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십자가의 불꽃" / 강정규 목사

2023-04-07 · 마태복음 26-27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마태복음 25장까지 내용은 지난 8편의 주일설교와 5편의 새벽예배 설교로 다뤘습니다. 오늘은 26장과 27장의 내용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금요일이기에 우리는 성금요일 예배로 드립니다. 마태복음 26장은 그보다 이틀 전인 수요일의 시점으로 시작합니다. 26장은 2가지 모임을 교차로 보여줍니다. 한 곳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마 26:1)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셨을 때에,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마

26:2) “너희가 아는 대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인자가 넘겨져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음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 것입니다. 이 시간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 26:3) 그 즈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서, (마 26:4) 예수를 속임수로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마 26:5) 그러나 그들은 “백성 가운데서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명절에는

하지 맙시다” 하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에 대제사장은 1명입니다. 다만 대제사장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임 대제사장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죠. 유월절 절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므로, 주저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밤에 은밀하게 예수님을 체포하게 됩니다. 죽음의 때를 알고 기다리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모의 중인 유대 지도자들. 이 대조를 마태복음은 보여줍니다. 다른 대조가

또 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위로하는 자와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도 하셔야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가십니다.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향유를 붓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네 편의 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내용이 같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차이점이 많습니다. 마태복음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바리새인의 집으로 나오거나,

날짜가 다르고, 향유 부은 여인의 정체도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냥 한 여인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창기이고, 요한복음에서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혹시나 말씀드리면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향유를 부은 여인과는 다릅니다. 찬송가 211장에서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향유를 부은 사건이 한 번만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많은 학자가 최소 2차례, 많으면 3차례

있었던 사건으로 봅니다. 물론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사건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마 26:10) 예수께서 이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마 26:1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향유를 부은 사건 이야기는 적어도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에게 위로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위로를 받으셨다.’ 저는 멋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위로를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위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인정받기 위해, 사람에게 보이려고 뭔가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또 그 남모를 헌신과 수고를 알아봐 주고,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것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예수님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마치 교차 편집처럼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마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 26: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여기서 유다가 스승을 배반하며 받기로 한 돈은 은 30입니다. 이는 120드라크마로 4개월 치 월급에 해당합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단순한 이유가 된다고 보기는 어려운

액수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신은 돈 때문이기보다는, 유다가 꿈꿨던 방향으로 행하지 않는 예수님의 모습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 마지막 돌이킬 기회를 얻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붙잡지 못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가룟 유다.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여인과 예수님을 자기 욕망의 수단으로 삼은 사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주님께 내 마음을 올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배신에 대한 경고는 유다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 대해서도 주님은 배신을 예언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도,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말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와 달리 실제적 위협 앞에서 도망치고 말게 됩니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사람의 뜻대로 행하는 자’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차이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유다는 적극적 의미로 자기 뜻으로 예수님을 반대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편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순교는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길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큰 어려움이 없는 길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육신의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기도도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니죠. 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여러 고난을 겪으며 순종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그가 아버지 하나님께 보인 온전함입니다. 마태복음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러한 순종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마 26:38)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마 26:39)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 그 청탁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시죠.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대답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는 이미

예수님이 무엇을 하든 동참하고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가셨지만, 그들은 기도하는 일조차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며 때를 준비하셨지만, 제자들은 같은 자리에 있음에도, 그 길에 함께할 준비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우리도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의지로 되지 않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정하고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에 순종할 용기와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겨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슬픔이 무엇이었는지를 묵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이 되면 자주 보는 영화 가운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은 잘 표현했지만, 정작 그보다 더 큰 고통을 표현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는 깨어질지도 모르지만, 부자의 관계는 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일체적이고 가까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자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실상 하나님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간적 관계보다 더 가깝습니다. 그 둘을 우리의 이해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비유한 것입니다. 실제로 ‘낳았다’라는 의미의 아들은 아닙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아들 중에서도 ‘독생자 예수’라고 표현하죠. 이 표현은 ‘독자

예수’와는 다른 것입니다. 독생자는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해요. 이것은 외아들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영어로도 외아들은 ‘only son’이라고 씁니다. 말 그대로 아들이 하나라는 의미이죠. ‘독생자’는 ‘only-begotten son’이라는 별도의 단어를 사용하여 표기합니다. 일부러 달리 표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외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종류의 존재, 단일 종류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핵심은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의미보다는, 같은 종류의

존재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자의 새끼는 사자입니다. 호랑이의 새끼는 호랑이이고, 신의 아들은 신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되지만 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세계보다 크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죠. 그러나 여전히 이 세계 밖에 있는 성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거룩함이 깨어지고 죄 덩어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일체적 관계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직면한 가장 큰 고통입니다. 우리가 죄를 설명할 때, 하나님과의 단절이 죄이고, 그로 인해 죽음의 현상들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거룩한 존재에서 가장 거룩하지 않은 존재로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 목적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목표와 특징입니다. 내

소원을 관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소원을 아버지의 뜻에 굴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도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은 기도할수록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세속적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기도하셨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또 다른 대조는 심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잡혀서 대제사장에게 끌려갑니다. 불법입니다. 밤중에 대제사장 집에서

이런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정식 재판이 아닌 것이죠. 그리고 어차피 이 재판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빌미일 뿐입니다. 이미 거짓 증인들은 매수되어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으로 고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비겁하고 정의롭지 못한 재판에서도 비굴하게 굴지 않습니다. (마 26:62) 그러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마 26:63) 그러나 예수께서는 잠자코 계셨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예수께 말하였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걸고 그대에게 명령하니,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마 26:6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말하였소.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다시 말하오.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이 말씀을 하심으로, 예수님은 신성모독의 죄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최근에 방영된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어떤 이단 교주가, 정작 재판에서는 자신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비굴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 재판을 받고 있는 순간 바깥 뜰에서는 어떤 일이 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그래도 도망친 제자들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여종이 나와서 말합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는 부인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부인,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인,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대제사장 무리는 예수를 죽이기 위해, 총독 빌라도에게 데려갑니다.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해 죽이기 위한 결정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의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로마 총독의 판결 아래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정치적으로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엄벌에 처하는 것이 되고, 유대인의 종교적 관점에서는 나무에 달려 죽은 자가 되어 저주받은 죽음으로 결론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 무리는 로마의 법에 위반되도록 예수를 이제 신성모독이 아니라 정치사범으로 몰아갑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바로 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재판에서 거론되는 쟁점에 해당하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왕은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호칭 자체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에게 적절한 호칭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했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심문 때에도 예수님은 무고한 혐의들에 대해서 반론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유대인의 왕이냐는 물음에 ‘당신이 말하였소’라고 긍정적 대답만을 하십니다. 그로 인해, 도리어 빌라도가 자신을 전혀 변호하지 않는 예수님의 모습에 의아함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유죄 판결을 내리기 찜찜해집니다. 그가 빠져나갈 방법으로 생각한 것은 ‘특별사면’입니다. 때가 유월절이기에 특별사면이 가능했던 것이죠.

예수님과 함께 특별사면 후보로 오른 것은 ‘바라바’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바라바를 ‘소요 중에 살인한 폭도’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강도라기보다는, 민족주의적 혁명가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죠. 빌라도는 충분히 무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당할 정치적 어려움으로 인해 옳은 판결을 회피합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에는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고 예수님을 죽이지 말 것을 부탁하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어쩌면 그녀는 예수님에 대해 은밀하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이방 여인 중 하나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옳은 사람임을 분별할 줄 아는 이방 여인, 그러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로마의 총독,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수많은 예언자가 나왔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예수를 죽음으로 내모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 마태복음은 이 역설적인 대조를 부각합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를 죽이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설득하여 바라바를 석방하도록 선동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동은 통했습니다. 민중의 집단적 광기에 휩싸인 그들은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집단의 광기는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바라바를 선택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거짓으로 선동한 유대 지도자들과 거기에 분별을 잃고 따라가 버린 백성들, 그리고 정의를 잃어버린 로마 총독의 판결 등에 힘입어 십자가형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로마 군인들에 의해 희롱과 모욕을 당합니다. 총독이 예수를 군인들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유대 주변의 이방인 출신의 군인들로서, 대개 유대인들에게 호감이 없거나 반감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는 예수가 넘겨지자, 그들은 자신들의 반유대 감정을 분출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채찍질 당하고 살이 찢겨 나갑니다. 당시 채찍은 끝에 금속이나 뼛조각이 박혀 있는 것으로, 채찍에 맞는

아픔도 크지만, 그것이 살을 뜯어내는 고통이 더 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고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해진 채로 십자가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로마에서 노예나 최악의 범죄자들을 사형 집행하는 도구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됩니다. 여기에도 몇 가지 역설이 가득합니다. 우선 십자가 자체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로마가 드넓은 땅을 지배하는 가장 폭력적인 방식이었습니다. 1세기 2세기의 로마를 ‘팍스 로마나’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절대적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이 주창하는 평화란, 힘의 논리에 의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십자가 제도’가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죄인 처단의 목적 외에 전시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걸어가서 높이 매달려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에 대항하면 죽는다는 힘의 통치를 보여주는 것이죠. 즉, 예수님은 그 로마의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루신 것은 로마보다 크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 기독교적

용어로 ‘화평’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평화와 화평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평화는 평정하여 화목게 하는 것이고, 화평은 화해를 통해 평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로마는 힘으로 눌러서 대항하지 못하는 평화를 만들었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죄로 인하여 생명을 잃어버리고 죽음에 놓인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었습니다. 로마의 가장 잔혹한 사형 도구가 하나님 사랑의 상징이 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오셨고,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를 외면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만 겪은 것은 아니죠.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우리는 늘 하나님을 외면하곤 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그것은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다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 말씀을 보고 배우며,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외로웠던

그 길을 묵상하며, 그 길의 동행자가 되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향유를 부었던 여인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가끔 제가 오히려 유다이고 베드로이고 유대 지도자들이고 백성일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오늘 우리에게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아무리 자신의 길을 이야기해줘도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흔들림 없이 아버지가 맡기신 사명을 다하여 걸어갑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순간이나, 대제사장의 뜰에서라도, 누구라도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동행했다면 참 위로가 되셨을 텐데, 그분은 이해받지 못하는 그 외로운 길을 걸어가서 마침내 메시아의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누구나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다시 누릴 수 있는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곁에 있었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어떤 일을 행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진리를 지키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말 그 마음에 들어와 임재하시고,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진 사람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두려움에 떨어서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후에 성령이 그의 안에 거하시자, 그는 주님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서 그도 십자가에 달리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우리에게 모두 요구하시는 것이 그런 죽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순교의 용기를 어쩌면 나눠서 평생에 걸쳐 살아내는 그러한 일입니다. 날마다 나를 내어주고, 나를 위해 사는 마음을 버리며, 주님을 묵묵히 따라가는 그 길입니다. 저는 걷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을 아십니까?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성령에 의해서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그러했고, 그 달라진 삶은 주변으로 영향을 미치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은 그런 것입니다. 복음으로 진짜 사는 사람은 주변을 함께 물들입니다. 저는 복음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에 있는 작은 불꽃들이 모여서 복음을 계승하고 이어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복음은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바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마치며 여러분과 한 영상을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이 타락하여 성경을 성도들이

보지 못하게 독점하고, 성경에 없는 그릇된 것을 거짓으로 가르치던 그때, 그 성경을 번역하고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성경을 전하다가 적발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진리를 깨달은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에게 맡긴 사명을 다해 목숨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대에 맡겨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을 따르는 길을 걸었습니다. 뮤지컬의 끝에는 기꺼이 그들이 믿음을 지키며

순교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성경이 번역되고 전파되며, 종교개혁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믿음의 고백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영상] 화형대의 등불 _ 더북 뮤지컬 이 영상 속 찬양의 가사에는 ‘나무에 지펴질 불꽃은 마침내 어둠을 밝히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화형대의 불꽃도 의미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예수님이 먼저 행하신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그 불꽃일

것입니다. 그 불꽃이 우리를 바꿨고, 이제 우리도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이 그 불꽃으로 어둠을 밝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우리들이 이 시대에 하나님이 복음으로 세우신 불꽃들입니다. 우리의 불꽃이 있는 곳에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타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해서 그런 복음이 전수되는 사명을 다하고, 생명을 살리며 빛을 밝히는 고귀한 삶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찬양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