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마태복음 말씀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지난 성탄 예배쯤부터 해서, ‘멋지다 복음 1,2’, ‘요단강에서 있었던 일’, ‘고작 세 가지’라는 제목으로 마태복음 1~4장 전반부에 대한 설교를 이어서 전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사건까지를 다뤘는데요, 오늘은 그 이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세례와 시험 사건 이후,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킹스베리’라는 학자는 이 구절이 마태복음 안에 등장하는 중요한 2가지 전환점 가운데 첫번째라고 말합니다. 바로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선언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혹시 ‘가까이 왔다’는 표현이 아직 안 온 것이라고 느껴지십니까? 이것은 이런 표현입니다. “어, 저기 왔네” 지금 막 왔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 나라에 함께하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 여기서는 ‘회개’이죠.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며 시작하신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은 무엇을 하신 것일까? 마태복음은 4:23과 9:35에서 비슷한 표현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으로 시작된 공생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일들이 기록됩니다.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요약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클루지오>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 요약 구절을 통해 정리해보자면, 예수님이 모든 곳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것에 예수님 사역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알려주고 싶고, 누리도록 주고 싶으셨던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로 이 복음으로 초대를 위해서 하신 일이 ‘가르치심’과 고치심‘입니다. 그래서 4:23 이후 5~7장까지는 ‘가르치심’에 대해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9장은 ‘고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방식, 복음으로 초대하는 방식은 ‘가르치심과 고치심’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간혹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신학적 이론이라고 생각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사역 주제라기 보다는 삶의 방식입니다. 메시아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삶의 방식이 ‘사랑’인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사랑’을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그럼,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도입 구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마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가르침과 고치심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반응을 끌어냅니다. 오늘도 복음이 힘이 있는 것은 복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바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고백처럼 복음으로 바꾸지 못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메시아로서 기적을 행하시지만, 기적 그 자체에 중요성을 두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적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기적은 말씀 선포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그에
대한 여러 반응이 있는데, 그중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도 있고, 단순히 인간적인 욕구를 채우는 반응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으로 사람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진리가 세워져야 합니다. 기적으로 마음을 열었다면 진리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에게 말씀으로 가르치십니다. 모인 자들에게 진리를 심기 원하십니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여기 ‘무리’와 ‘제자’가 나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팬’과 ‘제자’입니다. 제자는 이미 앞서 4장을 보면, 나름의 결단을 통해(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자입니다. 무리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예수님에 관한 관심으로 가르침의 현장에까지 와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며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살아내고자 하시는
삶을 함께 살아가는 것임을 알려주고자 하시는 것이죠. 바로 그 핵심을 담아낸 말씀이 ‘팔복’입니다. 산상수훈의 꽃이죠.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앞서 예수님의 사역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임을 요약 구절을 통해서 보여주었는데, 제자의 삶 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임을 팔복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요?
인클루지오 구조를 통해서 말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과 마지막 말씀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특징이 8개만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을 수십, 수백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8개로 요약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모습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한 가지를 바르게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면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일까요? 후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진리를 발견하고 붙들었기 때문이며, 그 새로운 목표를 향한 우리의 결단을 하나님이 도우시며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은 회심한 자들 안에 성령께서 일하시며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도 이에 대한 갈망함이 없고, 결단이 없다면, 애초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이 그 첫걸음이죠.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이제 전과 달리 세상에 대하여 다른 삶의 방식을 보이게 됩니다. 그가 진짜 복음을 깨닫고 그로 인해 삶의 중심축이 바뀌었다면 말입니다. 그 결과 제자의 삶은 세상의 추구와 다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삶의 모습이 우리가 진짜 하나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났음을 증거하는
열매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마음이 가난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누가는 이것이 단순히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은’에 대해서 말한 후 그에 대비하여 ‘부요한 사람은’에 대해 말합니다.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말하는 가난 또한 그것이 마음이든 실제적인 물질이든
혹은 그 외 무엇이든 간에 가난한 태도로 인하여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밖에 모르는 상태이죠. 아시다시피 여기서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프토코스는 어지간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장 극도로 가난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거지’를 의미합니다. 자기 삶의 생존을 위해 하나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거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거지는 자존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존심’을 버리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이 없는 의존성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윗은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자와 같이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 같았습니다. 그 다윗의 갈망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은 다윗의 그 모습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진짜 복음에 반응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는 태도에 다윗의 모습이 있어요. 가끔은 성도님들
중에도 이 사람은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수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 향유를 부은 여인의 마음도 이랬을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이 너무 좋고, 그분을 위해서는 무엇도 아깝지 않았어요. 자신의 마음을 온전하게 드리고 싶었어요. 그 향유 옥합을 깨뜨림을 가룟 유다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 안에 그런 마음이 없으니까요. 유다의 실패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 바로 하나님 나라는 그런 자들의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미래적으로 나오죠.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와 미래적 측면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적으로 받는 위로도 있지만, 완성된 나라의 위로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겨주시리라 약속했습니다. 성도의 삶은 애통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진짜 힘쓰면 꽃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도 가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교회의 모든 사역을 ‘섬김’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 그로 인한 ‘대가’를 받습니다. 그 대가가 위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섬김에 대가가 없어요. 섬기고 욕먹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 외에는 위로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그 애통함을 주께서 아신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그
섬김을 주께서 아십니다. 제가 목사로서도 우리 성도님들, 동역자들의 수고를 뭐라고 위로해주고 싶은데 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말해주곤 합니다. “내가 너의 수고를 안다. 그 애씀을 안다.” 제가 목회자로서 주는 작은 위로의 말이죠. 그 수고가 저에게도 보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저보다 더 많이 여러분을 아십니다. 그분의 위로가 그분께 나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말하는 온유는 마음이 부드럽고 착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복은 세상에서는 추구하기 싫은 것들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온유의 어원을 생각해 본다면 ‘야생마가 길들여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 주권을 잃어버린 듯하고, 내 마음대로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속박과 낮아짐의 과정을 말합니다. 제자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죠.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뜻대로 하려던 혈기가 죽고 잠잠해졌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낮아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필요한 과정일뿐더러, 복이 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것에 대한 성경적 표현입니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에서 ‘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삶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를
적극적으로 고대하며 기도합니다.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모습입니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의에 목마름이 없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충만함에 대한 약속이 이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자비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더 피해자이고,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를 먼저 채우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채워주는 행위에 대해서 인색하고, 불합리하다고 느끼기도 하며, 서운함을 갖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러한 본성에 역행하는 삶의 모습을 가진 것입니다. 사실 긍휼함이 사랑의 시작이 됩니다. 긍휼한 마음이 있어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원수도’ 사랑하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능력과 의무를 우리는 부여받았습니다. 따라서 제자가 그런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의 결정적이고 영원한 자비를 누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임이 분명합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모습으로 살아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향해 있기에 우리는 안전합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며,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마음이 나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제자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관심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는 그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본래 죄로 인해 더러워진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충성의 마음을 가진 청결한 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을 영원히 누리며 살아갑니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은 곧 평화입니다. 이에 반대어가 ‘투쟁’, ‘경쟁’, ‘다툼’입니다. 세상이 온통 이렇습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교회에 들어와서도 그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은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툼’의 근본 원인은 ‘욕심’이며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내 뜻과 다른 것을 정죄하기 십상이고, 내 뜻이 관철되지 않는
것을 못 견딥니다. 제자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평화롭게 하는 자’입니다. 화평한 자가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화평함을 누리는 것은 쉽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 가운데 이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려면 종종 손해를 봐야 합니다. 내 주장을 내려놔야 평화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이웃 중심의 사고로 살기 위해 나와 싸워야
합니다. 내가 나를 다스릴 때 평화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하나님은 ‘나의 자녀라’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가장 큰 역설은 바로 이 마지막 구절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 후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우리를
욕하고 핍박합니다. 의를 행한 후 그에 대해서 칭찬을 받아도 우리는 때로는 그 의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의를 행하고 욕까지 먹으면 우리는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삶은 세상의 가치관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중심축에 세우고 삶을 바라보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가 주님의 편에서 한걸음 바짝 살아가고 있다는 행복입니다. 제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제가 주일에 말했든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제가 말하는 영광에 대하여 그것이 무슨 영광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럼, 당신이 추구하는 영광은 진짜 영광인가? 그것이 정말 당신을 목마르지 않을 만큼 채워주고 있는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무엇이 진짜 우리의 삶을 끝까지 살 맛나게 할 것인가?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때때로 우리는 영광의 기준조차 세상의 기준에서 빼앗겨 생각하기에 삶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상식과 원리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성령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이 있는 삶입니다. 사실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성경시대로부터 있어왔기에 그들 나름대로 이것을 전하기 위해 여전히 힘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도 어린 시절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그런 것이었겠죠. “초가삼간도 나는 만족하네. 값진 재물도 내게 없지만”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세상의 기준 가운데 누가 이 고백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어쩌면 여전히 누군가는 이런 고백을 하는 우리를 보면 ‘정신 승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고, 우리는 그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삶이 주는 자유가 있고, 이 삶이 주는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으며 삶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확증해 주기 위해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칭찬받고 높임 받았던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세상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우리의 길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시대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으로 인해 육체적인 핍박과 박해를 받는 일은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어와 정서적, 정신적인 공격은 늘 우리를 향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웃을 수 있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목표와 초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은 더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상황을 목표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내가 세상의 목표를 내 삶의 목표로 두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내 삶의 중심축을 빨리 회개하여 바꿔야 하는 깨달음의 기회로 삼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여러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내 삶에 팔복에서 말하는 그런 요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고 있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힘을 내십시오. 오늘, 이 말씀 안에서 다시 한번, 나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주님께 속한 자로서 내 삶을 하나님 앞에 결단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