서 떠날 것을 말씀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 예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회복된 존재로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자꾸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온갖 부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남들과 달리 회복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래서 두렵고 어렵고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조차 저는 자꾸 우리가 복음이 말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에서 학습한 기준으로 성경을 우리가 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온갖 증명 요구를 받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예배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힘겹게 증명해야 하는 부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또한 복음을 요만큼 왜곡하고 비틀어버리는 공격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회복된 존재가 되는 데 있어서, 성경이 우리에게

뭘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존재의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존재가 바뀌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공로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쉽게 제가 원래 길고양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떠돌며 쓰레기를 뒤지며, 차에 치일 뻔한 위협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만약 신이 나를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는 그냥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아.” 나는 이제 사람으로 걸어서 걷고, 대화도 가능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길고양이로만 살았던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것인지도 모르고, 자꾸 옛 습관대로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려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신은 나에게 말하겠죠. “이제 그렇게 살지 마. 사람답게 사는 것은 이런 거야.” 내 존재가 달라졌다는 사실과, 그 존재에 걸맞은 삶의 모습을 가르치는데, 만약 제가 “왜 자꾸 저에게

사람다운 삶을 요구하세요. 부담스러워요.”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이 매우 이상한 이야기가 되겠죠. 세탁기가 있는데 여전히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것이 이상하고, 휴대폰이 있는데 공중전화를 찾아다니는 것이 이상한 것이죠.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바꾸셨다는 이야기이고, 이제 회복된 존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깨어진 나로서는 어울리지 않고, 감당할 수 없는 삶일지 모르지만,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들에게 그 존재다운 삶을 말씀하시는 가르침이 ‘제자도’, ‘산상수훈’입니다. 오늘 보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보여주고 이렇게 살라고 하면, 콧방귀를 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거듭난 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임을 믿는다면, 이제 이 말씀을 따르는 것은 언약 백성의 특권입니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동태동수법을 의미합니다. (출 21: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출 21: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출 21: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것이 동태동수법 혹은 ‘탈리온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눈, 이, 손, 발’은 인간의 모든 신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법이 왜 생겼을까요? 만약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폭행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다른 이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고 금전으로 그것을 배상하는 것이 가능해지면,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 즉, 율법은 그런 부분에 대한 금지를 다루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과도한 복수를 방지합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더 큰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깨어진 세상 속에 하나님이 가르치신 최소한의 보호장치로서의 율법이었습니다. 깨어진 관계는 더 큰 보복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선 ‘최소한의 보복’을 율법에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보복까지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회복된 관계에서는 보복 불가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방법입니다. 존재의 변화를 주시고, 그 존재가 변화된 삶을 살아감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실에 뿌리 박힌, 그러나 현실의 깨어짐을 넘어서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현실적인 상황을 예시로 듭니다. 이 상황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누군가 저의 오른편 뺨을 때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는 뺨을 맞게 되면 어느쪽 뺨을 맞게 됩니까? 왼편 뺨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오른편 뺨이라고 한 것은 그냥 뺨을 맞는 상황이 아닙니다. 유대

사회에는 ‘미쉬나’라는 법전이 있었는데, 뺨을 손바닥으로 때리면 ‘200 zuzin’을 배상해야 하고, 만약 뺨을 손등으로 때리면 ‘400 zuzin’의 벌금을 배상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 ‘손등’으로 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심각한 모독입니다. 이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상대방을 ‘하급자’ 또는 ‘노예’로 여긴다는 모욕적 표현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폭력도 문제지만, 사실 그 뒤의 보복과 합의금이 더 문제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폭력으로부터

돈을 얻기 위해 약 올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길을 끊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왼편도 돌려대라.” 이것은 오기가 아니라, 분노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내 화를 다스리며 관계를 회복하는 적극적 선택입니다. 이 말씀은 늘 세상에서 바보처럼 당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죄악이 싹트는 상황조차도 관계 회복의 기회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분노하여 나를 모욕했다면, 제자는 그 분노의 이유를 이해하려 하고, 때로는 상대가 감당해야

할 책임까지도 내가 함께 지려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깨진 관계 안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선택하듯, 말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서도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깨어진 세상에서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제 자녀에게 이렇게 무조건 하라고 강요하며 가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저의 자녀가 회심을 하고, 자기의 영적 정체성을 알고,

하나님을 위하여 이런 태도를 갖게 된다면, 저는 이 선택을 하는 자녀를 축복하고 응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역사에서 기독교가 망가진 것은 모두 기독교가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할 때였습니다. 더 강한 힘으로, 세력과 규모를 앞세워 뜻을 이루고자 할 때였습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세상화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이기길 바랍니다. 바로 이 말씀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바로 이러한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이 태도가

어떻게 한 번에 나에게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어야 비슷한 상황에서 이것의 반의반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훈련되면 반이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한순간에 그것과 역행하는 완벽함을 갖자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깨어진 세상의 흐름에서 조금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조금씩 걸음마라도 배워서 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조금이라도 선하게 살아갈 때, 그것을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 작은 선행이 우리를 교만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봐도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꽤 괜찮다고 스스로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 태도는 우리를 곧 안주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성경에 나오는 가르침, 예수님의 삶의 모습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님을 여전히 따르기에 부족한 나의 모습에서 겸손을 배울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주님을 따라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있음을 깨닫고 더욱 성령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듭났기에, 이제 완전히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다음은 율법에 나오는 옷에 대한 담보물 문제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의복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전기가 없는 시대이죠. 빛을 위해서 집은 창문을 내야 했습니다. 그 창은 밤이 되면 고스란히 바람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며, 전당으로 잡은 옷을 해질 때 돌려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율법 안에 있는 매우 디테일한 인권 보호의 계명들입니다. 사람의 악함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뛰어넘죠. 그러니까 이제 사람들은 전당물로 겉옷을 달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겉옷은 밤에 돌려줘야 하니까 계산이 빠른 ‘깨어진 세상화’가 잘 된 사람들은 속옷을 요구합니다. 세상으로 보면 영리한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이라는 것입니까? 우리의 기본권, 겉옷까지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대하라고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얄미운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작은 것 하나까지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냥 내어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무조건 맞춰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의 권리를 넘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언하는 선택, 그 선택을 통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겉옷까지 내어주는 제자의 삶은 세상에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능동적이고 담대한 삶입니다. 사경회에서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을 기억하시죠? [애굽]은 자기중심적이고 깨어진 세상의 모습입니다. [광야]는 최소한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배워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궁극적 삶은 [가나안], 곧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애굽의 삶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율법은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를 다르게 살게 합니다. 광야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를 거칠 수는 있지만, 거기가 목적지가 아닙니다. 가나안까지 반드시 가야 합니다. 애굽에서 출애굽 하는 것은 중요해요. 그러나 거기에 머물면 그곳은 광야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머물 곳은 아닙니다. 산상수훈은 가나안을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도 순서가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급선무이고, 광야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가나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자가 다른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 광야에만 있고 가나안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교인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가나안의 삶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살아본 경험도 없으니, 그것을 꿈꾸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난 애굽에 사는 사람과는 다르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광야에 있는 사람도 두 가지 모습으로 나뉩니다. 가나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과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광야의 삶에서 우선 지켜내야 하는 것은 방향입니다. 다시 애굽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얼마나 많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까? 결국 그런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을 소망해야 가나안으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충격을 받고, 좋아하면서도 자기의 말씀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가나안의 삶을 알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저는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건 돼, 이건 안 돼, 이것은 맞아, 이것은 틀려” 이렇게 내가 스스로 재단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한 번에 못 담아낼 수는 있죠. 그러나 내가 소망하는 방향은 늘 말씀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함께 가고 있어야 합니다.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이 말씀은 고난주간에 언급했었죠. 당시 로마의 군인에게는 이것을 요청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구레네

시몬이죠. 우리도 세상을 살다가 때로는 이런 억울하고 부당한 요구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 때문에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 혹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혹, 이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서 저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 앞에서도 침묵하고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다시

도표로 설명을 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도표는 풍성한 삶의 과정으로 설명하면 ‘영적 성장의 단계’입니다. 우선 우리는 애굽의 삶을 거부하며 출애굽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서 억울함을 만드는 자가 되지 않는 것. 우선 그것부터 하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그것이 되었다면, 이제 이 말씀에 대해서 진지하게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기대어

예수님 쪽으로 한 걸음 더 걸어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에게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지만, 제자는 “기꺼이”라는 십 리를 가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나를 위해 십 리 이상의 것을 행하셨음을 우리가 깨달을 때, 주님을 따라 나도 걸어갈 힘과 용기가 생기는 것이죠. 이것을 잊으면, 말씀을 따라 행한다고 하면서 더 억울한 마음만 가질 뿐입니다. 그러면 아주 신경질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담스러워~ 나에게 자꾸

뭘 하라고만 해~” 이런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레네 시몬처럼 강제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기꺼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제자가 십 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바로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내 정체성이 예수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억울함 속에서 억눌린 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울한 자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능동적 선택을 하라는 초대입니다. 제자는 세상 기준에 끌려다니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들의 결론은 이것이죠. 하나님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원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깨어진 세상, 애굽은 이웃을 미워합니다. 광야는 이웃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원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박해하는 자를

박해합니다. 광야는 박해하는 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버립니다. 가나안의 삶은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때,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의 삶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속한 자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에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작입니다. 우리의 완성은 광야가 아닙니다. 우리의 완성은 율법이 아닙니다. 우리의 완성은 예수님의 가르침,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주신 산상수훈입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온전함’입니다. 이는 제자의 삶이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애굽] 세상에 속한 삶 :

자기중심적 삶 (보복, 권리 집착, 억울함에 분노, 원수를 미워함) [광야] 율법에 속한 삶 : 율법적 삶 (보복 제한, 최소한의 정의 의지, 이웃만 사랑) [가나안] 하나님 나라의 삶 : 제자의 삶 (보복 대신 사랑, 억울함도 기꺼이 감당, 원수도 사랑) 말씀을 이루는 것은 한순간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의 여정을 통해 세상에서 더욱 벗어나고, 하나님께 다가섭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중요한 것은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통해서 그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길은 광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말씀과 나 사이의 간극을 발견했을 때, 그때 뭐 하는 것이라고 했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도구입니다. 성령님 또한 우리가 말씀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힘주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과 기준과 태도를 바르게 하며, 성령을 의지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며 이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참된 삶이 우리의 삶 가운데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