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서 성 금요일 아침입니다. 어 오늘 특별히 주님을 묵상하며 그의 아름다운 순종과 또 십자가를 통하여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어 확증하셨던 그분을 묵상하며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어, 교회 찬송가 432장입니다. 예수 흠도 죄도 없는 당신이 깊이 감쳐두 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어린양 속죄의 재물 되어 저주 받은 나무에 달리셨네. 아멘. 우리 다시 한번 찬양하겠습니다. 예수 금도 죄도 없는 당신이 깊이 감쳐두 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어린여 속죄의
죄물되어 저주받은 나무에 달리 네. 내가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못 받았습니다. 당신이 행하신님 약속을 다 있고 십자가의 예수를 매달았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못 파았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찌고 아버지께 힘도하시네. 내가 예수를 못 받았습니다. 예수 참 사랑과 평화의 주님. 예수 참 사랑과 평화의 주님. 소망 없이 먹어진 우리를 하나님과 온전히 화복케하기 위해 십자가 막힌 허무셨네.
내가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부인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당신이 행하신 일 모든 약속을 다 입고 십자가의 예수를 매달았네. 내가 내가 예수를 당신을 부인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은 못 박았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지고 아버지께 인도하신 내가 예수를 못 받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내가 예수를 당신을 부인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못 받았습니다. 당신이 행하시님 모든 약속을 다 있고 십자가의 예수를 매달았네. 내가 내가 예수를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못 박았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짓고 아버지께 힘도하신 내가 예수를 못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 나는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내가 예수 당신을 바라봅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다시 바라봅니다. 아멘. 내가 예수를 당신을 상합니다. 당신이 행하신 일 흔들리지 않는 사랑 깨지지 않는 약속 붙들겠네. 내가 내가 예수를 당신을 다시 바봅니다. 내가 예수를 탐신을 상합니다. 감을 수 없는 사랑께 인도하시네. 내가 예수를 사랑합니다.
아멘.이 이 시간 저희 함께 기도하며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2년 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어 유대인과 기도 기득교 세력만이 아니었습니다. 어이 세다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바로 주님을 그곳에 못 박았습니다. 나의 뜻대로 주님의 약속을 잊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바로 어 내가 주님을 못 박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이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의 삶을 내려놓고 다시금 주님을 바라볼 수 없는 나의 연약함과 온전히 주님만을 묵상할 수 있는 나의 모든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그 고백들을 진심으로 드리며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주제 함께 주시옵소서. 우리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 시간에 우리를 만져 주시고 아버지 우리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늘 넘어치고 작아질 수도 없지만 그러기도 아주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기억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한 걸음도 나아가고자이 시간 이렇게 예배하러 나왔습니다. 함께 이배할 수 있음이 감사하며 오늘 특별히 성 금요일이 아침에 맞이하여서
우리가 더욱더 주의 십자가를 마음에 새기고 품고 묵상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마태복음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말씀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갈 때 하나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해시고 또한 이해와 더불어 우리의 삶으로 그 말씀을 받고 쫓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네. 어. 드디어네 마지막 날입니다. 네. 우리 5일 동안 함께 수고하셨고네
우리 자 있는 분들 좀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함이 기쁨입니다. 네. 네. 마태복음 우리 말씀은 25장 말씀을 갖고 함께 아침에 주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도 본문에 먼저 묵상하고 설교를 나누도록 할 테니까요. 앞에 영상을 참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25장. 그때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밀어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오 다 졸며 잘세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을 준비할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하 이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하니 그들이 살에 신랑이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은 다친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하여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긴 거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 어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세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지고 와서 이 주인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달란트를 그 주인이이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을게 맡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을 내게 맡기리니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춰두었나이다. 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앗리라이 무익한 종을 을 얻으라. 거기서 슬며 일을 갈리라 하니라.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줄일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을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줄이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 병 드신 것이나 옥에 갇치신 것을 보고 가서 배웠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불에 들어가라 내가 너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지 아니하였고벗었을
때 옷잎히지 아니하였고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하여 이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줄이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신 것을 공하지 아니하 이에 임금이 하여 이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이니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네 아멘 네 우리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어 함께 보도록 합니다. 어제 마태복음
24장까지 봤었는데 24장의 내용은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과 종말과 재림에 대한 예언에 대한 것을 나눴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전반부는 성전 파괴와 관련된 그 예언이 주어졌고 마태복음 24장 후반부에는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해서 주님의 답이 주어지고 있는데 바로 그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해서 종말과 재림의 때를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를 말씀하시는 그 가르침이 25장까지 지금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장은 종말과 재림의 때를 앞둔 우리들,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것을 준비해야 되는지 알려 주고 있는데 25장은 우리에게 익히자 알려진 열처녀 비유로 시작합니다.이 이 비유는 앞서 24장에 나타났던 도둑 비유에 나타난 그 준비하라는 이야기와 또한 여러 다른 비유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구원과 심판이라는 각기 다른 결과에 사람들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이 열천녀 비유에서 우리가 알다시피 이의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이죠. 그러므로 이 잔치는 메시아의 잔치,
즉 구원의 잔치입니다. 자, 먼저 이 비유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봐야 될 것은 강조되고 있는 한 측면은 신랑의 도래가 지연된다는 점입니다. 즉 주님의 재림이 사람들이 예상한 거보다 또한 기대한 거보다 지연될 수 있다. 아, 어떻게 보면 어제가 말했듯이 알 수 없다는 측면이 강하다는 거죠. 주님의 재림이 인박할 것이라. 인박 우리가 곧 주님이 오신다라는이 기대가 성경 시대에 있는 사람에게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말씀된 것처럼 재림의 날은 우리가 알 수도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 때를 알려는 시도보다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지만 늘 주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주님, 그래도 제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힘써 살아왔습니다. 여전히 부족함이 많지만 그래도 주님을 담고자 힘써 왔던 제 마음의 그 중심을 주님이 아시죠.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진 것이 저와 우리의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비유에는 열 처녀야가 있었는데 신랑이 예상보다 늦게 오기 때문에 이들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뭐 지혜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우리는 일상적인 삶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상적인 삶 가운데 얘기치 못한 시간에 신랑이 옵니다. 지혜로운 다섯천은 등불도 갖고 있었고 기름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미련한다는 등불은 준비했는데 기름을 준비해 놓지 않았습니다. 즉 신랑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라는 것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비유는 비유로
봐야 됩니다.이 이 비율을 막 과모입해서 왜 여자가 남자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되냐? 뭐 불공정하다. 이렇게 하는 것은 비유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비유는 어떤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해 거기에 필요한 그냥 설정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또한 지혜로운 처녀가 왜이 상황에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서 왜 기름을 나눠 주지 않냐? 왜 편협하냐? 이렇게 따지면 안 됩니다. 비유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비유에서만큼은 예수님이 자신을 도적에 비유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비유가 강조해 주는 치면은 마지막 때를 위해서 우리가 준비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것은 그 준비는 어느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것을 스스로 책임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 없는 문제다라는 곳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래서 또한 기름을 준비하는 일은 신랑이 오기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그때 가서 뒤늦게 이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이미 잔치의 문이 다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으로 주어진
비유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달란트 비유이죠.이 이 비유는 제가 설교로도 몇 차례 나눈 바 있습니다. 오늘이 시간에 깊이 다룰 수 없으니까 관심이 있다면 한번 설교를 찾아보시면 몇 가지 설교가 나올 것입니다. 핵심만 오늘 본 보면 결국 이 달란트 비유 또한 준비에 대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인을 기다리는 그 시간은 그냥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막연하게 보내야 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주인의 명령이 있는 시간이며 종들에게 각 사람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제가 봤을 때 보통이 달란트 비유에 대해서 갖는 많은 오해는 달란트를 작게 보는 것입니다. 우습게 보는 거예요. 이것은 주일학교의 영향이 큽니다. 왜냐면 여러분 주일학교에서 여러분 애들한테 1단트 주면 좋아합니까? 네. 1달란트는 별거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근데 실상 1달란트는 엄청나게 큰 돈입니다. 여러분 달란트보다 작은 것이 데나리온입니다. 1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일반적인 당대의 하루 품삭입니다. 근데 이 1
달란트는이 데나리온을 몇 개 모아야지? 1단이면 6천000개 모아야 됩니다. 즉 노동자가 6,일 동안 일을 하면 하나 안 쓰면 1단한테 모을 수 있습니다. 1년에 빡세게 300일 일한다고 치면 20년을 일해야 됩니다. 그 20년치 연봉이 1달란트입니다. 자, 그럼 다섯 달란 사람 몇 년치 연봉이에요? 100년치 연봉입니다. 네. 즉 평생을 내가 일도 벌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즉 종으로서 다섯 달란트 뭐 둘한테 1달한테는 모두 주인으로서 내가 이것을 받을 것이라
기대할 수 없는 무엇을 받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1단트 즉 20년치 연봉을 투자해 준다면 그 자체가 엄청난 것이 아닐까요? 네. 하나님은 그런 분이에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만한 어떤 것들을 주시고 어 맡기셨습니다. 그이 달란트라 것이 무엇인가? 우리 뭐 가장 먼저 뭐 재능 하여 주신 탤런트 탤렌트 이런 걸 생각하는 경우 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적 재능이라기보다는 성경적으로 볼 때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특권들과 기회들을 부여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그런 기회의 시간 거기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제자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들은 각각의 특성과 크기가 다를 수 있음을이 비유는 전제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맡기신 책임과 각 사람 맡기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임의 크기를 정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린 거기에 얽매이지 않아야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내게 주어진 그 기회와 그 시간들을 충실히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달란트 가진 자는 뭐였어요? 안 쓰고 묶혀뒀어요. 그것이 책망받을 일이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해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비유의 특징입니다. 중요한 것은 5달란트 받은 자나 2달란트 받은 자나 그들이 남긴 곳은 5달란트와 2달트지만 그 크기를 갖고 주인은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둘 다 똑같은 칭찬에 받았어요. 차이가 있었다면 한 그것을
사용한 자와 사용하지 않은 자의 차이밖에 없었습니다. 주인이 기대는 주인의 기대는 우리에게 주신 그 기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섞히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비위의 안에서 보자면 자신이 평생 벌 수 없는 돈을 투자해서 무언가 장사를 한다는 것은 종으로서는 위험 부담을 갖는 것입니다. 일부가 아니라 그거를 다 투자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이처럼 때로는 내가 보기에 어쩌면 내 한계를 넘는 때로는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달란트 비유는 말도 안 되는 투자입니다. 위험한 투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우리가 그것을 갖고 내 삶을 거기에 들여서 주인의 명령에 맞춰서 내 삶을 사용한다는 것은 가장 안전한 투자입니다. 그 투자의 대상이 하나님이고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은 내가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데 내가 이 이러한 시간과 이만한
에돈을이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이 예배하는 일에 쓴다는 것은 엄청난 겁니다. 근데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충분히 거기에 들여서 내가 헌신하고 내가 예배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세 번째 종 즉 1단한테 받은 자 받은 종의 이야기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긴데 이것은 셋째 종을 통해서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의 실수는 무엇입니까? 그는 주인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요. 활동하지도
않은 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기대 안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다하지 않은 것은 정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초대교회 공동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 이런 태도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신령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만남만 먹고 살게요. 이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고 각자 자신에게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또한 내어놓음으로서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서로 섬겨줬어요. 서로의 삶에 최선을 다했어요. 하나님 믿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실제로 그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그 그 안에 수많은 과부와 고화를 책임지고 살렸습니다. 영혼을 돌봤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런 복음 전도를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순종으로 시작된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알아서 하세요. 저는 하나님만 미십니다. 네. 이러면서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1달란트 가진 종과 같습니다.이 비유는 그런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지극히 소극적인 뜻을 가진 사람에게 경고하는 비유예요. 하나님 나라의 제자의 삶이란 세상적인 안전이 아니라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주님의 뜻에 반응하는 적극적인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의 이런 가르침들을 대하다 보면 아 구원이 그럼 선행을 통해서 주어지는가라는 생각이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가장 기본적 원리는 기본적으로 은혜인데 특별히 그중에서도 사귐의 은혜예요. 우리 용서하시는 은혜라는 겁니다. 우리의 어떤 선한 행실 이전에 그리스도의 사제의 은혜가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이 주실 은혜가 없고 용서가 없는데 우리가 어떤 선행하더라도 우린 구원받을 수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전에 왔던 일만난한테 빚진 자의 비유를 생각하면 그가 무언가 선을 행했기 때문에 그 왕이 그 주인이 그의 일만 달란트를
탄감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선행 이전에 그의 회개와 그에 대한 주인의 용서로 그 은혜로 구원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제 그 1만 달란트 탄감해 준 탄감받은 자에게 기대되는 것이 또한 있었습니다. 그것이 선행이었어요. 그건 무슨 선행이었냐면 백대나리온 빚진 것 정도는 용서해질 수 있는 그러한 행위였습니다. 만약 네가 정말 받은 은혜가 이만한 건 줄 안다면 이만한 것을 행하는 것은 마땅히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책임이라는
거예요. 이것조차 하지 않으면 일만날테다 탄감해 준 것도 없던 것으로 여긴다라는 것이 그 비유의 핵심이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에 유명한 말씀이 있잖아요. 주여 주여 하는 자가 구원받지 못한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은 내가 정말 나의 삶의 주인으로 그분을 모시고 따른다면 그런 믿음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 주인의 뜻대로 내가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때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여 주여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주님을
정말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진실함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 특별히 마태복음이 말하는 믿음, 믿음 피스티스라는이 단어 안에는 언제나 순종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제가 지금 구원이 믿음 더하기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러면 잘못된 거예요. 구원은 믿음 더하기 선행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데 믿음 안에 순종이 내포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과 선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그 믿음이 순종이 포함된 믿음 즉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순종이 동부되 있어야 돼요. 그 마음의 진실함이 그 안에 담겨 있어야 돼요. 믿음은 행함을 그래서 반드시 수반합니다. 선행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는 않았어요. 여러분, 종교 개혁 당시에 루터 마틴 루터의 고민은 당시에 가톨릭이
갖고 있는 믿음과 무관한 행위들이 고민이었습니다. 그런 어떤 종교적인 행위와 의식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당대 행위 구원과 맞서 싸워야 됐기 때문에 그 루터나 종교자들은 칭의 믿음의 측면을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행함은 필요하지 않다. 즉 믿음 없는 행함에 반대한 것인데 역설적으로 종교 이후의 개신교는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치우쳐 버리는 또 다른 문제 직면에 있습니다. 우리는 양 극단에 빠지면 안 돼요. 믿음이 없는 행함을 강조하는 것도
안 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그 우리가 추구했 무엇입니까? 순종이 있는 믿음이에요. 행동하는 믿음이에요. 내 믿음 안에 그 믿음을 갖고 있는 그 진실한만큼 내 삶에서 하나님 향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성경이에요. 우리의 기준은 성경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우리 가르치고 있는데 특별히 마태복음은 그렇습니다. 마태 25장 37절 아까 봤지만 잠깐만 다시 읽어 드릴게요.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줄이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그들에게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정상 이들은 우리가 그런 일을 하고 살았는지도 몰라요. 근데 그것이 있었어요. 여러분 진짜 참대 의인은 내가 구원을 위해서 내가 이 일을 해서 구원받을 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선행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늘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이 무엇일까? 주님이 주인되시는 마음에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마음에 반응하는 삶의 태도가 선행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는 삶 자신의 선행도 의식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삶이 마태복음이 말하는 의인의 삶입니다. 당대도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제는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막 그렇게 뭔가를 하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 가르침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도 모를 정도로 선행을 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자기 의에 빠지지 말라는 곳입니다. 나 이런 거 하는 사람이야. 주님을 따른 자들에게 주님의 마음에 주시는 마음에 따르는 것을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4절로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줄이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이 갇치신 것을 보고 공영하지 공영하지 아니하도 되까?이 문제를 종교적 열심으로 행하려 한 자들은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 이런 거 안
했습니까? 저 우린 다 주님에게 그런 거 할 마음이 있었어요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열심인 사람들은 이 일들을이 선행을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에 대해서만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해서 내 삶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는가 그것을 보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진짜 진실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최선을 다해요. 매일같이 교회와서
막 기도하고 교회 안에 봉사하는 것은 최선을 다 하지만 정작 삶에서는 무관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나보다 높은 자, 나 영향력 있는 자에게 뭔가를 하는 것은 어쩌면 거기에는 순수한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낮은 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는 것은 진실합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 23절 이렇게 말하죠.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들어 이르되 주여 주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은 단순히 종교적 행위로 하는 일들에 대해서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활동 앞 사람들은 그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있게 우리 주님 위해서 이런 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때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어요. 내가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수많은 예배드려도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 우리 책임진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중심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하더라도 찬양을 하더라도 사역을 하더라도 선행을 하더라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나 5일 동안 새벽 예배에 어 개근이야 아무 의미 없을 수 있어요. 어떤 마음으로 이 시간을 보냈고이 시간에서 받은 주의 말씀을 갖고
그 마음을 갖고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도 목사로서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한 주간 수고하셨습니다. 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아 나 이번에 새벽이가 우리의 중심에 남아 있지는 않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되면 도리어 위험합니다. 나는 다섯 번 했어. 넌 한 번 했지. 이러면 안 됩니다. 네. 그보다이 시간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께 머물러 있음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보고 기도하며 주께 가까이 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주님 마음을 내가 받아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5일 동안 오신 분은 더 많은 깊은 사임과 더 많은 훈련을 누리신 거죠. 그것 자체가 감사할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사랑하시어 여러분을 이곳에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하는 마음을 주셨고 그 순종한 분들이 여기에 나온 줄로 믿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이 예배 안에서 주님이 주신 마음을 받았으니 주님이 주신 삶의 터지로 나아가 그 삶의 모든 기회 안에서 부여받은 그 사명 안에서 살아가
주십시오. 그렇게 하루를 잘 보내고 오늘 밤에 우리 함께 모여서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을 다시 예배하고 노래할 수 있는 모든 사인 가족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부르시어 주님의 예배할 수 있는 주의 자녀로 주님의 예배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주의 가족으로 삼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동행하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습이 날마다 날마다 더욱 주님 닮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를 묵상하고 주님을 되새기고 그 시간이 늘어갈수록 우리 마음이 우리의 모습이 주님을 닮아갈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이 예배 안에서 주님을 깊이 묵상하고 주님을 내 마음에 가득 담아서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삶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 우리 어 남은 시간 오늘 하루를 주님 앞에서 어떻게 보낼까 함께 같이 어 기도하면서 우리 자유롭게 기도하고 돌아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잘 살다가 밤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함으로 나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