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누가복음의 여섯 번째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다섯 편을 통해서 다룬 이야기는 우선 1~2장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예수님 탄생이 가진 역사성에 대해서 살펴본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3~9장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사역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전파된 하나님 나라 복음이 예고편이라면, 이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그 나라가 선포됩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를 부르시죠. 팬과 구별된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지설교를 통해서 가르치시고, 또 그들과 함께 메시아적 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렇게 제자훈련을 해나가세요. 팬에서 제자로. 또 제자들에게는 초기 양육을 거쳐서 이제는 제자도, 제자의 길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제자의 길에는 고난이 있죠.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제자의 길에는 무엇도 있습니까? ‘영광’도 있습니다. 아멘.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는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는 경기도와 같이 도시보다 큰 개념이라고
했어요. 갈릴리는 북쪽 지역에 해당합니다. 예루살렘은 남쪽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중심으로 사역을 하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 사명의 완수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기 시작합니다. 왜 가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향해 가는 것이죠. (눅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마주치는 사건들이 펼쳐지는데, 특히 ‘사마리아’ 지역이 등장합니다. 갈릴리의 위치를 ‘경기도’,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를 ‘전라도’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그 사이에 있는 ‘충청도’쯤 되는 곳이 사마리아지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를 싫어하고 적대시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정작 주목할 부분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를 미워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다른 길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에게 사마리아인 역시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에서는 ‘사마리아’가 여러 장면에서 강조됩니다. 나병환자 열 명을 치유한 사건에서도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고,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역시 이 복음서에 등장합니다. 이미 저는 누가복음 설교를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메시아로 오셨음을 여러 장면을 통해서 드러내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은 ‘약자와
소외된 자’를 적극적으로 조명하며, 그들에게도 구원의 빛이 비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적대시하던 사마리아인도 바로 그 대표적인 대상입니다. 그래서 10장에서 70인의 전도대를 보내어, 모든 이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가 주어졌다는 것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초청의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나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는 없음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균형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일에는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도 있는 것입니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 ‘손에 쟁기를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는 것은 그 결심과 달리 자꾸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했다면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 있으나,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초청은 모두를
향해 있어요. 그러나 결단하여 이것의 소중함을 알고 헌신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유대인들은 이런 원리가 아니라 잘못된 원리에 빠져 있었어요.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일단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일단 ‘이방인’은 불가하다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유대인의 그 한계를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의 선입견과 잘못된 기준이 바뀌어야 했어요. 예수님 앞에서 교정되어야 제자인 것입니다. 제가
그런 얘기를 종종 드리죠.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도로 자신을 바꿀 마음은 없고, 자신의 환경이나 자신의 주변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태도로 기도하면,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이기적으로 됩니다. 더 욕심꾸러기가 되기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나의 무엇을 바꾸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아니라, “이 말씀을 누가 들어야 하는데... 누가 이 말씀을 듣고 좀 깨닫고 바뀌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비판적인 태도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의 약함과 악함을 주님 앞에서 바꾸기 위해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훈련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예수님 때문에 내 생각과 기준과 태도가 계속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이 교정하고 계신 것, 다시 새롭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가르치고 고치시며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의 이 시간도 그렇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봅시다. 1. 이웃 사랑 : 관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우선 이 비유는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율법 교사란 율법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율법에 능통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웃 사랑’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그 ‘앎’에 대해서 맞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그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이웃 사랑을 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하죠. 우리도 종종 실수하는 부분이거든요. 우리는 내가 원하는 형태의 순종을 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닐 수 있거든요. 순종은 내가 하기 싫어도 했을 때 진짜이죠.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5개를 말씀하세요. 그런데 그중 2가지는 내가 가진 생각과 가치관과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3가지는 아닙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맞는, 동의가 되는 그 2가지만 하고 ‘순종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순종일까? 종종 성경은 그래서 이웃 사랑에 대해서도 이렇게 가르치죠. (눅 6:32)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눅 6:33)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우리도 이런 마음이 있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 놓고 “저 이웃 사랑을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기 싫은 사람은 사랑할 마음이 없어요.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바꿀 마음이 없어요. 그저 나와 코드가 맞고, 나와 관계가 괜찮은 사람만 사랑하려고 해요. 성경은 그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순종의 여부는 ‘내가 하지 못할 사랑’, ‘하기 싫은 사랑’, 그러나 주께서 원하시는
그 사랑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율법 교사가 정확하게 이런 사람이었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들의 위선을 꼬집죠. 그래서 설정을 일부러 강도 만난 자 옆에 우선 ‘제사장’, 그다음은 ‘레위인’이 지나가게 합니다. 그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하리라 기대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나름의 이유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나쳐버립니다. 어쩌면 그들이 그냥 지나간 이유로 그들을 ‘율법’을 말할 수도 있어요. 율법이 가장 원하는 것이
이웃 사랑인데, 율법 때문에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 모순이죠. 원래 이것이 우리들의 특징입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듯이 순종하려면 ‘방법’을 찾아요. 순종하지 않으려면 ‘핑계’를 찾습니다. 순종하려면 가능한 방법을 고민하고요, 순종 안 하려면 안 되는 이유부터 찾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에서 율법 교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의 끝에서 이렇게 묻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 교사는 내 이웃을 자기가
정하고 그들을 사랑하려고 했던 사람이고,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비유를 마치며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눅 10: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눅 10:37)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공동체란 것이 참 특이합니다. 교회는 서로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면 반드시 우리는 폐쇄적인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런데 교회는 열린 공동체이고 초청 공동체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역설이 발생합니다. 어떤 공동체가 관계적으로 조금 깊어지면 폐쇄적으로 되려고 합니다. 그냥 그것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런 성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람이 그 안에 들어오면 또 맞춰가야 하고, 그것이 힘들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 계심을 늘 기억하며 이렇게
질문해야 해요.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에 무엇을 원하실까?” 내가 이 교회에서 이미 좋은 관계성을 맺어서 나는 좋다고 칩시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혹시 우리 교회 안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없을까? 내가 돌아봐야 할 신앙적 위기에 빠진 사람은 없을까? 지금 내가 좋다고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늘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행해야 합니다. “가라. 행하라.”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제가 최근에도 예배팀 수련회에서도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르다는 ‘사역’에 집중했고, 마리아는 ‘예배’에 집중했습니다. 그것은 둘 다 필요해요. 저는 두 바퀴 수레에 비유했습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예배와 사역은 같이 가야 합니다. 한쪽이 커지면 앞으로 못 가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 뿐입니다. 예배의 채움과 사역의 헌신이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우열의 관계’는 아닙니다. 다만
‘선후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0’에서 시작하기에 예배를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가 어느 정도 채워진 후에는 ‘사역’을 하지 않으면, 머리만 커지고 섬김은 배우지 못하는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예배의 채움이 없이 사역하거나 예배의 채움에 비해 과중한 사역을 하면, 반드시 그 신앙은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나중에도 예배만 드릴 뿐, 주변의 어떤 것도 섬기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주님이 마리아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마리아의 그 선택을 존중하셨습니다. (눅 10:42b)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반면,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마르다가 일한다고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섬김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집중하다 보니, 예배의 채움을 넘어서게 되고, 불평이 생깁니다. 그래서 주님께 훈수를 둡니다. “아니, 주님. 제 동생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마리아 보고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주님이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얘기를 해 주셔야죠.” 그녀는 혈기를 부리며 이렇게 얘기하고, 예수님보다 자신이 더 권위자인 것처럼 도를 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르다를 교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르다, 그것이 아니라 네가 너무 사역을 무리하게 하고 있어. 그렇게 안 해도 돼. 네가 감당할 수 없는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보니 염려하고 근심하는 거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는 사역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예배의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사역을 해야 해요. 당연히 사역하다 보면 어려움이 와요. 그때마다 사역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 최선을 다해 약속한 기간은 책임지는 것도 배워야죠. 그러나 그 기간도 잘 감당하려면 예배를 잘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꼭 공적 예배만이 아니라, 개인의 예배도 힘쓰셔야 합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내가 지금 너무 힘들다. 그러면 “주님이 지금 나를 부르고 계시는
것이구나” 생각하시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나의 예배력을 늘려야 합니다. 예배가 나를 채우는 만큼, 우리는 헌신할 수 있습니다. 3. 제자의 삶 : 근거와 힘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 우리는 예수님이 타고난 능력 때문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능력이 있지만, 그분 또한 사람의 몸을 입은 동안 육체가 지닌 한계 또한 고스란히 감내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육체의 한계로 인해, 신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쓰셨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공감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 또한 육신의 삶을 사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또한 예수님이 육신의 연약함을 이겨내기 위해서 행하신 것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브리서는 명백하게 예수님이 원래부터 타고난 순종으로 사명을 감당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기도하심으로, 경외함으로, 순종을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에게도 이런 모습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내 힘으로, 내 결단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회심할 수도 없고, 자신의 힘으로 제자답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또한 베드로가 고백했을 때, 그것이 베드로의 깨달음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세요.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저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돌아온 이후 더 나은 삶을 여러 부분에서 살 수 있게 된다고 봐요. 그런데 그것이 다른 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며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했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새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자 할 때, 난관을 만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 어려움을 만나요. 그러면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어떤 때는 예배당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기도해야 하고요. 그렇지 못한 순간에라도 잠시라도 주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설교 초반에 얘기했던 ‘사랑’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요? 우리가 도대체 무슨 수로 내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가 용납하지 못할 것을 용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본성은 그렇지 못해요. 또한 사탄은 우리 옆에서 계속 우리를 방해하고 넘어뜨린다고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난관을 만났을 때, “그래, 기도해야겠다”라는 마음이 찾아와요. 저는 이게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해요.
주님이 나에게 말씀이 생각나게 하신 것이죠. 그런데 곧바로 사탄은 우리에게 어떤 음성을 줍니까? “기도한다고 이게 바뀌나?” 그저 우리의 상한 감정만 묵상하게 해요. 결국 “기도는 무슨 기도, 차라리 재밌는 유튜브나 보면서 기분이나 풀어야겠다.” 저는 사탄에게 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하셔야 해요.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예배 앞으로, 말씀 앞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말씀 이후에는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보혜사. 도움이 되시려고 우리 옆에 늘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삶의 문제 앞에서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대로 행해야 할 때, 그때 어떻게 하십니까?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요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생각을 붙잡고 주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면, 나에게 필요한 그다음의 것으로 또 인도하세요.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향한 긍휼한 마음도 주시고, 나는 쪼잔하지만 내 마음을 넘치게 할 만큼 주님께서 나를 먼저 채워주실 때도 있고요. 나를 위로하실 때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분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자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삶이 얼마나 멋진 삶인지 경험하게 해 주세요. 때로는 나의 순종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해도,
내가 주님의 뜻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칭찬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을 통해 점점 더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기도 : 초점과 구할 것 (주기도문과 성령) 11장이 바로 주님이 기도하시는 그때, 제자들과 하신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알려달라고 하죠. 그때 주님이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눅 11: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눅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마태복음과 유사하면서도 조금 차이가 있죠?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는 장면이 한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 상황에서 유사한 핵심 가르침을 반복하셨을
수 있고, 복음서 저자들은 각자의 독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시는 것처럼 핵심은 유사합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기도와 주기도문의 초점을 볼 때,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내 기도’하기에 바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때보면 ‘주문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과 그분의 비전’을 우선한 것이 특징입니다. 오늘 설교의 관통하는 주제이죠. 공동체를 하더라도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실까?” 이것이 주기도문적
생각입니다. “내 이웃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에게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것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관점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께 우리의 생존을 위한 기도, 필요를 위한 기도, 우리를 지켜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두 바퀴 수레처럼 균형을 잘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 이런 기도를 해야만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점차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저 나의 필요에 집중한 기도는 내 욕망으로 가득 찰 우려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간구는 잘못된 것인가요? 아니요. 예수님도 간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간절히 구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100번 해서 안 되면, 101번을 기도로 나아가서 간절히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죠. 이렇듯 ‘지극정성을 다하는 간절함’ 한국의 기도를 대표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옳은 것을 향한 간절함이어야 합니다. 저는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에 대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우리의 어떤 어려움에 대해서 주님께 아뢸 수 있어요. 그런데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기도한다고 합격하지는 않습니다. 갑자기 어떤 요행이 일어나서 지방에 대학 갈 친구가 간절히 기도하니 서울로 합격하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내 앞에 있는 몇 사람이 내 기도로 갑자기 다 불합격하고 내가 등수가 올라갔다면 그것이 정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이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가르치는 기도의 제목은 사실 명확해요. 우리가 저기까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밑에까지 집중해서 읽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핵심이 보입니다. 이어서 읽어보죠.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미 주기로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영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성령님’이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을 이미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나는 성령님이 함께하는 것을 잘 모르겠다는 분이 계십니까? 첫 번째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으로 우리는 성령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이니까요. 내 삶에 어느새 내가 다시 주인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면 회개하고, 나의 왕좌에 주님을 초청하십시오. 두 번째
필요한 것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찾으십시오. 구하십시오. 두드리십시오. 주님을 더 알기 원하는 그 갈망함의 기도를 주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악한 자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진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늘 주고 싶어서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주님을 찾는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로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동행인 줄로 믿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누가복음 10장과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잘못된 선입견, 자기중심적인 태도, 그리고 기도와 삶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교정하시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어떤 부분은 새롭게 깨닫고, 어떤 부분은 교정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이웃 사랑’의 초점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사랑, 나 중심적인 이웃 사랑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을 헤아리기보다, 내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구하십시오. 또한 주님은 예배와 사역의 균형에 대해서 가르쳐주십니다. 그 균형이 깨졌을 때 마르다처럼 혈기와 근심에 빠지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예배와 사역의 두 바퀴 균형을 잘 갖출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따라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기억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조차 기도하며 순종함으로 사명을 감당하신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제자도로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셔서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기도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필요를 구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 삶의 가장 큰 필요는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그를 위해 오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신앙은 거기서 승부가 날 것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점검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술할 수 있는 사람은,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 또한 피해가시거나 다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지 말고, 오늘도 말씀 앞에서 우리가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