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부터 16일까지 매일성경으로 묵상하시는 분들은 에베소서를 묵상하고 계십니다. 어제까지 4장을 묵상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과 다음주에 걸쳐서 2편의 설교로 에베소서를 다루고자 합니다. 마침 에베소서는 1~3장과 4~6장이 두 가지 주제로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저도 오늘은 1~3장을 본문으로 여러분과 에베소서 첫 번째 설교를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보통 처음으로 강해설교를 하는 책, 특별히 시리즈로 할 수 있을 때 첫 시간은, 에베소서를
여러분에게 소개해주는 소개팅의 주선자와 같은 마음으로 섭니다. 에베소서는 짧지만, 오늘도 간략히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주선자일 뿐, 여러분의 관심과 초점은 제가 아니라 에베소서라는 책에 있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썼다고 구분하는 책이 13권입니다. 물론 이 중에는 바울이 직접 썼다고 보는 책과, 바울의 권위 아래 그의 제자나 후대에 쓰였다고 논쟁 중인 책이 섞여 있습니다. 그 논쟁은 신학적으로는 충분히 타당한 것이지만, 어쨌든 저는 바울의 권위
아래 있으므로 우리가 13권의 책을 바울의 저서로 이해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13권의 바울서신 중에서 기독교 신학과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흔히 두 권을 꼽습니다. 하나는 그 유명한 로마서요, 다른 하나는 에베소서입니다. 유명한 강해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가 복음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라면, 에베소서는 복음을 가장 숭엄하고 가장 엄위롭게 표현한 서신’이라고 그의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서는 우리가 교회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와 성도에 대해 설명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작품’, ‘새 사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 ‘그리스도의 신부’ 등은 모두 에베소서에 나오는 표현들입니다. 또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말씀 또한 에베소서의 말씀이죠. 이런 것들만 보더라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얼마나 에베소서를 밀접하게 대하고 있는지,
또 교회 역사에서 에베소서가 얼마나 사랑받는 책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를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베소라는 도시는 어떤 도시이고, 바울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서 영적 교제를 시작했고, 지금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기에 바울이 썼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에베소서의 내용을 살아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터키)의 항구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고대에 리디아가 다스리다가, 페르시아 고레스가 정복하여 다스리고,
후에는 그리스의 알렉산더가 차지합니다. 그 후에는 여러 통치자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갑니다. 로마의 통치하에 에베소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죠. 사도 바울 당시에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로 발전합니다. 에베소는 정치적으로 아시아의 수도였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번영한 상업 중심지 중의 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이 선교했을 당시 인구가 20~25만 명 정도에 이르는 큰 도시였죠. 참고로 양주가 현재
23만 8천 명 정도입니다. 고대에 20만이 넘게 사는 곳이었으니 대단한 곳이었죠. 또한 에베소는 당시의 종교적으로 매우 신성한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에베소와 관련되어 꼭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행 19:28)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에베소는 그 유명한 아데미(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이 있던 곳이죠. 아데미 신전은 주전 6세기에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따지면 고조선 때 건축된 것입니다. 신전의 규모가 길이 130m, 폭 69m이고, 지름 2m, 높이 18m의 대리석 기둥 127개로 이루어진 엄청난 신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 아테네에 가서 볼 수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70m에 31m 높이 10m로서 크기로 보면 아데미 신전의 1/8에 불과합니다. 아데미 신전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 알 수 있죠. 그래서 아데미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데미 신전은 지중해 지역에서 신성불가침한 곳으로
간주되었어요. 에베소 시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아데미 신전의 관리자들로 자처했습니다. 3월과 4월에는 아데미 축제를 열었는데, 이때 수많은 순례자들이 에베소로 몰려왔기에, 이는 도시 경제 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가 바울이 선교를 하는 과정을 분석해보면 매우 전략적이라고 했지요? 바울은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선교지를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특별히 3차 선교여행은 소아시아 지역에 집중하는데, 그가 가장 집중한 곳은 자연스럽게 에베소라는 도시입니다. 그의
모든 전도여행을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인 3년을 머물며 에베소 사역을 진행합니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만큼 바울에게 있어서나, 기독교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나,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가 에베소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9장은 바울이 처음 에베소를 방문한 기록이 나옵니다. 바울은 늘 새로운 도시에 가면 일단 회당으로 갑니다. 그곳에 가면 종교에 관심이
많은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죠. (행 19:8)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반대하는 세력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뒤에는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을 거점으로 두고 2년 동안 에베소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칩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에베소에는 여러 가정교회가 세워집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에베소 인구의 10~15%는 유대인이므로, 일부 유대인들도 기독교로 개종해서 공동체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성원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죠. 말 그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행 19:20)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 말씀이 힘을 떨쳤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 아닐까요? 반면, 말씀이 힘을 떨치지 못했다면... 그것은
들은 자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말씀이 힘을 떨치고 있습니까? 에베소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합니다. 회심한 사람들의 삶이 변하지 않을 수 없죠. 그들이 이전과 다른 삶을 살기로 결단하기 시작하고, 그 결과 에베소 도시 전체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에베소는 아데미의 도시였기에 온갖 주술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비진리로 가득한 그런 책을 사람들 앞에 모아놓고 불태우게 됩니다. 이제 그것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결단이죠. 그때 불탄 책값이 5만 드라크마였습니다. 1드라크마가 하루 품삯이니, 하루 품삯을 10만 원만 잡아도 50억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심이었다는 것이죠. 저는 어려서부터 게임을 좋아했고 비교적 잘했어요. 저는 지금도 게임을 여가생활로 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해야 할 것을 못 할 정도로 하면 중독이죠. 그런데 제가 예전에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그렇게 했었어요. 특히 수능 끝나고는 거의 밤새는 날이 많았죠. 그래서 제가 생각해도
이게 심각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당시에는 게임을 CD로 구해서 했으니, CD를 부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구해서 하고 이래서, 제가 몇 번을 CD를 잘라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결단이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에베소라는 도시는 아데미 신전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축제 때마다 수많은 순례자가 방문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곳에서 아데미 신상의 모형품을 사서 돌아갔으므로, 그것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산업이 에베소에 있었죠.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아데미 신상은 우상에 불과하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아데미 신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죠. 이전까지 아데미 신상을 섬기는 일에 동행하던 사람들이 변화되며,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결국 이로 인해 큰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사람들이 바울의 동역자들을 붙잡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지켜서 그 소동에서 빼내죠. 결국 바울은 에베소 사역을 마무리한 후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고 몇 년 뒤, 그는 로마에 복음을 전하러 죄수의 신분으로 가게 됩니다.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로마로 가서 황제를 만나기 위한 선택이었죠. 그는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그의 종 오네시모를 만나게 되고,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빌레몬서’를 씁니다. 또한 그때 빌레몬이 사역하는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골로새서도 씁니다. 이 편지들은
‘두기고’라는 동역자를 통해 전달하게 됩니다. 그가 가는 길에 에베소를 거쳐 가게 되므로, 바울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써서 함께 보내게 됩니다. 그것이 에베소서입니다. 바울이 쓴 편지를 이해하려면, 저자 바울의 입장에서 그의 의도를 이해하며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통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선명한 복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구원의 영광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그들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바울의 일차적 목적이었습니다. 한번 바울의 그러한 목적을 기억하며 편지를 읽어봅시다. (엡 1:4)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엡 1:5)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음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이 되도록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창세 전이라는 것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기의 자녀들로 입양하시려고 하나님의 뜻과 사랑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예정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을 의미합니다. 시간 안에 머물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는데,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게 하셨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내가 주인 된 삶을 살고자 하나님 없는 삶을 택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갔지만, 그런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어 공허함과 허무함 가운데 허덕이게 된 그 모습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일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주셨기에 ‘은혜’입니다. (엡 1:6)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엡 1:7) 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늘 그런 분이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에도,
바로 그들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최초의 복음이죠. 또한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알게 되어,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을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정의로 인해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에 속한 인간은 하나님의 땅 에덴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심판이죠. 그러나 심판을 하시면서도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하나님은 갖고 계셨어요. 우리에게도 오늘날 적용되는 정의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자신의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엇입니까? 자격 없는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계속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며 함께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단하면 우리 안에 들어와 도우시며 하나님 나라를 경험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아들이 스스로 결단하여 떠나면 그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을 다해 돌아오면 그 전의 모습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나와 함께 다시 사랑하며 살자고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일어난 그 변화를 잊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 2:1)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엡 2:2)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엡 2:3)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가 회심하기 전에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였습니다. 제가 자주 쓰는
예화와 같이 하나님이 나무요, 우리는 가지와 같습니다. 가지가 살아있는 것은 가지의 힘이 아니라 나무의 생명력에 우리가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지로 지어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생명력을 누릴 수 있다고 여겨서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그 결과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죽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죄를 범하고서야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것과 같죠.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을 때,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없던 시절에는 자기중심성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도 모르고, 세상이 다 그렇게 사니까, 남들 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거짓된 속삭임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가 그렇다고 속삭이죠.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도 우리는 뭔가 비어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공허함을 채울 방법을 모를 뿐이죠. 진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신의 정욕이 원하는 대로, 그저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자녀가 아니라 진노의 자식, 즉 심판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그런 우리를 향하여 창세기에서 약속하신 구원의 계획이 실행됩니다. (엡 2:5)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엡 2: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그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이 맛보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우리를 살리시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우리의 구원을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구원 이후에 대한 비전이 있으세요. (엡 2: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것을 늘 쉽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결혼의 목적은 함께 살아가는 삶에 있지, 결혼식에 있지 않습니다. 결혼식이라는 결단을 통해 우리는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듯, 회심으로
얻어지는 구원을 최종 목표로 여기는 삶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늘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구원받은 각 사람을 통하여 함께 하고 싶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 사명으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을 우리도 바라보게 되죠. 하나님의 사랑이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있기에 나도 구원받은 것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고
삶 가운데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해답이 되어주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으면 그것이 선교이고 전도이죠. 사전적 의미로 ‘선교’는 종교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고, ‘전도’는 도를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전도는 복음을 전해서 우리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고, 선교는 다른 교회로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냥 전도나 선교나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역이든 그 사람의 삶이든
말입니다. 예배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돕는 일이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겠죠.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전도’라고 하면 매우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물론 너무나 감사하게도 제 삶 가운데 저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거나, 저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게 된 사람들, 회복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전도’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전도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제가 누군가를 제 능력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복음을 잘 설명해주고, 그 복음 때문에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진실되게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 진실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복음으로 인해서 이렇게 변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하기 전에는 때로는 공허함과 절망감과 무력감 가운데 넘어질 때가 있었으나, 복음으로 인해서 새롭게 되었다.
그래서 만약 너에게도 삶을 살아가면서 혹시 내가 느꼈던 갈증과 어려움을 느낀다면, 너도 한번 진지하게 이 진리를 탐구해보길 바란다.” 저는 이것이 최고의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선택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가 믿어달라고 애원할 필요도 없고, 우리는 복음을 부끄럽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진짜 좋은 것을 가졌으니, 우리는 그것을 잘 누리며 그것이 왜 좋은지를 잘 나누면 될 뿐이죠. 만약 진짜로 복음이 변화시키고 있는 여러분의 삶이 그 사람에게 목격되고
있다면, 여러분이 설명한 그 복음은 그 사람의 삶에 메아리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복음의 증인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가 주는 절망에서 회복시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소망으로 새롭게 하시고, 그런 우리를 통해서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깨어짐에서 하나됨으로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 회심의 과정은 죽어있는 문자나 기록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회심은 매우
실제적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과정에서 돌아서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경에서 늘 인간은 하나님이 안 보이면 이내 마음을 바꾸고, 돌아서기 일쑤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회심한 이후 우리의 삶을 그냥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고아 같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죠. 제자들의 모습을 기억하시죠. 예수님의 존재로 인해서 제자들은 그분만 있으면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이 눈에서 안 보이면 이내 위축되고 소심해지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떠나시며 그런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설명해주십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렇게 말씀해주시면서 성령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제자들의 보혜사였습니다.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가더라도 또 다른 보혜사가 제자들에게 올 것을 약속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잠시간 그들과 함께했지만,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너희는 혼자가 아니야.”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강조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제자들이 보기에는 가장 큰 두려움이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남으로 인해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그것이 더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의 몸을 입은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계심으로 인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확실성은 있지만, 그러나 육체의 한계 안에서 일하시게 됩니다. 갈릴리에 계시며 동시에 유대에 있을 수 없고, 유대에 있으며 동시에 사마리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재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므로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안에 살도록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예전에 표현한 도표를 다시 인용하자면 죽음의 웅덩이에 빠진
우리에게 살길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이죠. 믿음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면 살 수 있다라는 것을 진짜로 받아들이고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반응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의 구원의 여정에 보혜사가 되시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죠. (엡 1: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엡 1:14)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너는 이제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너는 이제 내 것이 되었다고 도장을 찍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유효하다는 담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며 우리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증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더욱 누릴 수 있습니다.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엡 1: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과 지금 멀리 떨어져 있지요. 그러나 자신에게도 경험되고 있고, 또한 회심한 에베소의 신자들에게도 경험되고 있는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다시 나누며, 그 은혜 안에 살아가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구원하셔서 충만케 하시는 그 은혜가 너무 소중하므로, 사랑하는 에베소 성도들도 계속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서 자신이 누리는 그 행복을 누리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이 편지를 어디에서 썼는지 기억하시죠. (엡 3:1) 그러므로 이방 사람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나 바울이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로 가서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그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이 예수를 열심히 믿었는데, 그로 인해 마주하는 상황이 감옥이라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아니 그렇게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이 열심히 예배하는데, 여러분이 마주하는 상황이 여러분이 기대했던 것들이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아시겠지만 바울에게도 질병이 있었습니다.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하죠. 바울은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십니까? 아닙니다. 바울의 원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그 안에서
깨닫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내가 약한 그때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엡 3:7) 나는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이 작용하는 대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따른 것입니다. (엡 3:8)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엡 3:9)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이 사용되는 것을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 그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라고, 다른 곳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러나 그런 자신의 부족함이 그의 키워드가 아니라, 그런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그는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누리고 있다고, 그것을 아직 하나님이 없어서 그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 은혜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워진 자신의 삶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그것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로마의 지배 아래서 주어지는 거짓된 평화가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자신을 변화시킨 복음의 진리를 갖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행 26:29b)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저는 우리가 바울의 이 간절한 기대처럼, 그가
경험한 하나님 나라를 함께 경험하며, 그가 충만하게 누렸던 성령의 임재를 날마다 고백하며, 복음이 바꿔버린 삶에 대해서 노래하며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감사하게 신대원에서 후배들에게 개척했던 과정을 소개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로 초청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귐의교회의 첫 목표는 이곳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회복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겠죠. 그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고백하며 주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교회 안에 그러한 회복과 증인된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선명한 복음 안에 자신의 삶의 이유를 깨달은 사람들이 다시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사용하는 아름다운 헌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육도 저에게 따르미로서 복음에 대해 들었던 사람들이, 이제 누군가의 이끄미가 되어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진행된 후, 모두 모여서 후기 모임을 진행했는데,
그날 모임을 마치고 제가 썼던 글이 하나 있습니다. 요즘에 많이 나누는 이야기가 '복음의 전수'에 관한 것이다. 금요기도회 설교도 마침 그것이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반드시 변화시킨다고 나는 믿는다. 삶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침묵할 수 없다. 그에게 하나님의 눈과 마음, 뜨거운 사랑의 심장이 심어졌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영혼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관심을 갖고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의 변화는 곧 너의 변화이자
우리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것이 교회의 생명력이다. 처음 1:1 양육을 시작했을 때, 이렇게 빨리 동지들을 얻게 될 줄 몰랐다. 양육을 '따르미'로서 받은 사람들이 이제 어느덧 다른 사람을 이끌어주는 '이끄미'들로 세워졌다. 이들을 통해 복음이 계속 전수되고 있다. 저 사진 속의 '따르미'들도, 또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의 '이끄미'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지난 2000년 동안, 복음이 그렇게 흘러왔던 것처럼..! 저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을 해나가시는데,
놀랍게도 너무나 연약한 우리를 그 일의 동역자로 사용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를 그저 손님이 아니라, 우리를 정말 자녀 삼아 주셔서 아버지가 해나가시는 가장 아름다운 일에 함께하자고 하여 주시니 너무나 좋습니다. 교회에 여러분이 나오시면 다른 것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선 복음을 마주하십시오. 다른 것을 하다가 정작 복음을 내 마음 가운데 품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를 바꾸어 가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를 찾아오신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 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가장 큰 꿈은 이곳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함께 회복되고, 함께 하나님의 꿈을 꾸며,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흩어진 삶에서 빛의 전달자, 소망의 등불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함께 나눈 복음의 진리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 여러분의 삶을 타고 흘러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