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난주부터 <스가랴서>를 함께 보고 있습니다. 스가랴서는 구약의 예언서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유명하지만 조금 낯설고 겁나서 멀리했던 책이라면, 스가랴서는 ‘성경에 그런 책도 있었어?’라고 할 만큼 생소한 책이죠. 제가 이번 요한계시록 시리즈를 설교하며 요한계시록이 마치 ‘마블 영화’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벤져스 시리즈’로도 유명한 마블 영화는 그 어벤져스 멤버별로 각자의 스토리를 담은 영화로 따로
있습니다. 아이언맨, 토르, 헐크, 캡틴 아메리카, 스파이더맨 등 각 인물에 대한 영화가 따로 존재하죠. 그리고 이들이 힘을 합쳐서 함께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어벤져스 시리즈’이죠. 그런데 혹시 다른 영화를 하나도 안 본 상태에서 어벤져스 영화를 처음 본 경험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제가 거의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왜 중요한 거지? 왜 다들 저 장면에 환호하지?” 그런데 나중에 저도 마블 영화를 쭉 보면서 이해하고 어벤져스를 보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마블
영화는 진입장벽이 높다는 인식이 그래서 생긴 것이고, 반면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는 것도 그래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성경의 특징과 매우 유사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알면 알수록 재미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나 스가랴 같은 책은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이번에 느낀 것은, 그동안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어느 정도 갖춰진 분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 타이밍에 다룬 이번 요한계시록 시리즈가 참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것은 드디어 요한계시록이 선명하게 보이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도 되고, 감동도 있는 것이죠. 그런데 아마 스가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드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처럼, 묵시적이고 상징적이라서,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되어 봐야 진짜 의미가 보입니다. 지난주 전도사님이 설교한 1–8장은 귀환 백성의 과거와 현재를,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보여주는 말씀이었습니다. 8가지 환상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하며, 악을 심판하고,
성전을 회복하며, 너희를 거룩한 백성으로 다시 세우리니, 담대히 나에게 돌아오라.” 이것이죠. 다시 말해, 그들의 현실 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고 계시니, 회개와 순종으로 미래를 준비하라는 초대였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는 것은 제 생각에 여러분이 지난주 설교의 내용은 다 까먹고 ‘어쩌라고’만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때문입니다. 스가랴서 전반부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은,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느끼는 현실적
어려움과 초라함, 정치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살아가는 주권이 없는 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그 모든 것 뒤에서, 그 모든 것 위에서 주권적으로 일하고 계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디테일을 한 스푼 더해 보겠습니다. 8개의 환상은 1-8번, 2-7번, 3-6번, 4-5번. 이런 식으로 짝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렇게 병렬된 구조에서는 가운데 환상이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4-5번 환상이죠. 4번 환상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재판장인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입니다. 사탄은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를 참소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탄을 책망하신 후, 여호수아를 깨끗게 하십니다. 사탄의 참소는 주님의 책망으로 꺾이고, 여호수아는 정결한 새 옷으로 회복되는 환상이죠. (슥 3:8) 여호수아 대제사장은 들어라. 여기 여호수아 앞에 앉아 있는 여호수아의 동료들도 함께 잘 들어라. 너희는 모두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제 새싹이라고 부르는 나의 종을
보내겠다. 하나님은 이 환상의 끝에서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 제사장들에게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하나 주십니다. 그것은 ‘새싹’이라고 부르는 ‘나의 종’을 보내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미 성경의 몇 부분에서 메시아를 ‘새싹’ 혹은 ‘순’으로 표현하기에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정결케 되고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것은, 그가 경험한 일과 그의 사역이 메시아가 할 일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죠. 이어지는 5번 환상은 순금 촛대와 그 양옆으로 서 있는 감람나무 두 그루를 본 것입니다. 여기서 촛대는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말씀이나,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촛대’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치이죠. 그 촛대 옆으로 서 있는 감람나무 두 그루는 하나님의 사명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이 그중 한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왕과 제사장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앞서 나온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감람나무의 한 부분을 의미하고, 스룹바벨이 다른 한 부분이 됩니다. 여기서 스룹바벨은 왕은 아니지만, 귀환한 유대공동체의 총독이며 무엇보다 그는 다윗의 후손입니다. 다시 말해 왕족입니다. 그가 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을 재건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했던 역할이죠. 그러니까 왕과 대제사장을 상징하는 사람들을 다시 귀환 공동체 안에 두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우는 프로젝트를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시선입니다. 하늘의 시선,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계획을 사람에게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이 묵시이죠. 땅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무너졌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버렸습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예언자를 두셔서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을 잡아간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이 그들의 주인이 됩니다. 그리고 갑자기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성전이 무너진 지 70년 만에 약속의 땅에 다시 성전을 재건하게 된 것입니다. 말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스가랴에게 보여주신 8가지 환상이 다 소개된 후, 하나님은 이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슥 6:11) 너는 은과 금을 받아서, 그것으로 왕관을 만들고, 그것을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머리에 씌워라. (슥 6:12) 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을 보아라. 그의 이름은 '새싹'이다. 그가 제자리에서 새싹처럼 돋아나서, 주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 이것은 8가지 환상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여준 후, 그 환상을 정리해서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앞서 나왔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이제는 왕의 왕관까지 씌우라는 내용이죠. 그리고 그가 ‘새싹’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이 여호수아를 앞에 나오는 실존 인물 여호수아로 봐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형이고 예표이죠. 앞서 대제사장 여호수아 자체도 사탄의 참소와 죄의 굴레를 벗어났죠. 죄의 해결과 관련된 인물이며, 그의 직분 자체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대제사장입니다. 그가 새싹을 예표하는 자로, 대제사장 겸, 성전을 지을 왕으로서, 그 두 가지 직분이 그에게서 연합하여 평화를 이루어 일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에게 유명한 스룹바벨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이 환상에
왜 채택되었는가? 그 이름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발음이 조금 수정되며 ‘예수아’라고 읽게 됩니다. 그래서 스가랴 당시에는 ‘예수아’라고 발음하는 이름이 되죠. 그리고 이것을 헬라어로 바꾸면 ‘예수스’가 됩니다. 영어로는 ‘지저스’, 한국어로는 ‘예수’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아’가 대제사장 겸 왕으로 오셔서 성전을 지으시고, 그는 왕이자 대제사장적 사명을 다하는 존재인데, 그가 바로 메시아로
오시는 ‘새싹’이 의미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앞서 8가지 예언과 그 뒤에 이어지는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 그들에게 주시는 현실에 대한 깨달음도 주지만, 구약에서 가장 대놓고 하나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이루시기 위해 준비되고 있는 우리의 왕이자,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자신을 제물로 화해의 제사를 지낼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포로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가장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과의 약속은 ‘다윗
언약’이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하나님의 집을 짓고, 하나님이 그의 후손과 나라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이죠. 그래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죠. 그런데 그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당황스러운 것이죠. 누구의 잘못으로 언약이 깨어졌냐는 것은 뒤로하더라도, 그러면 언약은 이제 깨진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겠죠. 바벨론에 살면서 내내 사탄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소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버렸어.’ 혹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아.’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를 일으키시고, 그들을 통해 유다 백성이 돌아오게 되었으며, 공교롭게도 그 책임자는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우연 같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스가랴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성전 재건이 중요했습니까? 왜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 재건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스룹바벨이 다시 성전을 재건함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성전’ 자체가 모형이고 예표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거처인데, 다른 의미로 말하면 구약의 ‘성막/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동행해 주겠다는 약속을 이루기 위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은 약속이 살아있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고, 그 진정한 성취가 올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래서 신약은 스가랴의 예언을 이렇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스가랴가 기록될 당시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은 수백 년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스가랴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예수아’에 대한 상징적 환상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마리아와 요셉이 자기들이 나을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은 것이 아니었죠. 예수라는 이름은 이미 구약의 예언에서 정해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에 ‘예수’이고, 그가 진정한 성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존재로 오신 것이기에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정리하면, 스가랴에 나오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메시아의 그림자였고, 신약의 예수님은 그림자의 실체이죠. 또한 그의 이름부터가 복음이었습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여호수아, 예수, 같은 이름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볼까요? 우리가 요한계시록까지 공부했으니까 이제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죠. 모세의 언약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동행을 약속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해야 할 약속이행은 ‘충성’입니다. 여호와께만 순결한 백성이 되는 것이었죠. 대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 이행은 ‘동행’입니다. 하나님의 동행 자체가 복이고, 보호였으니까요. 그를 위해 주신 것이
‘성막’이었습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으로 이어져서 ‘성전’이 되고, 다윗 언약은 이 언약을 이어받아 갱신한 것과 다름없는 형태였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의 어원은 말씀드린 것과 같이 ‘믿음, 신뢰, 신실함’ 등을 의미합니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졌을 때, 끝난 것인 줄 알았으나, 하나님은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기 위해 70년간 기다리셨던 것임이 밝혀졌고, 스룹바벨을 통해 성전을 다시 주심으로 약속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이 진짜 하기 위한 일의 빌드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언약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됩니다. 창세기 3장부터 하나님이 준비한 세상 구원 프로젝트의 결정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이 D-day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를 하십니다. “손으로 지은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알게 되죠.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처가 건물이면 성전이고,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활하심으로 이제 진정한 성전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이루십니다. 이 성전을 우리가 누리려면 우리의 약속이행을 하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충성’, ‘믿음’, ‘신실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신실함을 지키며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은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셨던 것이고, 이제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제 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회심한
자들, 그 거듭난 사람들은 이제 그 존재 자체가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회심한 자들 안에 성령께서 오셔서 거하시며 임마누엘 하십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성취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재림의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계 21:22)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그 완성된 천국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도시의 모습으로 상징하는데, 그 도시 안에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 예전처럼, 성막이나 성전이나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하고 하나 되었기에 다른 매개체가 필요 없이 하나님과 완전히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매개체가 필요 없는 온전한 연합. 죄가 갈라놓은 그것이 완전히 연합되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스가랴서는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에서 ‘귀환 공동체 시대’를 담당하는 예언자이죠. 그는 그 시점에서
귀환 공동체를 위로하고, 약속을 상기시키고, 앞으로 일어날 가장 중요한 약속인 ‘메시아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귀 이야기 스가랴서의 후반부라고 할 수 있는 9-14장에는 2개의 묵시적 환상 이야기가 나옵니다. 9-11장이 첫 번째 묵시이고, 12-14장이 두 번째 묵시입니다. 두 번째 묵시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종말에 메시아가 와서 모든 악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봤던 ‘새
예루살렘’이 등장합니다. 새 예루살렘이 종말의 완성된 모습으로 주어지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민족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이 그 종말의 공동체 안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또한 이 부분에서도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에덴이 회복되는 ‘새에덴’의 이미지이며, 생명의 강이 흐르는 장소로 주어질 것입니다. 느끼셨겠지만, 12-14장의 환상은 요한계시록의 축소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최근 금요특강으로 자세하게 다뤘던 부분이죠. 그러므로 스가랴 12-14장에서 주어진 종말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묵시가 요한계시록에서 더욱 풍성하고 자세하게 주어진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집중해서 살펴볼 것은 첫 번째 묵시입니다. 그 핵심 내용을 읽어봅시다. (슥 9:9)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슥 9:10)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스가랴의 예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에 대한 예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마무리하며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은 ‘드디어 우리가 예루살렘을 접수하는구나!’ 싶어서 흥분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명을 이루기 위해 가고 계신 걸음이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굉장히 많았죠? 이유는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임당한 어린양과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시기에 가신 것이죠. 성경을 알면, 예수님의 행동 하나에도 다 의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의 유월절 순례는 전통적으로 걸어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근처까지
걸어왔습니다. 이제 불과 10리, 4km 남은 곳에서 갑자기 생뚱맞게 나귀를 타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의도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야, 우리 스승님 또 이상한 주문을 하신다”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그냥 시키니까 하죠. 그들도 나중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하나하나 깨달아가며 뒤늦게 엄청 놀랐을 것 같습니다. (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마태복음에 따르는 나귀는 두 마리입니다.
사람을 한 번도 태워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에 성인인 예수님이 타고 가는 것이 애초에 쉽지 않죠. 그 사람 많은 곳을 새끼 나귀 홀로 갈 수 없기에 새끼 나귀 외에 어미 나귀 한 마리를 대동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겉옷을 그것들(복수형) 위에, 예수께서 그것들(복수형) 위에 타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을 따라, 이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예수님은 새끼 나귀 등에 타시지만, 사실 반쯤은 어미 나귀에 기대어 가신 것입니다.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이럴 바에야 그냥 어미 나귀에 올라타는 것이 훨씬 편하고 덜 어색하죠.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힘들게, 새끼 나귀도 힘들게 하면서 가셨냐? 바로 스가랴서가 예언하고 있는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이 상징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 어떤 왕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봤던 ‘사자와 어린양’의 메시지와 유사합니다. 예수님은 사자와 같이 온 세상의 왕입니다. 킹 오브 킹스. 모든 왕 위에 있는 유일한 왕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비빌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속적인 왕에 대한 이미지만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자의 포악함이 왕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힘으로 제압하고 그 위에 우뚝 서는 것이 ‘왕의 위엄’이라며 그것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진짜 왕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가 지배하는 깨어진 세상의 약육강식이 찬양하는 왕의 모습입니다. 애굽의 바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로마의 황제 등이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왕관을 쓰고, 흰말을 타고 군대를 호령하며 행진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사탄을 최종적으로 이기러 출동하실 때 악에 대하여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말씀의 검을 휘둘러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처단하고 악을 종결시키십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왕의 본체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왕인 메시아는 세상에서 그런 방식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왕이 되면, 그것은 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는 것, 하나님 나라 반대편의
정점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에게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어떻게든 그렇게 하셨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스가랴 시대에도 페르시아의 속국, 주권이 없는 지배당하는 민족으로 두십니다. 세상적 위치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평가에 여러분이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가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어떠함이 여러분의 실체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높아지거나 함부로 스스로를 낮게 보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 가치관에 휩쓸리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은 세상은, 바로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새한글 성경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슥 9:9-10 (새한글 성경) (예언자) 크게 기뻐해라, 딸 시온아! 소리 질러라, 딸 예루살렘아! 보라, 너의 임금이 너에게로 오실 것이다. 그는 공의로운 분이시고 구원받아 승리하신 분이시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다. 수나귀 곧 새끼 나귀를 타신다. (하나님) “내가 에브라임에서 전투수레를, 예루살렘에서 말을 끊어 없애겠다. 전쟁의 활도 끊어질 것이다. 그가 민족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프라테스강에서 땅끝까지 미칠 것이다.”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는 ‘공의로운 분’이며, ‘구원받아 승리하신 분’이며, ‘겸손한 분’입니다. 그가 공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통치한다는 것이며, 그가 구원받아 승리하신
분이라는 것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가장 먼저 이루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며, 그러나 세상의 왕과 달리 겸손의 왕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실 일은, 깨어진 세상에 만연한 갈등과 분쟁을 종식하며, 모든 민족 가운데 평화를 선포하며, 온 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진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충만함을 잃은 것입니다. 공허하고 허기져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손해보기 싫어하고, 먼저 내어주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어짐 속에 살다보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 안에 여유가 없는데 남은 것마저 먼저 내어주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았습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고, 경쟁하고, 분열하여 다투는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꿈에 동참했다고 하지만, 사실 각자의 검은 속내를 이루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존재였거나, 그저 인정욕구에 빠져서 지키지도 못할 헛된 약속을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배신을 하고 숨어버리는 연약한 군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쉽게
비판 못 합니다. 내 안에 그 유다가 있고, 내 안에 그 베드로가 있고, 내 안에 다른 제자들의 모습이 있음을 우리는 다 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만이 그렇습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 말했지만, 정작 그 메시아가 자신이 원하는 목소리를 내주는 것이 아니자, 그 메시아를 죽이는 일에 가장 앞장선 자들이 됩니다. 대다수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현장에는 그것이 주는 유익을 위해 몰려들지만, 제자가 된다는 것은
헌신과 절제가 필요한 것임을 말씀하시자 그 자리를 떠나거나 예수를 비난하고 저주하기 일쑤였습니다. 이것이 죄로 망가진 깨어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바꾸실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십니다. 목자 이야기 (슥 10:1) 너희는 봄철에 비를 내려 달라고 주님께 빌어라. 비구름을 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소나기를 주시며, 각 사람에게 밭의 채소를 주신다. (슥 10:2) 드라빔 우상은 헛소리나 하고, 점쟁이는 거짓 환상을
본다. 그들은 꾸며낸 꿈 이야기를 하며, 헛된 말로 위로하니, 백성은 양 떼같이 방황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고통을 당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무엇이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아시고 그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세상의 시스템 뒤에서 우리를 미혹하는 사탄의 유혹에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거짓 환상, 꾸며낸 꿈, 헛된 위로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이 방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자신을 망치고 있는지, 무엇이 진짜 나에게 필요한지
모르며, 헛된 것을 붙드는 데 인생을 사용하며 방황합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살아가다가 망하고 쫓겨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그들을 위해 일하십니다. (슥 10:9) 내가 그들을, 씨를 뿌리듯이,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어 버려도, 그들은 멀리서도 나를 기억할 것이며, 아들딸과 함께 살아 있다가 돌아오게 될 것이다. (슥 10:10) 내가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돌아오게 하고, 앗시리아에서도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그들을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데려올 것이니, 그 땅이 살기에 비좁을 것이다. (슥 10:11)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올 때에 나 주가 바다 물결의 기세를 꺾을 것이니, 나일 강이 그 바닥까지 다 마를 것이다. 앗시리아의 교만이 꺾일 것이며, 이집트의 왕권도 사라질 것이다. (슥 10:12) 내 백성이 나 주를 힘입어서 강해지도록 하겠다. 그들이 내 이름을 앞세우고, 늠름하게 나아갈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우리가 사탄의 체제를 배웠죠. 성경시대에는 ‘제국’이 보여주는 화려함과
위용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보다 제국의 길을 쫓다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기 백성에게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바벨론 포로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을 위한 것이었기에, 다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귀환시키셨죠. 그리고 세상의 제국들도 꺾으셔서 그것이 참된 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를 ‘거짓 목자’에게서 찾습니다. 여기서 거짓
목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유행과 주변 강대국의 길로 인도하는 그들입니다. 귀환한 백성들의 삶은 이제 그 길을 가면 안 됩니다. 그 길을 가면 이들도 실패를 반복하게 되니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들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기 위해 참되고 선한 목자를 주십니다. 그래서 목자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환상에서는 스가랴가 하나님의 선한 목자로서 그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는 환상으로 주어지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입니다. (슥
11:7) 나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돌보았다. 특별히 떼 가운데서도 억압을 당하고 있는 양 떼를 돌보았다. 나는 지팡이 두 개를 가져다가, 하나는 '은총'이라고 이름을 짓고, 다른 하나는 '연합'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나는 양 떼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은총’과 ‘연합’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그들을 하나로 결속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사명자를 그들에게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양 떼를 맡은 스가랴는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세 명의 목자를 해고합니다. 이것은 여러 해석이 있는데, 유다를 망하게 했던 3명의 왕이나, 혹은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 그것이 꼭 사람이 아니라면 우상숭배의 요소나 가치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로부터 끊어냅니다. 그러나 스가랴가 그렇게 하자, 오히려 양 떼들이 그를 미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양들은 사실 거짓 목자들이 자신들을 이용하고 있음을 모르고, 그들이 주는 거짓된 위로를 좋아하며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죠. 죄송하지만, 저는 이것이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오히려 세상의 것들을 더 추구하고 좋아하고 그것들로부터 위로받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목자는 그것을 지적하고 바른길로 인도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양들은 선한 목자를 거부합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가치 없이 여깁니다. 그러자 목자는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부러뜨립니다. 이것은 언약백성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로부터 버림받고, 일을 맡긴 자에게 가서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적절한 품삯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준 것은 ‘은 삼십’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품삯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사랑을 값싸게 여긴 백성들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그 돈을 ‘성전 토기장이에게 던져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욕적인 품삯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연합’이라는 막대기도 부러뜨립니다. 이제 이 양 떼들은 거짓
목자에게 맡겨집니다. 거짓 목자는 양 떼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양들은 깨어진 세상의 고통에 직면하며 파멸로 갑니다. 여기까지가 스가랴 11장까지의 메시지입니다. 이 목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여러분이 떠오르는 성경의 내용이 있지 않으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고,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생명을 주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양밖에 모르는 존재이죠. 그런데 정작 양은 어떻습니까? 목자의 그런 마음과 사랑을 모릅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존재들을 더 중요시하며, 목자를 외면하고 거절합니다. 선한목자의 품삯이 ‘은 30’이라는 것도 인상적이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받은 돈, 예수님의 몸값입니다. 가룟 유다가 나중에 그 돈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돌려주었을 때, 그들은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게 됩니다. 스가랴서가 쏜 공을 예수님의 시대가 받아서 성취하는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는 단기예언과 장기예언이 있습니다. 단기예언은 이미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기예언의 성취를 통해서 아직 이뤄지지 않은 장기예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신뢰하며, 소망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서가 보여주는 어린 나귀를 탄 왕과, 배신당하는 선한 목자의 이야기는 모두 메시아인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예언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나라와 어떻게 다르고, 우리가 그분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나라에 속한 삶을 선택하고 그것에 충성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훗날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의 완성은 약속대로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가랴는 귀환 공동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현실은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약속을 이루고 계신다. 그리고 그 약속의 완성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과 ‘양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선한 목자’로 오실 메시아 안에서 성취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는 실로 세상의 왕처럼 힘과 군대와
영광을 동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겸손과 섬김으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왕을 거부했고, 그 목자를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이 무엇입니까? 신앙도 신도 내가 원하는 것을 지지하거나 도와주지 않으면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세상과 우리를 보게 하는
기준입니다. 저는 말씀과 그것을 우리에게 먹이시는 성령이 선한 목자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거짓 목자도 있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체제와 시스템 뒤에서 우리를 조종합니다. 그것을 찬양하고 선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조종당합니다. 우리나라의 주택보급률은 2023년 기준 102.5%입니다. 수도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구대비 초과 공급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죠. 식량은 더합니다. 현재 전 세계는 80억 명 이상을 먹일 수 있는 식량을
충분히 생산 중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는 7억 명 이상이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사실 집도 식량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에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불안과 탐욕이죠. 악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늘 불안함을 증폭시키고, 탐욕은 정직한 욕망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모두 탐욕을 부리니, 세상은 경쟁과 계급사회가 가속화 되고, 인간은 스스로가 그것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죄의 악순환입니다. 이게 아닌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살아갈 만큼의 몫을 갖게 되어도 멈추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는 끝없이 불안해하며, 조금 더 가져서 내 삶의 안정감을 스스로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에 ‘적당히’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초점과 마음 안에서는, 조금 더 가졌다고 그것이 정말 내 불안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무엇을 얻고자 할까요?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그렇게 허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이 세상의 흐름 가운데서 선한
목자의 편으로 돌아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이 땅에 조금이라도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죽임당한 어린 양 예수,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셔서, 평화를 이루시는 왕. 스가랴서의 이 모습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위로 올라가기보다는 섬김의 자리로 낮아지고, 내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골라 사귀기보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움켜쥐기보다는 손을 펴서 나누며,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에
둔 거룩한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가는 사람. 저는 이 삶을 꿈꾸고 소망한다면, 그것이 바로 스가랴서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삶을 살기 위한 무모한 용기는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을 진리로 붙든 자에게서 나오는 말씀 위에 굳게 선 삶의 능력일 것입니다. 오늘 스가랴가 보여주는 말씀의 빛을 따라, 내가 빛이 되어 어두움을 물리치기를 원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