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를 아십니까?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전체의 시작이며 기초입니다. 1. 서기관은 토라를 송아지 가죽에 기록하여야 한다. 어른 소의 가죽에 토라를 기록하면 가죽이 너무 두꺼워 토라가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2. 서기관은 자연사한 송아지 가죽에 토라를 기록하여야 한다. 아무리 귀중한 토라일지라도 토라를 기록하기 위하여 송아지를 잡으면 하나의 생명이 희생되기 때문이다. 3. 서기관은 토라를 기록하다가 '여호와/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면 목욕을 하고 와서 주님의 이름을 기록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4. 서기관은 토라를 기록하다가 '여호와/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면 사용하던 펜을 버리고 새로운 펜을 꺼내어 사용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5. 서기관은 토라를 기록할 때 두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록하여야 한다. 잘못 옮겨 쓸 수 있기 때문이다. 6. 서기관은 토라를 기록할 때 '여호와/야훼'라는 단어에서 한 획이라도 틀릴 경우 해당 페이지를
뜯어내고 처음부터 새로 기록하여야 한다. 다만 하나님 이외의 단어가 틀릴 경우에는 해당 단어를 도려내고 새로운 가죽을 붙여 쓸 수 있다. 7. 서기관은 토라를 기록할 때 성경에 나와 있는 청결하다고 생각한 동물이나 식물로 만든 정결한 깃털이나 갈대로만 기록하여야 한다.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철은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이므로 철로 된 필기구를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 8. 서기관은 토라를 기록할 때 천천히 기록하여야 한다. 그 뜻을 묵상하면서
기록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토라의 마지막이자 결론과 같은 부분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는 독단적으로 읽으면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고, 그 앞에 놓인 4개의 책과의 연관성과 흐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즉 ‘토라’의 총체적인 흐름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마지막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토라의 시작은 창세기죠. 창세기는 우리가 모두 관심을 갖고 있는 ‘생명과 신앙’의 근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하나 이야기가 우리에게
익숙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단편적인 이야기보다 창세기라는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토라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는 모든 학자가 두 부분으로 봅니다. 명확하죠. 창세기 1-11장까지는 ‘온 세상의 시작’에 대해 다룹니다. 창조 이야기가 그 핵심이죠. 창조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은 창조가 가진 의미입니다. 창조신앙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세계와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인간도 포함되죠. 신학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개인인 동시에 대표성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아담’이라는 단어의 뜻이 ‘인류’이고, 하와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한 모든 인류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에 대한 신앙고백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창조주의 선하심과 성품을 반영하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창조신앙 안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른 특별성을 부여받습니다. 창조에 순응하는 삶은 그 목적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문화와 예술을 조성하고 자연을 경작하여, 만들고 가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 중에는 ‘주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이 세상을 어떻게 건설할지에 대한 도덕적 선택권을 주십니다. 그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가진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결정권도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즉,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여 따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선택권으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삶을 결정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욕망이자, 나와 내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의 희생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성향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 순간부터 하나님이 ‘좋다’고 하셨던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라진 삶, 깨어지고 엇나간 모습으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창세기는 인간의 타락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 안에서 온전함을 누렸던 아담과 하와도 이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전까지는 수치를 모르는 온전한 연합을 누렸으나, 하나님을 잃어버리자 서로 앞에서도 수치를 느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자기중심적 삶은 사람에
대한 마음과 태도도 바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인과 아벨은 어떻습니까? 질투하고 시기하며 폭력을 행하는 모습이죠.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나타난 깨어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다를까요? 우리는 법을 통해서 나름의 질서를 유지할 뿐, 지금도 법이 없다면 이 세상은 잔인한 폭력과 약육강식의 모습에 빠져버릴 것입니다. 무정부 상태가 되면 그 위험성은 드러나죠. 그 상황에서 언제나 여인과 약자들은 더 고통받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
뒤에 이어지는 인류의 역사는 죄가 더 폭증합니다. 그 후 등장하는 라멕은 자신의 아내를 마치 재산처럼 축적했고, 자신의 폭력성을 자랑하고 노래했습니다. 악이 당연시되고, 악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 그 시대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해야 할 일은 악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통해, 악을 제거하는 것이죠. 완전히 악이 세상을 삼키기 전에요. 그것이 노아의 홍수 심판입니다. 홍수 심판은 하나님의 슬픔이 가득 담긴 결정입니다. 세상에 다시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 당대의
유일한 의인이라고 평가받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방주라는 특별한 보호 속에 살려두시죠. 또한 창조된 생명체들도 지키셔서,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도 다시 하나님의 기대와 멀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 다시 악이 축적되고, 그 결과 바벨탑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그들은 바벨이라는 큰 도시를 지으려 합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 심판 이후로 그런 심판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셨고, 이제 그들을 세상에 흩어버리시는 것으로 악의 규합을 저지하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1-11장입니다. 결국 창세기 초반부가 보여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주인 되어 자신들의 기준대로, 죄의 본성대로 살아갈 때, 세상은 비극의 장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기준이 무너진 세상 자체가 지옥입니다. 세상이 악으로 파멸하는 첫 번째 위기에서는 홍수 심판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결정을 내리셨다면, 바벨탑 사건으로 다시 찾아온
위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흩으신 후, 이제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승부수는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어두운 세상에 빛을 주시고, 죽음의 골짜기에 생명을 꽃피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갈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은 마치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선택의 기회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가던 아담에게 주셨던 결정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현재의 축복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아브라함은 깨어진 세상 가운데 살고 있기에, 깨어진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통해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고 회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깨어진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 누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모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이후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처럼 살아서
깨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속하여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실패만 반복한 이 세상은 절망이 가득하였고, 하나님이 아닌 사탄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왕 노릇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 세상 속에 아브라함의 구원은 한줄기 소망의 빛입니다.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빛이죠. 인간을 믿었다가 배신당하고 실패하였으나, 여전히 인간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통로로 삼고자 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사탄은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사탄은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
믿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꿈은 나약한 인간이 이루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죄가 없던 아담조차도 실패했으니까요. 사탄은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하는 일은 늘 성공해왔던 것이기에 자신이 있었죠. 실패의 예시는 널렸고, 성공의 기록은 없기 때문입니다. 심해의 깊은 어둠에 살아가는 생명체는 나중에는 빛에 반응조차 하지 않습니다. 빛이 낯설고 어둠이 익숙하기 때문이죠. 어쩌면 생명을 잃어버린 어두운 세상에 주어진 소망의 불씨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는, 정말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사는 그 한 사람이 불씨이죠. 그 작은 불씨가 시작되어야만 불이 조금씩 옮겨붙고, 주변을 밝히며, 어둠을 빛으로 바꿔내는 그 놀라운 일이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억지로’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거나, 우리의 선택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저 응원하실 뿐이죠.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삶에 주어진 고난과 역경과 불안과 의심을 헤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이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인간의 약함과 악함은 여지없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조차도 하나님의 약속을 언제나 믿고 언제나 순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후손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고, 보호하고 지키겠다는 약속도 신뢰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려 했고, 위기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여 살길을 찾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모습이죠.
자기 잘못으로 인한 결과와 책임을 감당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인내하고 기다리시며 그들의 삶에 동행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전해지고, 하나님은 그 믿음의 사람들과 동행하십니다. 위기는 늘 있었죠. 야곱의 아들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려고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어질 뻔합니다. 살인은 하지 않았으나, 동생 요셉을
형들이 이집트에 팔아버리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아니었죠. 그래도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에 있는 요셉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절망과 좌절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한 사람으로 살기 위한 결정을 요셉이 할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하나님은 요셉이 그 일에 성공하길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놀랍게도 삶에 찾아온 수많은 좌절과 절망의 상황 속에서 소망을 잃지 않았고, 점점 하나님이 기대한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서 그의 삶은 반전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반전되어 힘을 가진 실력자가 된 순간은 사실 또 하나의 시험입니다. 그전에는 어려움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것 자체가 시험이었죠.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이 그의 형제에게 당한 배신의 상처를 딛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용서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그에게 주십니다. 얼마든지 ‘복수’를 할 수 있었죠.
복수하는 순간 요셉은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기가 주인인 사람으로 판결 나는 것입니다. 그 경우 이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뤄가시는 일도 위기를 맞이하죠. 요셉의 위대함은 그 상황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 때문에 선한 마음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선악과를 먹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선악을 판단하여 행하지 않았어요. 자유의지와 힘이 있었는데도요. 이것을 통해서 야곱의 족속들은 기근과 가난이라는 외부의 위기에서도
벗어나고, 가족 안에 있었던 분열이라는 오랜 위기도 이겨내며 비로소 ‘회복’이 일어납니다. 이 회복의 이야기가 창세기가 보여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력하시기에, 참고 기다리시며 이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나올 수 있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이 일하셔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의 결단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기회를 주셔야만 가능하죠. 그러나 아무리 구원의 은혜와 기회를 주셔도 그것에 응답하는 사람이 없다면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하나님과의 사귐은 그의 증손자 세대까지 이어졌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도 계속되는 것으로 창세기의 긴 여정이 끝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로 넘어가면, 야곱의 가족들은 그 수가 늘어나 한 국가를 이룰 수 있는 수준이 됩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에서 그의 가족으로, 그의 가족에서 이제는 민족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확장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이 아닌, 모든 인류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비전은 확대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민족이 너와 네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죠. 하나님은 이 구원계획을 한 사람과 한 가정에만 주신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민족을 향한 초청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보면, 이 약속을 받은 민족의 현실은 깨어진 세상이 주는 위기입니다. 바로와 이집트라는 당대 가장 강력한 악에 의해 고통받고 있죠. 그 앞에서 이들은 너무나 무력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죠. 이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된 것은 ‘모세’입니다. 모세 개인의 삶에도 자기 힘으로 하려다 실패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실패 속에서 무력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와 대면하십니다. 떨기나무에 임한 불의 형상으로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도자로 살아가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당대 가장 강력한 세력인 이집트를 심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특별히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방법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열 번째 재앙을 기억하시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방법을 말씀하여 주셨고, 순종을 통해서 구원받습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자가 살게 되는 이야기가 계속 반복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 이스라엘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악과 동일한 심판을 당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살고, 말씀에 불순종하면 죽습니다. 이것 자체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이 그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창 17:7)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창 17:8)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뒤에 오는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모두 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창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와 세운 언약을 잘 지켜야 하고,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도 대대로 이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계속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하고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도 책임을 다하십니다. 하나님의 책임이란 이 깨어진 세상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하시며, 하나님께 속한 새 피조물로 살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이스라엘에게 계승되었기에, 하나님은 이들과 직접 다시 그 언약을 확인하는 의식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시내산에서의 언약식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하나님을 거부하므로 관계가 깨어졌죠. 그러나 아브라함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오기 시작하여, 이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아갈 수 있는 특권과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임재를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습니다. 언약을 지키면,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와 하나님의 편이 되어, 모든 열방에 하나님을 대변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이 주고자 하셨던
가장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출 19:5)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출 19: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이것은 죄로 인해 망가지기 전의 관계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던 그 모습으로의 회복입니다. 물론 온전한 상태에서 시작하여 타락으로 간 아담의 때와 달리, 이제 우리는 반대로 깨어진 상태에서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깨어짐의 회복이 필요하기에 점진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언약에 순종하는 것은 늘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것처럼, 늘 우리에게는 순종하지 않을 선택의 권한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마음대로 벗어나면 죽음이라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무관한 삶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식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선택하고 결단합니다. 이로써 언약의 계승자가 된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기 할 일을 약속했기에, 하나님도 이스라엘과 함께하겠다는 하나님 하실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언약식 이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를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성막이죠. 성막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행 방식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막 내부는 에덴동산을 상징하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아담의 실패로 깨어진 하나님과 함께하는 세상, 즉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성막이 완성되고 하나님은 정말로 자신의 존재를 인간이 만든 성막에 두십니다. 놀라운 일이죠. (출 40:33) 울타리를 만들어서 성막과 제단을
둘러싸고, 동쪽 울타리에다가 낸 정문에는 막을 달아 가렸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다. (출 40:34)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그런데 정작 모세가 그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출애굽기는 끝납니다. 사실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성막에 못 들어갑니다. (출 40:35)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방식을 행해야 합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무균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소독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에 함께 하려면,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성막에 오셨고, 우리도 죄악 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계신 성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거룩’(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그 거룩의 방법을 하나님은 레위기라는 책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그 다양한 규정들은 사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셔서 우리를
준비시키는 방법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레위기의 가장 중심에 있는 속죄일 이야기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동물’에게 우리의 죄를 전가하므로 죄를 사하고 하나님께 나아갔다면, 신약 이후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못 박고, 죄 사함을 얻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일을 이해할 때, 십자가가 어떤 효력이 있고, 어떤 일을 위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창세 이후로
우리와 늘 함께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와 마음의 결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아야 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거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방법을 마련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방법에 순종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를 하나님은 기뻐 맞아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럼, 이제
진짜 그것을 행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신앙은 앎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들이 진짜 믿고 있는 것인지는 결국 일상의 삶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삶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삶을 통해 그 믿음이 증명되겠죠. 민수기가 바로 그 광야의 이야기입니다. 광야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을 그들의 가장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이동은 하나님이 가라고 할 때 가고, 멈추시면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삶의 방식입니다. 불편하죠. 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단순하고 편합니다. 그냥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니까요. 다만 인간의 본성은 늘 이것을 싫어하고 주도권을 갖기를 원합니다.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하기 원하죠. 신앙의 가장 큰 적은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나오는 불평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불신’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정탐꾼 사건이죠. 12명의 정탐꾼 중 2명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하지만 10명은 달랐습니다. 늘 우리의 삶도 이 두 가지 모습 중 하나와 같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죠. 백성들도 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지,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1세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 같이 선악과의 실패를 반복하고 말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도 했고,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거부합니다.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출애굽 1세대의 모습이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포기하려고 하십니다. 그때 모세가 간절히 중보하죠.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 하나님을 선택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만 얻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부분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1세대 가운데서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1세대 중에서 실패 이후에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은 구원을 받았겠죠. 그러나 그들의 죄가 가져온 책임은 져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1세대는 생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세요.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존중하십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기를 선택한다면, 평생을 허비하게 내버려 두십니다. 여러모로 우리에게 노크하시겠지만,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보다, 그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노예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광야 생활 중 하나님은 수많은 기회를 주셨지만, 반복된 불순종을 보인 1세대는 결국 실패한 세대가 됩니다. 하나님은 다음 세대를 기다리시며 광야에서 약 40년의 시간 동안 이스라엘을 보존하십니다. 1세대는 죽고,
그의 자녀 세대가 장성하여 새로운 세대가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들을 언약의 대상자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약속과 사명을 맡기고자 합니다. 이들을 출애굽 2세대라고 부릅니다. 1세대의 지도자로 쓰임 받은 모세의 마지막 사명은 이 출애굽 2세대에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보는 신명기는 출애굽 2세대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모세의 마지막 사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2세대와 모세가 모여 있는 곳은 광야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는
곳. 요단강 앞에 있는 모압 평지입니다. 이제 바로 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면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땅을 성취한다는 것은 이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계승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하여, 모든 열방을 회복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끌었던 1세대의 실패를 경험했고,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워보면
부모 마음을 알죠. 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이끌어보는 사람이 목사의 마음을 잘 알더라고요. 저도 목사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아마 당대에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모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신 세대. 출애굽 2세대만큼은 1세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를 너무나 소망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신명기에는 모세가 가르친 3편의 설교가 나오는데, 첫 부분인 1-11장까지는 1세대의 실패에 대한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40년간의 방황이 왜 발생했는지를 그들에게 말해주면서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 1:3) 이집트에서 나온 지 사십 년째가 되는 해의 열한째 달 초하루에, 모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고 명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출애굽 1세대의 본격적인 여정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고, 율법과 성막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죠. 신명기의 첫 시작에서 모세는 그때의 일을 설명합니다. (신
1:6) "우리가 호렙 산에 있을 때에,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산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으니, (신 1:7) 이제 방향을 바꾸어 나아가, 아모리 사람의 산지로 가거라. 그 인근 모든 지역, 곧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부 지역과 해변으로 가거라. 또 가나안 사람의 땅과 레바논과 저 멀리 있는 큰 강, 유프라테스 강까지 가거라. (신 1:8) 내가 너희 앞에 보여 주는 이 땅은, 나 주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이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그 땅을 차지하여라." 그리고 그들이 최종적으로 실패했던 정탐꾼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로 그 장소는 가데스 바네아였죠. (신 1:19) 우리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호렙을 떠나, 우리가 본 그 크고 무서운 광야를 지나서, 아모리 사람의 산지로 가는 길을 따라 가데스바네아까지 이르렀습니다. (신 1:26) 그러나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 1:27) 당신들은 장막 안에서 원망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신다. 아모리 사람의 손에 우리를 내주어 전멸시키려고,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처럼 이끌어 내셨다. (신 1:28) 우리가 왜 그 곳으로 가야 한단 말이냐? 무모한 일이다.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우리의 형제들은, 그 곳 사람들이 우리보다 힘이 훨씬 더 세고 키가 크며, 성읍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거기에는 아낙 자손들까지 산다고
하지 않았느냐?' 1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함께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누릴 수 있고,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백성들에게 말하죠.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셨던 일들을 기억해보아라. (신 1:31) ‘또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는 것과 같이, 당신들이 이
곳에 이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당신들을 돌보아 주시는 것을, 광야에서 직접 보았소.’ (신 1:32) 그런데도 당신들은 아직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신 1:33) 당신들이 진 칠 곳을 찾아 주시려고 당신들 앞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셨는데도, 그리고 당신들이 갈 길을 보여 주시려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는데도, 당신들은 아직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광야 생활을 떠올릴 때, 누군가는
불평만 합니다. 모든 것이 불평하려면 다 불평거리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기였습니다. 교회에도 불평이 특기인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민수기 설교할 때도 전했지만, 불평할 것이 없어서 불평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잘 묵상하면 은혜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광야에서도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이 본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어요. 그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가득한 곳이었고,
다른 이들이 본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것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살았지만, 다른 백성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추구하며 살았기에, 자신의 입맛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고 불신하고, 현실 속에서 절망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라고 다를까요? 누군가는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끄시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누군가는 왜 하나님이 안 계시냐고, 하나님은 지금 무엇하고 계시냐고 말합니다. 혹은 아예 계시든 안 계시든 관심도 없이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신명기라는 책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에 처음 와서 막연히 ‘신명기’라는 책의 이름을 들으면 ‘신의 명령을 담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신-신(神)’자로 생각하는 것이죠. 교회를 조금 다니다 보면, 모세가 율법을 가르쳤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이야기는 앞에 다 나오니 신명기는 그
뒤에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울 신(新)’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신명기의 신은 ‘되풀이할 신(申)’입니다. 신명기는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늘 우리에게 원하셨던 그것, 40년 전에 받았던 그 명령과 말씀을 다시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이 철저하게 실패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잘 지켜서 성공해야 할 그 명령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늘 했던 얘기 저기서 또 하고, 2000년이
지나도 신약서 또 합니다. 우리가 오늘 설교에서도 봤지만, 결국 에덴에서부터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인류는 늘 실패하여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 늘 구원하고자 힘써오셨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아니 안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않고,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아담의 불순종이 있고, 우리 안에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도사리고 있어서,
늘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합니다. 다만 한가지 희망은 하나님은 늘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자 늘 구원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또, 그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뻔한 이야기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가 스스로 이루지 못한 새로운 삶이 주어집니다. 아브라함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며,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하신 비전을 이제 나와
함께 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였던 다른 사람과 그 시대와 구별된 삶의 태도가 오늘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함께라면 광야에서건, 전쟁에서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요셉처럼, 모세처럼, 여호수아처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한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약속을 붙들고 계시며, 그것을 진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함께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니 살아가야 합니다. 이 사실을 진짜로 붙잡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회복된 삶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 2세대를 바라보며 말해주고 싶은 확신. 그 말씀을 읽으며 마칩니다. (신 1:30) 당신들 앞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시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들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신 것과 같이, 이제도 당신들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이제도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진짜 믿는 자가 누리는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