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타임 키퍼

2025-08-24 · 창세기 22장 1~5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은 우리교회가 처음 시도해 보는 ‘팸 소풍 예배’이고, ‘청년 섬김의 주일’입니다. 청년들이 함께 섬겨주었기에 가능한 시도였지요. 오늘은 평소의 매일성경 시리즈 설교 대신, 성경의 한 인물, 아브라함을 통해 ‘시간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나누려 합니다. 여러분, 위인전을 많이 읽어보셨습니까? 대체로 제가 읽어봤던 위인전을 보면, 그 위인의 ‘비범함’에 대해서 떡밥을 던지며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는 식으로 말이죠. 대부분 누군가를 좋은 모습으로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렇게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조금 다릅니다.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약 4000년의 시간 속에 수많은 사람을 보여주는데, 대체로 사람들의 모습은 비범하기보다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들이 엿보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될 만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첫 번째 도구가 된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는 마태복음의 첫

줄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잘 읽어보면, 아브라함은 우리가 기대하는 그 모습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주시죠. 그렇게 아브라함의 인생에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에 갔다가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바로가 자기 아내를 탐내자,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속입니다. 15장을 보면, 그는 하나님이 자손의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몇 년이 지나도 자녀가 없자, 자기 종 가운데

엘리에셀이라는 사람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죠. 16장을 보면, 이번에는 부부 사이에서는 임신 소식이 없자,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기다리지 못하는 모습이 계속 보입니다.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아비멜렉(블레셋 왕의 호칭) 앞에서 또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는 이 시대로 보면, 아내를 지켜주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아주 못된 남자인 셈이죠. 어떻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이야기가 어울립니까? 아브라함은 실패와 두려움이 가득한, 그냥 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 사람을 보는 눈이 없으시구나. 의리도 없고, 두려움은 많고, 자기 고집은 세고, 인내심도 적고. 우리가 만약 아브라함을 우리 사역의 동역자로 불렀다면, 이내 아브라함에게 실망하고 “넌 안 되겠다”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긴 시간 동안 그를 실패 속에서도 다듬어

가십니다. 옆 사람에게도 한번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실패해도 괜찮아. 하나님이 너를 붙들고 계셔.” 아브라함 하면 떠오르는 것이 ‘믿음’인데,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어 보이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했을 때, 떠날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것이죠. 여러분 보고 갑자기 다 내려놓고 저기 선교지 가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살라고 하면 쉽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순종했죠. 그러나 사실 ‘롯’을 데리고 나오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은 아니었어요. 자기의 보험이었죠. 결국 여전히 사람의 계산과 불완전함이 엿보여요. 그리고 앞서 언급한 여러 좋지 않은 선택과 결정도 있다고요.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라함을 보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믿음’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거룩하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사용하십니다. 이 이야기가 그러니까 “마음껏 방황하다가 나중에 언젠가 돌아오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10년 걸릴 훈련도 30년이 걸리게 될지도 몰라요.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졌다고, 우리의 삶이 그 마음에 걸맞은 모습으로 한순간에 바뀌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마음도 없다면, 변화는커녕 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배워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의 연약함이 악함으로 내려가지 않고, 연약함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강함으로 바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자녀는 자신을 위한 마음이 있는 부모 밑에 있을 때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부모가 그 실패를 감당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부모는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도록 조언하며, 격려하며, 기다려 줄 것입니다. 실패를 바라는 부모는 없지만, 실패 없이 성장할 것만을 요구하는 부모도 없습니다. 우리가 실패해도 괜찮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실패를 원하시는가? 아닙니다. 그런데 실패도 필요할 수 있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우리를 다독이시고,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실패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입니다. 가족이 그 역할을 못 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러나 내 주변에 가족이 아니더라도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실패를 극복하고 배우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서로에게 그런 너그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습니다. 자신은 부족했지만, 자신의

곁에서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고백이 그의 삶에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어느새 변해가고 있었죠. 하나님도 느끼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테스트가 무엇인지 아시죠?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 명령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명을 아브라함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 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데 꼭 확인해 보셔야 아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실 수도 있죠. 그런데 우리가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결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자기 마음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요구 앞에 순종하면서, 이제 자신에게 있어서 우선순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고백한 것입니다. (창 22: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창 22: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창 22: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창 22:4)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창 22:5)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자, 즉시 다음날 그것을 시작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아들도 사랑하죠. 그는 자신의 결단을 막을 수도 있는 종들도 두고 아들과 갑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종에게 했던 이야기가 ‘예배’하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돌아오겠다는 것이 믿음인지, 아니면 종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에서 처음 ‘예배’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 이 부분입니다. 예배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이 최고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고, 가장 소중한 것이었고, 그조차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이 마음은 ‘예배’ 그

자체였던 것이죠. 물론 히브리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행했던 이유가 나옵니다.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약속을 받은 그가 그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히 11:18)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라 불릴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다" 하셨습니다. (히 11:19)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 ‘이삭’을 통해 약속의 자손을 이루시겠다는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삭을 정말 데려가신다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그 이삭을 살리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그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내도 지키지 못했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자기 방식대로 행하던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이 이제는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신뢰하며,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따를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서게 된 순간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계획이 다 있으셨죠. 이삭은 제물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 그곳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해석해 봅시다. 우리의 삶도 실패와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사탄은

우리의 실패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작은 실수 하나를 마치 인생 전체의 낙인처럼 과장해 버립니다. “너는 안 돼. 넌 늘 이럴 거야.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이렇게 속삭이면서 우리를 실패 속에 묶어두려 합니다. 실패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실패에 묶여 아무것도 못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은 실패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우리 인생을 보게 합니다. 조금만 뒤처져도 낙오자가 되고, 시험 한 번 망치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몰아갑니다.

끝없는 경쟁 안에서 “성공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압박을 주죠. 우리를 지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하나님은 넘어진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며,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 실패 속에 머물지 말고, 나를 바라보라.” 하십니다. 사탄은 실패를 ‘결박의 도구’로 쓰고, 세상은 실패를 ‘탈락의 도구’로 쓰지만, 하나님은 실패를 ‘부르심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타임 키퍼’입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시간을 사용해 그의 믿음을 빚으셨듯, 지금도 우리 삶의 시간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기다림조차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사용해 믿음을 꽃피우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어느 시절만큼 지금 오셨을까요? 아직 모리아산의 모습만큼 가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또한 모두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수준의 요구를 하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삶을 맞춤형으로 훈련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반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곧 하나님이 최고이심을 삶으로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이곳과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빚어가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