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 / 강정규 목사

2023-01-20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저는 제가 설교하는 스타일이 평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외적으로는 일단 자유하죠. 그러나 설교 내적으로는 매우 촘촘한 논리를 추구합니다. 신학적으로는 모든 논의를 열어두지만, 신앙적으로는 매우 실천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보수적입니다. 설교 시간은 길지만, 성경과 신학을 벗어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예화는 이해를 돕기 위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며, 예화보다는 가급적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고자 힘씁니다. 논리적 설명을 추구하기 때문에

논리적 사고를 하는 분이라면,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도 설교를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흐름을 한번 놓치면,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제가 코끼리에 대해서 한 시간 동안 설명을 하면, 그중에 ‘꼬리’에 대한 부분만 이해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예 모르는 것보다 감사한 것이죠. 그러나 설교의 맥을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진짜 설명하고 싶은 메인 스토리보다 그것을 설명하는 부수적인 것만

기억하면, 그 사람은 시리즈 설교가 갖는 장점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성경 이해라는 것은 연속성과 깊이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는 눈과 시각, 신학이 한순간에 쌓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씩 하나씩 잘 간직하고 꺼내어 사용하는 훈련과 습관을 기르게 되면,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 나가며, 성경이 갖는 놀라운 연결성에 탄복하게 됩니다. 저는 저희 교회 설교의 깊이가 평균 이상의 수준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길이만이 아니라 깊이가 말입니다. 5년 전 설교나 지금

설교나 제가 하고 싶은 궁극적 방향성은 늘 동일한데,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깊이는 달라져 있습니다. 저도 자랐고, 여러분도 자랐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설교와 지금의 설교의 깊이가 동일하다면 저는 우리가 성장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말씀대로 젖을 먹는 수준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하죠. 저는 신학교 때 몇몇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설교를 잘 전한다는 것에서 놀란 것이 아닙니다. 말 잘하는 사람은

어디나 있으니까요. 놀란 것은 그 ‘깊이’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솔직한 느낌은 “이런 설교를 성도들이 알아듣는다고?”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신학생인 저조차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본문이나, 신학을 설교로 매주 성도와 나누는 그 모습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저 설교가 신학교 강의면 좋겠다는 마음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마도 제가 느끼기에 제가 지금 신학교에 가서 ‘하나님 나라’를 강의를 신학생에게 한다 해도 제가 여러분에게 지금 전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누군가가 저에게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줬다면 정말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 5번째 시간인데,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었던 네 편의 설교가 결코 만만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설교를 통해서 나눌 수 있는 것은 저나 여러분에게 너무나 감사한 기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잘 소화가 되지 않았다고 좌절하지 마시고, 만약 지난 네 편의 설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잘

새기고 정리하시고,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이제는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본개념이 정리가 되고 내재화 된다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씨줄을 얻은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비전 말입니다. 제가 설교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논리 전개의 방식이 성경으로 성경을 설명하고 연결하는 방식인데, 기본적으로

모든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처음과 끝의 시대가 수천 년의 간격이 있지만, 그 안에 동일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만날 때, 다시 신약으로부터 수천 년이 떨어진 지금 우리에게도 그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고 진짜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해함, 그 눈을 여러분에게 선물해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의 비전을 넘어 여러분의 비전, 그리고 우리의 비전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나의 비전이 되는 시간.

그때 우리의 예배도, 우리의 삶도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구약과 신약의 연결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엑스칼리버’라는 칼에 대해서 아십니까? 영국의 ‘아서왕 이야기’에 나오는 신화 속 칼입니다. 캔터베리 대성당 돌계단에 꽂혀있는 엑스칼리버를 뽑는 자가 왕이 될 자라는 유언을 남기고 우터 왕은 죽습니다. 후에 아서가 아무도 뽑을 수 없던 이 칼을 뽑아서 왕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구약시대는 기본적으로 실패한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선택한 다윗 왕조와 나라가 세워지지만, 그들은 제사장 나라로 살아야 하는 그들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을 통해서 RESET이 일어납니다. 70년 포로생활로 그들의 실패를 청산하시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신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은 봐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 실패한 백성들에게 주신 소망의 가장 핵심이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우시겠다는 약속이 구약 백성들에게 강렬한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시다시피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여러 제국주의에 치이고 시달렸기에,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자신들이 역으로 제국주의 세상의 주도권을 잡는 나라가 되고 싶었고, 메시아가 자신들에게 그러한 힘을 줄 것이라고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를 정복하고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는 이스라엘을 가져다줄 정복자로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그런 존재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것은 도리어 깨어진 세상의 극치, 세상적 피라미드 구조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하나님의 비전과 꿈을 이루신 것은 아니겠죠. 동시에 예수님의 비전과 꿈을 계승한 우리가 이 깨어진 세상에서 진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우기가 너무나도 힘든 이유 또한 여기게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옛 본성과 부딪힙니다.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깨어진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이 세상 가운데 좀 더 잘 사는 방식, 좀 더 멋진 방식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과 방향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가치관 안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꿈꾸는 진짜 교회를 세우다가 실패하는 이유는 세상의 가치와 충돌하는 그 사명을 다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 안에서 모두가 같은 비전 안에 동행하는 것이 상당히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이 길을 좁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그런 우리의 모습은 외롭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추구대로,

나의 옛 모습대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은 애초에 맞지 않는 길입니다.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헌신해서 사랑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헌신으로 사랑받고 싶고, 나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태도를 버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처음에는 이런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하지 않으십니다. 젖을 먹여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분은 반드시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것은 권리포기와 대가지불이 동반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이 길을 갈 것인가 결단하게 됩니다. 결단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체제를 거부하고 개혁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공존하지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충돌은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30년 동안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초청하기 시작하면서 점화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나사렛 회당에서의 있었던 메시아적 선언입니다. 이사야서 후반부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살펴봤던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던 글도 이사야서였죠. 그 글이 예언하는 것이 오실 메시아이기에 빌립은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고 설명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중에서도 이사야서 61장의 이 글은 누구나 알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마치 엑스칼리버 칼처럼 이 말씀을 성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메시아일 것이라고 당대의 모든 유대인들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고 이름한 한 청년이 사고를 칩니다. 그의 고향 나사렛의 어느 한 회당에서 말입니다. 예수를 당시 사람들은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여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곤 했는데, 당대의 가장 보편적인 사람에 대한 설명방식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나사렛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출생지는 어디입니까? 베들레헴입니다. 이 또한 구약의 예언입니다. 구약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탄생하시지만, 그것은 그의 부모가 계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눅 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만삭의 마리아(성령으로 잉태)는 남편 요셉을 따라 유대로 가게 되었던 것이고, 그곳에서 예수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출생만 그곳에서 했을 뿐, 다시 원래 자신들의 거처인 갈릴리 나사렛으로 와서 살았기에 예수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고 알게 된 것입니다. (요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후에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예수를

두고 했던 이 말은 바로 그 의미입니다. 나사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구약의 예언에 의한다면 베들레헴 탄생이어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서른 살쯤부터 갈릴리 지역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자신의 고향 나사렛에 와서 회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회당이라는 곳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예배 장소입니다. 원래는 성전에서 예배해야 하지만 포로 생활 가운데 성전을 갈 수 없기에 지역마다 회당을 만들고 그곳에서 모이는 전통이 생겨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대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집니다. 회당의 예배는 남자 10명이 모여야 이루어집니다. 찬양과 기도를 하고,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상당 기간 동안 사역을 하셨고, 유대인들에게 ‘랍비’ 즉 선생이라고도 불릴 만큼 인정받았기에,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나사렛 회당에 서신 예수님은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건네받고 61장의 이 부분을 펴서 읽으십니다. 이사야서의 유명한

메시아 예언의 말씀을 읽으신 후, 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주고 앉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 글이 예언하는 것이 성취되었다는 뜻이죠. 즉, 오늘 메시아가 너희 앞에 왔다는 선언입니다. 나사렛에 회당에 모여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이 선언은 그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이 일로 인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끌고 가서 죽이자고 합니다.

그 죽음의 위기에서 피하셔서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굉장히 멋졌으나, 사실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았던 고요 속의 외침이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으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 예수님의 선언이 참된 진리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이사야서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이 말씀 그대로, 세상의 가치관에 포로된 자들, 그 거짓에 눈먼 사람들, 깨어진 세상에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회복시키고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시며, 주님의 은혜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귀신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4:41).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나사렛 회당에서의 선포와 그 귀신들의 증언을 토대로 예수님이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메시아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눅 4: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은 자신이 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복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4:18에서 주의 성령이 임하시므로 전하였던 복음 또한 하나님 나라 복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매우 독특한 표현이 하나 등장하죠. 바로 그 복음의 대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눅 4:18a)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구약 이사야서에서도 메시아의 사역 대상은 ‘가난한 자’입니다. (사 61:1a)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럼 우리는 이렇게 이해함이 바람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초청은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초청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힘씁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경위가 나를 조금 더 잘 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존재로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이해할 때, 그것이 나를 부유하게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가난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만약 예수를 믿는 것이 스스로 가난해짐을 각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들릴까요?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자발적 가난을 각오하라는 이 이야기가

기쁘십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이 가난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가난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상태라고 말한다면,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해 내가 가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그것은 매우 부담스럽고 불쾌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고는 싶지만, 가난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유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가난하지는 않고 싶으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도 소유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이 가난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물론 가난에는 ‘심령의 가난’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심령의 가난이 모든 가난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필요한 가난이 모두 심령이 가난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추구는 성경이 항상 경계하는 부분이기에, 가난도 분명 물질적인 가난, 실제적 가난과 더욱 관련이 깊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는 가난을 심령의 가난으로 설명하지만, 그와 유사한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죠. 즉, 성경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으로 설명하는 ‘가난’을 심령의 가난으로 해석하여 ‘마음에 채움이 필요한 상태, 공허함’ 정도로 이 말씀을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평지설교는 대칭구조인데, 위 말씀의 대칭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눅 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고, ‘부요한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이 ‘가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다음 설교를 통해서 성경이 주는 답을 찾을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 질문만 던지고 끝낼 수는 없으니, 설교의 결론을 오늘 기도할 분량만큼 지어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이사야서의 예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고,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물질적 측면에서 부자에게는 대체로 경고하고, 가난한 자를 보통 격려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나사로는 거지로 살았으나, 죽어서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 땅에서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 방향성, 추구점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가난하면 장땡이다’가 아닙니다. 가난하면서도 부자를 부러워하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기중심성만 가득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과 무관한 상태임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은 채, 무엇을 따라가고 있나? 어떤 가치관을 붙들고 살고 있나?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나? 무엇을 위해 사나?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의 첫걸음 세상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두 번째 하나님을 따르는 걸음을 내딛을 수 있죠. 세상에 속한 우리들의 모습이 성경적 표현으로 보자면, 포로 된 자의 모습이고, 눈먼 자의 모습이고, 눌린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결단에 있습니다. 그 삶이 옳지 않다는 문제의식에 있습니다. 깨어진 세상에 일부가

되어 살지 않겠다는 성찰에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분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삶입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바뀌기는 싫고, 말씀을 배우면서 도리어 정죄하고 판단하기를 더욱 좋아하는 것이 여전히 악한 영에게 유혹받는 우리의 모습일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어도, 메시아가 오셨어도,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당시의

사람들의 눈은 왜 가려져 있었습니까? 복음이 앞에 있어도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원하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기 원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우리에게 성령님이 계셔도 여전히 내가 그런 상태라면, 성령님이 나에게 날마다 말씀하셔도 우리는 어느 것도 듣고 따라가며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 성경에서 진리를 전하는 자들이 그렇게 핍박을 당했습니까? 진리가 청중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기대로 이 예배에 오셨습니까? 내가 가진

나의 생각과 나의 가치관과 나의 삶의 방식들이 말씀 앞에 드러나고 박살 나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오셨다면, 저는 그것이 주님 앞에 다 내어놓은 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나의 가치관과 나의 삶의 방식을 여전히 추구하면서 그것을 움켜쥐고 주님 앞에 서서 그 나라 백성도 되고자 한다면, 저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로 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고 싶은 것은,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깨어진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 그분이 그렇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나의 삶으로, 나의 마음으로, 나의 모든 영역으로 그분을 초청하시고, 그분 앞에 온전히 항복하십시오. 모든 것을 내어놓고 빈 잔 들고 주님을 맞이하십시오. 그때 그 빈 마음, 그 가난한 자의 모든 부분을 주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