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신앙의 원리" / 강정규 목사

2023-01-22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민수기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지난주에 민수기의 큰 그림을 설명해드렸듯, 민수기는 3막으로 나눠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내용까지가 1막에 해당합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출애굽 1세대가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하기까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준비하고 순종했던 시간들입니다. 사실 이 부분을 여러분이 읽어갈 때, 이 안에서 신앙적 원리를 찾아서 적용하는 것이 쉽지는 않음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과일로 따지면 파인애플 같은 말씀입니다. 그대로 먹기는

어려워요. 그러나 껍질을 깎아서 안에 있는 내용을 만나면 달콤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우리와 다른 시대, 다른 지역, 다른 문화에 속한 것이기에,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것일지 생각하고, 그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원리는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7장에는 이러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민 7:1) 모세는 성막을 세우고 나서, 성막에 기름을 부어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였다. 제단과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에도 기름을 부어,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였다. 제가 지난 설교를 통해서 민수기의 백성과 오늘날 교회의 성도가 서 있는 위치가 같다고 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속한 언약백성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 안에 하나님이 거하셨던 모세 시대의 성막을 거룩하게 했다면, 오늘날 새 언약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우리 자체를 성전 삼아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적용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리 자체가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적용해야 함이 분명합니다. 거룩은 ‘구별’이죠. 오늘도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하나님 밖에 머물던 나와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방법입니다. (민 7: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민 7: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이 말씀 앞에서도 우리는 적어도 2가지 신앙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지휘관이라고 불리는 백성의 리더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인구조사 하는 일에 동참해서 모세를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막 기물을 옮기는 레위 지파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수레와 소를 내어놓습니다. 모든 리더들이

함께 뜻을 모아 한마음으로 이 일을 행한 것입니다. Upside Down Kingdom.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의 리더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찾고 필요를 돕는 것입니다. 거기에 내 역량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멈춰서서 자신의 삶의 방향과 마음의 흐름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최근에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가장 많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성품에 맞는가?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말과 혀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까? 그것이 신앙의 성숙함입니다. 둘째, 이 말씀에도 잘 살펴보면 자발성의 원칙이 엿보입니다. 보통 민수기에는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그것을 백성들이 따르는 형태로 기록됩니다. 그런데 이 일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습니다. 즉, 이 봉헌은 자발적 봉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자발성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의 마음이 진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공동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늘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예루살렘교회 공동체는 복음에 대한 영접과 회심으로 급격히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여러 필요를 채우고 돌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살기 위해서는 늘 헌신이 필요합니다. 사도들 외에도 일곱 집사와 같은 헌신자들도 세워집니다. 특별히 그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놀라운 기록이 나옵니다(행 4:23). (행 4: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가난한 사람이 교회에 못 왔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서로가 잘 돌보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가난이 물리적으로 없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가난을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모습이겠죠. 세상은 할 수 없는,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누군가는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정말 성숙한 사람들은 맘몬의 지배를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의 범위를 설정하고, 검소하게 살고자 힘쓰며,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그러한 삶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곳에 세상과 다른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있는 것을 내어놓은 사람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신실한 사람이 하나 있는데,

바나바라 불리는 요셉입니다. (행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행 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누가 시켜서 밭을 팔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럼 100% 가스라이팅 당한 결과이거나, 아니면 그 일로 큰 시험에 빠질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은 성령께서 각 사람 안에 주신 마음에 자발적 순종을 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헌신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더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은 하나님 안에서의 자발적 선택입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4년간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일하며 목회를 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이었으니 그 기간을 기쁨으로 헌신했지,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강요했다면 저는 1년도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헌신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마음에 스스로 응답하는 결과여야 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공동체 또한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초대교회 안에 속했으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고 칭찬받고 하니까, 사람들의 어떤 평가에 귀를 기울였는지, 아니면 위신 때문이었는지,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거짓으로 합니다. 밭을 팔아서 헌금을 하긴 하는데, 그 값을 감추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헌금하고 심판받은 케이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실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의 이스라엘 공동체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나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사귐의교회 안에 단순히 헌신을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삶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원해요. 다시 민수기 7장으로 돌아와서 이어지는 말씀을 봅시다. 모세는 그렇게 드려진 헌물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레위인들에게

나눠줍니다. (민 7:5) 그것을 그들에게서 받아 레위인에게 주어 각기 직임대로 회막 봉사에 쓰게 할지니라 이 말씀도 우리에게 적용점이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예시로 든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에 민수기의 이 모습이 다시 등장합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리더들처럼, 초대교회에서도 자발적으로 드린 헌금이 모아졌죠. 그것을 사도들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나옵니다. (행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민수기는 ‘직임대로’,

즉 맡겨진 역할에 맞게 필요한 대로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공동체 안에서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매일성경 해설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계적인 균형이 도리어 차별과 불공정을 낳을 수 있다.” 하나님이 나누어주시는 방식은 모두에게 같은 분량을 주는 것에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저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뒤통수를 세게 맞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 제가 굉장히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한 정의는 자기중심적인 정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성을 열심히 발휘하면서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가 진짜 정의일까?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제가 생각하는 정의를 조금 내려놓고, 대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마이클 샌델이 2년 전에 책을 다시 하나 내놨죠. 이번 책의 제목은 <공정하다는 착각>입니다. 우리는 공정함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죠. 학자의

눈으로 보더라도 세상은 공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쓴소리입니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이 좋아지다가도 자주 착각하며 넘어집니다. 성경을 배우고 신앙생활을 해가며 아는 것은 많아지고 그래서 기준은 높아지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 조차도 내 기준에서 판단해버리고, 성경에 대해서도 그렇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설교는 평가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정말 그 판단을 할만큼 지혜로울까요? 내가 생각하는 수많은 기준은 정말

오류가 없을까요? 사실 진짜 신앙은 내가 하나님 앞에 무익하고 무지한 자이며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주님의 지혜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없으면 나는 한 순간도 못 삽니다 주님의 생명이 없으면 민수기와 사도행전에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공동체 안에서 어떤 물질을 나눌

때, 주님의 일하심에 따라 주님이 보여주시는 필요에 따라 배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쫓는 것에 늘 그들은 최선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약 같은 것을 주지 않으면 바로 공평하지 않다고 이야기가 나올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고민해봐야 해요. 무엇이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일까? 내가 번 돈은 다 내 것일까? 거기에 나를 위해 허락된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다른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분, 제가 외부에 사역을

나가면 사례비, 강사료를 받습니다. 제가 어떤 부분에서 부족함을 두고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채워주신다고 느낄 때도 있죠. 그런데 항상 저를 위해서 쓰지는 않습니다. 가급적 더 필요한 곳에 흘려보내거나, 아예 그곳에 있는 예배팀, 혹은 더 어려운 누군가에게 주고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도 계속 그렇게 살 것입니다. 여러분도 고민해주십시오. 민수기의 아름다운 모습과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사이에는 1500년 정도의 시간적 거리가 있었지만, 그들의 삶의 원리는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성경과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 안에서도 하나님의 원리는 같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첫 번째 포인트입니다. 구약을 보면서도 얼마든지 오늘날 내가 따라야 할 원리들을 물어야 하고,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내게 지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등불이 됩니다. 8장은 성막 안 등잔에 대한 규정과 레위인에 대한 규정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모두 특별한 역할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레위인을 다른 지파들과 구별하셔서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일을 하도록 명령하신 것에는 매우 독특한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민 8:16)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레위 사람은 온전히 나에게 바쳐진 사람이다. 모태를 처음 열고 나온 모든 맏이 대신에,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그들을 나의 것으로 삼았다. (민 8:17)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모든 맏이는 나의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집트 땅에서 모든 맏이를 쳐서 죽이던 날,

내가 그들을 나의 몫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민 8:18) 나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모든 맏이 대신에, 레위 사람을 나의 것으로 삼았다. 민수기 첫 설교에서 레위인 구별을 살펴보며, 안식일 준수나 십일조 명령과 그 의미가 연결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일부를 내어드리지만, 그 고백을 통해 사실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며 모든 시간을 드리는 것이고, 십일조는 세금처럼 1/10내면 9/10은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1/10을 통해 모든 물질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레위인 구별은 하나님께서 레위인만 선택하고 받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받으시는 것입니다. 모든 출애굽 백성이 경험했던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구원은 출애굽 직전에 애굽에 내려진 열 번째 재앙, 처음 난 것에 대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양의 피를 문에 바르면, 그 순종함을 보시고 그

집은 심판하지 않고 넘어갔던 그 경험이죠. 그때 애굽의 모든 장자는 다 죽었지만, 이스라엘 중 순종했던 가정의 장자들은 모두 구원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출애굽기 13장 이후로 이스라엘에서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하나님께 드리기 시작했어요. 고백이죠. 하나님이 처음 난 것을 살려주셨으니,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장자를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지만, 사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을 민수기에서 이렇게

적용하도록 하십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씩을 분리하여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지 않으시고, 열두 지파 가운데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며, 그들로 각 장자를 대신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레위지파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에 대한 디테일입니다. 인구조사 때 레위지파를 계수합니다. 모두 22,0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의 수를 셉니다. 그랬더니 22,273명입니다. 그럼

원래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장자의 숫자는 22,273명인데, 레위인은 22,000명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더 받으셔야죠. (민 3:46) 이스라엘 자손의 맏아들은, 그 수효가 레위 사람보다 이백칠십삼 명이 더 많으므로, 나머지 사람은 그 수만큼 속전, 곧 물어 내는 값을 치러야 한다. (민 3:47) 한 사람에 오 세겔씩 물도록 하여라. 세겔은 성소에서 따르는 방식대로 이십 게라를 한 세겔로 계산하여라. 하나님이 273명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에누리가

없습니다. 장자 22,273명을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도록 구체적으로 행하십니다. 레위인 22,000명으로 대신 받으시고, 해결되지 않은 273명에 대해서는 성소의 예물을 드림으로, 그 의무를 다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충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22,273명 중 22,272명을 드리는 것은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죄를 봐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속성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싸잡아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 그 언약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장자의 헌신을 대신하였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을 대신 담당하셨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공로는 아니지만, 그 일에는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당하게, 이제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9장은 유월절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애굽에서의 열 번째 재앙, 즉 모든 처음 난 것의 죽음이라는 심판 앞에서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죽음의 사자가 양의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하였다(Pass over)는 뜻으로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날이요,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나오게 된 민족의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영적 생일입니다. 우리에게도 그 시작이 각자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시작점은 복음 앞에 내가 ‘회심’을 결단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심은 내 삶이 주님의 것이라는 다짐이요, 그 실제적 결단입니다. 저는 회심한 사람들이라면 예배를 다른 것보다 우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외 모든 삶의 영역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는 구체적인 결단과 최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너무 일차원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예수를 믿는다’ 고로 ‘구원받았다’라는 말로 모든 것을 결론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유월절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유월절을 경험한 출애굽 백성들이 민수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음으로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더욱 정직한 고백은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라는 믿음 안에, 그 시작된 구원의 관계를 하나님과 끝까지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을 꼭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어떤 은혜를 입었고,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꼭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를 하면서 복음 앞에 다시 섭니다. 복음을 이해하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유월절 사건을 다시 되새기는 영적 유월절을 보내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 과정을 대충해서는 안 됩니다. 회심을 가르치지 않거나, 회심하지 않은 삶을 방치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끊임없이 사랑하고 권면하여서 회심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회심을 잃어버리고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돌보는 것이 목양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돌아가 버릴 수 있어요.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도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길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영혼이 복음을 모르다가 복음을 알게 되고, 회심하지 않았던 사람이 결단하여 회심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저는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의 잔치,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의 기쁨이 가장 넘치는 날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가 제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임을 잘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교회로 또 저의 목양의 울타리 안으로 자꾸 영혼들을 맡기실 때가 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교회는 수많은 영혼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교회에 소속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지난 2년 안에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끝없는 침체 가운데 있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이 상황은 놀랍죠. 이러한 우리 공동체의 성장과 부흥은 목회자인 저에게도 매우 놀라운 일이고, 가끔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그 고민을

여러분과 나누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새가족이 늘어나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목양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느끼는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단순히 교회의 숫자가 늘어나는 기쁨보다 그 거룩한 부담감이 제게는 늘 앞서 있기에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질적으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 하나님의 꿈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영혼 구원을 위한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사명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 보내어주시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그 사명에 합당한 도구로, 동역자로 불러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저는 저와 우리 사귐의교회에 먼저 세워진 가족들 안에 그 기쁨과 주님의 마음을 잘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주 교회에 방문한 찾는이가 22명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예배하기 위해 오는 찾는 이들의 영적 회심과 회복을 위해서 여러분이 사랑으로 힘써주십시오. 그리고 그 방문을 기쁨으로 환대해주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교회에서 풍삶초를 하면서 회심에 대한 다짐과 결단을 한다면, 회심했다고 고백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풍성한 삶의 기초>라는 제자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첫 시간에 우리는 함께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다. 풍삶기를 들어가면, 아침마다 이것을 고백하는 훈련을 합니다. 회심했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 그것을 잘 기억하며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과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을 지키라는 의미의 현대적 적용은 내가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날마다

기억하며, 그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백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한 가지 더 나옵니다. (민 9:15) 성막을 세우던 날, 구름이 성막, 곧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을 덮었다. 저녁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불처럼 보였으며, 아침까지 그렇게 계속되었다. (민 9:16) 그것은 늘 그러하였다.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으며, 밤에는 그 구름이 불처럼 보였다. (민 9:17) 구름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갈 때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 길을 떠났고, 구름이 내려와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쳤다. (민 9:18) 이스라엘 자손은 이렇게 주님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났고, 또한 주님의 지시에 따라 진을 쳤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날 동안에는, 진에 머물렀다. (민 9:19) 그 구름이 성막 위에 여러 날 동안 오래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의 명을 지켜 길을 떠나지 않았다. 주님과 동행이란, 주님의 속도와 주님의 방향과 주님의 때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다림과 신뢰, 그리고 무엇보다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꾸 내 뜻대로 하지요. 저도 매일 저를 쳐서 복종시키려고 애씁니다. 어떤 때는 설교를 전하다가 깨닫고 돌이키기도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싸인을 기다리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죠. 실제로 민수기 10장에서는 백성 전체가 함께 하나님을 따라 나아가기 위해서 ‘나팔 소리’를 활용합니다. 나팔 2개를 길게 불면 모든 백성이 모였고, 나팔 1개를 길게

불면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짧게 끊어서 불면 순서대로 이동하도록 이스라엘 안에 전달 시스템을 잘 구축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요? 우리 공동체가 이렇게 다들 개성이 다른데, 어떻게 한 방향으로 같은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자기 뜻대로, 자기 방식대로 하는 한 우리의 하나 됨은 절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성령님입니다. 우리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 우리의 나팔

소리는 성령님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성령께서 계신다면, 그 하나님의 영이 정말 거룩한 영이시라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도대체 무슨 지혜로, 무슨 힘으로 세상 가운데서 세상과 구별된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성령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명 우리의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으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기로 결단했다면, 그리고 주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며, 그분대로 살기로 결정했다면, 그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묻고, 듣고, 따르는 삶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와 위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저자를 성령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뜻과 성경의 진리는 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가운데 성경의 그 가르침을, 또 그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지혜를, 그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습관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이죠. “하나님, 제게 말씀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 제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정말로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 생각과 뜻을 정말로 내려놓고 한번 그분이 원하시는 삶에

나를 맡겨 보십시오. 오늘도 우리가 들은 말씀을 성령께서 여러분의 일상 가운데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 삶에 결정이 필요한 순간마다 성령께서 말씀의 진리로 우리를 깨우쳐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삶이 오늘도 광야와 같은 길을 알 수 없는 황무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지키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