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부활, 믿을 수 있나요?" / 강정규 목사

2023-04-09 · 마태복음 27-2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뮤지컬(청소년부) _ 예수님의 부활을 느끼시나요? 샬롬! 주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 청소년부가 뮤지컬팀을 결성하고 부활에 관한 멋진 뮤지컬을 보여주었습니다. 목사로서 제가 너무나 감사하게 되는 부분이 이럴 때입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기대 됩니다. 뮤지컬 제목을 기억하십니가?‘예수님의 부활을 느끼시나요?’ 아마도 부활이 막 몸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지금 우리는 오히려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고 없었던 거짓이고, 느껴야지만 실제 있었던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느낌’을 따르는 신앙생활만큼 약한 것이 없습니다. 느낌은 주관적이고 영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느낌이라는 반석 위에 서 있으면 그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래 위에 쌓은 성보다도 더 약할 것입니다. (고후 5:7)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여기서 보는 것은 보고, 느끼고, 만지는 이러한 우리의

감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감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신앙이 더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 시대에 수많은 기적을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일에는 실패하는 것을 우리는 허다하게 봅니다. 우리가 종종 예화로 나누듯, 천동설과 지동설은 대표적인 느낌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의 눈으로 아무리 봐도, 지구는 동그랄 수가 없으며, 지구가 지금 태양을 따라 돌고 있음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보는 것으로 판단했을

때, 모두가 천동설, 즉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다는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천동설을 주장하면 바보가 되죠. 이제 지동설이 우리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느낌에 근거한 것인가요? 아니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진리는 본래 느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느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내게 느껴지는지 안 느껴지는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느끼기에 사실이라면 진리는 오락가락 할 것입니다. 기분 따라, 감정 따라, 상황 따라, 사람 따라. 우리는 나의 감정의 어떠함, 나의 인식의 한계가 갖는 어떠함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진리에 서 있어야 견고하고 영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담은 성경을 읽고 그 안에 거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그 안에서 경험하고 느끼게 됩니다. 객관적 사실이 주관적 경험으로 다가오는 그 은혜 말입니다. 오늘 뮤지컬이 바록 그런 것이죠. 이것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되는가입니다.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관적 체험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안 따라와도 됩니다. 안 따라왔다고 진리가 무너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우리가 누리는 보너스입니다. 우리는 사실을 사실로써 받아들였을 뿐인데, 진리는 살아 있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도 역사하고 계시기에, 사실에 기초한 우리의 결단 속에 일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벧전 1: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벧전 1:9)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오늘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놀랍게 여기는 신앙의 신비가 여기에 있었거든요. “이게 가능하네?” 사도들은 자신들은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이 그래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본 일이 없어도 사랑하며, 사귐을 누리며, 그 영광과 기쁨 안에 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래 신앙이란, 신앙 밖에 있는 사람이 봤을 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누군가 이해 못한다고 하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소망하십시오. 내가 춤을

출 때, 다 비웃겠지만, 그들도 주 알게 되면, 함께 기뻐 춤을 추게 되리.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교회 누군가의 간증처럼 우리의 모습은 마치 단체로 최면에 걸린 듯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말하는 돈, 명예, 세상의 성공이 없어도 진짜로 행복해.” 말할 때, 세상이 여러분의 그 이야기를 순순하게 믿어줄 것 같습니까? 아뇨. 의심합니다. 더 나아가서 ‘정신승리 하는구먼.’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세상은 복음의 신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그 놀라운 신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은 모르니까 오해하고, 기독교를 욕하고 이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진리도 모르고, 그것을 경험하지도 못하니까요.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없죠. 그러나 제가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머물지만 끝내 그것의 기쁨을 모르고 끝나는 신앙입니다. 복음을 맛보지 못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이곳에 함께 하면서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교회의 주변에서만 머물다가,

‘여기 별것 없네’ 하고 떠나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런 예화를 가끔 들어요. 여러분, 지금 여기에 뭐가 있는지 아십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있는 것이 있어요. 이것을 느끼면 대박입니다. 뭘까요? 와이파이(wifi)입니다. 여러분 이곳에 와이파이가 있음을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대단히 믿음이 좋으시군요. 어떻게 믿으십니까? 이곳에 와이파이가 있음을? 와이파이에 연결 가능한 기계를 갖고 와이파이와 연결하면 새로운 세계로 연결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보고

깨닫는 것이죠. “여기는 와이파이가 있어.” 신앙도 같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성령을 내 안에 주인 삼고, 그 하나님과 연결되어, 믿음의 삶,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는 것입니다. “아, 여기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더 놀라운 것은 ‘Free wifi zone’처럼, 여기는 ‘Free God, Jesus, Holy Spirit’ 입니다. 내가 마음만 있으면 접속할 수 있듯, 여러분이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 은혜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wifi 접속 못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죠? 옆 사람에게 가져가서 어떻게 연결하는지 묻잖아요. 어떻게 세팅해야 하는지. 신앙도 똑같습니다. 먼저 연결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고 따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끄미이고, 신앙의 선배이고, 안내자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거야.’ 더 나아가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더 나아가서 ‘이렇게 살아야겠다.’ 소망하게 하는 곳입니다.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신기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절망의 한계선을 돌파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 죄가 들어온 세상, 깨어진 세상에는 절망이 늘 존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절망은 ‘죽음’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릴 것 같은, 끝내버릴 것 같은 그 절망감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오늘 부활절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소망의 이유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는 그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절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탄보다 부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에

해당하는 때 안식일을 지켰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즉 교회는 안식일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정하여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일요일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일’, ‘주님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부활은 믿음의 근거요,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십자가로 향하고 있음을 말씀하셨고, 그 죽음에 대해서도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가진 존재적 한계, 인식적

한계의 틀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죽은 자의 부활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진짜 일어날 것이라 믿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에 대해서 더 신경 쓰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 즉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이었습니다. (마 27:63) 말하였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

27:64)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다 잊어버리고, 진짜 죽음의 순간이 오자 두려워 도망쳐버리고 말았는데, 적대자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며, 혹시라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물론 그들이 대비하고자 했던 것은 진짜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시체를 훔쳐 간 후, ‘부활’이라고 소문낼 것에 대한 대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무덤은 당시의 풍습대로 바위 안의 동굴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큰 돌로 그 입구를 봉인하고, 경비병까지 세워서 며칠 동안은 더 단단히 지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죠.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그 시간에 무덤으로

향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의해서 치유를 경험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부활을 기대하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이라도 바르며 추모하고 싶은 마음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무덤을 향해 가면서도 큰 돌로 입구가 막혀 있기에, “과연 누가 우리를 위해서 열어줄까?”라는 마음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가 도착했을 때, 이미 무덤은 열려 있었고, 안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시신이 도둑맞았다고 생각하였을 정도로, 그녀 또한 부활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진실한 마음으로 닫혔을지라도 갔기에, 그녀는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요, 증인이 됩니다. (마 28:8)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마 28:9)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마 28:10)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가졌던 감정은 ‘무서움’과 ‘기쁨’이었습니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봤는데, 그분을 살아서 만난다는 것이 꼭 기쁨만 있었겠습니까? 무서움도 있었죠.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서 위로하고 말씀하시죠. “무서워하지 말아라” 이 일에 대해서 마태복음은 유대인 지도자 그룹이 어떻게 처리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8:12)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병사들에게 은돈을 많이 집어 주고 (마 28: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하고 말하여라. (마 28:14) 이 소문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잘 말해서, 너희에게

아무 해가 미치지 않게 해주겠다." (마 28:15) 그들은 돈을 받고서,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결국 한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가고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하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성경에 있으니까 그냥 믿을게요.” 이런 순진한 생각 말고. 죽은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제자들의 말을

믿겠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가서 숨겨두고 부활했다고 말함으로 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하고 있다는 교회 밖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으시겠습니까? 상식적으로는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까지 기록해요. (마 28:16)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마 28:17)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면서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심이었을까요?

‘저거 예수님 맞아? 닮은 사람 어디서 구해서 연극 하는 거 아니야?’ 여러분, 우리라고 다를까요?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본성은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한다’가 아니라, 보는 것으로 살아가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 가운데서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을 봐야 합니다. 그 사실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보다 조금 더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우리가 믿어봅시다. 만약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정말 어떤 수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내서, 어디에 꽁꽁 숨겨두고, 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이야기가 더 그럴 듯하게 이해되기에 그 이야기를 믿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이 살아나지 않고 시체로 죽어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시체를 숨겼으니까요. 그럼 질문이 생깁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해서 교회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그들에게는 이 종교를 유지해서 얻는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도, 과연 그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를 할 수 있었을까요?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예수님처럼 복음을 위해 순교를 당합니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택하고 비합리적인 부활 사건을 버리면 더 이해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기점으로

제자들이 보였던 전과 후의 행동변화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확 변한다면, 그것은 그의 삶에 그만한 임팩트가 있는 어떤 사건을 경험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정말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면...?” 이 추론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죽음을 목격했던 그 예수님이 정말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셔서 자기들에게 찾아오셔서 위로하시는 것을 정말 경험했다면, 그렇다면 그들의 변화가 오히려 이해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뿔뿔히 도망쳤던 제자들이, 숨어버렸던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와 복음의 증인되어 살아가게 된 이유.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났다는 것 말고는 그들의 변화를 설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마태복음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분은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들, 죽음의 위협 앞에서 나약해지고 도망쳤던 그들, 그들을 만나서 위로하시며 일으켜 세우시고, 그들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마 이 순간,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가르쳤던 내용들이 모두 실제임을

확신했을 것이고, 이제 예수님을 따라 자신들의 삶을 이 일에 드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먼저 온전한 제자가 되고, 제자 삼는 삶. 그렇게 복음을 전하며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 말입니다. 그 삶에 이제 흔들림이 없었겠습니까? 크게 성장하고 변화했지만, 이후에도 이들의 나약함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잖아요.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약속이 이것이지 않습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우리는 흔들려도 됩니다. 주님이 흔들리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붙어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그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전체가 인클루지오라고 했습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그분은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떠나셨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 애쓰고 삶을 결단하고 나아가는 여러분과 하나님이 세상 끝까지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진리를 믿으십시오. 이 진리를 붙드십시오. 내 감정으로 그것이 느껴지든 안 느껴지든, 그보다 더 흔들림 없는 주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오늘 그런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샬롬! 결단의 찬양 / 임마누엘 + 아무것도 두려워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