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유명한 설교가 존 맥아더는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하는 것에 관해 자신의 책에 기록한 바 있습니다. 에베레스트산 비탈에서는 매년 산을 오르다 목숨을 잃은 등반가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고는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높은 산을 등반하는 일은 많은 비용과 노력과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1996년 전까지는 등반가 네 명 중 한 명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요즘에는 그 숫자가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정상을 향해 100명이 등반을 시작했다면 그 가운데 목숨을
잃는 사람이 평균 14명이며, 정상에 오르고 나서 하산 중 사망하는 숫자도 10명당 1명은 됩니다. 지난 30년간 산을 오르다가 죽은 사람은 225명이 넘으며, 한 번에 39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목숨을 걸 뿐 아니라, 매우 큰 비용을 투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번 산에 오르는데 적게는 3만 달러(3,000만 원 이상), 많은 경우는 10만 달러 이상이 소요됩니다. 등반에 대한 훈련을 받는 것에도 최소 8~10개월이 걸립니다. 수년간 여러
등반 경험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에베레스트산에 도전하게 됩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고, 시간도 걸리고, 매우 큰 위험이 뒤따르는 일인데도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는 물론이고 심지어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은 그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이상한 일. 무모한 일. 가치 없어 보이는 일.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전부인 일.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구별된 사람들, 성도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온전한 성도로 살아가고, 힘들 때가 있지만 그 길에 후회함 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나은데... 여전히 아직 가야 할 길을 정하지 못하거나 한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도인 듯, 성도 아닌, 성도 같은 애매함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를 모두 ‘성도’라고 통칭해서 부르지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마음, 헌신 등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누군가는 정말 주님이 주인 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이 주인 된 삶을 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네
가지 밭의 상태가 있고, 만약 그것이 모두 같은 결과를 맞이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밭의 상태가 다름을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열두 정탐꾼 가운데 열 명과 두 명의 태도가 달랐는데, 그들이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우리가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겠죠.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 모두를 구원하고 싶은 것에 있습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래서 모두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기회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이런 논쟁은 또 다른 이야기로 풀어가야겠지만,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내 삶의 방향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 사람이니, 우리는 말 그대로 핑계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에게 누구든지 구원받을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혈통이나, 민족이나, 신분이나, 성별이나 아무런 상관이 없이, 모두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분명 성경은 모두가 구원받는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놋 뱀 사건도 그 이야기를 듣고 행한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만약에 누구나 구원한다면 바울이 왜 굳이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서 살아가겠습니까? 왜 이미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흔들릴 때마다 그곳에 편지하고 권면하고 그들이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힘썼겠습니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정작 그것에 대해서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깨닫지 못하고 가볍게 여기며, 하나님과의 언약과 약속은 언제든지 내 편의에 따라서 내팽개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회심하여 하나님께 한 걸음씩 나아가 그 품에 안기는 자들의 모습은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자신의 평생의 ‘열매’요, ‘면류관’이라고 고백 되었던 것입니다. (살전
2:19)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살전 2:20)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여러분. 저에게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함께 서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하나님께 드릴 선물이며, 면류관입니다. 저는 사귐의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회심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 그 발걸음이 지속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회심은 입으로만 하는 거짓된
회심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전환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의 초점과 주인이 바뀌는 삶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고 하니까, 억지로 이 악물고 하는 그런 행군이 아니라…. 이전에는 몰랐으나 정말 주님이 주인 된 삶을 사는 것이 나를 가장 행복하고 평안하고 소중하게 만드는구나, 고백하게 되는 그러한 여정이 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내가 이전에 다른 것을 얻고자 힘썼던 것, 다른 것을 자랑했던 것이... ‘이 삶을 몰랐기 때문이구나’ 고백할 수 있는
참된 성도의 삶이 저는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2. 신앙의 여정 여러분, 한번 오늘의 설교를 들으며 여러분의 신앙 여정을 되짚어 보십시오. 누구나 구원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우선 어떤 경로를 통해서 교회를 만나게 되고,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이 첫 번째죠. 복음을 이해하기까지 우리는 각기 다른 시간을 갖습니다. 누군가는 어려서부터 너무 많이 듣지만, 그것이 부모의 신앙에 의한 것일 뿐 자신의 신앙은 아니기에, 하나님이 정말 내 삶의 고백으로 인정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 속한 것과 하나님이 주인 된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적 동의’나 ‘인정’보다는, 복음 앞에 내 삶이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천동설적 인식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나의 자리를 찾아가는 지동설로의 전환처럼, 나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는 사건이 필요합니다. 1) 복음 : 죄와 구원의 필요성 이해 복음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그 하나님을 떠나서 깨어진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즉, 죄를 다루지 않으면 절대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의 교회에서는 ‘죄’에 대해서 잘 다루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니까요. 교회에서 죄인이라는
소리보다는 내 삶이 조금 위로받고 축복받고 안전하다고 느끼길 원해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의사가 여러분을 죽게 하는 질병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고 ‘괜찮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잠시는 듣기 좋으나, 여러분을 죽게 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사실 요즘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보다는, 우리의 관점에서 내가 받은 ‘상처’라는 표현으로 많은 것이 대체되었습니다. 상처받은 내가 치유받고 회복되어야 하는 관점에서 설교하다 보니 위로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죄’를 만하면 우리가 가해자이지만, ‘상처’라고 표현하는 순간 우리는 피해자가 되거든요. 교회의 설교는 그런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는데 집중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그 문제 앞에서 당사자로 서지 않는 한, 대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서 바뀌어야 할 어떤 문제가 있음을 우리는 적시해야 하고, 내가 바로 하나님의 주인 됨을 거부한 또 다른 아담과 하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죄를 잘 이해하고,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비로소 그때 ‘복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죄인에게만 ‘복음’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실 방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로 인한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마음으로 수많은 한계와 고통과 허무함 속에 살지만, 하나님과 다시 원래의 관계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만 복음이 필요하고, 죄인에게만 구원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지금 깨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 안에서 헛된 것을 쫓아봤지만 그것에 소망이 없고, 다른 무엇으로도 나는 내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정말 나의 고백이 될 때, 바로 그런 사람에게
‘예수’가 복음이 되어 나를 새롭게 하시는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있으면 좋고, 그런데 사실 꼭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고, 나는 사실 다른 것이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마음이 있다면, 아직 여러분은 ‘죄’와 ‘죄가 우리에게 준 진짜 고난’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또한 글로 배우고, 너무 많이 듣다 보니, 수도 없이 구원을 말하지만 정작 구원이 뭔지를
잘 모르기도 합니다. 내가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고, 내가 지금 구원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기도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내가, 다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안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삯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죄’와 ‘죽음’이 세트입니다. 그런데 개념적으로 ‘죽음’이 있으려면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어둠’을 설명하기 위해서 ‘빛’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죄를 이해해야만,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내 삶의 깨어짐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고백해야만, 하나님이 내 삶에 주시는 구원도 참되게 이해하고 누리며, 다시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힘쓸 수 있는 것입니다. 회심이 구원 사건의 시작입니다. 회심하기 전의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입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속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공급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 유일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고,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생명, 이것을 누리게 된 순간 우리에게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에서 주님이 주신 새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경험이 있었다면 여러분에게 구원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이 더 우선순위로 다시 올라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첫 번째 역할이고, 회심한 자들의
그 회심을 지켜내는 것이 교회의 두 번째 역할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두 가지 이유입니다. 2) 믿음과 회심 : 구원의 시작 교회에 나오고,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데 있어서 성경이 강조하는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말할 때 필수요소로 늘 ‘믿음’을 말하니까요. 김형국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믿음’만 바르게 알아도, 이렇게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신앙의 악화와 약화는 대부분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그 믿음은 무엇일까요? 김세윤 교수는 믿음의 본질적 의미는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제가 여기 앞에 있는 분에게 ‘핸드폰 좀 줘보세요’라고 말하면 줄까요? 주겠죠. 왜냐하면 저의 제안과 의도를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누구인지 알고, 제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제가 지금 옥정 시내에 나가서 모르는 사람에게
‘핸드폰 좀 줘보세요’라고 말하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과 믿음의 관계입니다. 복음을 잘 이해하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내 삶을 그것에 의탁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내게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믿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믿는다는 것은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는 것입니다. 그냥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또 하나, 복음을 이해했지만 복음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약하거나 없는 상태입니다. 제가 누군지 알지만 제 요구에 응하지 않는 상태이죠. 그러면 저와 더 교제하며 더 가까워지거나, 아니면 저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잠시 갈림길에 머물러 있지만, 결국 둘 중의 하나의 상태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구원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관계에 대한
용어이므로, 바뀔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좋은 방향으로 바꿔가야 하며, 때로는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행위 믿음은 또한 반드시 ‘믿음의 행위’를 낳습니다. 믿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행동이 그에 맞지 않는다면 믿음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죠. 믿음의 실제적인 예를 봅시다. 우리가 얼마 전에 보았던 마가복음에는 12년간 혈루증 앓는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마가는 그 여인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모든 재산을
소비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도리어 그녀의 병세가 더욱 악화 되어 갔다는 것이죠. 이처럼 오랫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여인은 예수님께 몰래 나아가서 뒤에서 살짝 그분의 옷을 만집니다. 28절에 보면 그녀는 ‘내가 이분의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녀가 숨어서 몰래 그분의 옷자락을 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혈루증 자체가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 자체가 용기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었기에 그녀는 그러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예수님을 만집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자신을 만진 것을 아시고 무리 가운데 여인을 찾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행한 일로 인해 두려워 떨며 예수님께 나와서 사실대로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을 만진다고 다 낫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을 구분하는 요소입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을 잘 보면 그때 예수님을 만진 것은 그 여인만이 아닙니다.
수십 명이 만집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치유하는 구원을 일으킨 믿음은 이 여인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을 만진 사람이 ‘믿음’이 다 없었을까요? 뭐라도 기대하는 믿음이 있었겠죠. 그러니까 굳이 거기서 예수님께 다가가서 그분을 만지려고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기대를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어머니 칠순여행을 일본으로 갔습니다. 가이드가 우리를 데리고 한 사원에 가서 거기 있는 어떤 조각상을 만지면
돈이 들어온다고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만집니다. 그것이 믿음일까요? 아마도 제 생각에 고침 받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꼭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아무런 간절함이 없이도 무엇이든 가서 만졌을 것입니다. 여기가 용하다고 하면 그것도 붙들고, 이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것도 붙들고. 필요하면 교회도 가고. 또 내게 도움이 되면 다른 종교도 가서 붙들고. 예수님께도 기도도 하고 의지하는 듯하지만, 사실 다른 것도 의지하고. 마치 보험 들어 놓듯이 그렇게 이것저것
붙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믿음을 의미하는 ‘피스티스’의 다른 뜻은 ‘충성’과 ‘신실함’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충성’과 ‘신실함’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사건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마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이 여인은
특수한 상황이었어요.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 자체가 결단입니다. 욕먹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믿음으로 여러 마음의 장벽을 넘어서 여러 어려움을 감내하고 믿음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진위는 많은 경우 내 삶에서 믿음의 ‘대가 지불’도 감내하며 행하는가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죠. 바울이나 야고보나 그들이 말한 믿음은 늘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복음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하나님을 떠난 비참한 나의 삶을 바꾸시고 새롭게 하셨음을 진짜로 받아들이고, 이제 그분께 속한 자가 되어 내게 주어진 삶을 충성되고 신실하게, 예수님께 속한 자답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함께하는 구원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깨어진 세상 가운데 살아갈 때는 여전히 우리에게 시험과 고난이 옵니다. 여기서 믿음은 무엇입니까?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내 깨어진 삶을 구속하신 하나님께 맡겨진 내
인생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전함을 믿으며, 신실하고 충성된 모습으로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기도합니다. 두 가지 부류의 기도자가 있겠죠. 일단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결과로 합격시켜주시리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기도 후 하나님이 주시는 당장의 결과에 집중한 좋은 결과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일까요? 혈루증 여인 사건에 빗대어 보자면, 이것은 그냥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수십
명의 모습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들은 ‘에이, 헛수고했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저는 그보다 더 좋은 기도의 태도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당장 이 시험의 결과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시험의 결과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나 능력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보다 크신 계획 속에 내 삶을 이끌고 계심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중요성 여러분. 부자 청년 이야기 기억하시죠? 왜 그가 주님을 따르는 일이 실패하고 돌아갑니까?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 오히려 가진 것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는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냥 너무나도 평탄한 신앙생활의 모습 속에서 단 한 번도 믿음을 발휘하지 않고, 멋진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믿음이 없어도 들통나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평탄했으니까요. 그러나 정작 믿음이 필요한 순간에 그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고 맙니다. 반대가 삭개오 이야기죠. 그는 다른 것은 다 못 믿었어요. 뭐만 믿었어요? 돈. ‘사람도 못 믿어. 나를 배신하지 않는 것은 돈밖에 없어.’ 그런데 정말 그가 예수님과 마주하게 된 그때, 그는 시키지도 않은 결단을
합니다. 예수님이 뭘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스스로 평생 가장 우선순위에 있던 ‘돈’을 내려놓고, 이제 주님이 가장 소중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죠. 마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고향에서는 예수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나오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 가니까 능력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완고함을 예수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대해 예수님이
특별히 무엇을 보태시거나 바꾸거나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성령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과, 신실함에 근거한 우리의 태도. 그것이 있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믿음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가 구원받았음을 믿어’, ‘내가 자녀라는 것을 믿어’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정말 내 삶에 생긴 변화의 흔적입니다. 진짜 믿으셨습니까? 그래서 뭘 포기했죠?
뭐가 달라졌죠? 내 삶이 회심 이전과 이후에 정말 달라졌나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위해 돌아섰나요? 어려움이 와도 이전과 다른 태도로 견디고 있나요? 정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중에도 그분을 끝까지 따르면 거기에 길이 있음을 믿으시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변화를 지켜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회심을 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심을 지켜내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까요. 여전히 내 안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때로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뻔히 죄인 줄 알면서도 내 마음이 그것을 원하니까 하나님보다도 죄를 택하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정말로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충성과 신실함을 갖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는 평탄할 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드러나지 않아요. 문제 앞에서, 요동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진짜가 드러납니다.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믿고 따라가
보시겠습니까? 4.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밭에 감춘 보화 비유를 아시죠? 밭에 감춘 것이 정말 보화라는 믿음과 확신이 없었다면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믿음과 확신은 보화를 보화로 알아볼 수 있는 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의 차이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 안에 같이 있지만, 공동체 안에 같이 있지만... 누군가는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다 내어놔도 아깝지 않을 보화를 날마다 발견하고 있고,
누군가는 아직 그것이 보화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누군가에게는 보화이고, 누군가에게는 보화가 아닌 것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화를 알아볼 수 있는 자와 보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 하나님이 내게 가장 소중한 보화인 사람과 보화가 여전히 세상의 다른 요소인 사람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믿음은 진리를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의 삶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삶에 깊숙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흔적을 봅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나도 그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그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와 도전과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공동체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회심을 돕고 회심을 지켜내기도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도 진리를 배우지만, 성경의 그 진리가 실제화 된 곳이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늘 사람을 살리는 곳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세상의 것도 좋고 예수님도 좋다. 아직 여기까지인 분들도 솔직하게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 자리에서 주저앉지 마십시오. 절대 그것이 믿음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거기서 한 손에 잡은 것을 놓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 믿음을 잘 지키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충성과
신실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갑시다. 때로는 우리도 흐릿한 부분도 있습니다.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과 충성의 대상을 바꾸지는 맙시다. 함께 갑시다. 믿음의 여정. 함께 갑시다. 주님의 나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