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새로운 삶의 방식

2025-03-23 · 누가복음 12~13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 복음의 핵심 : 하나님 나라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가?” ‘사랑’은 중심사상이라기보다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 알려주고 싶었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삶의 방식이 ‘사랑’인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사랑’을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이 주시는 진리의 핵심이라는 것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또한 ‘하나님 나라’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천국’보다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이유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 싶은 이미지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번 이 시간 ‘천국’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떤 밝고 환한 장소, 혹은 보물이 가득한 어떤 장소 등 ‘장소’를 떠올리게 됩니다.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장소적 개념의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해석은 21절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21절을 오해해서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하니까, 우리의 마음에 임하는 평안 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 또한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너희’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닐테지요. 그러므로 이 장면은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기에 너희 안에는 ‘그들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다’라는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는 어색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언어와 성경의 언어가 가진 뉘앙스의 차이 때문입니다. 언어는 단어 이상의 의미와 이해를 갖게 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마음’을 ‘mind’라고 영어로 해석할 경우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 ‘가슴’을 만지지만, 영어권 사람들은 ‘mind’를 생각하면 ‘이마’를 만지죠. ‘나라’가 이와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나라’는 ‘장소적 개념’보다는 ‘관계적 개념’입니다. ‘나라’를 의미하는 ‘바실레이아’는 왕을 의미하는 ‘바실류스’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왕권’, ‘왕의 통치’가 중요한 개념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를 나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

안에 있을 때, 그것이 ‘바실레이아’에 속한 것입니다.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이 왕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직접 실현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죠.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의 사역을 통해 깨어진 세상에서 구원의 자리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정복하지만, 그분은 사랑과 낮아짐과 희생을 통해 그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반응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신앙의 가장 본질입니다. (눅 12: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의미는 그분과의 참된 관계를 추구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면, 성경이 말하는 것들이 총체적으로 정리됩니다. (2) 죄와 회개 : 하나님 나라로의 첫걸음 많은 분들이 풍삶초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으로 ‘죄’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렇죠. 우리는 죄를 많이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성도님들은 ‘죄’가 ‘자기중심적 태도’를 의미한다고 대부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왕 되심 아래 있었죠. 즉,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었습니다. 에덴은 그분의 뜻과 질서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원형입니다. 그곳에서 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말하는 핵심이 그것이죠.

열매를 먹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버린 행위가 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면, 그 반대개념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중심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상태를 어둠, 죽음, 깨어진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회복하기 원하시죠. 회복이란 하나님과의 깨어지기

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그 공동체 안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다시 추구하며 살겠다는 돌이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회개’가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눅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며 거짓 진리와 가치관과 죄악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입니다. 어디로요? 하나님 안으로 말입니다. 이 일에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잘못들에 대한 회개도 필요하지만, 내 삶의 주인 됨, 그 방향성에 대한 궁극적 회개를 ‘회심’이라고 부르죠.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히 '내가 죄를 지었어'라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주님이 왕 되시도록 영역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이런 회개가 있다면, 우리의 삶에는 전과 다른 여러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수반될 것입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포기하지 않는 자아,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계획을 우선하는 태도가 있다면 그것들이 여전히 우리가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할 삶의 실제적인 부분들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시죠.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께 속한 삶의 가장 큰 유익은 우리 삶의 변화입니다. 특별히 너무나 깨어진 이 세상은 우리를 망가뜨리기 너무 쉽습니다. 성경 시대의 세계관으로는 우리를 괴롭히던 깨어짐의 현상들을 악한 영의 영향으로 이해했습니다. 주님은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켜내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왔으니, 이제 그분께 나아오는 자는 구원과 회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고 가셔도 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구원과 회복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오셔서 함께하시며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성장은 하나님의 통치로 한걸음 나아가느냐, 자기중심성에 한걸음 묶여있느냐의 싸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는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무기입니다. 핵심은 ‘그를 통해 내 뜻을 이루느냐’, 아니면 ‘그를 통해 내 뜻을 이기느냐’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예배는 내 뜻을 이기고 하나님 뜻대로 한걸음 나아간

자에게는 그로 인해 세상이 주는 역풍을 맞느라 힘겨웠지만 ‘위로’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 이게 맞지.” 그런데 여전히 내 뜻이 중요하고 그것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 강하다면, 예배는 그것을 내려놓고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아픈’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뜻을 죽이고 주님을 따르기 위한 전환의 과정이라면, 그것이 내가 예배를 통해 살아나는 시간이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삶에서 이루기 위해 힘쓸수록 때로는

억울함도 생깁니다. 세상은 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거슬러 살면서 의심과 불안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배를 떠나 있으면 우리는 그런 감정과 불안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배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그런 우리의 삶의 걸음을 위로하시고 확인해주십니다. “그래, 이게 맞지. 이렇게 사는 거지.” 말씀을 통해 내 삶의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 나아갑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잊을 때도 있지만, 내 삶에 함께하는 성령님과

공동체를 발견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3) 새로운 삶의 방식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회개하고 회심하여 하나님의 통치 안에 살아가는 일이라면, 그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돌아서지 않을만큼 단단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내 삶에 내면화하고, 그 가치를 흔들림 없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여러분들 중에 아직 회심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끊임없이 ‘회심’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회심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초청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회심한 분들에게는 다시 돌아서지 않도록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사는 삶을 깊이 추구하고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방식이 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목양’이고 ‘제자훈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양을 한다는 것은 ‘회심’의 고백을 지켜내고 추구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의 과정 또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선명히 하며 함께 훈련해가는

것입니다. 훈련 없이는 내면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면화 하여 삶의 방식이 바뀌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길에 들어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전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로 권면하기 시작하십니다.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눅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눅 12: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눅 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와 세상의 통치를 비교하며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힘이 우리의 목줄을 붙잡고 있습니다. 내 밥줄도 거기에 달려있지요.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세상의 이야기들도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속한 사람들은 그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누군가에게는 ‘위로’이고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입니다. 바로 세상의 어떠함 속에도 하나님을 따르느라 힘쓰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이죠. 반면 세상에서 타협하고 하나님의 뜻을 쉽게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이야기입니다. 시장에서 가장 가치가 낮은

참새조차도 하나님은 그 존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 늘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은 하나님께도 부인당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은 삶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모습을 지켜내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일에서 물러나지 마십시오.” 그것이 부인하지 않는 삶입니다. (눅 12:16)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눅 12: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눅 12:18)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눅 12: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눅 12:20)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눅 12:21)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하나님을 따라야 할 영역 가운데 중요한 것이 ‘물질’에 대한 태도입니다. 저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신 양용의 교수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갑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분이 교수님인데 우리한테 그렇게 가르쳐서 본인이 좋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분은 성경학자로서 특별히 복음서와 하나님 나라를 평생 연구한 분으로 매일 저희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애쓰셨어요.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는 자에 대하여 다루십니다. 그 결과 그의 창고는 부요해졌으나, 그것에 힘쓰는 동안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가 되고 맙니다. 성경에서 이는 가장 어리석은 자로 표현됩니다. 가치 판단을 잘못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 갈등하는 이유 중에 ‘욕심’도 있지만, 때때로 ‘불안’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을 사랑한다기보다, 돈이 없을 때 당할 어려움에 대한 ‘불안’이 우리로 하여금 물질에 대한 욕심을 일으킵니다. “나는 부유하려는 것이 아니야. 최소한의 안정성을 누리려는 거야.” 이것이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목사 이전에 한 인간으로 동일한 마음 앞에 서 있습니다. 저의

불안한 마음과 제가 믿는 말씀의 진리 안에서 충돌할 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삶을 택하기 위해 저도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기도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그 불안함을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것도 ‘잘못된 마음’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우상숭배의 기원 또한 다 그런 불안함에 대한 해결에 있는 것이죠. 배를 타는 사람이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하고 출항합니다. 불안 때문입니다. (눅 12:22)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눅 12:25)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눅 12:28)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눅 12:29)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눅 12:30) 이런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보호’를 믿는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나라가 생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나라의 백성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그 나라의 보호를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삶의 많은 에너지를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데 써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믿어요. 하나님을 따르는 내 삶을 지켜주신다고 믿습니다. 더 많은 것으로 안정을 누리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고 욕심이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은 주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지켜지느냐? 부자가 쌓은 돈도 그를 지킬 수 없었고, 우리가 아무리 건강을 걱정한다고 해도 그 또한 우리의 힘으로 지킬 수 없습니다.

즉,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는 우리의 한계에 대한 인정과, 그 한계 너머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 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위로이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약속이고 우리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짜 우리에게 필요하신 것은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불안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훈련하며 그분의 살아계심을 경험합니다. 바로 이런 실제적인 부분에 대하여 우리의 믿음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가, 이방 사람의 삶의 방식인가? 저는 우리가 이방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삶의 방식으로 한걸음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저도 압니다. 우리는 종종 버겁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한데, 이 작은 삶에도 참 돌봐야 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종종 버겁고, 아무리 애써도 모든 것을 충분히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불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추구하며 살아내려고 애쓰지만, 저의

한계에서는 충분치 못하며 놓치게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때때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자녀 양육에 세상의 기준만큼 시간을 쓰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잘 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끝도 없고, 저의 삶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도 있기 때문에 고민하며 저의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없는 영역, 저의 부족함의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산다고 애쓰면서 혹시라도

생기게 될 자녀 양육의 공백을 도와주십시오. 저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이라도 아이들과 더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미처 돌보지 못하는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돌봐주십시오.” 제가 설령 자녀 양육에만 온통 집중한다고 해도 저는 그것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아무리 내가 내 건강과 안전을 위해 힘쓴다고 해도 그것이 온전하지 못함도 압니다. 최선을 다해서 내 삶을 잘 사용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힘써보아도, 결코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만족할 만큼 다 해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한 삶을 살면, 주님께 맡긴 삶은 주께서 책임져 주시리라. 당연히 일, 가정, 건강, 신앙, 사역... 다양한 부분에서 우리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팽개칠 수는 없죠. 그러나 내려놓음도 필요합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그 이상의 것은 맡기고 나아가야죠.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실 것이라 믿어요. 나에게 주시지 않는 것은 나에게 그것이 없는 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믿어요. 저는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것이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삶의 방식입니다. (4) 좁은 길을 걷는 이들에게 (눅 12:32)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저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단어가

눈에 들어왔어요. ‘적은 무리여.’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소수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세요.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면 그가 우리 안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그 원함이 없는 것이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다른 것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이렇게 산다고 따라가지 마십시오. 세상은 우리와 가는 길이 다릅니다.

물론 여러분도 잘 판단하셔야 합니다. 만약 세상이 추구하는 그 삶이 더 좋고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아마도 제가 아무리 어떤 설교를 해도 여러분은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갈등은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12: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눅 12: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눅 12: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이것이 진리의 특성입니다. 복음은 인격적이기에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두가 발견하고, 모두가 그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진 세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두가 한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돌아선 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 안에는 상반된 삶의 태도가 갈등처럼 동반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합의 된 평화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진리 안에서의 일치성을 말합니다. 모두 어둠이었어요. 그런데 그곳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어둠 속의 현상들이 빛으로 바뀔 때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 갈등은 가정 안에서도 발생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집이나 그 집에 처음 믿는 자가 발생했을 때 갈등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성도님 가운데 집안의 유일한 복음의 씨앗으로 살아가느라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갈등을 우리는 이해하고 통과해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과정이 모두 그렇습니다. 회심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이 핵심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갈등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온 갈등은 깨어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두움을 빛으로 대항하신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육체를 생명으로 이끌기 위한 수술이었습니다. 비진리와 거짓으로 묶여 있는 삶을 자유케 하기 위한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이 갈등은 개인의 내적 외적으로, 또 세상과 주변에 대하여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말씀대로 사느라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주를 의지하며 인내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싸움에 주님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진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승리를 믿습니다. 우리의 추구는 세상과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소수이고 별종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성경은 ‘겨자씨’에 비유합니다. (눅 13: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눅 13: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아시다시피 겨자씨,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누룩’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굉장히 작고 미비할 것임을 시사합니다. 적은 무리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끝내 승리합니다. 그 겨자씨도 참된 생명력이 있기에, 그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새들이 거기에 우거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진 힘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참 생명과 참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반된 역설은 곳곳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눅 13: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눅 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는 좁은 문이고 좁은 길로 비유됩니다. 들어가는 자가 적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나라의 영향력은 온 세상을 향합니다. 동서남북에서 그 나라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훗날 이 말씀을 놓고 이렇게 예배할 것이라 제자들이 기대했을까요? 또한 하나님 나라는 관계적입니다. 관계에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힘쓰지 않으면 어느새 소원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소위 교회의 경력이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를 진심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가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우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해야죠. 그러나 그 이후에 더 중요한 것은 그 왕되심 아래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내 삶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서 나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회심이 중요해요. 그러나 회심의 그 고백 아래 점점 더

주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에 있어서 주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그래서 ‘실로암 탑 붕괴 사고’와 관련하여 ‘인생의 끝’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죽음을 잊고 살아가기에 내 삶이 유한하다는 것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초상집’에 가서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삶의 유한함을 깨닫고, 주어진 삶을 바르게 살기 위해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언젠가 회개하고 바르게 살아야지”라는 태도나 “나중에 나이 들면 하나님을 더 의지하겠지”라는 태도가 우리의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삶을 소중히 여긴다면,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나는 주님을 어디쯤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스스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기 시작했다면, 내 삶의 영역 중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새로운 삶의 방식을 나는 얼마나 나의 것으로 훈련해가고 있는가? 적어도 주님은 잃어버린 우리를 다시 얻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하시고, 우리를 다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계시며,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자들로 오늘도 이 예배 안에서 우리를

세워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께 속한 자, 주님께서 책임지신다.” 이 약속에 나의 삶을 걸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 속하였으나 하늘에 속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 12–13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그 삶의 방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태도가 곧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성을 버려야 하고, 때로는 세상적 가치관과 충돌하며 갈등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불안과 걱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보호’를 진심으로 신뢰해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적은 무리여’라고 말씀하시며, 좁은 길을 걷는 우리의 수고와 믿음을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사느라 겪는 고난조차도, 오히려 믿음이 단단해지는 과정이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결국, 오늘 이 말씀은

우리 각자의 삶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회개하고, ‘지금’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길지 않고,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가 결단했으면 합니다. “하나님, 제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왕이신 주님을 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겠습니다. 불안과 염려도 주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겠습니다.” 이 결단이야말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성도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 길로 한 발 내디딜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실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한 주 동안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우리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묵상하며,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다스림을 분명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때, 우리는 ‘겨자씨’처럼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놀라운 열매를 맺는지 함께 경험하며 누리며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