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저희가 민수기에 대해서 어네 번째 다시 설교를 하는데 어 저희가 1 2 3번 설교를 1월에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다시 민수기로 돌아왔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는 저희가 결정하는게 아니라 아시겠지만네 메일 성경 본문에 따라서 저희 설교하고 있는데 메일 성경 본문이 어 좀 긴 책 같은 경우는 한 번에 쭉 가기보다는 끊어서 가는데 저희가 그래서 앞에 민수기 1부는 1월에 봤고 이제 2, 3부에 향한 내용을 오늘부터 설교할 내용 어 예정입니다.
민수기 우리 지난 설교를 잠깐 그래도 떠올리기 위해서 제목을 보여 드리면 어 민수기는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언약 백성 신앙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1월 달에 세 편의 설교를 나눴습니다. 저도 어 마태복음을 끝내고 다시 민수기 모드로 돌아오기 위해서 이번 한 주간에 보내면서이 세 편의 설교를 다시 찾아 들었습니다. 혹시 만약에 이 앞부분에 있는 내용을 다시들을 거면 우리 유튜브나 블로그에 있으니까 보셔도 되고 만약에 저에 내가 앞부분을 이해하고 싶은데 나는 한편밖에
못들을 것 같다라고 하면 제가 어 추천 두 번째 소개를 듣는 것이 그래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더 많이 도움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 민수기는 1월 달에 잠깐 설명했지만 민수기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어, 첫 번째는 약속의 땅 입성 준비. 그다음에 두 번째는 약속의 땅으로의 여정과 실패. 세 번째는 약속의 땅 입성을 위한 새로운 준비입니다. 어,이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기억하시면 됩니다. 1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행진을
시작하기 전까지 준비하는 단계가 즉 1세대 준비입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 땅에 광야 거쳐 들어가려고 하지만 실패하는 이야기로 말미암아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내게 되는 이야기 이런 것들이 두 번째 부분이고 그 광야에서 지내며 태어난 새로운 세대이 세대가 다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 이 세대 준비 세 번째 단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1월에 나눈 민수기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설교는 1세대가 인고 조사를 하고 가나안 땅을 향해서 출발하는
여정을 준비하는 과정에 관해서 다뤘습니다. 오늘부터 5월 말까지 거의 한 일곱 번 정도의 설교를 통해서 1세대의 실패 부분과 2세대의 준비 부분을 함께 볼 것입니다. 오늘이 그 일곱 번의 여정에 어 시작이 되는 설교입니다. 어, 우리 앞부분에 있던 첫 번째 단락 즉 1장부터 10장까지는 하나님과 어떻게 광야에서 동행해야 되는지 동행하는 법을 배우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시내산에서 인구 조사를 하고 출발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당연히 매우매우 다릅니다. 시대적으로 다르죠. 우리가 지금 뭐 갑자기 제사장 복장을 하고 여기서 뭐 짐승을 잡고 언약궤를 앞세우고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시대적으로나 지적으로 많이 변했고 그런 것을 따라하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구약이 주어져 있는 이유는 그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에 담긴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민수기의 세 번째 설교 제목이 신앙의 원리였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민수기 안에 있는 원리를 찾아서 우리 적용해야 되는데 특별히 오늘부터 몇 주간 동안 살펴볼 제목은 아마 계속 이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번 주부터 살펴볼 것은 실패에 대한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원리입니다. 원리로 볼 때만 구약의 내용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항상 광야에서 진을 친 텐트를 치는 순서가 있어요. 그런
진의 배치를 보면 12두지파 가운데 하나님의 진 성막이 있음을 말미암아 그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삶을 가르치는지 원리가 보여줍니다. 즉 우리의 삶의 항상 중심에 우리의 공동체의 항상 중심에 하나님이 거하셔야 된다는 것 보여주죠. 또한 이스라엘 가운데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서 그들에게는 보다 직접적인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고 다른 지파가 그들을 지원하며 다른 모든 지파는 일상의 삶과 그리고 신앙이라는 그 균형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오늘 우리가 모두 기억해야 될
성도의 삶입니다. 그럼 우리가 한번 두 번째 여정의 시작 행진을 시작하는 부분을 한번 말씀으로 보겠습니다. 한번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하 그서 이스라엘 자 신의서를 하서네 행군이 행진에도 원리가 너무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아주 간단히 말하면 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가시면 따라가고 하나님이 멈추시는 곳에 따라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성마 위에는 하나님의 기둥인 구름기둥과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하게 하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역사하는 그 구름이 있는데
그 구름이 떠나면 아 하나님이 가시니까 우리도 가야겠다. 텐트 접어 이래서 막 해서 이동해서 가다가 멈추는 곳에 다시 진을 펴고 거기서 어 유숙하는 것입니다. 성막은 이동식 텐트였고 모든 이스라엘은 이동할 수 있는 텐트에 지냈기 때문에 성막을 정리하여 이동하고 가서 피고 이것이 광야 생활이었습니다.이 행진을 할 때는 가장 앞에는 언약궤 하나님의 상징의 언약궤를 앞세웁니다. 즉 이것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가장 앞에 선두의 마치 왕처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3절 말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네. 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길이 여러 가지 있을 텐데 어떤 경로로 가냐면 그것은 그냥 하나님이 가시는 곳으로 일로 가면 일로 가고 절로 가면 절로 가고 이렇게 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명령이 필요한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전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 백성이 이끌려져 갔습니다. 그렇게 이제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을 향해서 온 백성이 광야로 나선
것입니다. 그렇게 민수기 11장이 시작되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요즘에 교회를 개척하는 분들을 만나서 돕는 일, 저희 예성 교단이나 뭐 예성교 개척학교나 아니면 제가 속해 있는 하나북이라는 사역의 개척 네트워크나 이런 곳에서 같이 가서 함께 그런 일 돕고 사역하곤 합니다. 근데 그곳에서 가르치는 선배 목사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종종해요. 흔히 뭐 목회에 대해서 개척에 대해서 성공한 것에 대해서 이유를 물으면 대체로 간단히 대답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실제로 여러
가지가 종합되어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뭐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실패한 이유를 부르면 대체로 답이 명확하고 간단합니다. 그래서 성공의 이유를 분석하기보다는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뭐 목회를 비롯해서 모든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보통 그런 개초학교나 이런데 가면은 대체로 지금 내가 어떤 부분을 미스했는지 실수했는지 실패했는지 그것을 진단하고 보완해 가는 과정을 어 갔습니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목회의 성공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크기에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영적인 것보다는 어쩌면 내적이고 질적인 부분에서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인데 그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볼 때이 민수기 말씀은 실패의 역사를 기록해 주고 있어요. 그것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을 보면서 이들이 하나님 백성이었지만 이들이 어떤 부분에서 실수했는지를 우리가 보면서 그릇 그것 속에서 배우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러한 말씀이고
그러한 은혜예요. 그래서 우리가 1세대 출애굽할 때 1세대 즉 그 인구 조사의 그 백성들 첫 번째 대상이었던 그들을 아 분석해 보면서 그들은 왜 실패했는가? 그들은 어떤 분에서 실수했는가? 우리가 그것을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뭐 앞으로 계속 찾아갈 거지만 오늘은 민수기에서 11장 12장에 나타난 것은 딱 하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의 실패의 어 첫 번째 원리는 바로 불평입니다. 11장 12장은 온통 불평에 대한 얘기만 몇 가지 에피소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혼자가 아니라 여럿시 살아가는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실패하게 만드는 너무나 큰 요소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불평은 간단하잖아요. 불평 누구나 하잖아요. 근데 그 불평이 간단하지만 생각보다 작지 않습니다. 여파가 클 때가 있어요. 그것을 보여 주고 있어요. 여러분 광야에 나갔습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 같은 거 생각하시면 돼요. 거기 나가지 얼마 안 돼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불평과 원망이 시작됩니다. 아,
가나안 땅을 가야 돼. 희망찬 요정 시작했지만 뭐 그것이 쉽지 않죠. 어 수레에다가 가축을 데리고 아이를 데리고 짐을 밟아 싸드리고 현실을 고단했기 때문이에요. 광야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신속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불평합니다. 여러분 인생이 여러분의 인생이 광야를 만나지 않을 길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다 광야를 만날 거예요. 그러나 불평하는 삶과 불평하지 않는 삶은 선택이 가능합니다. 광야를 만나냐 안 맞냐는 내가 선택할 수 없어요. 그러나
거기서 불평할 것인가 불평하지 않을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불평하고 불평하지 않냐는 누군가는 그런 환경을 만나고 누군 만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기로 결단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번 민수 설교에 또 얘기했지만 불평은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번 옆에 사람에게 얘기해 주십시오. 불평 없는 것이 아니라 불평 없는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출애굽기에서의
광야 여정이 있었어요. 출애굽기 광야 여정은 이제 이스라엘 성령이 애굽에서 처음 나와서 겪었던 광야의 시간입니다. 그때도 백성들이 광야에 나서 불평하거든요. 근데 그때는 하나님이 그래도 공급하심으로 응답해 주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근데 이제부터 민숙의 불평은 좀 달라요. 이유가 있다면 이제 이들이 애굽에 애굽에 나온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상당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애굽에서 나온지 한 3개월의 시간 동안 이들은 신내산에
도착했고 그 과정이 있었고 신내서 1년 2개월 정도 머물고 거기서 하나님과 언약도 맺고 율법도 받고 성막도 지으며 하나님과 함께한 시간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민수이 나온 거예요. 이때의 광야와 이때의 광야를 대하는 이들의 어 모습이 달라져 있게 하나님 기대하셨던 거 같아요. 어쩌 하나님은 그러면 신앙도 이곳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신앙도 단계별로 다루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이를 키워도 뭐 간난 아기 돌도 안 된 아기 어린 시절의 아이가 울면은
야 너 왜 울어? 이러면 그 부모가 좀 이상한 거잖아요. 아이는 우는게 당연하고 울면 달래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근데 여러분 한 초등학생쯤이 되었는데 계속 이유 없이 울고 징징되고 그러면 어 그것을 부모는 훈계하고 가르칩니다. 이제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영적으로도 하나님 보시기요. 여기에 육적으로 우리 나이가 다양하게 있지만 이곳에는 영적으로는 아직 신앙을 시작하고 자라간 초기 단계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영적으로 어린아이, 영적 청소년, 청년,
작년 다양할 거예요. 어쩌면 아직 초기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 불평하더라도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고 이런 측면이 더 클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이제 때가 되었는데도 계속 그러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런 습관적인 불평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민수기에서는 불평이 시작되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서 진영 끝에 살라서 경고를 하십니다. 모세는 그것이 지금 하나님의 진노하심 심판으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려서 재앙이 그치게 합니다.
근데 정작 불평의 주범인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합니다. 조금 더 길을 가다가 다시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이번 불평은 작은게 아니라 그저보다는 더 광범이하고 더 조직적으로 나타납니다. 11장 4절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읽어 볼게요. 시작.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에니 이스라엘 자손가 우리에게 고기를 자 여러분 불평은 마음속에 있는 것과 꺼내어 놓는 것은 상당히 다릅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직은 그래도 개인적
문제지만 내가 꺼내는 순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더 안 좋은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이 말씀에서이 불평의 시작이 누구에게 소는지 다르는데 어 이스라엘 자존관데 섞여 살던 물이 바로 출애굽할 때 함께 나온 이방 족속들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만 나온게 아닙니다. 애굽에 함께 있던 아마 노예로 같이 있었던 그런 무리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같이 이스라엘과 함께 나오게 됐어요. 여러분 이들이 나온 거는 그들 중에 신앙이 있는 사람도
있었을 수 있지만 신앙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애굽보다 더 나은 환경을 위해서 따라나왔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불평에는 뭐가 있냐면 전염성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그 불평을 따라서 함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단체 생활을 하다 보면 불평하지 않는 법을 훈련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어요. 왜냐하면 한 명이 불평 불평을 말하기 시작하면 금방 분위기가 그렇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뭐 저도 가끔 즐겨보는 그런 프로그램 요소 가운데 막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같이 막 그 군인 출신들이 나와서 서바이벌하는 그런 거 팀으로 이렇게 어서 미션하고 이런 거 보면 거기서 이렇게 불평 같은 걸 누가 눌러 놓으면 팀장 같은 사람이 항상 말하죠. 참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어 왜 거기서 자꾸 불평을 하고 자꾸 힘들다고 하고 그러면 그 팀에 같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들은 조금만 어려워도 불평할 수 있어요. 그건
아이들이니까요. 근데 만약 같은 상황에서 청년들도 마치 아이들처럼 불평을 하고 있다면 저는 아마도 아이들을 대하는 것과 다른 태도로 그들을 대할 것입니다. 왜냐면 청년들은 조금 더 성숙하게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불평하는 아이들, 불평한 동생들을 잘 돌보고 또한 리더를 잘 도와서 흔들림 없도록 공동체를 지켜가는 것이 어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제 영적으로도 같아요. 저는 이곳에 있는 분들 가운데
막 처음에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사실 뭘 해도 우리가 같이 응원해 주고 기쁘게 여겨 주고 하나님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이제 하나님의 기대 가운데 자라는 자야 되는 시간에 이루었다면 저는 언제까지나 그렇게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사 민족 안에 섞여 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는 아이와 같은 자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쉽게 불평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의 힘이워서 함께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번에 불평은 생각보다 여파가 컸어요. 거기서 시작된 불평은 빠르게 힘을 발휘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제 함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 안에서 이 불평의 내용은 점점 더 감정적으로 격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격해지니까 자기들이 겪었던 일을 과장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사람이 감정에 휩사이면 더 자극적이고 더 큰 일로 만들어 버리기 쉽거든요. 11장
5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 있어요.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과네 뭐 짧게 요약 있지만 이들이 어떤 것을 갖고 어떻게 불평인지 보이지 않습니까? 근데 여러분, 여기에 지금 거짓이 섞여 있다는 거예요. 이게 감정적이 되니까. 어, 거짓이 섞여서 말합니다. 무슨 얘기냐면 애굽에서 먹었던 것이 지금 광야에 먹었던 보다 다양했던 것은 사실이에요. 사실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공짜로 먹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이들은 애굽에서 어, 노예
생활을 한 결과로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음식들은 노예 생활의 힘겨운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 생활할 때는 정자 우리를 제발이 상황에서 해결해 주세요.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원했고 하나님이 그 상에 벗어나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이들은 그때는 감격에 겨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은혜는 있고 불평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들의 불평은 계속해서 번져 나갑니다.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갑니다. 이제는 그들에게 주시는 만나, 하나님이
주신 만나에 대한 것입니다. 처음 그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만나가 주어졌을 때는 백성들이 감격하고 감사했지만 이제 그것이 매일같이 내리니까 일상의 만나는 더 이상 그들의 감사 제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뭐가 됐어요? 불평거리였어요. 배가 부르니까 이제 뭐 하는 거예요? 편식하고 싶은 거죠. 네.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이들의 모습 보지만 어쩌면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주님 이것만 넘어가게
해 주시면 이것만 없애 주시면 감사가 넘치는 삶이 살 것처럼 기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해결되고 이제 그것을 벗어나는 삶이 지속되면 그 감격이 잃어버리고 다른 것을 갖고 불평하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대표적으로 우리가 아마 한 번 경험하겠지만 막 몸이 너무 아프거나 어떤 질병에 있으면 하나님 이것만 내가 이겨 나가게 하시면 제가 정말 하나님 말씀 잘 살게요. 그래서 하나님이 감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켜서 매일매일이 건강합니다. 그럼 더 이상 이게
감격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이제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게 되고 다른 것을 갖고 불평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참 우리의 모습도 이들과 같이 한없이 가볍습니다. 아까 그때 불평의 최대 단점은 전염성이라는 거예요. 죄의 무서움도 전염성에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주변에 영향을 끼치고 다른 사람을 함께 실족시킵니다. 넘어뜨려요. 이방 족속의 불평이 이스라엘에게 옮겨왔고 그 불평을 하나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평은 결국 어디로 향하냐면 지도자인 모세를 향해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
불평해 봤자 여러분 속이 안 시원해요. 하나님은 뭐 계시지도 않은 거 같고 갑자기 이때가 되면 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리더 모세를 잡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모세도 불평합니다. 이게 지금 불평의 전염성이에요. 민수기 11장 11절부터 한번 내용을 좀 길지만 천천히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밖에 벗어나게 하시어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십니까?이
모든 백성을 제가이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히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사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먹일에 품듯이 그들의 품에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 백성은 저를 보고 울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달라 하고 외치는데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저 혼자서는 도저히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그리고 제가 주님의 눈밖에
나지 않았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제가 이 공경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네. 여러분 뭐 저도 이런 느낌을 가질 때가 뭐 아주 가끔씩 있어요. 막 저도 저에게 있는 문제, 저에게 있는 사역 이런 걸 감당하려고 막 저의 수익하 여기 간신이 여기 차 갖고 막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저한테 막 불평을 쏟아 놓구나 이러면 넘쳐서 예 하나님 이렇게 할 때가 있는 거죠.네 네. 모세의 어려움은 뭐냐면 사실 지금 뭐냐면 백성이 다 아기처럼 굳은 거예요. 하나님
제가 베이비 시팅하게 지쳤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이렇게 쓰면 저 죽이십시오. 모세의 기도가 아니라 모세의 협박이죠. 네. 모세의 불평은 하나님 아니 내가 뭐이 백성되고 뭐 나 잘하겠다고 뭐 하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나한테 맡기셔 놓고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거죠. 그 이것이 불평의 위력입니다. 이방 족속의 불평은 이스라엘로, 이스라엘 불평은 모세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이 상황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불평하는
문제에서 해결해 줘야 될 것은 해결해 주시고 혼내셔야 될 것은 혼내십니다. 일단 먼저 모세가 제기한 불평. 즉 모세가 내게 된 과중한 책임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세요.이 사람의 70명의 지도자 그룹을 세워주셔서 함께 백성들을 돌보아 주시는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불평 중에 만나가 지겹다는 것은 고기 먹고 싶다는 것은 매출하기를 내려 주시는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이렇게 응답도 해 주시지만이 문제에 대해서 잘못도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에 대해서 탐욕을 조장했던 이들을 벌하십니다. 벌하셨던 것은 죽이셨다는 거예요. 성경은 누구라고 정확하게 지칭하지 않지만 그들이 불평의 주동자들이었거나 아니면 매출하기를 주셨을 때도 과도한 탐욕을 보인 자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벌하심을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정화하고 그 영향을 받지 않게 하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에요. 뭐라고요? 사랑과 정의 하나님이에요. 사랑하십니다. 부족한 거 채워 주세요.
그러나 잘못된 것은 바로잡으십니다. 잘못된 것은 벌하십니다. 이게 11장 사건이면 12장에 또 다른 불편 사건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어떻게 보면은 모세와 함께 세워진 또 리더들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과 형인 아론입니다. 이들이 불평하는 내용이요. 12장의 불평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번 읽어 볼게요. 시작. 자를니 그지를 네. 여러분 굿스라는 것은 지역을 말하는 거예요. 어이 보면 여기 보면 미리암과 아론이라 나오는데 성경에서
일반적이라면 여성 이름이 먼저 나온 거 드은 일이에요. 보통 옆 앞에 나온다면 그 사람이 좀 더이 일에 어 우선된 자 혹은 좀 더 주동자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즉이 비방의 주동자는 미리암이었습니다. 아론이 동주하고 거들었어요. 자, 1절의 내용은 모세가 행한 일 가운데 어떤 부분이 이들이 보기에 못 마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이 굿스 여인이 누구냐라는 것은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출신이 구수다라고 그서 그것에 문제다라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 외에 또 다른 처을 뒀는데 그 사람이 구수 출신이다. 이방 출신이어서 이거에 대해 문제 제기됐다라는 것으로 견해가 나눠졌습니다. 근데 문제는 미리암과 아론이 진짜로 불평하는 것은 모세가 이 일을 했다는 것에 있지 않아요. 불평핵심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핑계거리입니다. 사실 그들이 진짜 불평하고 있는 것은 그다음에 있음이 성경에 드러납니다. 2절 말씀을 볼게요. 시작. 그를 어서 오라가지 아니하 여호와께서 즉 미디암은 모세의
어떤 일 중에서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봤을 때 의아하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부각해서 흠집을 내고 그참에 모세에게 집중된 권리와 권위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미리암 역시 선지자였으며 아론 역시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느끼게 이런 거예요. 뭐 모세나 우리나 뭐가 달라. 내심 자신보다 어린 동생인 모세의 지도력에 순종해 하는 상황이 싫었을 수도 있습니다. 즉 모세에게 제기한 도덕성은 그들의 그냥 핑계에
불과한 것이고 핵심은 모세의 영적 리더십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가 그럼 정말 모세가 그러한 지적을 받을만큼 뭘 잘못하고 있나라는 것 성경 살펴봐야 될 것입니다. 일단은 굿스 여인의 취한고에 대해서 성경은 전혀 어 그것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거를 볼 수 있냐면 모세가 그런 정말 독단적인 리더였는가? 그가 그런 구조를 만들려고 했는가? 권위주의자였는가?라고 라고 보면 오히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 앞서 하나님 앞에서 모세가 하나님 제가
너무 힘듭니다 할 때 하나님께서 70명의 지도자 그룹을 함께 세워서 그때 돌보했을 때 모세가 했던 행동이 성경에 기록되 있는데 모세는 권위를 독점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홀로 너무 많은 과중한 책임을 맞는 것에 부담을 갖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께서 백성이 주장한데 70명을 세웠을 때 그 70명에게도 하나님의 영을 내려주셔서 그들이 예언하였다라고 성경에 나오고 있어요. 근데 그중에 몇 사람은 나머지 일반 백성들이 있는 진인 진 중에서
예언하니까 오히려 모세의 오른팔인 여호수아가 그것을 보고 모세에게 알립니다. 저들이 백성 앞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저 말리셔야 됩니다. 지금 그러자면 여호수아는 어떤 입장이냐면 아 저런 영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모세만 해야 되는데 나머지 70명의 사랑 가운데 저렇게 하니까 일종에 영적 영향력이 모세 외에 다른 사람을 통해 발휘되는 것을 여호수아가 경계에서 가서 말한 거예요. 근데 그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말하냐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히려 주님께서
저들만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모두가 예언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여러분 이걸 보면 모세는 독점적 리더십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는 인물입니다. 즉 미디암과이 아론은 어쩌면 자신들 어떠함을 위해서 어 거짓으로 어떤 것을 잘 비방하고 그것을 갖고 불평하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으로 따지면 모세는 흔히 말하는 사제주의 뭐 흔히 말 목사는 이렇고 성도 이렇고 권위를 나누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만인이
제사장이라 만인이 제사장은 원리와 같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세워질 수 있고 쓰임받을 수 있으면 인정하는 수평적 리더십을 추구하는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리고 현 시대로 보자면 어떤 분들은 목사, 성도 이런 것을 나눠서 어떤 권위들의 뭐 목사에게 축복권이 있다. 더심한 분은 목사에게 저주권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어 있는 경우도 볼 때가 있는데 모세는 그런 것을 거부하고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영성을 인정하는 사람이었어요. 전혀이 비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저걸 성경 보자면 모세는 자신의 독단 조건에 추구하거나 자신과 다른 사연 사이에 영적 차별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미리암과 아론에 대해서도 모세는 그렇게 대해했을 겁니다. 근데 그 반작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미리암과 아론이 지도자 모세의 권위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거 참 쉽지 않은 문제죠. 이런 공동체 안에서 리더십에 대한 존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권위 주의가 되는 것은 곤란합니다. 우리는 그 균형을 이르면 안 되는 것이죠. 민숙기는
철저하게 공동체 안에 질서가 있고 리더십에 대한 존중을 가르칩니다. 동시에 리더로서 리더가 보여야 될 옳은 태도에 대해서도 함께 가르칩니다. 리더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고 팔로어에게 요구하는 하나님 가르침이 있다는 거예요. 모세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만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온유의함을 민수기는 함께 가르치고 있어요. 적어도 그러나 이번 사건만큼은 하나님은 모세의 편에 철저하게서 주십니다. 이렇게 미리암과 아론에
대해서 그 문제 이렇게 말씀하시죠. 3절입니다. 읽겠습니다. 시작. 사람이다. 미리암과 아론이 얘기했을 때 하나님은 아니야. 내 종 모세는 땅에 있는 모든 생활에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말씀하십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서는 하나님께 모세 평지만 나중에 모세가 다른 부분에서는 혼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하나님께. 어떤 모습 때문입니까? 모세가 스스로 화내고 혈기 부릴 때였습니다. 그가 지도자로서 백성을 이끌 때 억울한 일을 당하며 하나님이 그의 편이 돼 주세요. 근데 그가
스스로 화내고 혈기부리고 이때는 모세도 하나님께 혼나는 것 이것이 민수기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지서에난 것을 바로 잡으십니다. 그러고 잘못된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잡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어 모세는 모세 남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사실 늘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을 보시는가? 모세가 자기 성질대로 행하는가? 그것을 보십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도 리더로 섬기는 다양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교육자라고 할 사람은
저밖에 없지만 저희는 성도들과 함께 세워져 가는 교회를 꿈꾸기 때문에 매년 리더들이 새롭게 세워지고 또 리더 역할하다가 어 리더가 아닌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올해 목사는 어 제가 어쩌면 대표적으로 리더 맡고 있고 그외 우리 교회 안에는 그렇게 세워진 리더가 어 사역자라고 불리는 성도 리더들이 저를 포함해서 24명 정도가 올해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 목사라는 전 타이틀이 있으니까 대부분 그 권위를 잘 인정해 주시고 잘 따라 주시니
제가 사역 간사님들을 예로 드리겠습니다. 저희 사역 관사 두 분이 있는데 이들은 어 어쩌면 전도사로서 어 사역을 하기도 했었고 또 이제 목회기를 가기 위해서 어 훈련받기 와 있죠. 대부분 여러분보다 연소합니다. 평소에는 동생처럼 지내도 되고 친구처럼 대해도 되고 어 그러기도 합니다. 그럼 만약에 이들이 어떤 사역 안에서 어떤 리더 리더 리더로서 행할 때 우리는 이들을 존중하고 또 그 지도력을 인정하고 따라야 하는 것 그것이 마땅히 우리 안에서 해야 할 몫일 수 있을
것입니다. 뭐 이래서 이거는 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죠. 우리 교회 청년 가운데네 27살에 불과한 우리 현우가네 예배팀의 입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 청년이지만 그가 예배 팀의 리더로 돼서 그 팀을 이끌고 예배 준비할 때 사역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세우신 권의로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근데 그것은 그가 그 사역을 할 때만이에요. 현우가 사역을 마치고 오후에 청년 공동체 모임에 가면 거기에는 또 다른 리더가 있습니다.
청년 공동체의 리더인 태이 자매가 있죠. 그리고 현우는 그 태이의 권위를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근데 또 그 태이도 어린이부에 가면 거기는 또 어린이부의 리더인 대표 교사인 정하 자매님이 있습니다. 그럼 태이도 거기서는 자기의 리더십이 아니라 그 자매님의 리더십을 따라야 됩니다. 근데 그 정화 자매님도 또 예배 팀에 오시면 싱어로서 현후의 권위를 따라야 하는 거예요. 어쩌면 또 돌고 도는 거죠. 그 현우도 사역에서 잘 벗어나면 우리에게는 그냥 교회 안에 청년 어
현우일 뿐입니다. 제가 무슨 얘기하고 싶은 거냐면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할 때는 함께 그 사역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여기면서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존중하는 거예요. 그 사역에 잘 벗어났을 때는 그는 그냥 우리의 형제의 자매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시 그가 또 누군가 권의하을 때는 권의를 존중하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것이 우리 안에서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분야이든 우리 교회 안에 세워진 리더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그것을 인정하고 따라 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원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리더들에게도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어떤 내가 이끄는 역할을 맞다 보면 속상할 때도 있고 누군가가 내 리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아서 서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감정대로 행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각 역할마다 기대하고 주목하여 보시는 것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사실 이렇게만 말하면 교회적인 주인 거 같지만 사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모두
다 리더십을 주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있는 가정에서는 여러분은 다 하나님의 영적인 권위를 가진 리더들일 거예요. 부모님들이라면 여러분이 감정대로 행하는가 아닌가 하나님은 사실 보고 계실 겁니다. 하나님은 미리암과 아론에게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자절부터 한번 읽어 볼게요. 시작하고 나를 할 치 아니하니 그는 내리라 또한 내가 하여를 하고 그도 여호와의을 너희가 없어지 아니하다 여호와께서 그를 위하여 증거하시고 하시매고 미는 자이 미리네 미리암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당하는 장면이죠 여러분 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맡기신 어떠한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 단순히 일만 맡기시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도 사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나 그 착각하지 말아야 될 건 뭐냐면 내가 어떠한 일을 할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하여서 거기서는 어떤 영적 영향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인정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그 사역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뿐입니다.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고 내가 높아지거나 어떤 내가 특수한 능력을 지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역을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을 쓰실 뿐이에요. 신약시대 보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들에게 그의 합당한 능력을 주십니다. 어떨 때는 그 사람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기도 해요. 근데 여러분 지금 시대에도 어떤 기적을 행한다고 하면서 아 뭐 어떤 누군가 기적을 행하니까 막 그 사람을 높이고
저는 그러면 그거는 이미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바나바와 바울의 대가 대표로 그렇습니다. 이방 지역에서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 그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그들이 행할 때 마치 사람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정말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 권위와 영향력이 나타나니까 사람들이 바나바를 보면서 어 저 사람은 마치 제우스 같아. 바울은 헤르메스 같아. 자신들이 이해하는 신내에 대입하면서 갑자기 바울과 바나바를 둘러싸고 그들에게 경배를
돌리고 예배하려고 합니다. 그때 바나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읽어 볼게요. 시작. 이렇게 말하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시니까 여러분과 성을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너희를 고와 있는 모든 것을 같이 하는게 하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누구도 목사인 저주사도 제가 여러분과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할 때만큼은 만약에 하나님이 저를 통해 뭔가를 주실 수도 있겠죠. 제 능력 이상의
어떤 권위와 어떤 영향과 어떤 은혜와 어 그것은 제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실 뿐인 겁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우리가 어떠한 것도 그것이 나의 능력이다, 나의 힘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만 맡기신 건 아니라 그것을 감당한 능력과 영적 권위와 힘도 함께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가 어떤 사역의 질서
안에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동시에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하여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 주어진 것을 인정하며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 모세는 하나님께 이런 말 모세는 이 세상 모든 사람 가운데 아까 세 번역는 겸손했다. 개혁해지는 온유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제가 온유함을 설명된 적이 있어요. 온유함의 어언을 따라가면 온유함은 야생마가 길들려지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어요. 온유한게 된다고 뭐냐면 단순히 착해 이게 아닙니다. 성경 말 온유함은 야생마와 같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 앞에서 길드려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된 상태예요. 그 상태가 즉 뭐냐면 다른 모든 사람 가운데 겸손한 상태였다고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종종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과 겸손을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 교만과 겸손을 갖고 오해하기 때문이에요. 세상에서 말하는 우리가 이해하는 겸손는 대충 다 이런 겁니다. 자신을 무조건 낮추는 거예요.
실제로 내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적어도 태도와 말로서 낮추는 겁니다. 뭐 대표적인 이런 거죠. 이만큼 차려놓고 나도 이만큼 찾아놓다고 다 알아요. 근데 뭐라고 말하죠? 차린게 없습니다. 네. 이렇게 말해야지 어 겸손해 보이기 때문이에요. 네. 뭐 더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연인이 사귀다가 헤어질 때 난 너에게 넌 넌 나에게 너무 가분해.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 어, 이거 이런 것이 말로만 하는 겸손이죠. 네. 여러분, 그것은 성경이 바라는 겸손이 아니에요.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과 교만은 이렇게 이해야 됩니다. 여러분, 일단 교만은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보시는데 내가 스스로 나를 더 높게 보면 이게 뭐예요? 교만이죠. 오케이. 이건 다 이해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 이렇게 보시는데 내가 스스로 나를 이렇게 보면 뭐예요? 이것도 교만입니다. 자,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예요. 모세가 하나님께서 모세 처음 부르시는 장면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3장 말씀 한번 읽어보면 읽겠습니다. 시작. 너를 바로에게 보내 이스라엘
자손을 인정하였다 하였다고 이스라는 에서 하나님 모세 부르면 모세야 내가 널 이렇게 쓸 거야 내가 너 향한 쓰임은 이런 거야 너희가 네가 나와 함께 이런 일을 하자 이렇게 말씀할 때 일단 모세가 하나님 제가 뭐라고 저 못 합니다. 근데 여러분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고 했어요. 왜냐면 주님께서 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모세는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자기의 힘인 줄 알고 자기가 어떠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근데 한 번 정도
그럴 수 있죠. 하나님이 계속 설득합니다. 그때 모세가 여러 번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읽어 볼게요. 시작. 주님께 알았다. 주님 저는 우리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저로 주님께서이를 말씀하고 신다이고 제가 걸어리며 주님 송합니다. 내가 열매하는 사람을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시다. 네. 뭐 하자고 했더니 주님 저는 말이 못 해서 안 됩니다. 또 해결해줬더니 주님 저는 아닙니다. 제발 보낼 만한 자를 보냈어. 이렇게 말을 하고 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크게 노아하시며
말씀하신 장면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은 모세의 겸손 아니라 모세의 교만이에요. 모세의 모습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자기의 중심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냥 따르기 싫은 거예요. 핑계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랬던 모세가 온유하게 되었다. 겸손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신 것처럼 나도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언가를 맡긴다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 저는 부족한게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시면 하나님이 나에게 힘 주실 줄 알고 제가 따라가 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겸손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내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성경 말하는 겸손이요 온유함입니다. 야생마가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기 말대로 나 일로 갈 거야, 절로 갈 거야. 이게 야생마예요. 길드렸자는 건 뭡니까? 주인이 일로 가자 하는 대로 가고 일로 가자 갈 수 있는 그것이 길드려진 것입니다. 우리의
자기 준성은 하나님이 이렇게 가라고 해도 전 이렇게 할 거예요. 이렇게 할 거예요. 불평도 사실 그런 것 다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왜 이게 없습니까? 저게 없습니까? 이거 주셔야죠. 그랬던 사람들이 훈련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 온유함이고 겸손함. 그것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모세는 그 전에 비해서 훨씬 더 온유해서 그래도 모세 정도니까 지금이 공동체 이렇게 이끌고 있는 어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거예요.
모세가 온유함이이 땅 모든 사람 가운데 최고다. 너희의 비방은 틀렸다라고 하면서 미리암을 벌라집니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려요.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거고 지금 말면 극한 피부병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 심판을 받게 되자 아론도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그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2장 11절이요. 읽겠습니다. 시작. 아론이 모세이다 성하여 가운데서. 네. 이것이 지금 아론의 태도가 변한 것을 보여집니다. 그전까지 모세 너만 잘랐냐?
너만 하나님 말씀 듣냐? 말했지만이 일을 통해 깨닫고 동생이지만 이스라엘 지도자인 모세에게 내 주여라고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를 영적 지서로 인정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와 어쩌면 지도력을 나눠갔고 혹은 모세와 같이 되기를 원했으나 결국 모세에게 하나님과의 중제를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지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모세의 차례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봤지 막 이래야 될까요? 여기서 혈기 부리고 자기 잘난주
까보면 큰일난 거죠. 예. 모세도 하나님이 기대하신 대로 행합니다. 모세가 이제 이들을 위해서 중보합니다. 그래서 주이 부르셨다. 하나님 비옵니다. 제와 미리암을 고쳐 주십시오. 하나님은 이 기도에 대해서 즉각 응답하진 않으세요. 7일 동안 미리암을 나병 상태로 두게 합니다. 그걸 통해서 아마도 그녀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7일이 지나서 회복되어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이 사실을 보고 미리암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게 하십니다. 이것은 미리암에게 모두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교육이기 때문입니다.이 이야기는 여전히 미리암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중요한 인물이라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한 치면이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미리암의 징계 기간에 동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공동체입니다. 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하나님이 바라시는 공동체 모습 보면 언제 하나님은 그 사람과
그 공동체를 향해서 함께 하고 싶은 하나님한 비전이 있어요. 원하시는 방향이 있고 우리가 모두 겸손하게 주님을 따라서 그 방향 걸어갈 때 우리는 그 일을 해 나가며 함께 하나님의 그 함께하심과 동행하심과 그 놀라운 증인이 되곤 합니다. 근데 많은 경우에 성경에 보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그 행진이 늦어지는 경우가 있을 때가 있어요. 자, 지금 전체 지금 대표적으로 출애굽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어요. 근데 이세대가 뒤에 보면 실패합니다. 실패했다고 하나님이 아, 나 이거 안 해. 이렇게 하십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고자 하신 일을 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께서 들려보는 건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다만 1세대가 이 일을 실패하게 됐을 때 40년의 시간이 지연되고 그 일을 행하는 도구된 사람들의 주체가 바뀌었음입니다. 1세대에서 2세대로. 여러분 또한 더 큰 그림을 보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백성 삼아서 그들을 제사장
나라 삼고 세상 모든 나라를 구원하는 통로로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보여주듯이 그들이 그 사명에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 백성을 부르셔서 신약의 교회 그리스도인을 부르셔서 그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이고 연기될 뿐이고 그 사용된 사람이 받기뿐 하나님의 일은 계속된다는 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실패의 원리에 다뤘어요. 제가 마지막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실패할 수 있어요. 우리의 실패가 뼈 아픈 곳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그 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실패한다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실패하면 우리가 그 일을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는 것을 못 볼 뿐이에요. 심한 경우는 우리가 그 일에 배지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태도를 갖고 하나님이 깨닫게 하는 것을 깨닫고 함께 날마다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공동체를
저는 하나님이 쓰신다고 생각해요. 우리 공동체 하나님이 향한 비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우리가 하나님 잘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우리 통해서 그 일을 하시겠지만 우리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넘어질 수 있어요. 그럼 하나님이 그 일을 안 하시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을 더 늦추시거나 아니면 우리가 아니라 다른 독을 찾으실 거예요. 저는 민수기가 주는 이 실패의 원리를 통해서 우리가 실패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평이 생길 상황이 우리에게
없지 않아요. 그러나 불평은 불평을 밖으로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의 성숙이란 것을 기억하십시오. 불평이 있는 것은 불평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불평이 없을 수는 없을 거예요. 불평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신뢰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 앞으로 나아가 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리고 기대하는 공동의 성숙함은 불평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때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잡아주며 함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불평하기보다는 더 먼저 섬김으로 행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될 것은 따로 있어요.이 공동체를 지키는 것보다 더 먼저 더 우선을 지켜야 된 것은 가장 중요한 나의 마음이에요.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입술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지키셔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행하지 않도록 그것을 집중하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사랑의 시선은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는 시선은 남을 향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혹시 정제와 판단에 있어서는 제바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하십시오. 여러분 말씀에 보면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냐? 주님 말씀하십니다. 부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해십시오. 그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불평 결국 이것도 남탓입니다. 사람 탓, 환경 탓. 그러나
우리에게 먼저 유구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나를 나를 들여다보고 주님과 내가 지금 잘 연결되었는지 살피며 늘 주님 안에서부터 우리의 고갈됨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갖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찾으신 사람은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주님 앞에서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 안에서 길들려져 가는 주님이 쉬고자 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