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설교 네 번째 시간입니다. 마태복음의 전체적 구조에서 본다면 1-2장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족보, 탄생과 유년기 등이 나오는데, 특별히 마태복음에서는 이 모든 것이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시간의 간격이 조금 있은 후, 마태복음 3-4장이 시작되죠.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말라기서에서 예언한 ‘엘리야’로서 등장하여 메시아가 오실 것을 밝히고 회개를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광야의 시험
사건 등이 기록되며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을 준비하시는데, 그가 이제 사역을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하신 일은 구약이 예고한 그 모습대로였습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가르치고 고치시는 일.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면 가르치시고 고치신 것입니다. 진리를 전하고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는 제자,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바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한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이 ‘산상수훈’인 것이죠. 학자들은 마태복음 5-7장의 내용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주어진 말씀을 모아둔 것이라고 봅니다. 즉, 딱 한번만, 그리고 이 전체 내용을 그 한번에 다 전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늘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것이었으니까요. 그 말씀의 핵심을 모아서 마태는 5-7장에 기록합니다. 이게 마태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설교로 나눴듯,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믿어.” 당연히 맞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한 주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외면한다면 그것은 과연 그리스도인이 맞을까?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의 고백이 종종 둥둥 떠다니는 말뿐인 가벼운 고백이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만 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아이고 주여, 아이고 주여” 입버릇처럼 이런 이야기 하는 것에 달렸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똑같죠. ‘Oh My God’, ‘Jesus’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정말 나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 후, 끊임없이 주님 뜻을 따라가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내 삶은 달라지고 있는가? 어쩌면 이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으면 정확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예수님 때문에 좀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 이 질문에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YES”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정말 잘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내가 예수님을 잘 따르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꾸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고민이신 분들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분들을 무지하게 격려하고 싶습니다. 가끔 저도 저를 보면서 그런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보고 듣고, 내 삶에 비추어 보며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나는 자꾸 오른뺨을 맞으면 나도 때리고 싶고, 목사이기에 억지로 참아보지만, 마음에 분함이 있을 때도 많으며, 그 또한 기도하면서 이겨내더라도, 그 후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내가 사랑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되며, “주님 나에게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싶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고 닮고 싶고 닮아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떤 순간에 보면 그렇지 못한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잘하고 있어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잘하고 싶어서 오늘도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라면 풍삶초 과정을 통해서 다 들으셨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종종 장애물에 걸려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장애물은 교회와 교인들이 만들어놓은 장애물이죠. 사람들은 교인들이 위선이 가득하다, 말만 잘한다,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망가져 있다고....
그래서 나는 교회를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전부 다 맞는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겠으나, 분명 교회가 교회 밖의 누군가에게, 그리고 교회 안에서 신앙이 연약한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에 신앙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도 있음을 우리가 다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혹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억하시나요? 우선 사과해야 합니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생각해도 교회 안에, 교인들 안에 그런
모습이 정말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모든 교회를 대표할 수 없지만, 교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너에게 그런 불편한 마음을 주었던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 사과만 하고 끝내면 안 된다고 했죠.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덧붙여서 해 주어야 할 이야기와 다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런데 이런 속담이 있어.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지는 말아라.” 즉, 교회와 교인들 안에 우리가 정말 걸러내어 버려야 할 구정물과 같은 부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서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도 맞지만, 그러다가 그 안에 있는 생명까지 다 버리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죠. 구정물은 버리고 아기는 지켜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아니 적어도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예화로 들었던 것처럼 인도의 선교사들이 기독교와 예수를 구분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가진 이미지가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과 약탈, 강압적 통치라는 구정물로 오염되어 있으니, 그것은 버리지만, 기독교의 핵심, 복음의
전부인 예수님의 가르침은 생명을 주는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소중하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장애물을 가진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기독교 안에 그러한 생명이 분명히 있고, 나도 이제부터 그 기독교인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볼게. 아직 그런 공동체가 있어. 분명히 그렇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어. 나도 노력할게.”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주여주여 하는 자가 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가
되는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힘쓰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착각합니다. 이런 것이죠.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했어.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냈어.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도 행했어.” 그러나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메시지 성경은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 우리는 메시지를 전했고, 귀신을 혼내 줬으며, 하나님이 후원해 주신 우리 사업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말할지 아느냐? 이미 때는 늦었다. 너희가 한
일이라고는 나를 이용해 유력자가 된 것뿐이다. 너희에게는 나를 감동시키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여기서 나가거라.” 우리는 내가 사역을 잘하고 있으면, 그래서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어떤 성과가 있으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역,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하여, 그것이 정말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요즘에도 유튜브를 보면 귀신을 내어쫓는 사람, 어떤 기적을 행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이 현혹되어서 저기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우르르 몰려갑니다. 여러분, 잘 분별하십시오. 진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닮아가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떤 테크닉이나 어떤 외적 사역이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고자 애쓰고 있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저희 교회에도, 기존에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경험하셨던 분들이 교회를 찾다가 정착하게 된 경우가 많았죠. 이곳에 오셔서 제 설교를 듣기
시작한 후, 가장 많이 저에게 왔던 피드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너무 부담스러워요. 너무 괴로워요.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 전에 들어왔던 설교는 ‘위로 설교’가 많았나봐요.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그 피드백 때문에 얼마나 고민이 많았나 모릅니다. “나는 너무 성도를 위로할 줄 모르나?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만들고 힘들게 하는 목회자인가?” 그런데 제가 요즘에 그런 피드백을 들어도 끄떡도
안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저에게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이 변해가더라고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진짜 애쓰더라고요. 제가 설교를 아무리 열심히 전해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들은 안 불편합니다. 그리고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는 사람들은 부담스럽죠, 괴롭죠, 마음이 불편하죠. 당연한 반응입니다. 고민이 생깁니다. 말씀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고민이 우리가 변화되는 시작점입니다.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해요. 말씀에 나를 비추어 내가 혹시 고쳐야 할 부분은 없는가? 내가 잘 가고 있나? 늘 점검해야 합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우리를 교훈합니다. 교훈한다는 것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를
책망합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그 길로 가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어디서 길을 벗어났는가를 보여줍니다. 또한 바르게 합니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그 벗어난 길에서 바른길로 돌아가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의로 교육하죠. 의로 교육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그 주님의 길을 걷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말씀에 사로잡힌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다른 데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진리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에 비추어 내가 깨달은 것들, 결단한 것들을 고백하고 나눠야 해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래야 우리가 그 말 때문이라도 더 그렇게 살게 됩니다. 내가 해놓은 말이 있으니, 때로는 그 말이 나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자로 살아가는 제가 얼마나 부담이 되겠어요. 그런데 또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고백하십시오. 잘 안되더라도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마태복음은
5-7장은 가르침을 모아두고, 8-9장은 고치심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뒀습니다. 흔히 기적 모음집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말씀들이 이곳에 쭉 적혀있습니다. 가르치심과 고치심.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사역의 총체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인클루지오로 5-9장을 이렇게 묶어둔 것입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저는 고치심의 역사가 지금도 있다고 믿어요. 이것은 꼭 죽은 자가 살아나고,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고,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되는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저는 이 시대에 저를 통해서도 우리 교회를 통해서도 이런 고치심의 은혜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적으로 죽어있고,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처럼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말씀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살아나는 것을 봅니다. 허무함에 굴복하고 좌절하고 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회복되고 열정이 가득해져 걸어가는 것을 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는지,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깨닫고 보며 누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진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그곳에 고치심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계속 회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나도 변해가고 함께 변해가는 것입니다. 9장까지가
예수님이 고치신 이야기라면, 바로 10장에서 하는 이야기가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을 함께 해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 10: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그들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다. (마 10:7)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마 10:8)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제자가 주님이 명령하신 일을 행할 때, 그 능력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그 능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권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를 나눌 뿐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순종할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제자를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주신 명령인데, 이때는 이스라엘 안에서 행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마지막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두 번째로 제자를 파송하십니다. 이때는 모든 민족을 향하여 제자를 보내십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을 읽는 모든 자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의 생각에는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수준 높은 사역
같습니까?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첫 번째 파송은 그저 성령께 받은 능력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했던 모든 사역을 마치며 이제 그들에게 맡기시는 일이 복음을 들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아가서 그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주고, 지키게 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을 나누어줄 준비가 되셨습니까? 여러분은 이 마태복음의
명령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누가 나눌 수 있습니까? 제자입니다. 제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의 중요한 특징은, 먼저 복음으로 인해서 삶이 변화되고 있는 상태, 바로 그런 사람이 그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경험하고 있고, 내가 먼저 그 생명을 누리고 있다면, 어쩌면 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나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야, 교회 와봐.” 그럼 여러분의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여러분을 따르던가요? 아니죠. 만약 그 사람이 여러분의 삶을 잘 관찰하고 있었고, 여러분이 삶으로 변화를 잘 보여줬으면, 교회를 오라고 할 때 ‘그럴까?’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것은 그 전에 이미 여러분 주변에서 그 사람이 여러분의 삶의 좋은 변화를 보고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가끔 제가 듣는 간증이 무엇이냐면, 누군가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는 용기가 없거나, 혹은 외면 당할까 봐 한 번도
교회 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옆에 있는 사람이 서운해합니다. ‘너는 왜 나한테 교회 가자고 안 하냐?’ 사랑하면 전해야 합니다. 거절당할 수 있죠. 그래도 전하고 거절당하는 것과 아닌 것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삶에서 어떤 좋은 궁금증을 안겨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교회 와봐’라고 했을 때도, ‘내가 왜 가야 하는데?’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때 뭐라고 하시겠어요. ‘나도 몰라’ 하시겠어요? 우리는 사람을 살릴 준비를
해둬야 합니다. 영적 CPR 교육이 필요해요.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분 안에서 바뀌었다면... 그래서 지난주 결단의 찬양처럼 ‘나의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네’라고 고백하며 달라지고 있다면, 그
모습은 세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 깨어져 있고, 허무하고, 서로를 상처 내기 때문에, 그곳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데.... 나보다 더 나은 환경이나 조건이 아닌 것 같음에도 늘 평화 속에 거하고, 사랑이 채워져 있고, 절망하지 않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보게 되면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묻게 되거나, 혹은 우리가 다가설 때, “왜”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대답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면서 궁금증을 만들고,
그 궁금증에 복음의 진리로 답할 수 있다면, 저는 그 삶이 바로 전도자의 삶이요, 제자의 삶이요, 바로 그 삶 자체가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복된 소식입니다.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 되는 삶을 살아주십시오. 우리의 존재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변화시키겠습니까? 빛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이 머무는 곳마다 마치 소금이 썩지 않게 하는 것처럼, 여러분 주변이 세상이
주는 절망함 가운데 썩어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등불을 밝혀 주십시오. 저는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를 이해할 때마다, 제가 예전에 들었던 이 예화가 자주 생각납니다. 세상이 망망한 바다라면, 그리스도인은 그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습니다. 배가 바다에 있는 것이 당연하듯,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배가 바닷물로 가득 차면 침몰합니다. 우리 안에 세상 것이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세상과 무관한 다른 나라를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 가운데 두시고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만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고 때로는 위협할 것이라는 이야기죠. “내가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만사형통해야지.”
주님이 주시는 형통이 있죠. 주님이 주시는 세상이 알 수 없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잘 살아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과 박해를 당하거든 여러분은 이렇게 이해하십시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여러분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세상과 같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며 인내하십시오. 여러분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늘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라고 말하는데, 그 이기는 방법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인내하라. 견디라. 우리가 세상과 싸워서 정복하고 무찌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러분. 축구 경기를 아시죠. 축구에서 우리가 골을 넣었고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버티면 됩니다. 버티는 것이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마음을 간직하며 세상의 공격 안에서도 그 마음을 지키며 인내하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을 이해하고, 우리의 마음은 요동하지 않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순결하게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맡겨진 시대를 살아가는 비법입니다. 제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는 부분을 현대어로 번역한 메시지 성경으로 조금 축약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사귐의교회에 속한 나의 사람, OOO를 보내시며 이렇게 당부하셨다. “믿지 않는 자들을 회심시키려고
먼 곳부터 다니지 마라. 바로 여기 가까이 있는 잃어버린 사람들,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거라.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고 말하여라. 병든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고,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려 주어라. 버림받은 사람들을 만져 주어라. 시작하기 전에 모금행사를 벌여야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에게는 많은 준비가 필요 없다. 너희 자신을 준비하여라. 하루 세끼 먹을 것만 있어도 너희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 문을 두드릴 때는 정중히 인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맞아들이거든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나누어라. 너희를 맞아들이지 않거든 조용히 떠나라. 소란 피울 것 없다. 너희의 길을 가면 된다. 심판 날에 그들은 틀림없이 후회하겠지만, 그것은 지금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늘 정신을 바짝 차려라. 너희는 이리 떼 속을 달려가는 양과 같으니, 뱀처럼 영리하고 비둘기처럼 순수하여라. 세상을 몰라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너희의 동기를 비난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너희의 평판을 더럽힐 것이다. 단지 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너희가 전하려는 분이, 자기들 기분이나 맞춰 주는 어떤 우상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임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너희를 대적할 것이다. 심지어 너희 가족들도 그럴 것이다. 큰 사랑을 선포했는데 그처럼 큰 미움을 맛보게 되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냐! 그러나 포기하지 마라. 굴복하지 마라. 마지막에 가면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너희가 구할 것은, 성공이 아니라 생존이다. 살아남는 자가 되어라! 너희는
내 학생이요 내 추수할 일꾼이니, 나와 똑같은 대접을 받거든 만족하여라. 아예 기뻐하여라. 겁먹지 마라. 언젠가는 모든 것이 밝혀져 모든 사람이 일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드러내놓고 진리를 말하기를 주저하지 마라. 괴롭히는 자들이 허세를 부리며 위협한다고 해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너희 존재의 중심인 너희 영혼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너희는 너희 삶 전체를 그 손에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된다.” 제가 긴 말씀임에도
설교의 시간에 이 말씀을 읽은 이유는, 말씀이 주는 진리가 제가 전하는 백 마디보다 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돌보시는 하나님, 주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힘쓰는 우리가 그 참새보다 귀하니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 또 말씀하시죠.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이 찬양을 아십니까? 사도 바울이 했던 이 고백입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사도 요한의 제자 중에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로, 폴리갑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달콤한 제안을 합니다. 이교도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 살려주겠다. 마지막에 그에게 ‘배교’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때
폴리갑이 했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마주하는 세상, 이 교회 밖을 나가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의 터전이 신앙을 지키기에 그리 만만하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이곳에서 다짐하고 결단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계속 유혹하고, 우리가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미련하다고 말할 것이며,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고 우리를 두렵게 할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붙들지만, 세상에서는 놓고 살아가라고, 부인하라고 위협하고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분께 속한 존재로 받아들여졌으며, 이전의 나는 세상에 가까웠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나는 변화되고 달라졌음을 여러분이 먼저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여러분의 존재가 세상에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향기요,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연약하고 때로는 악했던 나의 옛 모습은 다 죽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십시오. 혹시 세상이 나를 박해하거든, 내 모습이 그리스도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이겨내십시오. 세상이 나를 위협하지만, 이미 주께서 승리하신 이 세상에서, 주님이
나를 지키실 것을 믿으며, 여러분의 존재가 그분을 드러내는 복음이 되도록 살아주십시오. 오늘도 이 설교 이후에 우리가 흩어져 그렇게 살고, 다시 만나 주를 예배하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