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에 두란노 <목회와 신학>이라는 기독교 잡지사 기자 분께서 저희 교회를 방문해주셨습니다. 4월 중순 쯤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받았는데, <목회와 신학>에서 저희 교회를 인터뷰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보다 조금 더 놀랐는데, 왜냐하면 <목회와 신학>은 우리나라에서 해당 분야에서 제일 유명한 월간지입니다. <생명의 삶>을 만드는 두란노에서 목회자들을 위해 발행하는 잡지거든요. 거기서 ‘개척교회 프론티어’라고 개척교회 중에 주목할 만한 교회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는데, 저희가 12번째 이야기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인터뷰 중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신앙 훈련을 하지만, 때로는 저의 기대만큼 변화가 빠르고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저도 모르게 변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고 함께 말씀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는 묵상은 6년에 1독을 하는데, 제가 앞으로 30년
목회를 한다고 했을 때, 5독을 할 수 있습니다.” 처음 배우는 성경이 지금은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믿습니다. 함께 예배하며 천천히 가도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잠언’이라는 책과 처음으로 마주합니다. 두달 동안 잠언 여행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잠언을 5번 가르치면 제 나이가 70세가 됩니다. 저는 한 번, 두 번 볼 때마다 우리가 그만큼 자라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처음 잠언으로
강해 설교를 전하는 것이라 조금은 어색할 수도 있지만, 첫걸음이니 마음을 좀 편히 가지시고 조금이라도 친밀해지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확실한 것은 말씀은 가까이 보고, 자주 보고, 보면 볼수록 아름답습니다. 친밀감이 생깁니다. 잠언과의 사귐을 꿈꾸며 시작해 봅시다. 몇 번을 함께 보게 될지 어느 하나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어쩌면 잠언은 그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수요 바이블클래스를 통해서 잠언에 대한 개관을
짧게 다뤘습니다. 잠언은 한 사람이 쭉 기록한 그런 책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격언을 모아놓은 모음집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글도 있고, 그 외의 다른 저자들의 글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분량을 기록한 대표 저자는 솔로몬임에 틀림이 없죠. 그래서 잠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그러나 모음집이라는 내적 증거들도 나오죠. (잠 25:1)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그러니까 솔로몬을 비롯한 지혜자들이 남긴 잠언을 후대에 편집하여 오늘날 형태로 남아서 우리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죠. 우리나라에도 속담 혹은 격언들이 있죠. 그 하나하나를 통해 우리는 삶의 지혜를 되새기게 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시작이 반이다. 우리로 하여금 삶의
어느 순간에 기억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말들이죠. 때로는 이를 통해 절망 가운데서 힘을 내기도 하고, 삶의 어려움을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언과 속담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잠언은 ‘아포리즘’이라고 봐야 하는데, 아포리즘과 속담의 가장 큰 차이는 속담은 작가 불명의 말이지만, 아포리즘은 작가가 있는 교훈이라는 점이죠. 여러분은 혹시 잠언이 왜 잠언인지 아십니까? 잠언은 한자죠? 잠언 : 바늘 잠, 말씀 언 찌르는 말이다. 무감각한 우리를 찔러서 깨어나게
하는 것 잠언은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그런 성격의 책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설교자에게는 사실 만만치 않은 책입니다. 잠언은 사건과 이야기(서사)가 없어서 줄거리 연결이 어렵습니다. 어떤 역사 이야기이거나, 분석이 필요한 성경의 부분은 오히려 가르치기가 쉽거든요. 그런데 잠언은 어렵죠. 그런데 저도 피하지 않고 배우며 즐겁게 할 것입니다. 반대로 유익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에 깊이 잇닿은 내용들이 많아요. 때로는 복잡하지 않은 한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잠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절이 있습니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1장과 잠언 마지막 장에 나타나는 이 구절이 <인클루지오>로서
잠언 전체의 핵심입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하여라. 지식의 첫걸음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만이 지혜와 지식을 업신여긴다. 매력이 사람을 현혹하고 아름다움은 금세 사라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여인은 칭송과 칭찬을 받는다. 31장은 지혜를 의인화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인데, 바로 그 지혜로운 여인이 최고의 아내라는 것이죠. 잠언은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지혜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외함을 다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경외와 사랑은 같으면서도 조금 다릅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할 수 있고, 경외는 우리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외’라는 단어에는 ‘존재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외함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존재, 그분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존재의 인식 속에서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마음이 경외입니다. 우리 남자들이
집에서도 나름 ‘가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가끔 말합니다. “아빠 못 믿어?” 가족들이 못 믿고 신뢰하지 못하면 싫은 것이죠. 경외함은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내가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말로만 인정하는 것은 누가 못해요. 행동으로 삶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자의 모습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크심 앞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바라시죠.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경외함으로 드리는 것이죠.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삼은 2장을 한번 읽어봅시다. (잠 2: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내 아들아’라고 부르는 주체는 지혜 선생, 혹은 부모입니다. 여기서의 계명은 ‘미츠바’인데, 이것은 십계명처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이 아니라 권면과 조언입니다. 지금 그 가르침을 받고 간직하라는 것이죠.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르침을 듣는 것과 받는 것은 좀 다릅니다. 뭐가 더 강해요? 받는 것이 좀 더 정확하게 말을 새겨들었다는 표현처럼 보이죠. 듣는 것은 듣고 흘려보낼 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이 말씀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를 하다보면...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가 있고, ‘듣는 자’와 ‘받는 자’가 있습니다. 이게 미세하게 다르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이 죽습니다. 그런데 들어도 또 받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받는 것은 ‘수용’하는 것이죠. 말씀을 잘 받고 수용하는 사람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가르쳐주신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데요. 여러분, 어떤 한 예배에서 청중이 설교를 잘 듣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설교자와 청중. 누구의 책임입니까? 우리는 남탓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100% 자신의 책임처럼 느끼며 최선을 다해야 하고, 청중도 100% 자신의 책임처럼 느끼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배 안에서 하나님
앞에 전심이어야 하는 것이죠. 잠언은 그 말씀을 받을뿐더러 ‘간직하라’고 말합니다. 간직한다는 것은 그 말씀은 내면화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성장해갑니다.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는 옛 이야기가 있죠. 옛날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묘지 근처로 이사를 갔는데, 그 때에 맹자가 나이가 어려서부터 보고 듣는 것이 상여와 곡소리뿐이죠. 그러니까 맹자가 늘 그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의 어머니가 ‘이곳이 자식 기를 곳이 못 된다’
하고 곧 시장 근처로 집을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장사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죠. 맹자의 어머니가 이곳도 ‘자식 기를 곳이 아니라’ 하고, 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를 갑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늘 글 읽는 흉내를 내므로 이곳이야말로 자식 기르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여 거기에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그 유명한 ‘맹모삼천지교’입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통해서 배운다는 것이지요. 비슷한 이야기가 속담에도 있고 성경에도 있어요. 이 정도면 삼위일체 진리입니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 저는 이 말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저와 같이 모태신앙들을 대변하는 언어입니다. 모태신앙의 특징이 뭐에요? ‘못 해요.’ 기도도 못해, 전도도 못해. 왜 못하는지 알아요? 거저 주어졌기 때문이에요. 내가 치열하게 이겨내서 믿음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 뱃속부터 타인에 의해서 내 신앙이 자랄 곳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참 힘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반전이 있어요. 마치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듯이,
또 우직한 신앙의 DNA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왜요? 들었으니까. 어려서부터 들었으니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교회 다니는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 할 것 같고...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왠지 낯설지는 않고... 그래서 저는 모태신앙 참 중요하다고 여겨요. 물론 모태신앙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이 자기 신앙이 되는 변화가 있어야 하죠. 그리고 모태신앙이 아닌 분들도 중요합니다. 왜냐면, 모태신앙은 누군가 그 집에
복음의 첫 열매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입은 것이잖아요. 누군가는 신앙을 시작해야지 그것이 흘러가는 것이잖아요. 그 첫 시작점이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그 중요한 일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세워지고 있는 것이니, 여러분은 정말 대단하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하는데, 처음 교회 오면 잘 안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중요한 것은 계속 듣는 것입니다.
계속 듣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교회 공동체의 힘입니다. 초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적응하려면 참 힘들어요. 그때 교회 공동체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때로는 말씀이 낯설고 힘들지만, 교회에서 계속 말씀을 듣게 되는 힘을 얻는 것은, 다른 것들이 나를 붙잡아 주기 때문이거든요. 그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머물며 예배하며 살아가면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꼭 듣는 것이 언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옆 사람의 삶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은 먼저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이죠. 그런 의미에서 잠언은 가정이 최고의 배움의 장소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혹시 여러분에게 “엄마 집사 맞아?”라고 하고 있다면, 여러분 그 이야기는 성령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결국 아이들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영향을 받는 것이지요. 물론 아이들도 크면서 다 알아요. 사람은 다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 연약함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지 그 모습이 주는 메시지가 굉장히 큰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이 그런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잠 2: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2절은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명철을 마음에 두라고 말합니다. 지혜와 명철은 동의어이기도 한데, 조금 차이가 있어요. 명철(히, 테부나)은 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생긴 ‘분별력, 깨달음’으로 해석하면 좋습니다.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분별력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귀를 기울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세요? 고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 시대는 고독하게 뭔가를 사색할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아니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싫어해요. 그러나 잠잠히 머무는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가끔 여러분에게 기도 시간에 말하는 기도만 하지 말고 ‘듣는 기도’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려요. 내 마음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기도는 필요하죠. 전달했으면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들어봐야죠.
그래야 그렇게 살 것 아니겠습니까? 내 말하는 기도가 끝나면 조용히 하나님의 마음을 듣고자 하는 기도를 해보세요. 저는 그 시간에 굉장히 많은 것을 얻습니다. 내 마음에 답답함이 있으면 막 쏟아내죠. 목사가 어디 가서 풀겠습니까? 하나님께 푸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도 후에 잠잠히 하나님 앞에서 듣고자 하면, 나와는 조금 다른 그분의 마음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 고요함 속에 설득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다른 소리들이 너무 가득 차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제가 이번에 심방을 하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대하며 그것을 붙들고 살아내는 모습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제가 전했는데, 여러분이 더 설교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볼 때가 있어요. 아, 저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구나. 오히려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서 제가 다시금 그 설교의 메시지를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모든 잡다한 소리들을 다 삼키고 이기시는 역사가 우리 안에 날마다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잠 2: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잠 2: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3~4절은 지혜를 향한 적극적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불러 구하고, 명철을 소리 높여 부르라는 것이죠. 은을 찾듯 찾으며, 보배를 찾듯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것이
저절로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해요. 말하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지요. 말씀을 들어야지요. 다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 한번 펴보지 않고, 예배도 등한시 하면서 하나님 뜻을 알기 원한다는 것은 밥 안 먹고 배부르기 원하며, 운동 안하고 살 빠지기 원하는 것과 같지요. 하나님 뜻대로 살기 원한다면, 그 뜻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듣고자 하는 자에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열정이 있는 자가 배웁니다. 교만한 자는 못 배우는 것이에요. 여러분, 제가 처음 신학대학교에 갔을 때 교만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배우려 하지를 않았어요. 배움은 필요 없고, 나는 오직 예배와 선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예배하고(휴학하고도 학교 채플을
들어가고), 열심히 봉사활동하고(선교단체 활동에 모든 것을 다 쏟고), 수업시간에는 등한시 했어요. 열심히 뭔가를 하면 사람들의 칭찬은 듣지요. 그러나 그것이 더 교만하게 만들어 빈 깡통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행히 그런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깨우쳐주셨고, 뒤늦게 다시 복학을 했을 때는 저 스스로가 “나는 5학기 동안 학교를 헛되이 다녔기에 가장 바보다”라는 마음으로 복학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3학년 2학기로 복학을 했는데, 2학년 과목을 듣기도
했어요. 수업 시간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어요. 엄청나게 질문했습니다. 2학년 후배들 중에 좀 열심히 하는 친구들 있으면 붙잡고 알려달라고 했어요. 저보다 5년 후배들이고, 제가 가장 선배였어요. 그런데 저는 제 스스로가 거기 있는 50명 중에 가장 모르는 상태이므로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보다, 모르는데 아는 체 하고 있는 것이 더 부끄러운 것이라고 여겼어요. 우리의 신앙의 연수가 우리의 신앙의
성숙함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분이 내 신앙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배우지 않으려는 자세가 잘못된 모습입니다. 여러분, 저도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배우려는 마음의 눈동자는 다릅니다. 앉아있는 자세가 달라요. 그 사람은 배워갑니다.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제가 경험한바 좋은 학자는 결코 자신이 완벽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다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이 빈 사람들이 배우기보다 가르치려고
하고, 자신이 비어 있는 것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울 정신이 필요해요.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본인이 완전하심 같이 우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쩌면 우리의 삶은 끝날 까지도 완전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내 안에 이뤄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가 없는 상태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그 마음으로 완전히 우리가 가득 차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참된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무엇이 약속되어 있는가? (잠 2:5) 그렇게 하면, 너는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깨달을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터득할 것이다. (잠 2:6)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주님께서 친히 지식과 명철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찾고, 그 말씀을 새기면 반드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 찾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면 만나집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것은 지적인 풍성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경험하여 아는 인격적 앎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내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삶을 아는 지혜,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분별력. 말씀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자들을 주님이 만나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감추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찾을 때 응답하시려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숨어있는 듯하지만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분을 추구하면 그분을 알아갑니다. 이것은 당연해요. 구하라,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잠 2: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그의 뜻을 알고 그 앞에 진실된 모습, 정직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 행실이 온전한 자.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쌓이고 있습니다. 나의 정직, 나의 옳은 행실. 때로는 어느 누구 알아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그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방패는 그 무엇도 뚫을 수 없습니다. 참된 평안을 주신다는 것이죠. (잠 2:8)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다시 한 번 말씀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사는 이들을 주님은
보호하시고, 성도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의로움이 있습니다. 의로움은 무엇입니까? 그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언약에 충실합니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의롭기 때문입니다. 그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설교 초반에 언급했듯이, 잡지 인터뷰를 하면서 개척 4년간 배운 것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끝에 그 느낀 것을 이렇게 정리하여 말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잘하는 것보다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좋은 길보다 옳은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을 믿는 것입니다. 주어지는 자리를 보내신 자리로 믿고 힘차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는 것이 언제나 최선입니다.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를 때, 그 길은 하나님께 맡겨지는 것입니다. 주께 맡겨진 길에는 하나님의 보호와 평안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배우고 고백하며 오늘도 붙잡습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김기석 목사님이란 분이 한자를 통해서 성경의 메시지를 잘 설명하시는데요. ‘근심 환(患)’이라는 한자가 있습니다. ‘가운데 중’이 두 번이나 마음 위에 놓여있는데, 여러 가지 중심을 마음에 두고 있으면 근심인 것이죠. 다중은 근심입니다. 반면, 일중, 중심 하나가 마음에 자리 잡게 될 때, 그 단어는 ‘충성 충(忠)’자가 됩니다. 다중은 근심이요, 일중은 충성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여러 가지 것들이 가득하면 언제나 근심합니다. 예배드리면서도 근심하고,
예배 후에도 근심합니다. 아직도 싸우기 때문이에요. 내 마음과 하나님 마음, 세상의 여러 가지 가르침과 말씀이 함께 있으면 근심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오직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지혜, 말씀이 머물 때, 내가 오직 그것을 구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내 인생의 주도권을 넘겨줄 때, 그 충성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봅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를 받는 것이니까요. 그 나라의 백성이 되면, 그 나라의 보호를 받고, 그 나라의 백성에게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잠언이 우리에게 주는 권면처럼, 하나님의 말을 받고 간직하고 그것으로 삶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기도>. 양명고등학교 익투스에서 만든 찬양으로, 80년대생이고 안양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찬양팀 사역을 했다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찬양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자주 불렀는데.. 악보도 없이 구전으로 찬양을 기억하다 보니... 기억을 더듬어서 찬양 악보를 만들었는데.. 앞
소절 가사가 바뀐 상태로 부른 것 같습니다. 다음에 다시 제대로 고백하고자, 악보는 영상과 달리 가사를 바꿔서 업로드 합니다. 김은지 자매님이 악보 작성과 편곡을 도와주셨습니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