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산상수훈" / 강정규 목사

2023-02-19 · 마태복음 5-7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마태복음 강해설교 세 번째 시간입니다. 제가 이번 마태복음 시리즈에서는 가급적 2019년 마태복음 시리즈에서 다루지 않았던 내용 위주로 설교를 나누겠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마태복음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이 산상수훈인데, 2019년에도 마태복음 4장의 광야사건을 다루고, 7장으로 넘어가 산상수훈의 결론부만 다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산상수훈의 내용을 조금 더 세밀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1. 존재 : 소금과 빛 산상수훈의 첫 부분이 바로 지난 시간에 보았던

팔복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에게 유명한 이 말씀이죠.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먼저 소금을 생각해봅시다. 단짠단짠이라고 우리가 표현하지 않습니까? 짠맛과 단맛이 가장 대표되는 맛입니다. 그런데 그중 짠맛은

소금의 고유한 속성입니다. 반대로 단맛은 여러 가지 물질이 단맛을 냅니다. 설탕, 꿀, 물엿, 사카린. 이것들은 모두 분자식이 다릅니다. 신맛은 어떤가요? 식초, 레몬, 신김치도 모두 다른 물질입니다. 그러나 짠맛은 소금으로만 낼 수 있습니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면 용기 있는 자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간장은요? 간장도 소금이 들어갑니다. 즉, 세상에서 짠맛을 내는 분자식은 염화나트륨(NaCl)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에서 독특한 맛을 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만이 낼 수 있는 맛.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재가 갖는 특징입니다. 이 말씀의 재미있는 측면은 ‘맛을 잃은 소금’이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맛을 잃어버린 소금. 즉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화학적으로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소금은 짠맛을 잃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안정적입니다. 그런데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맛을 잃은 소금’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 사해 소금을 들어보셨죠? 사해가 바로 이스라엘 영토 안에 있습니다. 당시에

사해 주변의 염석을 캐내어 갈아서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그 과정에서 순수한 염화나트륨만이 아니라, 비슷한 색상의 다른 물질도 함께 섞이게 됩니다. 그런 소금을 모아놓은 소금 포대를 잘못 보관하면 물기에 노출됩니다. 염화나트륨은 물에 약합니다. 그럼 소금은 싹 빠져나가고 소금 포대에 하얀 색상의 물질만 남습니다. 보기에는 소금 같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소금이라고 부르지만, 소금의 기능을 못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소금 아닌 소금을 길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죠.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면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빛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름이 빛인데 빛의 비추지

못하면 그것이 빛이겠습니까? 스스로 아무리 빛이라고 주장해도 빛이 아닙니다. 빛은 빛을 발산할 때, 비로소 빛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의 기능은 주변을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이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너희는 빛이 되어 세상에 하나님의 빛깔을 드러내라고 여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감추어 둘 비밀이 아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훤히 드러낼 것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만큼 훤히 드러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등불을

들고 있게 한다면, 설마 너희는 내가 너희를 통 속에 숨겨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단 위에 둘 것이다. 내가 너희를 언덕 위에, 등불 놓는 단 위에 두었으니 빛을 비추어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자신이 신자라는 것을 철저히 숨깁니다. 자기만 알고 싶어 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요. 가끔 그러다가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놀라죠? “당신도 교회 다녀요?” 빛은 숨길 수 없습니다. 빛의 기능은 밝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왜 신앙을 숨기려 할 때가 있습니까? 신앙인이라고 드러내면 내가 불편해질 것 같거든요. 왜냐하면 우리도 잘 알아요. 세상은 기독교인에게 그래도 조금 더 기대해요. 그래도 조금 더 선한 삶을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항상 무엇을 틀고 있어요? 찬송입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왜 찬송일까요? 그게 세상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기준입니다. 그렇게 목사를 욕하면서도, 목사가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목사가 그러냐’라고 하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래도 신앙인이 조금은 더 나은 모습이리라 기대하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인임을 숨기는 이유가 이것이죠. 그 기대만큼 살아가는 것이 피곤하니까요. 불편하니까요. 불리하니까요. 여러분이 항상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생활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여러분의 행동 가운데 많은 순간 불편함이 생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신앙인인 것을 알면, 내가 다르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내 모습이 있는 것이죠. 제가

지난주 설교에서 나눴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은 ‘기꺼이 불편할 용기’입니다. ‘기꺼이 고난 당할 무모함’입니다. 실제로 이 소금과 빛에 대해 말씀을 하신 이유가 이어지는 16절에 나옵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소금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그 고유한 짠맛은 다름 아닌 ‘착한 행실’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착한

행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빛으로서 드러내야 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착한 행실은 지난주에 나눈 팔복의 삶, 그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산상수훈을 읽을 때면,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놀랍게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마하트마 간디’.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비폭력주의자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가운데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도의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가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야기입니다. 서양의 제국주의는 여러 대륙에 걸쳐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죠. 영국은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입니다. 스탠리 존스는 미국 선교사였는데 그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데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이유는 ‘기독교’라는 단어 자체가 인도 사람들에게는 제국주의의 일부분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전해지는 예수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힘썼던 것은 <기독교>와 <예수>를 분리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서구의 핍박을 받던 인도인들에게 서구의 상징과 같은 <기독교>는 마음을 닫게 만드는 요소였기에, 선교사들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기독교>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전하기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스탠리 존스 선교사와 마하트마 간디는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간디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매우 좋아했고, 아침마다 산상수훈을 읽었다고 합니다. 저도 2009년쯤, 인도를 3주

정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제법 놀랐던 일이 있습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한 사람만 새겨져 있는데 모두 간디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인도에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간디가 예수님을 믿고 개종했다면, 인도의 종교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일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모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간디가 어느 마을에서 연설할 때의 일화입니다. 간디는 연단으로 올라와서 <신약성서>를

꺼내 들고는 <산상수훈>을 읽고 이렇게 그의 연설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연설입니다. 이렇게만 행동하십시오.” 간디가 스탠리 존스 선교사에게 건넨 조언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이 부분이 제일 도전 되었습니다. “당신네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은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은 반드시 당신네 종교와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지 말고 타협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제가 요즘에 정말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기독교인이었고,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 3년 정도 사이에 정말 강력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라는 확신입니다. 진짜 복음을 그들이 듣고, 진짜 복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본다면, 저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말하는 복음은 그냥 기독교의 가르침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은 모태신앙으로부터

우리에게 매일같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으로 다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복음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 그 안에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며, 그런 공동체 안에 속하여 살아가게 되면, 복음이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무엇이었음을 저는 고백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감추어 둘 수 없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분의 백성 삼으신 이유는,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해 말씀하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세상에 전하는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 때입니다. 제가 ‘소금과 빛’에 대한 이 말씀을 나눌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 되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금과 빛처럼 될 것이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시죠. 우리의 존재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의 존재가 이미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에

걸맞게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의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말입니다. 세상이 숨길 수 없는 존재. 숨겨지지 않는 복음. 우리는 깨어진 세상을 비추는 소망의 빛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눴던 찬양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살 때.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살 때. 나에게 있는 작은 힘을 남을 위해 나눌 때.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하며 이겨낼 때. 억울한 일 많으나 주님 앞에 울고 세상에서는 웃을

때.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주님 뜻대로 살아갈 때. 그것이 진짜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임을 고백하며 끊임없이 나아갈 때. 그때 우리는 빛나고 있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세상과 다른 이유를 말입니다. 2. 명령 : 더 나은 의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메시지 : 옳게 사는 문제에서 너희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이 바리새인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공식대로라면, 바리새인의 의가 좀 작고 낮아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당시의 바리새인은 가장 큰 의를 가진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처럼 사는 것, 그들의 삶을 흉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다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자신들이 믿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충실한 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답은 ‘관계’에 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열심’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없다면 우리는 분명 진정성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연애를 하는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내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다른 것을 더 즐거워하며 행복해한다면,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열심’은 진정성의 문제와 관련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의 동기와 방향은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열심’으로 모든 것을 옳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열심’은 스토커도 갖고 있고, 나에게 보험을 팔고 싶은 사람도, 나에게 사기를 치고 싶은 사람도 다 ‘열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열심’의 동기와 방향과 목적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인 됨,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의는 ‘자기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가 되면 문제입니다. 교회에서도 ‘열심’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무엇에 의한 것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란,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안에서 우리가 드리는 참된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삶의 모습.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기독교 신앙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말을 오해하여 ‘행위’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루터 신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바울서신에서도 언제나

실천을 뒷부분에 담고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중요합니다. 다만 이 행위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결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회심의 결과, 내 안에 주인이 바뀌셨으므로, 그분의 명령에 따른 순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가 아닙니다. 이 의는 하나님 통치의 결과이기에, 바리새인이 보인 자기 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종하고 나서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저는 주님을 따랐을 뿐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에 불과하다고,

주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를 맡길 뿐입니다. 온전히 맡길 때, 따를 수 있습니다. 3. 기준 : 새 계명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붙잡고 살았던 율법의 문자적 실천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깨어진 관계 속에 주어진 것이고,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회복된 관계

안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진 관계 안에 주어진 율법은 ‘최소’의 기대치를 요구합니다. 율법은 최소한 지켜야 될 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들은 이렇게 시작하죠. “옛사람에게 말한바 ~ 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 그중에서도 십계명을 예로 드신 후, 이렇게 말씀하시죠. ‘ejgw; de; levgw uJmi'n -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러분,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들은 율법 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보다 위에 계신 분입니다. 율법의 본질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마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뛰어넘어 가르치십니다. “형제에 대하여 화내고 욕하는 자도 살인한 것이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골빈 놈’, ‘멍청이’라고

한마디 했다고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문자적으로 적용하긴 어렵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도 욕을 사용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잊으면 안 되죠. 살인은 ‘외적 행동’이고 사실 그 원인은 ‘마음의 분노’입니다. 하한선의 기준인 율법에서 ‘분노’는 무죄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은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고,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욕을

하고 싶을 때, 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구별입니다. 우리는 이미 변화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 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또한 간음이라는 실제적 행동을 뛰어넘어 우리 안의 음욕의 문제로 다뤄집니다. 남녀의 교제함 가운데 음욕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결혼하려면 기본적으로 성적 호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혼을 위한 예비 관계로서 서로 안의 호감으로서 절제함 속에 허용될 뿐입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말장난을 합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봐서 문제일 뿐, 여자를 보고 음욕이 생기는 것은 합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범죄의 의도가 없다면 음욕도 허용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바로 자의적 해석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말씀은 이 문제에 단호합니다. (마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많은 사람이 이 말씀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실제로 몇몇 신학자들과 신앙인들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지켜서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 말씀에 대한 문자적 적용을 교회법으로 금지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이 말씀을 봐도 우리와 무관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각오함을 갖고 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떤 영화가 나에게 음욕을 일으킨다면, 마치 발이 없는 것처럼 가지 않는다. 눈이 없는 것처럼 보지 않는다. 영적 생명이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얼마나 철저한 수술이 필요한지 보여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문제 외에도, 이혼의 문제, 맹세의 문제,

보복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기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율법에서는 보복까지 정당방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보복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더이상 깨어진 관계가 아니라, 회복된 관계, 변화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몇 가지 예화가 등장하죠.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돌려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엄청난 모독행위였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엄청난 벌금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미쉬나). 사람들은 오른뺨을 맞았을 때도 상대방이 당하게 될 벌금에 대한 기대로 참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는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합니다. 이 꽉 깨물고, 오기로 때리라고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분노입니다. 분노는 살인죄를 또 짓는 것이죠. 이렇게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먼저 내 안에 끓어오르는 화를 제어하고, 도리어 상대방의 입장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면 왼편도 때리기를 청하라는 것입니다. 즉, 내 감정대로가 아니라, 상대방의 상한 마음도 잘 헤아리고 도리어 더 낮은 자세로 품으라는 것입니다. ‘지렁이는 밟으면 꿈틀하지만, 제자는 꿈틀하지 않는다. 내가 죽었기에….’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겉옷을 담보로 잡으면 율법에 따라 해지기 전에 돌려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계산이 빠른 사람들은 속옷을 달라고 한 것이죠. 그러나

제자는 그런 삶을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딱 봐도 자기의 이익을 어떻게든 도모하려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만날 때에도, 도리어 그 기본권(겉옷)까지도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별입니다. 그리고 그만큼의 자기 부정과 자기 죽음을 위해 우리는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당시 로마의 군인에게는 이것을 요청할 권리가 있었습니다(예: 구레네 시몬). 그리스도인은

이런 억울하고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도 들어주며, 도리어 더 해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의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보호적이지만, 하나님의 의는 이웃 중심적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최종적 결론은 이렇게 주어집니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이웃 사랑’이 아닌 ‘원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그저 가르치기만 하신 분이 아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그 앞에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 성령으로 충만한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을 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쉽지 않죠. 네. 쉽지 않습니다. 저도 참 이 말씀 앞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압니다. 이렇게 만약 우리가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성인군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성령께서 철저하게 주인 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말씀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결국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용기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우리의 안전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을 때.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진짜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무모함을 기꺼이 걸어갈 수 있고, 말씀에 내 삶을 내어 던질 수 있는 용기는 말씀이 진리임을 진짜로 믿을 때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믿지 못하기에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좁은 길’이라고 표현되는 이유입니다. 찾는 이가 적습니다. 오라고 하더라도 가지 않습니다. 인기 없습니다. 세상의 기대와 세상의 정의.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 그것들을 붙들고는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러나

말씀의 진리를 믿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길이 아니라, 바로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늘 고민스럽고, 고민되지만, 우리 이 길을 피하지는 말고 넘어지더라도 부딪혀 나아가봅시다. 적어도 말씀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증거 해 줍시다. 말씀대로 사는 삶이 괜찮다는 것을. 옳았다는 것을. 그래서 승리했다는 것을....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바울신학자인 권연경 교수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참된 조건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의로움’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느냐 아니냐이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결코 아무렇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의 행위(열매)는 바로 우리의 본질(나무)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은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행실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구원에로의 초대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의 문제이다. 우리가 행위가 종말론적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식을 되새기는 것일 뿐이다. 마태복음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마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존재가 바뀌었음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떨어진 가지가 아니라, 다시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는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가 되었음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맺히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분의 영,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정말 그 성령께 순종한다면, 우리의

삶에 성령께서 생명으로 피어내시는 그 순종의 열매들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삶을 살기를 추구하고, 절대 세상 앞에서 물러나지 마십시오.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이기십시오.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썩어질 세상을 지켜내고 회복하는 소금입니다. 그렇게 살아주십시오. 그렇게 살아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