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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으로의 초대

2025-03-02 · 누가복음 7~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 누가복음 4번째 설교는 단락의 제목을 잡는다면 ‘예수님의 기적 모음집’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나는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은 그냥 무조건 다 믿는다?” “나는 믿고 싶지만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아 고민이 된다?” 교회 안에서도 “기적”에 대해 의문을 품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이 정말 물 위를 걸으셨을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과장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솔직히 해본 적 있으실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성경에 기적 이야기들이 없으면 더욱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17~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서구에서는 같은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가 등장했습니다. 초자연적 사건을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만 인정하려는 흐름이었지요. 미국의 ‘예수 세미나’ 같은 단체도 복음서 속 기적들을 과장이나 신화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논리로 이해할 수 있는 예수님에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다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여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라고 말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다고 그것이 비진리라고 아예 닫아두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그저 아직 이해할 수 없을 뿐이죠. 내 이해가 온전한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계적 존재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내 이해가 미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분의 역사를 배제해 버린다면, 오히려 더 큰 진리를 놓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너무 크죠. 태양도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8분 20초 전의 모습입니다. 우주만 나가도 시공의 차이로 인해서 내가 본 것은 나에게는 현재이지만, 실상은 과거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라면, 나의 이해가 가능한 것까지만 ‘사실’이라고 말하기에는 잃어버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을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도, 생명도, 우주의 섭리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요. 어쩌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지금 정도로 이해하고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어쩌면 그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저는 부르고 싶습니다. 우주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살기까지 하니까요.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자신을 한껏 낮추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신의 일을 보여주셨기에, 우리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우주조차도 아직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데, 하나님에 대해 이해한 만큼만 믿겠다고 한다면, 우리의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다 보니 이해할 수 없는 무리수가 될 것입니다. 만약 제가 누군가에게 글을 썼는데 난해한 부분이 있다면, 그 진짜 의도는 저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글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의미를 제가 설명해 줄 수 있으니까요. 성경에 대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찾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와 소통하셨고, 우리에게 하늘의 진리를 알 수 있도록 하셨으니까요. 그것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받아들이도록 하신 것이죠. 그리고 성경을 통해 실제로 하나님을 알기도 하고, 붙들고 살고자 결단한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할 때는 ‘하나님의 계시’가 주체가 되어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나의 이성’이

주체가 되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칫 자기중심적 성경읽기에 빠지면,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알아가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기적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깨닫고 받아들이길 원하셨을까?” 1. 구원 이야기 저는 ‘기적 이야기’는 곧 ‘구원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의 기적이야기는 대부분 어떤 상황에서 곤경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도와주시는 것이죠. 더러는

고쳐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이야기들도 있죠. 그래서 기적 이야기는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저도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몇 번 나누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어린 마음이지만 그분을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고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저에게 전달된

이야기는 “너는 이제 죽으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너는 교회를 왜 다녀?” “구원받으려고.” 이것이 일종의 공식이었습니다. 꼭 틀렸다고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초등학생인 제가 신앙고백을 갖게 됨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럼 나는 구원을 받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를 믿는 목적이 ‘구원’이라면, 저는 인생을 다 살아보기도

전에 목적을 달성해 버렸고, 그만큼 제 삶은 목적 없는 막연한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겠으나, 실제로 저는 조금은 허무함 가운데 삶을 매우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은 이미 달성했으나, 그 실제적 효과는 죽어야 나타나는 논리 가운데, 저에게 주어진 삶은 저에게 의미 있게 다가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부분에서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이 활력 없이 소망 없이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사소하지만

‘구원’을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구원에는 분명 죽음 이후에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는 이야기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육체적·사회적·정신적·역사적 구출을 포함하는 총체적 개념입니다. 구약에서도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도 ‘구원’, 병에서 고침 받은 것도 ‘구원’,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도 ‘구원’입니다. 즉, 구원은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어떤 일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때 사용하셨던 이사야서 61장의 본문 내용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가 ‘희망의 소식’을 갖게 되고, 포로가 된 자가 ‘자유’를 갖게 되고, 눈먼 자가 ‘보게 되는 것’이 메시아가 가져다주는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 육체, 관계, 사회 속에서 한 인간이 깨어지고 망가진 어떤 것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 속한 삶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며, 이 과정은 ‘현재적’입니다. 주님이 오신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조차도 이에 대해 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확인합니다. (눅 7: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눅 7: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은 자기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눅 7:19) 주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눅 7:2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메시아의 나라를 오히려 너무 영적인 어떤 것들로 오해하고 있을 뿐, 메시아가 오시면 하신다는 그 모든 일들이 나를 통해 일어나고 있지 않느냐?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전해라.” 실제로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행하고 계신다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누가복음 7~8장입니다. 이 모든 기적 사건은 메시아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이 땅에 충만하게 시작된 것입니다. ① 백부장의 종 치유 (눅 7:1-10) 로마 군대 장교인 백부장의 종이 중병에 빠진 상황입니다. 유대 장로 몇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가 회당도 지어주고 좋은 사람이라며 그 종의 치유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집으로 향하시던 중에, 백부장이 보낸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 친구들이 백부장의 말을 전합니다.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그는 예수님의 권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진짜로 예수님에 의해서 병이 치유됩니다. ② 나인성 과부의 아들 소생 (눅 7:11-17) 예수님이 나인성 성문 근처에서 장례 행렬을 마주칩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절망적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소망과 같았던 아들이 죽음을 맞이한 절망적인 상황이었죠.

주님이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아들을 살아내게 하십니다. ③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심 (눅 7:36-50)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 중 한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성경 본문에는 그녀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지만, 그녀는 마을에서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향유를 부어 헌신하는 등 회개의 마음이 담긴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눅 7:5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나중에 죽으면 천국 가게 될 것이야.”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④ 거라사 귀신 들린 자 치유 (눅 8:26-39) 이방 지역 거라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마을 출신의

한 사람이 귀신 들린 상태였습니다. 옷도 입지 않고 집 밖 무덤가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는 ‘군대’라고 불릴 정도로 다수의 귀신이 들린 극단적 상황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서 귀신을 내쫓고 치유하십니다. 귀신이 나가자, 그 사람은 옷을 입고 예수님 앞에 얌전해집니다. (눅 8: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⑤ 혈루증 앓던 여인

치유 (눅 8:43-48) 12년간 계속된 혈루증으로 오랜 고통받았어요. 오랜 투병 생활에 재산도 다 탕진했는데, 치유도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이 근처에 오셨다는 소식에 군중 속에서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치유가 일어납니다. ⑥ 야이로의 딸 소생 (눅 8:49-56) 회당장인 야이로의 위독해서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치유해 주느라 머물면서

지체되었어요. 그 사이에 이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딸이 죽었다고 집에서 사람이 와서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50절) 하신 뒤, 죽은 딸을 살려주십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기적 이야기’인 동시에 ‘구원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죽음 이후에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모두 그들이 겪고 있는 현재적 어려움에 대한 터치였습니다. 만약 이 모든 이야기에서 “이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사실일까?”에 대해서 고민하시는 분들이라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성경의 기적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깨닫고 받아들이길 원하셨을까?”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다음의 4가지 내용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병과 죽음, 귀신까지 다스리는 절대적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답이 없는 삶의 상황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연민과 자비를

가지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삶에도 다가와서 치유를 하실 수 있죠. 그분은 지금도 절대적 권세를 가지고 있으나, 우리의 삶에도 찾아와 함께하실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둘째, 다양한 부류의 구원 사건들을 보여줍니다. 각 사건은 죄, 병, 죽음, 악령 등 인간이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로부터의 해방과 회복을 보여줌으로써, 구원이 결코 ‘죽음 이후’만이 아닌 현재적·전인적 차원임을 시사합니다. 특히 ‘죄 많은 여인’은 용서받아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는 영적 구원을, ‘혈루증 여인’은 육체적 치유, ‘나인성 과부의 아들 소생’과 ‘야이로의 딸’은 죽음에서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병의 치유, 마음의 회복, 관계의 회복, 경제적 어려움에서의 도움 등 다양한 우리의 문제 가운데 찾아오셔서 일하십니다. 셋째, 이 모든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구원 사건에는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우리 눈에는 잘 안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믿음’이 굉장히 중요하게 강조됩니다. 백부장도, 혈루증

여인도, 야이로도 모두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말씀만 하소서” (백부장), “옷자락만 만져도” (혈루증 여인),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 등에서 볼 수 있듯,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에 대한 신뢰가 핵심 요소로 드러납니다. 믿음이 승패를 갈랐음이 보이는 것은 이 장면입니다. (눅 8:45) 예수께서 물으셨다.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이 모두 부인하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것은 그녀만은 아니었어요.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여인만 고침을 받았어요. 왜요? 이 여인만이 믿음이 있었다고 말해요.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도 뭐라도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겠죠. 그러니까 굳이 거기서 예수님께 다가가서 그분을 만지려고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기대를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고침 받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꼭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아무런 간절함이 없이도 무엇이든 가서 만졌을 것입니다. 여기가 용하다고 하면 그것도 붙들고, 이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것도 붙들고. 필요하면 교회도 가고. 또 내게 도움이 되면 다른 종교도 가서 붙들고. 예수님께도 기도도 하고 의지하는 듯하지만, 사실 다른 것도 의지하고. 마치 보험 들어 놓듯이 그렇게 이것저것 붙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도 살다 보면 이것저것 다 붙들고

싶은 흔들림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최종적으로 예수님께 생각과 마음을 완전히 의탁하며 신뢰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적 사건은 그 대상과 지역이 다양합니다. 백부장(이방인), 거라사 귀신 들린 자(이방 땅), 죄인 취급받는 여인들(부정한 상태) 등 유대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된 인물들에게까지 구원이 임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민족·종교·성별 경계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백부장: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예수님께

전적인 믿음으로 나아가 종을 치유 받음 (눅 7:1-10) 거라사 귀신 들린 자: 유대 땅이 아닌 이방 지역에서 귀신이 쫓겨나 자유를 얻음 (눅 8:26-39) 죄 많은 여인: 유대 사회가 손가락질하던 이가 죄 사함과 평안을 누림 (눅 7:36-50) 혈루증 여인: 부정하다고 배척받던 여인이 치유와 구원을 경험 (눅 8:43-48) 구원은 특정 민족이나 특정 계층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편적 구원의

표징인 “기적”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2.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 오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보편적인 치유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사실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며, 그 나라는 지금도 역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가끔 놀라는 것이 2000년 전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때에도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망과 눈물이

있었어요. 2000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도 깨어진 세상에 신음할 때가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삶의 길을 잃은 채 그저 살아갑니다. 직장인의 70%가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성인 남녀 4명 중 1명이 1년 내 우울감이나 우울 증상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대에는 정신질환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억눌리고,

심한 경우 귀신 들린 상태로 표현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 내면에서 늘 거짓 음성을 속삭여요. “넌 가치가 없어.” “희망이 없어.” 오늘 이 시대에도 악한 영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특별히 이 시대 사람들의 가장 큰 질병 가운데 하나는 ‘외로움’입니다. 사회적 고립감이 너무 커서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우울감, 불안감이 올라갑니다. 부부의 갈등이나 자녀의 양육 문제가 너무 큰 스트레스가 되어서 현대인들을 괴롭힙니다. 한국은 자존감이나 삶의 만족도가

매우 낮아요. 왜냐하면 성취 중심의 문화, 결과로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늘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는 태도’를 갖습니다. 원래 인간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후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소유와 성취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열등감과, 성취를 내야만 가치가 있다는 강박 사이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40대가 되면 커리어의 정체, 자녀 교육에 대한 부담,

노부모 돌봄 등이 겹치며, 소위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각자가 감당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삶의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늘 채워도 부족한 상황 가운데서 ‘절망’이라는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이 시대가 정말로 구원이 필요한 시대라고 봐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것을 어떤 영적인 일부분을 채운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의 전인격적인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었던 바로 그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 4: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요 4: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저는 제 삶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제 그릇된 오해는 사실 구원을 바르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 필요한 상태에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그런 저를 구원해 주셨죠.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삶의 방황 속에서. 저를 너무나 멋지게 구원해 주셨고, 삶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그리고 저는 많은 사람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정말 다양한 스토리를 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본인도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과 자살 충동 때문에 고민하다가 와서 치유를 경험한 경우도 있고요. 이것저것 다 해봐도 도저히 참된 행복을 만날 수 없어서 고민하며 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고백하게 된 사람도 있어요. 어떤 분은 평생 자존감이 낮아서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가정은 부부 갈등으로 이혼 위기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서로를 용서하며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허무한 것을 쫓는

삶을 살면서 인생을 허비하다가, 이제야 주님 안에서 진짜 바른 것을 향해 삶을 드리게 된 사람도 있고요.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꿈꿀 수 없어서 그냥 스스로 삶을 내팽개치고 살다가, 하나하나 회복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다 지금도 일어나는 구원입니다. 지금도 일어나는 기적 사건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약속한 새로운 생명을 맛보며, 이전과 다른 삶을 경험하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기적 사건처럼

즉각적이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온전케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내면의 문제들은 그런 것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때는 나아만의 일곱 번, 여리고 성의 13번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결국 먼저 회복된 사람들이 그것을 전하지 않고 견딜 수 없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복음을 전해주어 죄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하고, 무너진 자존감에도 치유가 일어나고, 관계의 어려움도 극복해 가기 시작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 삶에 주고 싶은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선은 현재적인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구원을 넘어 ‘공동체적 회복’을 성경은 항상 말합니다. (막 10: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지난 설교에서 봤지만, 팬이 아니라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모든 것의 우선순위를 바꾼 것입니다. 제자로 사는 사람이 맛볼 수 있는 구원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포기한 것을 100배나 받아요. 그런데 박해를 겸하여

받아요. 지난 4복 4화의 말씀 그대로죠. 100배를 받는 것은 우리에게 수많은 영적 가족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원래 하나님을 모르고 살면, 나도 별수 없죠. 자기중심적이고, 기껏해야 가족중심주의로 살아가요. 그래서 그 가족도 들들 볶죠. 결국 나중에 자녀들도 내 뜻대로 다 안 되고, 다 떠나면 외로운 삶을 살기 쉬워요. 하나님이 그 삶에서 우리를 구원하세요. 어떻게요? 가족보다도 하나님을 우선하는 삶이 될 때, 그 모든 가족도 하나님 안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저는 제 아내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돕는 배필임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죠. 제 자녀가 하나님이 저에게 경작하라고 잠시 맡기신 유업이라고 믿는 것이죠. 언젠가 다시 내어드려야 하죠.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위해서. 내 것이 아니죠. 대신 하나님은 저에게 수많은 형제자매를 주셔서 더불어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의미로는 세상의 삶이 주는 괴로움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경조사만

함께 겪어도 느껴지잖아요. 우리는 가족이 너무 많아서 문제죠. 여러분,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하객을 알바로 데려다 채웁니다. 나의 장례식 때 누가 올까, 걱정합니다. 우리교회는 오히려 무슨 걱정 합니까? “결혼식장 커야겠는데….”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완전히 바꿔놓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와 성령의 임재로 지금 여기서 새로운 삶을 맛보며, 동시에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맛본 것이 있어야 소망을 해요. 저는 하나님 나라가 상상이 안 되면, “지금 내 삶은 게임의 데모 버전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왜냐하면 지금의 구원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장차 더 ‘온전한 구원’을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충분히 놀랍고 감격스럽습니다. 우리가 이 데모 버전마저도 충분히 누리며 살 때, 하나님은 앞으로 더 큰 ‘본편’을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삶 이후의 이야기는 아무리 상상해도 완벽하게 그려낼

수는 없어요. 그런데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구원을 누리고 회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요. 깨어짐에서 한 번에 회복되지는 않지만, 점점 회복되고 더 나아가 충만한 그 삶을 말이에요. 저도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죠. 그런데 적어도 그때까지의 제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지금은 알아요. 허투루 쓸 수 없죠. 저 정도면 하나님 나라에서 꽤 훈련된 고급 인력인데, 제 삶을 통해 하나님이 시킨 일을 감당하면 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음을 아니까,

잘 사용하고 싶은 것이죠. 제 비전은 여러분 모두의 삶이 구원을 누리도록 돕는 일입니다. 우선 우리를 괴롭히던 것들로부터 회복을 돕고, 우리를 억누르는 세상의 것들로부터 자유를 누리도록 진리로 초대하고, 우리가 스스로를 정말 사랑할 수 있도록 내면은 건강하게 하고, 정말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며 보람된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의 비전을 맛보게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구원’,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가장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펴본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2천 년 전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신화’가 아닙니다. 결국 ‘기적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지는 ‘구원 이야기’이며, 죽음 이후가 아닌 ‘지금 이 자리’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구원은 죽음 이후에만 주어지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 삶과 관계를 회복하시고,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맛보게 하시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혹시 이 말씀이 잘 믿어지지 않아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괜찮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어떤 기적 사건이 아니라, 곤경에 처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구원의 사건이라고 이해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오늘도 그 기적이 주님에 의해서 우리의 삶에 나타나고 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어려움은 각각 다르죠. 그러나 모든 삶에 각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혈루증으로 12년을 고통받던 여인, 죽은 자식 때문에 절망했던 과부, 귀신 들려 인간의

존엄조차 잃었던 거라사의 사람도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회복은 한 순간일수도 있지만, 어떤 회복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구원은 또 다른 구원을 낳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경험한 우리는 자연스레 이 기적의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됩니다. 낙심하고, 외롭고, 무력해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울고, 기도하며 치유의 길을 걷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길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영적 가족을 만나게 되고, “백 배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깨어진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 찾아오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 속한 인생은 지금도 곳곳에서 회복되고 치유되고 의미를 찾고 충만해지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이 땅의 구원은 '데모 버전'처럼 맛보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이면서, 동시에 장차 완성될 미래의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삶을 결코 허투루 흘려보내지 맙시다. 혹시 내 안에 무너진 부분이 있다면, 그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하십시오. 주변에 상한 영혼이 있다면 함께 동행하며 치유와 회복의 여정에 손을 내밀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기대하며, 주님 앞에 ‘충성과 신실함(피스티스)’으로 나아가는 믿음을 실천해 보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적의 삶’이며, ‘하나님 나라’를 사는 길입니다. 날마다 이 구원과 회복의 자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