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에 대한 두 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설교를 통해서 에베소라는 도시가 로마의 식민지 중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특별히 소아시아 지역의 중심지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을 3차 선교여행의 중심지로 삼았고, 3년의 시간을 보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의 힘. 복음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합니다. 아데미 여신밖에 몰랐던 도시에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도시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변화를 목격하고, 다음 사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선교의 최종 목적지인 로마로 향하는 것이었고, 방법은 죄수가 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회심하며 품은 비전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에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당대의 땅끝이라는 의미는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지리적으로는 로마의 가장 끝인 스페인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목표였습니다.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롬 15:23)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롬 15:28)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하게 전해 준 뒤에,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즉, 복음은 먼저 바울의 삶과 방향성, 인생을 대하는 방법과 태도를 바꾸었고,
그는 이방지역에 복음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삶을 헌신하게 됩니다. 로마로 간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로 투옥 됩니다. 제한적으로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만날 수 있었고, 그 시간들을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면서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 에-골-빌-빌, 즉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인 에베소서는 로마서와 함께 바울서신의 양대 기둥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두 편의 서신이 유독 교회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면, 편지의 내용이 가진 ‘보편성’ 때문입니다. 보통 서신은 대상이 있기 마련이고, 그 수신자에게 필요한 내용을 기록하므로 주관적인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와 에베소서는 좀 다릅니다. 로마서는 로마 교회의 상황과 문제에 맞추어 쓰였지만, 바울의 중요한 생각과 사상을 조직적으로 기록하여 보내었기에, 바울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보편적 유익함을 줍니다. 에베소서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이 편지가 회람용 서신이었다고 봅니다. 즉,
에베소 교회가 받아서 읽고, 주변 지역의 여러 교회가 돌려서 읽도록 써 보낸 편지라는 것이죠. 그런 성격으로 인해, 에베소 교회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고 싶은 복음의 메시지를 바울이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읽어도, 어색함 없이 읽을 수 있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두 부분으로 주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1~3장까지는 ‘복음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4~6장은 ‘우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인간의 반응적 측면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반응’이라는 두 가지 관점이 성경에 나타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치 하이파이브를 하듯이 하나님이 손을 내미셨다면, 우리도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응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주시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이 손을 내미셨어도 우리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죠.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찾아왔으나, 그것이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내가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죠.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반대편에 사는 우리들까지도 말입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모두에게 주어졌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그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총체적 개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왜 우리를 위해 일하셨고, 어떤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지 선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제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여러분이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여러분이
복음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내용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복이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삼아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실 때, 그 복이란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일까요? 우리가 이 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 이상한 것을 복으로 여기며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필요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그런데 그 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잘 알아야 하잖아요. 세상에서 복이라고 하면 거의
물질의 풍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도 그런가요? 자꾸 우리 안에 복음이 복음으로 역사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에 우리가 현혹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 전 설교에서도 나눴지만, 구원을 잘못 인식하면 우리의 삶은 굉장히 허무해집니다. 구원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이미 난 구원이 확정되었으니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을 가르치면서도 교회에는 헌신이 필요하니까, 헌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상한 신학이 자리 잡습니다. 상급론이죠. “구원은 받았는데, 상급을 안 쌓으면 천국 가서 개털 모자 쓰고 다니고, 허름한 집에 사니까, 상급을 쌓아야 한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 이러한 천국에서의 차등상급론은 우리가 받은 구원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 뿐 아니라, 신자로 하여금 다시금 세속적 가치와 경쟁 속에서 살도록 만듭니다. 가장 나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우리가 받을 상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상급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죠. 사실 상과 복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과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복음의 선물은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과 우리가 죄로 인해 갈라졌다고 표현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에서 있습니다. (엡 4:17)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엡 4:18)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자기 소견대로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원래의 자리에 모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질입니다. 신앙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연합이요 하나 됨이며 동행입니다. 그것이 원래 우리를 지으신 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 속하여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그들의 마음에서 버리며, 그들 또한 에덴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죄의 결과는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공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란 분리된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안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하여 결국에 이스라엘을 준비시키고, 애굽이라는 강대국 안에서 그들이 나라를 이룰 만한 숫자를 이루어 가시도록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죠.
그리고 때가 되어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애굽에서 끄집어 내어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오도록 하십니다. 그때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건너는 곳이 있죠. 그곳이 무엇입니까? 홍해입니다. 바울이 이 홍해 사건을 신약에서 어떻게 해석합니까? (고전 10: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고전 10:2)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이 바로 세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던 세상의 모습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게 된 전환점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교회에 와서 세례를 받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하나님 없던 나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예식을 하는 것이죠. 원래 그것이 침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식으로 머리 위에다 물을 뿌리는 것이죠. 의미는 나의 옛 모습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상징합니다. 홍해 사건이 세례라면, 시내산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회심적 결단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되어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결단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율법을 주시죠. 이것이 중요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먼저 존재를
바꾸시고 그 존재에 걸맞은 삶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가 바뀌었으니까요. 구약 백성들에게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법을 말씀해주셨다면,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말씀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에베소서 4~6장은 온통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엡 4:21)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엡 4:22)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엡 4:23)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엡 4:24)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엡 5:1)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엡 5:2)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엡 5:3)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행위나 탐욕은 그 이름조차도 여러분의 입에 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에게 합당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나와 무관한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들입니다. (엡 5:16)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 삶을 주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였다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죠. 그리고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그런 노력도 없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에스라성경대학원에서 바울서신을 가르치는 이진섭 교수님은 ‘행위 구원론’과 ‘구원론의 행위’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행위 구원(우리의 어떤 행동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선행으로도, 어떤 열심히도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나타나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행위는 우리의 믿음의 진실함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울신학자로 유명한 숭실대의 권연경 교수님은 그의 책 <행위 없는 구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우리의 행위(열매)는 바로 우리의 본질(나무)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은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행위가 종말론적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식을 되새기는 것일 뿐이다.’ ‘나는 구원받았어’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저는 진심으로 되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삶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에 어떻게 달라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까?” 저의 이 질문은 결과물을 내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진실함을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떤 경우에 우리에게 진실한 마음은 있으나, 때때로 나의 연약함과 죄성 앞에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라면 더욱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내용, 즉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해답이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연약함을 토로하며 머물러 있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해답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그 해답은 우리에게 주신, 그래서 우리가 누리는 ‘세상과 다른 특별한 복’에 있습니다. 다시 출애굽 사건으로 돌아가서 설명해봅시다. 홍해를 건너서, 이전의 삶으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시내산 언약, 즉 회심적 결단을 한 그들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회심한 그들에게 하나님이 기다리셨다는 듯, 그 고백을 듣고 허락하여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막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이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기로 결단했기에, 그들이 누리게 된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이 가진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제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회심한 사람들에게 성막을 주십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고,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둘 모두 회심하기 전에는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약과 신약이 완벽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신약은 갑자기 뚝 하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것, 하나님의 비전은 동일하고 영원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인간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인간 세상 안에 들어와서 거하시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에덴에서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임재를 죄 많은 이 세상 가운데서 경험하게 하십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이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다른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이 가나안 정착 후 성전이 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소중한 신앙의 상징이었죠. 그러나 동시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라는 모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전을 통해 그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유대교 신앙은 형식은
취하고 중심은 잃어버립니다. 성전의 제사와 종교 생활은 남아 있었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실패 이유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은 건물에 거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인격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실체로서 나타나신 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전이 모형이라면 예수님은 실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을 통해서 준비되었고,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천사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 즉 임마누엘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세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일제히 이렇게 선언합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시대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오심을 전파하던 세례 요한까지가 ‘구약 = 옛 언약 = 시내산 언약(성전/성막)’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이고,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 새 언약’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날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를 통해서 주어질 것을 구약의 예언자들은 예언하고 선포했죠. 히브리어 ‘메시아’는 헬라어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셨음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고향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서 행하신 일이죠.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사야서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알만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읽으신 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4: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커밍아웃도 아니고, 메밍아웃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가 메시아다’ 예수님이 선언한 순간입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예언을 전한, 세례 요한은 어느 날 예수님이 정말 자신이 예언하고 기다린 그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눅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 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요한의 그 질문에 이사야의 그 예언이 자신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는 특징들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회복의 나라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이 주는 고통과 슬픔을 회복시킵니다. 맹인, 못 걷는 사람, 나병환자, 귀먹은 사람, 죽은 자, 가난한 자는 모두 이 세상의 고통 가운데 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두움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공허함과 허무함을 충만함과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지만,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면 경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그 구원의 능력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 권세로부터 예수님은 우리를 해방하고 자유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거하는 것은 해방입니다.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주님이 성육신하셔서
이 땅 가운데 행하신 일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진리를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을 아무나 누릴 수 없어요. 그래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회심하지 않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리가 없죠. 이 말씀의 진의는 바리새인들 무리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지리적,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져 있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나라에 속한 삶을 경험하며 소망하게 됩니다. 아직 우리는 완벽하게 하나님 나라만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이유가 있다면 아직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어진 세상 속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붙잡아 살 때, 분명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확신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속대로 그
나라가 반드시 완성되고 있음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새 언약의 구속을 성취하셨고, 우리를 죄로부터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복음의 증인 된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며 살아갈 때,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 에덴에서 함께 하셨고, 성막으로, 성전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머무셨고, 성육신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던 하나님은 이제 성령으로 함께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회심하여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릴 수 있었던 은혜가 하나님의 임재였다면, 동일하게 복음을 듣고 반응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임재라는
복을 누리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끝날까지 참여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을 우리의 힘과 능력과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살아가야 한다면 모순이고 억지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은 우리의 행동이 바뀌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가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들어가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었고,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이 우리를 거룩한 자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사실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존재가 달라졌다는 것은 내가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문제입니다. 진짜로 그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새로운 존재로 우리를 바꾸어주신 그분의 능력과 힘에 의지하여 살아가면 됩니다. 정말 내 안에 성령이 들어오셨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그분을 느껴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 회심이 진짜라면, 회심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도 우리의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객관적 진리가 나의 주관적 경험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은혜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삶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연약해지고, 의심이 찾아올 때면, 이 복음의 진리를 기억하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해보세요. 우리는 그렇게 그분을 붙잡으며 의심을 이겨내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 즉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며 에베소서 전반부를 마친 후, 4장으로 넘어갑니다. (엡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엡 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 4:1)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므로. 그러므로! 아멘 이십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새롭게 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세뇌나 암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꾸어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내가 이제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믿고, 이제 그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가르침과 방향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엡 5: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성경은 선언합니다.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지금은 빛이다! 과거에는 우리가 어두움에 있었기에 회심하기 이전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며 살았던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 내가 빛의 자녀답게 되었다는 진리를 믿는다면,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엡 5:10)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서 많은 영역으로 가르칩니다. 제가 그 부분을 메시지 성경을 인용하여 현실에 맞게 바꾸어 몇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부디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잘 새겨져서,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모습이 필요한 순간에 성령과 더불어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아무 생각이나 분별없이 사는 대중들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거부한 나머지, 하나님은 물론이고 현실에 대해서도 감각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똑바로 생각할 줄 모릅니다. 감각을 잃어버린 그들은, 성에 집착하고 온갖 종류의 변태 행위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 더 이상 거짓과 가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웃에게 진실하게 말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 화가 나면 화를 내십시오. 화내는 것 자체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화를 연료로 삼아 복수심을 불태워서는 안 됩니다. 화난 채로 오래 있지 마십시오. 화난 채로 잠자리에 들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귀에게 거점을 내주는 일입니다. • 불의한 일을 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은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정당한 일로 돈을 벌어서, 일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십시오. • 여러분의 말하는 습관을 살피십시오. 여러분의 입에서 불쾌하고 더러운 말이 나오지 않게
하십시오. 도움이 되는 말만 하고, 여러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선물이 되게 하십시오. • 가시 돋친 말, 헐뜯는 말, 불경스러운 말은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서로 마음을 쓰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여러분도 서로 신속하고 완전하게 용서하십시오. • 사랑을 육체의 욕망으로 변질시키지 마십시오. 난잡한 성행위, 추잡한 행실, 거만한 탐욕에 빠졌다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몇몇 사람들이 남의 뒷말하기를 즐기더라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보다 나은 언어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더러운 말이나 어리석은 말은 우리의 생활방식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사용해야 할 언어는 감사입니다. • 술 취하지 마십시오. 과음은 여러분의 삶을 저속하게 만듭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영을 들이마십시오. 축배의 노래 대신 찬송을 부르십시오. 저는 이러한 삶을 우리의 힘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것은 우리 안에 능히 그 일을
행하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지만, 나보다 능력이 크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내 고집과 내 생각을 조금 더 내려놓고, 그분께 내 삶의 운전대를 맡기고, 그분이 내게 말씀해주시는 것을 따라 행할 수 있다면, 저와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빛으로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복음의 선물은 우리의 존재가 바뀌어 살아가는 삶이고, 그것을 돕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키워드로 삼지는 않았지만, 에베소서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 됨’입니다. 너무나 다양하고 다른 우리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는가? 성경은 우리 모두가 성령께 순종할 때 그 일까지도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기적인 우리가 어떻게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행할 때, 이곳은 세상에 없는 그래서 너무나 특별한 주님의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내 옆 사람 하나 품기 어려운 것이 내 본성이고 내 죄성이지만, 성령께 순종하기 시작할 때,
능히 내 주변의 사람을 사랑할 능력도 얻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옆에서 바른길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십니다. 우리에게 더 좋은 삶을 맛보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해놓고도, 마음이 변하여 그렇게 행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엡 4:30a)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져 가는 것을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일하실 때, 우리의 마음과 무관하게 함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인정하고 따르고자 할 때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따르지 않고 무시하기 시작하면 성령께서는 근심하고 슬퍼하십니다. 더 심하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살펴본 대로 성령을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분과 인격적으로 깊은 사귐을 경험하면 성경은 그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 성령충만은 내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 안에 오셔서 일하시는 성령님. 그분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다시 예전처럼 내가 주인 된 삶을 살 것인가? 여전히 그 선택과 결정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이 감옥에서도 에베소 교인들을 생각하며 이것을 설명한 것이겠죠. 잃고
싶지 않아서. 혹시 오늘 말씀이 아직 잘 이해가 안 되신다면, 다시 찬찬히 들어보시며 복음을 새기십시오. 듣고 또 들으십시오. 진리를 깨닫고자 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지혜를 주셔서 깨닫고 이해될뿐더러 경험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의 심정으로 저도 우리 사랑하는 사귐의교회 성도님들에게 권합니다. 회심한 여러분의 삶을 사랑하며, 이미 우리의 존재를 바꾸어주신 성령의 능력을 믿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결코 돌아서지 마십시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마시고, 그분이 나를 통하여 충만하게 역사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성령충만한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