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들의 나라’에 대한 지난 설교는 팸 예배를 통해서도 한번 더 정리했으니, 오늘은 복습은 하지 않고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유한 자’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을 대표하는 표현이며,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을 대표하는 표현임을 저는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기준대로 성경을 왜곡하고 잘못된
적용과 기준을 세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의 내용까지 잘 이해하신다면, 적어도 저희 안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1) 모압 평지에서 (신명기) 출애굽 1세대의 실패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연기되고,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출애굽 2세대가 준비됩니다. 출애굽 1세대는 시내산에서 직접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세대였지만, 출애굽 2세대는 당시에 어렸거나, 광야생활 가운데 태어난 사람들이었으므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출애굽 2세대에게 하나님의 뜻을 다시 가르칩니다. 모압 평지.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에 갈 수 있는 그곳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출애굽 2세대에게 가르칩니다. 그것이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신’은 ‘새로울 신(新)’이 아니라, ‘거듭 신(申)’을 씁니다.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가르치는 계명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명기 28장은 교회에서 많이 인용됩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8장에는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즉 언약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기준과 그에 따른 결과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번 말씀을 살펴봅시다. ① 누가 복을 받는가 : 말씀에 순종하는 자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 즉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이 주어집니다. ② 복의 결과 : 땅을 통한 공급 / 풍요 (신 28: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의 결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현재 이들이 광야생활 중에 있었으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땅에
들어가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즉,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약속하신 그 언약을 성취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언약은 그러나 언제나 지키지 못했을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것에 대한 경고가 신명기 28장에는 복에 대한 부분보다 훨씬 더 길게 표현됩니다. 복은 14절이요, 저주는 54절에 이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출애굽 1세대가 실패하였던 상황이라, 더욱 실패하지 말자고 외치며 경고하는 것이죠. ③ 누가 저주를 받는가 :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복과 저주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이 주어졌다면, 저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주어집니다. ④ 저주의 결과 : 땅에서 쫓겨남 / 가난(멸망) (신 28:63)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이 주어진다면,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의 최종적 모습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언약 관계 안에 있으므로 복과 저주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자체가 약속의 땅을 차지하더라도 거기에서 불순종하면 뽑힐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가 아닌 취소에 대한 말씀과 같습니다. 땅이 없던 백성들이 땅이 있게 되었으나, 이제 도리어 땅이 있던 백성들이 땅이 없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어진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순종하면 그 결과로 모두가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모두가 저주를 받게 된다는 선포입니다. 그럼 공동체가 순종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신명기에는 이 말씀이 주어집니다. (신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이 말씀을 잘 보시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후,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데, 그 복된 삶의 증거로 나타나는 모습은 그 공동체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도 순종하면서 살아간다면,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 자가 없다는 말씀인 것이죠. 가난한 자가 없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이며 복된 공동체가 되었다는 결과적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기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 15: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신 15: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이 부분에 대해서 스터디바이블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 본문 전체에 걸쳐 이스라엘 자손은 서로 경쟁자가 아니라 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이러한 안식일 원리는 과거에는 땅을 위한 안식년(출 23:10-11)과 희년(레 25:8-55)을 통해 발전되어 왔고, 선지자들은 온 세상의 궁극적 해방을 내다보며 이 원리를 미래로 투영시켰다(61:1-3).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바로 그 희년을
선포하셨으며(4:16-21), 초기 교회는 이 관점을 구체화 시켰다(행 2:42-47).’ 즉 성경은 늘 같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죠. 출애굽기의 안식년 법이나, 레위기의 희년 법이나, 선지서가 바라본 메시아의 사역이나,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모두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으며, 놀랍게도 초대교회는 실제 그렇게 살아가고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가난한 자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늘 가난한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는 모습은 손을 펴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나는 자발적으로 가난으로, 아니 최소한 자발적 검소함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다른 이의 삶은 그저 다른 이의 삶이라고 여기지 말고. 최소한 한 공동체라면
말입니다. 물론 이것을 우리가 현시대에 적용할 때, 무조건 돈을 나누어주는 것에 그 적용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는 그 결핍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나님이 이끄시는 과정일수도 있고, 단순히 모든 필요를 채워주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풀어가는 과정에는 성령의 도우심과 분별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꾸어주라’라고 표현된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소소한 나눔은 모르겠으나, 큰 물질적
도움을 아무 책임감 없이 받는 것은 받는 이로서도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 가운데 순종하여 성숙한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주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한 책임감과 선한 연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이 없던 광야의 시간들 끝에서 하나님이 다시 가르치신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들은 순종을 약속합니다. 그렇게 이제 출애굽 2세대가 약속의 땅으로 향합니다. 2) 약속의 땅에서 이러한 명령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여호수아와 함께 들어갑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또한 이스라엘의 순종으로 그 땅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결국 가나안 땅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목민족이었던 그들은 이제 땅을 기반으로
농경사회로 전환하게 됩니다. 가나안 토착민들을 보면서 농경 생활을 배웁니다. 그런데 단순히 기술만 배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형태, 가치관, 종교까지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제 농경의 신인 바알 신을 섬기며 땅이 주는 풍요를 얻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풍요 방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가르쳤는데, 그들은 가나안에 속하여 살면서 그 세상의 가치관, 우상을 따르게 됩니다. 바알은 풍요를 주관하는 신이었고, 이스라엘의 가치관은 세상에
물들어 버립니다. 농경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죠. 하나님의 명령대로라면,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바알을 쫓으며 풍요의 맛을 알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그럴 마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은 부자들에게 도리어 더욱 부자가 될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상황을 이용하면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절박함을 이용하면 돈놀이로 노예를 삼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난한 자를 착취하며 더 많은 부를 쫓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많은 부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가진 것이 많으므로 성대하고 풍성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부요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그 제사를 보면서 무엇이라고 하였겠습니까? 선지서에 많이 나오는 내용이 이것이죠. “너희의 제사는 역겹다. 내 뜰을 밟지 말라” 선지서와 시편의 주요한 메시지는 부자를 저주하고 적대시하는 하나님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뜻을 진짜로 따르지 않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 종교적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처음에는 부자들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착취뿐이죠.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마지막으로 바라볼 존재는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신의 생존을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 바로 이 상태를 성경은
‘가난한 자’라고 부릅니다. 헬라어 ‘프토코스’. 이 표현은 자신의 생존을 전적으로 의존한 상태. 즉 절대적 가난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러한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십니다. (시 68: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146: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사 10:2)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것이 구약성경이 말해주는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성경의 관점입니다. 가난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였습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등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지난 설교들에서 언급했듯, 가난 그 자체로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기에, 아니 어쩌면 그들의 삶에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을 의지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붙들게 됩니다. 반면, 부자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기득권을 우선하며, 피라미드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부자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부자와 권력가, 귀족과 정치가,
종교지도자 등 이미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 버린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보다 지금 자신이 누리는 부와 명예, 힘과 권력이 더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판결을 실행하십니다. 이스라엘 모두를 약속의 땅에서 몰아내어 땅 없는 자들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바로 그것이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모두가 한순간에 가난한 자가 되어버린 사건입니다. 그 상황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그들 또한 믿었던 이웃 나라에게 도움을 청해봐야 짓밟힐 뿐임을 경험합니다. 3) 바벨론 포로에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 있던 시간. 놀랍게도 그 시간은 반전을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프토코스’가 되어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그 징벌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모두가 가난한 자가 되었으므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가난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난은 현실적인 가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현실적 어려움과 결핍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전심을 드리는 마음의 태도를 갖게 한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아들에게 유산이 있을 때는 그는 그것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 있는 사람을 의지하여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얻기를 바라지만
주는 자가 없습니다. 그때에야 그가 깨닫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 아버지 곁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을 때는 정작 깨닫지 못했던 그가, 세상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완전하게 다른 태도로 돌아오죠. 이처럼 빈손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태도로 살겠다는 결단을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돈에서 하나님으로, 강대국에서
하나님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은 프토코스가 되어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포로지의 이스라엘을 놀랍게도 제국의 간판을 바꾸어서 다시 돌려보냅니다. 약속의 땅으로.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시 출발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가장 마지막 부분부터 이어지는 신약의 이야기들입니다. 4) 가난한 자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의 말씀에서 깨닫는 가난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보는 태도’와 같습니다. 나의 생사여탈권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주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삶에서 이 가난은 통합적인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심령이 가난하고, 누군가는 관계적으로 가난하고, 누군가는 물질적으로 가난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의 어떠한 요소로 인해서 하나님을 깊이 갈망하게 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난한 자는 당대의 ‘포로 된 자’와 맥이 통합니다. 억눌린 자입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하나님 나라는 누구의 나라인가? 바로 이러한 모든 삶의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심한 자.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 이것이 이사야에서 말하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입니다.
신약시대에서는 로마의 왕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로 말하면, 세상이 주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상태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복음 앞에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어진 세상의 실상을 알고, 내 안에 깨어진
마음을 느끼며, 그것을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 바로 그들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며,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나타내시는 분이 우리가 오늘도 예배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가장 우선된 삶을 살아가는 프토코스, 내 삶을 하나님께 건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