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道’를 아십니까?

2025-03-09 · 누가복음 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펴볼 본문은 누가복음 다섯 번째 설교로 누가복음 9장에 대해서입니다.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이며, 메시아로서 하셔야 할 일을 한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삶을 구원하는 이야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는 민감하죠. 저는 이미 몇 번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우파라고 할 수 있는 세리와 좌파라고 할 수 있는 열심당원이 모두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의 그 다름도 하나로 묶어 내시는 분이 예수님이었다고 말이죠. 특별히 교회는 그래야 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성령은 그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시는 능력이 있지요. 다름을 넘어서게 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진보였을까, 보수였을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진보적입니다. 당대의

틀을 깨는 일을 많이 하셨죠. 특별히 ‘금기’라고 하는 일들을 많이 하셨어요. 나병환자와 접촉하셨고, 지난주 봤던 혈루증 여인도 접촉하셨습니다. 죄인으로 취급받아서 부정하다고 여겼던 사람들과 교류를 피하지 않으셨고, 민족과 종교의 경계를 넘나드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기적 이야기에서도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예수님이 구원하신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부정한 자와 죄인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여성을 제자 삼기도 하거나, 여인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는 등,

당시 사회의 틀을 여러 방면에서 깨시며 그것으로 어떤 교훈과 깨달음을 주신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또 보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예수님의 이 모든 사역의 목적은 ‘율법의 완성’이었습니다. 즉, 원래 주어진 율법을 바꾸는 혁명가가 아니라, 본래 정신을 더 온전하게 회복하고 시행하기 위해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으로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절기를 지키셨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실현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보수 중의 보수입니다. 즉, 예수님은 어느 한쪽 가치로 그분을 다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 안에서 전통의 본질을 더욱 지켜내되, 그 본질을 왜곡하는 어떤 당대의 틀과 기준은 과감히 벗겨내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사람들이 가족끼리 모여도 정치 의견은 안 맞는다고 하잖아요.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와

성도는 말씀의 진리, 성령의 뜻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정치활동을 각자 할 수도 있습니다. 무관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늘 점검하면 좋겠고, 나와 다른 가치를 용납하고 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9장에서도 예수님의 모습은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뜻을 온전히 지켜가고 있고, 또 틀을 깨는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또한 그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 길이 은혜이자 동시에 십자가의 길인지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9장 첫 부분은 열두 제자를 파송하여 복음 전도사역을 보내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10장도 70명의 제자를 파송하는 장면으로 나옵니다. 그들을 파송하는 목적은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죠? 팬은 자기만족이 목적이지만, 제자는 스승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이 왜 두 번 나오느냐? 열두 제자 파송은 유대 갈릴리 활동 중에 나오고, 70인의

제자 파송은 여행길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해 제자를 파송하셨다는 것을 균형 있게 다루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서 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셨던 바로 그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심 & 고치심’입니다. 제자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자들을 고치라’ 명하시죠. (눅 9: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눅 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저는 이 두 가지가 각기 다른 사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전도 여행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배척할 경우, 발에 먼지를 떨어뜨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9장 51절 이하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할 때, 다른 곳을 향하여 가십니다. 복음은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인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응답도 있고 거부도 있습니다. 복음의 열매인 ‘고침(치유, 회복)’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반응(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을 위해서는 전하는 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신뢰). 그래서 제자들도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고, 그들을 영접한 사람들에게 치유가 나타났습니다. 치유의 능력은 제자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자, 지역의 통치자였던 헤롯도 소문을 듣게 됩니다. 예수라는 사람을 따르는 제자들이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인가?” 이것이 헤롯 궁에서도 화두였습니다. 전도 여행 후, 다시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도 역시 그 사역을 하십니다. 가르치심과 고치심. (눅 9: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이

사역 중에 이어지는 사건이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사건입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같은 맥락의 4,000명 사건이 한 번 더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5,000명은 유대인 대상, 4,000명은 이방인 대상 사건이라고 하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기적 사건이고, 기적 사건의 결정판과도 같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 평지설교, 여러 기적, 전도 여행, 오병이어 사건 등은 예수님께 배우고 실습하고 경험하는 ‘제자훈련’이었습니다. 우리 박예진 전도사를 제자훈련해요. 제가 하는 사역마다 같이 들어와서 보게 합니다. 그러고는 일부분을 감당해 보게도 합니다. 가르치고, 보여주고, 참여시키고, 경험하게 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그렇게 배워갔습니다. 그 결과 오병이어 사건 다음에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죠. (눅 9: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눅 9:19)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눅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앞서 헤롯의 궁궐에서도 예수님을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정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는

스승을 알고 따르는 자이니, 마침내 제자들의 입에서 신앙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양육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풍삶초’를 해서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가 성취되면 그다음 과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또 ‘풍삶첫’을 할 때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성취하면 그다음 ‘풍삶기’ 과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도 맨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으십니다. 같이 살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고 기다려주십니다. 제자훈련의 1단계이죠. 그 결과 이들이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들에게 제자훈련 2단계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궁극적 사명과 거기에 함께하기 위해 제자가 각오해야 할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눅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는 길이 ‘죽음을 위한 길’임을 가르칩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이 이야기가 제자들의 기대와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후반부에 배신하게 되는 첫 싹이 이때 꿈틀거리며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예수님이 정치적인 구원자로서 이 세상에 대하여 ‘승리자’가 되기를 기대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정작 본인이 많은 고난을 받고, 로마 황제는 고사하고 유대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조차 감당하지 못하여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만 그런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내어놓고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 9장 57절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실제적인 우선순위를 요구합니다.

때론 냉정하게 느껴져요. 아버지 장례보다도,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보다도 주님을 따르는 것을 우선시하라고 하니까요.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강조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우선순위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는 것은 성경의 일관적인 태도입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 하다 보면, 처음 교회를 나가면서 기대한 바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 ‘종교적 채움’, ‘성공을 위한 신의 도움’ , ‘사람들의 친절과 관심’. 뭐 나름의 어떤 기대가 있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다 보면, “성경이 진짜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기대와 다른 것이구나.” 느끼는 시점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럼, 갈등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는 ‘회심’에 대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얼마나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나는 그냥 교회에 다니면서 조금 유익을 얻으려고 했는데, 예수님을 그렇게 믿으면 안 된다고?” 이런 충돌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물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기대하고 교회에 왔던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진짜 여러분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다고 믿어요. 마태복음 산상설교의 ‘팔복’이나 누가복음 평지설교의 ‘사복사화’에서 말하는 ‘복’(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복된 상태, 진짜 행복’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누리기 위한 방법이 ‘회심, 제자 됨’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에 해당하는 표현이 ‘자기를 부인하고’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나’임을 부인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삼는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큰 중병에 걸렸다고 해봅시다. 의사에게 맡겨야 회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 맡길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맛봅니다. “나는 단지 예수를 믿을 뿐, 제자가 되는 부담까지 지기는 싫은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목사의 양심을 걸고, 또 성경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아무리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도, 성경의 맥락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나를 믿어라’와 ‘나를 따르라’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지적 동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될 때 그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값싼 은혜’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죄 용서만 바라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외면하는 태도’를 본회퍼가 강하게 비판했죠. 여러분, 제가 설교로 여러분을 참 부담스럽게

할 때가 많죠. 제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너무 잘 알죠. 저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각 사람의 몫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선택을 위해 누군가는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제가 고민해 봐도 다른 길은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과 ‘끝내 따르지 않는 삶’으로 구분될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하고 좋은 것이라고 얘기해도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정말

없었으면 좋겠지만요. 만약 그것이 끝내 자기의 결정이라면, 어떻게 침범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늘 외칠 뿐이죠. 그런데 만약 누군가는 자기 선택이 아니라,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인지 몰라서, 그렇게 배우지 못해서, 교회에만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며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안타까운 것이 아닐까요? 정말 조금만 눈을 열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우리를 그렇게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너무나 많은 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오라고, 이 삶으로 건너오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아는데... 어떻게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는 분들이 구원을 ‘천국행 티켓’ 정도로 축소하고 제자의 삶을 ‘신앙의 열심 있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 여기도록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그 삶이 결코 하나님의 행복 가운데 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저도 점점 더 깨닫고 있습니다. 여러분, 실제로 예수님 앞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 아니라 제자도에 대해

말했을 때, 예수님을 떠났는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사건 후에 예수님이 영적 진리에 대해 계속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말씀이 어렵다” 하면서 떠납니다. (요 6:66)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기적과 채우심. 그것에 관심을 갖고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복음과 진리를 향해서 중심으로 더욱 향하다 보니, ‘결단’해야 하는 어떤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신앙고백의 관문을 만나요. 회심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많은 이들의 떠나감 속에 예수님이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7) 이때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이것이 결단이고 이것이 믿음의 고백이죠. 기적이 구원이라고

했지요. 그 구원 사건의 수혜자가 되면 끝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중 아홉 명은 치유에만 집중해서 가버립니다. 딱 한 사람이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묻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봤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내용이 부담된다고 느끼자,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 가르치심과 고치심은 그래서 함께 일어나야 온전한

것이고, 그 결과 제자의 삶을 선택하고 걸어가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작은 표현 하나입니다. ‘날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어떤 신앙인들은 아주 예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살았던 그때를 지금도 추억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청소년 때, 청년 때. 아닙니다. “예전에”, “한 때” 내가 어떻게 신앙생활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복음을 잘 이해하지 않았을 때의 열심은 복음에 의한 열심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내가 깨닫고 고백하는 하나님, 내가 받아들인 복음에 의해서 내 삶은 변화되고 회복되고 충만해지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닮아가고 따라가고 있는가? 내가 믿는 그 신앙의 진리들에 의해서, 내 삶은 지금도 조율되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나의 본성을 부인하고 주님이 원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가?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날마다’ 우리 안에는

이러한 점검과 그로 인한 결단과 삶의 모습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제가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있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 삶이 있는 것이 제자입니다. 누가복음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 이야기’ 이후 곧바로 ‘변화산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요.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 이후에 누릴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이 함께 경험하게 하세요. 이것이 일종의 제자도의 또 다른 측면이죠. 제자의 영광 말입니다. 제자도는 단순히 ‘고난의 길’만을 말하지 않아요. 제자도는 ‘영광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역설입니다. 울음이 행복이고, 고난이 영광이라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진리.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그 신비를 경험하며 고백하는 삶이기 때문이죠. 제가 2021년에 목회 5년 차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를 종종 떠올립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교회는 장소적으로 3단계를 거쳤습니다. 처음 5개월은 예배당이 없던 시절, 회의실에서 예배하던 때였고 저는 이때를 ‘사귐 1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3년 정도 고읍동 예배당에서 예배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워플’만한 곳에서 예배하던 때였죠. 이때를 ‘사귐 2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2020년 여름에 지금 이곳으로 와서 ‘사귐 3기’가 시작되었죠. 개척을 하면서 ‘쉽게 망하지 않는 교회’를 하는 방법으로 공간에 대한 비용이 없는 교회, 그리고 사례비가

없는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대신 생계는 제가 스스로 감당해야 했죠. 당연히 쉬운 것은 아니었고, 지금 돌아보면 주님의 돌보심이 아니었으면 저는 그 시기를 이겨낼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시절을 보내며 엄청나게 각오하고 날마다 스스로에게 약해지지 말 것을 독려했던 것 같아요. 일단 내가 생존해야 한다. 그러면서 정말로 우리 교회는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나갔죠. 내심 제 안에서는 당시를 견뎌내며 이런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내가 힘든 것은 내가 일도

하고 목회도 하는 이중직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이니, 목회만 할 수 있는 때가 되면 지금보다 훨씬 좋을 거야.” “나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을 수 있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좋을 거야.” “우리교회도 성장해서 자립할 수 있게 되면 지금 보다 훨씬 좋을 거야.” “조금 더 좋은 장소로 가면 지금보다 더 좋을 거야.” 그리고 2021년은 드디어 이 모든 일이 이뤄진 때였습니다. 4년간 받지 못했던 사례비를 어느 정도라도 받게 되었고, 교회는 성장해서 자립을 논하는 때가

되었고, 덩달아 저도 꽤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인터뷰나 강의도 하게 됐어요. 일터의 삶도 상당 부분 정리해서 그 전에 비해 목회에 훨씬 집중할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목회의 위기가 왔어요. 교인이 늘어나면 좋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우선 더 힘든 일이 많았고요. 그전까지 막연하게 제가 기대했던, 그래서 저로 하여금 이 악물고 버티게 했던 ‘그 만족’, ‘그 행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내 환경에 ‘이것저것’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며 버텼는데, 꿈꿨던 것이 상당수 이뤄졌는데 여전히 저는 힘든 것입니다. 목회의 어려움은 어떤 외적인 환경의 변화로 해결되지 않았어요. “내가 평생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이 불쑥 찾아와 저를 힘들게 했던 해가 2021년입니다. 목회가 유난히 힘들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요. 성도님들도 다 그 싸움을 하고 계시죠. 다만 저의 역량에 비해 맡겨진 사명의 무게가 점점 커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이 저에게 여러 깨달음을 주셨어요. 그해를 보내며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게 하신 것은 ‘제가 목회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의 고난이야 이미 알고 느끼고 있었지만, ‘목회의 영광’을 저는 다른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었죠. “이것이 해결되면 안 힘들 거야”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제자의 길을 가겠다고 하면서 ‘십자가’는 외면하려 하고 ‘자기 부인’을 외면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긴 태도였습니다. 오히려 제가 목회 5년

차에 깨달은 것은 ‘목회’는 내가 이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에 ‘안 힘든 날은 없겠다’, ‘내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겠다’는 점입니다. 그 어려움을 두려워하면 이 길을 갈 수 없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그리고 성경을 보니,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삶을 사용한 사람 중에 힘들지 않은 삶이 없더라고요. 우선 예수님이 가신 길이 그렇고요. 그런데 주님이 더불어 깨닫게 해 주신 것은 그럼에도 내가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다른 이유였습니다. 바로 ‘목회의

영광’ 말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는 그것.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애써야 하고, 이 길에서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목회의 영광은 주님이 맡긴 사명에 참여하여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다는 아름다움과,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영혼이 살아나고 변해가는 것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쁨이었습니다. 목회의 영광은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고, 누군가의 삶이

복음으로 변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그것이 깨달아지니, 저는 다시금 제게 주어진 이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며, 저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게 이 역할은 계속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가치를 저는 깨닫고 누리기에 힘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저보다 먼저 목회자의 길, 제자의 길을 걸었던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바울은 자신을 통해 복음으로 세워져 간 사람들이 자신의 기쁨이요, 주님 앞에 그들이 함께 서게 되는 것이 자신의 평생을 통해 맛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이죠. “도를 아십니까?” 제자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자의 길이 고난이다, 포기가 있다, 자기중심성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는 이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그 길로 그토록 오기를 바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제자의 길이 그 어떤 삶의 길보다 영광 또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제자의 영광을 세상에서 추구하는 그 기준에 따라서 기대한다면, 우리 또한 가룟 유다처럼 실망하고 제자의 길을 떠나버릴 것입니다. 고작 기적의 유익만을 바라고 왔던 수많은 무리들이 떠나갔던 것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의 영광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풍삶초에서 짧게 2가지로 요약해서 나누듯,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늘 일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달리 나를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우리의 내면은 회복됩니다. 또한 제자의 길에는 삶에 가치를 더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늘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는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면서 우리의 삶을 가장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깨어진 세상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 가장 먼저 충만하게 바꾸시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제자는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먼저 누리고 고백하는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제자의 길, 제자이기에 감당해야 하는 고난과 헌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이기에 맛볼 수 있는 영광이 또한 이 길에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분은 여전히 교회를 처음 나왔을 때 동기나 기대가 ‘내 삶을 좀 보완해줄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초대하시는 길은, 그런 보완 수준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저는 이 길이 힘들지만 동시에 영광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이 초청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혹 아직 잘 모르겠다면, 계속 고민하고, 또 말씀을 배우고, 공동체 안에서 물어보면서 걸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사귐의교회 모든 성도님들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제자의 길을 걷고, 제자로 주 앞에 서서 서로를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 가족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