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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살아가는가" / 강정규 목사

2022-09-04 · 데살로니가후서 1-3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여러분은 이런 궁금증을 가져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제게는 어린 시절 무척이나 궁금했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질문이죠. ‘왜 우리는 살아가는가?’ 제가 철학적이어서가 아니라, 궁금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제 인생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입니다. 우선 우리는 태어났으니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교회를 다니게 되었어요. 제게는 저의 선택도 아니었죠. 그 유명한 모태신앙. 내가 결정한 신앙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못 하는 모태신앙.

한 번쯤은 자기 결단이 꼭 필요한 신앙이 모태신앙이죠. 내 선택으로 이 길을 가겠노라고. 아무튼 교회를 다니다 보니 ‘천국’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은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이런 것들이죠. 어린 저에게 있어서, 교회에서 말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서 갖게 된 생각은, 천국이 그렇고 좋고 이 세상은 내 집도 아닌데…. ‘나는 여기에 살아서 무엇하나?’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저를 막는 생각들이

있었어요. 또 자살하면 안 된대요. 그럼 지옥 간대요. ‘야... 참 이건 뭔가? 그럼 나는 내 집도 아닌 불편한 이 세상에서, 주님이 불러주실 때만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우리가 이미 구원은 받았다고 하고, ‘구원 받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면 믿음이 없다고 하고, 내가 교회를 다니니까 죽으면 천국에는 갈 것 같은데, 도대체 거기 갈 때까지 이 세상에서 무엇 하며 살아야 하나? 이런 것들이 신앙을 접한 이후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저와 비슷한 시대에 교회생활을 하신 분이라면, 제가 이해한 것이 틀린 이야기가 있나요? 아니죠. 그때는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저는 막연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 이야기를 조합해보면 저는 도저히 이 세상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바라보는 삶은 조금 허무했어요. 뭔가를 여기서 간절히 꿈꾸기에는 너무 세속적인 것 같고.... “그냥 지옥에 갈만한 죄만 짓지 않고 적당히 살자.”

이게 어린 시절 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엇나가지는 않았죠. 그러나 삶이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예전에 한 번 공개한 적이 있는데,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저희 반에서 학급문집을 만들었어요. 글을 하나씩 썼죠. 그중에 선생님이 몇 개의 글이 인상적이었다고 읽어주었는데, 제가 쓴 글을 읽고 모두가 빵 터졌습니다. 왜냐면 6학년의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제목 : 과연 내 생활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 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과연, 내 생활에

재미있는 게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하는 대로 해왔다. 아이들은 다과회, 학예회, 무슨 여행을 하면 재미있다고 하지만 난 재미가 없다. 그래도 내 삶에서 가장은 아니지만 강아지와 노는 것, 자전거 타는 것, 책보는 것이 좋다. 그냥 나는 다른 아이가 하는 대로 할 뿐이다. 이것이 제가 6학년 때 실제로 쓴 글의 일부입니다. 엄청나죠? 이 우울함과 공허함. 지금 봐도 ‘허무주의’가 가득한 모습 아닙니까? 삶은 재미가 없고, 난 왜 사는

것인지 잘 모르겠고. 그냥 남들처럼 살아갈 뿐이고... 저는 삶에 대한 소망 자체가 그다지 없는 사람이었어요. 하루하루 그냥 남들 하는 것만큼만 하면서 사는 거예요. 좋아하는 색깔, 회색. 그래서 선생님이 이 글을 읽어주시며 6학년이 아니라 60세쯤 돼서 쓴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런데 정말 제 생각과 제 삶의 태도가 저랬습니다. 이때 제 인생의 목표는.. 그래도 너무 빨리 죽을 수는 없으니 적당히 살다가 60세에 죽는 것이었어요. 뭘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장래희망 물어보면 남들 다 이야기하는 과학자, 뭐 그런 것 적는 사람이었어요. 실제로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안하고. 그렇다고 막 우울하게 산 것은 아니고, 그냥 이런 고민을 남들 모르게 품은 채,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제 삶을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그냥 지나가는 인생, 어쩔 수 없이 버티는 인생. 아마 지금의 제 모습을 보는 여러분들은 좀 적응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딱 저였어요. “그냥 남들처럼 살다가, 뭐 죽으면 나는

그래도 천국 가겠지.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서 뭐 하나. 난 그냥 대충 살다가 주님 만나러 가야지.” 뭘 하면 재미있을까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과연 내 생활에 재미있는 것이 존재나 할까 의문이라고 말하는 것. 그냥 남들 하는 대로 살아봤는데, 남들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도 난 하나도 재미없고. 그냥 사는 인생. 10대의 제가 왜 이런 생각을 갖고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공교롭게도 신앙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느끼는 신학적 위기감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모태신앙으로 평생을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배우며 자라긴 했지만, 조금은 왜곡되고 기울어진 상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삶을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는 상태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 그나마 조금 기쁘고, 교회 밖에서는 지겹고. 그런데 지금 목사가 된 입장에서 저는, 그 시절의 제가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을 이해합니다.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의 저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한 끗 차이일지 모르는데, 복음이 잘 정리되면 그것이 우리를 생명력 있게 살게 하지만, 그것이 잘못 정리되면 삶을 대하는 태도를 그릇되게 만듭니다. 저의 저런 삶의 태도는 단순히 저 때뿐이었겠습니까? 아니죠. 저 글을 쓰고 얼마 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가정이 저희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박해와 핍박. 그로 인한 어려움.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 뭐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이

뛰고 막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그냥 작은 마음을 살짝 먹어보게 되었어요. 어차피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소원인데, ‘내 삶 속에서 뭔가 해볼 만한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고, 선교사가 필요한 나라들이 있다고 하니,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삶이나 해야겠다. 나는 어차피 삶에 대한 간절함도 크지 않고,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신은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이 저런 곳에 가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를 꿈꾸게 되었어요. 분명히 한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있어서 그런 마음도 먹었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답답한 내 삶의 한 가지 길이 생긴 것이었어요. 신앙을 지키면서, 멋지게 살면서, 폼나게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 말입니다. 그것도 가급적 조금 빠르게. 그래서 저는 항상 가장 위험한 나라에 선교하러 갈 생각을 갖고 살아갔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은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저는 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그냥 스스로 열심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내가 뭔가 나를 위해 열심히 하면 그것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내가 뭔가 뿌리내리고 살겠다는... 마치 신앙에 반하는 행동처럼 생각했어요. 그래서 딱 넉넉히 신학교에 갈 만큼만 했습니다. 1지망 성결대 신학부, 2지망 성결대 신학부, 3지망 성결대 신학부. 제가 그 정도 성적은 넉넉히 냈기에 부모님 면담도 안 하고 원서를 써주셨어요. 가서도 공부? 안 했습니다. 신학교에 왔으니 열심히 예배하고, 봉사하고, 사역하고,

헌신하지만.... 내 성공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겠다...! 제 신앙이 늘 그랬던 것이죠. 아주 당당하게 그것이 옳다고 여기며 말입니다. 때로는 열심히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을 내심 정죄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제 비전은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 순교. 제가 살아왔던 모든 삶의 가치와 맞는 길이잖아요. 오지에 가서 복음 전하다 장렬히 순교하는 것. 이것은 제 결혼관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저의 이상형? 하나님이 가라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호감이 생기고 고백을 하고 연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마지막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순교까지도 꿈꾸는 사람인데, 당신에게도 하나님이 가라시면 어디든지 갈 마음이 있느냐?” 저도 미쳐있었지만, 당시에는 아내도 미쳐있어서 ‘OK.’ 그래서 연애를 시작했어요. 다행히 20대부터 하나님이 조금씩 저를 다뤄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가진 생각들이 조금씩 깨어져 나갈 수 있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부정적 측면들이 조금씩 깎여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비로소 제가 귀를 열었기 때문이에요. 20대에 하나님이 주신 도전이 있어서 드디어 진지하게 공부를 해보기로 마음먹고 다양한 책과 강의를 듣고, 진정한 의미의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거든요. 제 신앙을 객관화할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 이상한 소신으로 공부를 멀리했으니, 제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 계속 살아갔던 것입니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죠. 그게 전부인지 아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삶이 가진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삶은

그냥 복음을 듣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을 위해 존재할 뿐, 그 이후의 삶은 온통 죽음을 위해 소모되는 무의미한 길과 같이 여겼던 것이죠. 만약 지금 누군가가 여전히 그런 신앙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면, 저는 단호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제가 저의 10대와 20대의 삶에 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본문이 데살로니가후서인데, 이곳에는 마치 저와 같이 균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삶의 태도 또한 비관적이며 냉소적이고 무책임했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 주어진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지도 않고, 아무런 책임과 열정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그러한 행동이 신앙 있는 태도라고 스스로 여기는 것입니다. 제가 2019년에 데살로니가후서 이미 한번 설교했었는데, 그때 설교의 제목이 ‘워워밸’이었습니다. 요즘에 ‘워라밸’이라는 표현을 잘 쓰잖아요. ‘Work and Life Balance’의

발음을 우리말로 줄여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직장’과 ‘개인 생활’의 밸런스를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개발도상국 시대를 살던 세대와 달리 소처럼 일만 하지는 않겠다는 요즘 세대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그럼 워워밸은 무엇인가? 일(work)과 예배(worship)의 조화(balance)를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데살로니가후서의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과 일터의 삶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것 말입니다. 쉽게 말해, 좋은 신앙인은 일터에서도 좋은 일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비록 죄로 인해 망가지고 깨어졌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버리시지 않은 것처럼, 이 세상도 저는 버리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통치가 드러나는 곳이 되기를 소망하십니다. 건강한 신앙은 그러한 균형을 갖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에 가까이

서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 설교에서 다뤘던 내용도 그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 해주신다는 태도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한쪽으로 쏠려버린 신앙의 태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도 주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해나가고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야만 한다고 여기면 그 또한 잘못된 신앙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최선이란 때론 예측하지 못하는 변수들과 방향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좇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일까 질문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박해의 상황에 직면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재림의 소망’에 대해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러한 말씀과 같죠.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데살로니가전후서에는 실제로 종말의 날과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 신앙의 요소 가운데 ‘소망’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가운데 <마라나타>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소망을 담은 기도문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믿음의 싸움을 인내하는 그들의 신앙적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악한 것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을 믿으며, 힘든

환경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소망의 인내를 해나갈 것을 다짐하는 그러한 태도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영상 설교로 나눴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리지만 멋진 모습의 교회였습니다. 목회자 바울이 없이도 자신들의 자리에서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이 첫 번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낸 후 오래되지 않아서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여전히 이들의 상황은 박해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편지도 이렇게 그들의

모습을 칭찬합니다. (살후 1:4)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간직한 그 인내와 믿음을 두고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고난을 겪고 있지만, 주님이 행하실 정의 또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주께서 오시는 날 주님의 찬란한 권능 앞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가 오시는 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을 높이고

찬양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지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이상한 신앙적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부류들은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다른 길로 갔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말 그대로 한가지 측면에서만 그것을 바라보다 보니 오해하게 된 측면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죠.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주님의 날이 이미 임했다고 했는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성경의

구원론을 이해하고 있기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도표로도 여러번 설명해 드렸죠. ‘이미와 아직’ 사이를 우리는 살고 있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놓쳐버리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는데 내 삶은 왜 이러지?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살후 2:2) 여러분은, 영이나 말이나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에 속아서,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살후 2:3a)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공존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궁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 우리가 자칫

중심을 잃기 쉬운 중요한 신학적 이슈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저에게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럼 제게는 무엇만 있었어요? 죽음 이후에 가게 될 하나님 나라만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 삶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누리고 내 삶을 드려서 헌신할 하나님 나라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그러한 신앙적 기쁨을 누리려면 뭐해야 해요? 빨리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하니, 이 땅에서는 최대한 죄를 짓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 최대한 얌전하게 살다가 죽어서 그 나라 가기만을 기다리는 이상한 삶의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이미 임했다는 쪽에 꽂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삶은 왜 이 모양인가? 그래서 바울이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데살로니가후서를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그날에 대해서는 누구도 특정해 말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날이

다가오면 성경에 약속된 예언들이 성취되고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니, 그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히 그러시겠지만, 자신들만 특별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무리들을 조심하십시오. 일반 교회들은 모르는 특별한 비밀을 우리만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 이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만 특별히 말씀하신다고 말하는 자들을 더욱 조심하십시오. 안타깝게도 잘못된 신앙관은 잘못된 삶의 태도를 만듭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내팽개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신앙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잘못된 신앙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가운데 잘못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그 원인은 크게 2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곧 오실 텐데 일해서 무엇하냐? 이런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마치 이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태도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삶을 최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태도가 기독교인의 태도와 같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마땅히 가져야 할 성실한 삶의 태도보다, 로마 사회의 유력자들의 하수인이 되어 그들의 죄악 된 삶에 동참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신앙에 입각한 삶보다는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쉽고 편하게 살자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기독교인의 경제생활에서 2가지를 멀리해야 합니다. 1) ‘불로소득’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성실하게

일하여 노동의 대가로 살아가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 고민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참 많은 요소가 불로소득과 유사하게 결합되어 있어 명명백백하게 하나씩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율법적으로 구분을 짓기보다 신앙에 기초한 삶의 태도로서 각자가 최선을 다해 판단해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양심적으로 판단하여 여러분의 삶이 불로소득에 기대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2) ‘불의한 소득’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로마

사회는 후견 제도가 있었습니다. 즉,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후견인이 되고 피후견인으로 그를 따르는 삶을 살면 지원을 받는 것입니다. 노예제도와는 조금 다르지만 많은 부분에서 후견인의 삶에 종속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피후견인은 후견인을 섬깁니다. 그러나 그 섬김은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돈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후견인에 대한 의무 때문에 신전에 가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뇌물을 주고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이런 부분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 그런 피후견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피후견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의한 일에 동참하게 되는 일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정직하고 옳은 일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서 일하여 먹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불로소득과 불의한 소득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데살로니가후서 3장의 내용입니다. 사실 당시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피후견인이었습니다. 후견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을 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무엇을 합니까? 복음을 전하되 일하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이 누군가의 피후견인이 되어 살아가며 복음을 전한다면, 마치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이 하는 이야기쯤으로 들릴 것을 경계했던 것이죠. (살후 3: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무절제한 생활을 한 일이 없습니다. (살후

3:8)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은 일이 없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살후 3:9) 그것은,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삶을 살았기에 그가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 유명한 말씀이 나오죠. (살후 3:10)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살아가되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모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다 피후견인이 되면 편하고 좋다고 말하고, 불로소득과 불의한 소득을 추구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면 단호히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살후 3:11) 그런데 우리가 들으니,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살후 3:12)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하며, 또 권면합니다.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그래서 하면 안 됩니다.

루터가 고백했듯, 우리가 노동하는 모든 현장은 하나님 앞에 성직이며, 소젖을 짜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이 유독 학벌을 줄 세우고, 직업군을 줄 세우고, 사는 지역을 줄 세우고... 이런 환경 가운데 우리는 살아가지만, 우리도 그런 가치관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내 삶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땀 흘려 일하며, 고단함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여러분이... 그리고 충분히 쉬고 싶은 마음이 있고, 주말에 놀러가고 싶은 마음도

있겠으나, 내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기에 예배하러 나온 여러분들이 저는 복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설교 초반에 저의 이야기를 나눴지만, 저의 균형잃은 삶의 태도는 진리 안에서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이해하다 보니, 내 삶이 단순히 내가 구원을 받는 것, 천국 가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나 한 사람 구원받는 아주 그런 작은 일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목표라면 우리는 이미 회심하여 그 구원에 참여했다면

남은 삶은 어떤 목적으로 사시려고요. 무의미해 집니다. 회심은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 이후 우리의 삶은 천국을 기다리기 위해 소모되는 막연한 시간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심 이후 우리의 삶은 현재 임해있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깊이 경험하고, 또 알려줄 수 있는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를 얻는 시간이고, 그 의미 있는 삶의 출발선에 서는 것입니다.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회심한

이후,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며, 핍박을 당하며, 스스로 노동하면서 죽어라 일하고, 결국 순교 당해 죽는 삶을 살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그가 보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애씀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기쁨 말입니다. 어린 시절 제가 가진 삶의 태도가 허무함이었다면, 저는 지금 제게 주어진 삶을 아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들이 너무나

기대되고 그 일에 참여하여 살아가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가면서, 우리의 깨어진 부분들이 회복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함께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 너무나 가치 있고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 소중함을 아는 만큼,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그것이 바울이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였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모여 예배하는 우리들의 삶의 이유이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왜

우리는 살아가는가? 우리의 삶은 단순히 천국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땅에 살아가지만 임해있는 그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신비를 누리는 시간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누리며, 변화된 삶을 증언하고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더욱 소망하며, 내게 주신 사람들과 소중하게 동행하는 한 번뿐인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신 이가 있고, 주신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

때 가장 행복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지 그 해답 또한 우리에게 삶을 주신 분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그러한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서 주님은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있는 이유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가장 강력하게 경험하고 증거하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세워지고 존속되고 있는 것에도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10개 교회가 세워지면 12개 교회가 사라진다고 하는 시대에 우리는 5년 동안 살아있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난주까지 저희교회에 올해 등록한 새가족이 47명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45명인데, 올해는 더 많은 사람이 사귐의교회의 가족이 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때로는 이제 조금 무섭습니다. 아마 제힘으로, 혹은 우리 힘으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겼으면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르고 계신 것이라고 믿고, 우리 교회를 통해서 주께서 회복시키고 변화시키고,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해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혼들을 돌아오게 하고, 상처와 깨어짐이 있는 사람들은 잘 품어서 회복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고, 조금은 왜곡되고 균형 잃은 신앙 가운데 혼란스러운 사람들은 말씀의 진리로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족한 우리를 부르셔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바꾸어 가시고, 또 여전히 이 시대에 그런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시어, 함께

그 변화의 기쁨과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노래하고 증거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재림이 언제일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누리며 나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을 소중히 여기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아껴서,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행복으로 채워가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