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팬인가, 제자인가

2025-02-23 · 누가복음 5~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 팬인가, 제자인가 2011년,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에 의해 출간된 ‘Not a Fa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 ‘팬인가, 제자인가’이죠. 즉,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팬’입니다. 팬클럽 아시죠? 팬은 와서 환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와서 환호하다가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팬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미지를 좋아하고 소비합니다. 카톡 프사로

말씀을 기록하기도 하고, 그것을 보며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좋아해요. 하지만 팬은 예수님 때문에 삶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팬은 예수님을 소비하고 누리고 싶은 것이지 그분께 헌신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와 다른 부류가 ‘제자’입니다. 제자는 와서 환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 주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제자의 특징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으로 수술을 당하고 말씀 앞에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스승이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 변화되어 가며, 그 가치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헌신이라는 표현 앞에 팬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도 헌신해요.” 네. 팬도 헌신하듯 보입니다. 조공도 하고, 굿즈도 사고, 시간과 노력도 쏟지요.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위한 팬질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팬들은 입덕(어떤 대상을 좋아하기 시작함)도 쉽게 하지만,

쉽게 탈덕(더이상 그 대상을 좋아하지 않게 됨)도 합니다. 왜냐면 자신의 기호에 맞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팬은 개인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종교에도 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매력이 있거든요. 예배도 사역도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팬질’하듯이 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생활에 참여함으로 내 불안함을 잠재워주고, 누군가를 동경하고 사랑함으로써 자기만족이 일어날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제자는

다릅니다. 제자는 예수님께 흥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자’입니다. 스승을 관찰하고 모방하며 따라가는 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삶을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시간을 헌신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힘씁니다. 조금이라도 더 닮아가고 따라가고 전수하기 위해 힘씁니다. 그래서 팬은 자기가 하고 싶은 신앙생활을 추구하고, 제자는 자기가 해야 하는 신앙생활을 추구합니다. 트리와 장식에 비유하면, 팬은 자기가 나무가 되어 자기의

관심이 있는 것들을 가져와서 자신을 장식합니다. 거기에 신앙도 있고 예수님도 있는 것입니다. 흥미가 있기에 자기 나무에 걸어놓습니다. 나 이런 흥미가 있다고 보여주고 표출하기도 합니다. 제자는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걸리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뜻과 비전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팬과 예수님의 관계를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받아들일 마음이 없거든요. 예수님을 걸러서 따르다 보면 결국 어느 순간에 따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하여진 인생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버리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팬 활동을 하는 것은 감정, 공감, 취향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반면, 제자도는 인격적인 변화와 실천에 무게를 둡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음악의 팬이라면 음악을 듣고 콘서트에 가는 것에서 만족하겠으나, 내가 어떤 음악적 스승의 제자가 된다면 그 음악을 내 삶으로 연주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시간을 쏟게 되고, 언젠가 내 스승의 뒤를 이어 그 곡을

연주해 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물어봐야겠죠.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팬으로 시작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팬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의 선포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시고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해나갈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사람 세우기’였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사람 안에 세워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역에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자기의 삶에 함께할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부르기 전에 이미 예수님에게는 제법 많은 ‘팬클럽’이 있었습니다. 게네사렛이라고도 불리는 갈릴리 호숫가에 계실 때도 많은 팬들이 예수님 곁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시몬(훗날 베드로라고 불림)의 배에 오르시어 호숫가의 사람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더니 대뜸 그에게 말씀하시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부로 평생 살았던 전문가입니다. 밤새도록 이미 고기잡이를 해봤어요. 허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해요.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내가 전문가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라고 했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 그냥 있는 곳에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어도 귀찮을 텐데, 깊은 곳으로 가라는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저는 결코 베드로의 반응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무슨 마음으로 했는지는 몰라요.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는 신앙의 공식이 있죠. 믿음을 발휘할 기회에 순종하면, 그에 대한 경험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인해 더 어려운 일에도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이 일은 베드로가 교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이런 일에 전문가인데...” 가장 믿음을 발휘하기 힘든 태도입니다. 제자들은 달랐어요. 바로 이 사건 때문에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곁에 있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자기의 삶을 걸고 따를 분이라고 결심하게 됩니다.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이 제자를 한 번에 다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콜링하시는 장면 사이사이 예수님의 사역 장면이나, 유대인과의 논쟁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5장에는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세리로 일하고 있었던 ‘마태’입니다. 여기에는 ‘레위’라고 나오죠. 레위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세리는 그 직업을 통해 얻을

것과 잃는 것이 확실한 직업이었습니다. 우선 얻을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이득입니다. 대신 잃는 것은 동족 유대인들과의 관계입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였으나, 사회적/종교적 소외감이나 죄책감이 세리로 살아가는 이들 안에는 있었습니다. 우리가 친일파도 알지만, 그 삶을 거침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양심이 준동하는 사람은 양심의 소리 앞에 괴로울 수도 있고,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외로움에 공허함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바로 그에게 유대인인

예수님이 다가갑니다. 그리고 대뜸 이렇게 묻습니다. “나를 따르라.” (눅 5:27) 그 뒤에 예수께서 나가셔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눅 5:28)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저는 마태가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이었다고 봐요. 안 그러면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도 삶을 살아봐서 알잖아요. 마태가 돈으로 인생의 만족을 삼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미쳤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다른 사람과 다른 태도로 자신에게 다가와 ‘인격적 초대’를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마태는 새로운 삶을 향해 방향을 전환합니다. 우리가 이 구절만 봤을 때는 ‘갑작스러운 결심’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태 안에는 이미 자기 인생의 방향에 대한 고민, 세리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회의감,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 혹은 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 그 순간, 그는 순종합니다. 누가복음이

보여주는 ‘제자’의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제자는 자기의 삶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가는 장면에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라는 표현이 있었어요. 마태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장면에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가 있습니다. 저는 팬과 제자의 차이가 여기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팬이라면 ‘무례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대상을 버립니다. 탈덕합니다. ‘팬’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어요. 그런 요구를 들으면 예수님을 버립니다. 사실 ‘팬’의

핵심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대상이 꼭 ‘이 사람’은 아니어도 됩니다. 갈아타면 되거든요. 내 마음을 기댈 누군가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차이로 제자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는 태도’가 있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금요 영상설교로 말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진짜로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의미도 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에 준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마음의 왕좌에 예수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상황에 따라, 필요하다면 실제 결단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그 핵심은 ‘내 삶을 주도하던 욕심을 내려놓는 태도’에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지’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장면은, 팬에서 제자로 넘어가는 극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취향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바꾸고, 일부만이 아니라 전부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오늘날에도 “나는 과연 팬인가,

제자인가?”를 묻는다면, 핵심은 바로 ‘내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들마저도 예수님을 위해 내려놓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된 것이죠. 믿음은 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데 하늘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요소가 아닙니다. 제자들의 모습과 같이 내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을 위해서 다른 것도 버리고 따를 수 있는 결단이 있을 때, 그것이 “믿음을 보았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믿는 것’과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동의어였습니다. 저는 팬은 ‘관심’을 가진 것이고, 제자가 ‘믿음’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 ‘카일 아이들먼’도 그렇고 이렇게 구분 지어 설명하는 것은 급을 나누거나 정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칫 팬인 상태가 ‘끝’이라고 생각할까봐 입니다. 아직 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팬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팬에서 제자가 되는 이야기, 어쩌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한순간의 결단이 아닙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들어선 것이지, 제자가 되었다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것은 예수의 길을 가보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결단하는 그 시점이 ‘제자로의 시작점’이고, 그 후로도 넘어지고 실패하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스승을 끝까지 따르면,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제자로 살면 넘어지고 실패하기도 하지만, 팬으로 살면

실패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팬은 편합니다. 제자는 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 ‘좁은 길’이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신앙적 고민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할 것이니까요. 자꾸 나에게 뭘 요구하면 떠나면 그만이니까요. 성경의 인물 중 부자 청년이 ‘팬’의 대표적 인물이죠. 예수님을 존경하고 관심을 가졌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헌신하라는 요구 앞에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니고데모도

‘팬’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공개적으로 따르는 결단을 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고민하다가 ‘팬’에서 ‘제자’로 나아갑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이유입니다. 니고데모도 진리를 듣고 한 번에 소화하지 못했지만, 그가 제자로 나아가게 되었으니까요. 말씀을 배우고 결단하여 ‘팬’에서 ‘제자’가 될 때, 하나님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잔치를 여시는 분입니다. 2. 제자도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 6: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눅 6: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눅 6: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보게 돼요. 왜 굳이

12명만 제자로 뽑았을까? 물론 ‘제자’라는 호칭 안에는 12명만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특별히 사도라고 부르죠. 우선 12명을 세운 것은 구약 12지파의 상징성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구성하는 일을 하고자 12명을 부르신 것입니다. 또한 언어로 가르치는 것은 수많은 무리에게도 가능하지만, 삶을 나누며 전수하기 위해서는 아주 가까운 소그룹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과 삶을 함께하며 전수하였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곧 예수님의 부활 후 초대교회의 리더들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교회의 초기 리더들을 세워서 양육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방식에는 특징이 있는데, 우선 그분은 ‘깊고 좁게’ 집중하여 가르칩니다. ‘씨 뿌리는 비유’나 ‘작은 누룩 비유’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나님 나라는 ‘작은 시작’에서 확장되어 큰 열매를 맺습니다. 열두 명이라는 소수를 통하여 훗날 복음이 확장되는 것을 예수님은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소그룹 목회를 연구할 때도,

모이는 인원을 적정선을 최대 12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니까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어요. 우리는 많으면 10명 정도가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내게 형성되어 간다면 그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어떤 평지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많은 사람과도 할 수 있는

일이죠. 그곳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또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의 말씀을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이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 버금가는 제자도의 핵심 말씀, 토대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 매뉴얼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세우신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요구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제자도의 핵심 지침입니다. 20 예수님이 눈을 들어 제자들을 바라보시고는 말씀하셨다. 복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 나라이니까요. 21 복 있습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배부르게 될 테니까요. 복 있습니다, 지금 우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웃게 될 테니까요. 22 복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미워할 때, 여러분을 따돌릴 때, 비방할 때, 여러분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는요! 인자 때문에 말입니다! 23 바로 그날에는 기뻐하며 춤추세요. 보세요, 하늘에서 여러분의 보상이 크니까요.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똑같이 해 왔거든요.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핍박받는 자.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세요. 우리가 이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복이 있다고 여겨지겠어요. 그런데 왜 이들이 복이 있는지 아십니까? 가난, 굶주림, 울음, 핍박 자체가 복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이 되는 이유는, 주를 따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것들을 겪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자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사느라 나누기에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며 씨를 뿌리고, 주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므로 ‘복’입니다. 세상에서는 ‘부요한 자, 즐거운 자, 칭찬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뭐라고 가르칩니까? ‘화’라고 가르칩니다.

새한글은 ‘끝장’이라고 번역합니다. 24 그러나 끝장이오, 당신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당신들이 이미 위로를 넉넉히 받아 누리고 있으니까요. 25 끝장이오, 당신들에게는! 지금 배부른 사람들! 당신들이 굶주리게 될 테니까요. 끝장이오, 지금 웃는 사람들! 당신들이 슬퍼하고 울게 될 테니까요. 26 끝장이오, 당신들을 두고 모든 사람들이 좋은 말을 해 줄 때는요!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꼭 이같이 하곤 했거든요.”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화’인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바로 그것이 제자의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에게 행복이란 보통 물질적 풍요, 성공, 안전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행복하지 않지.” “내가 성공하지 못했으니 행복하지 않지.” “내가 안전하지 않고 불안하니 행복하지 않지.” 그런데 어느 정도의 부가 있으면 우리가 누구를 봐도 비교하여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까요? 어느 정도로

성공하면 누구를 봐도 비교하여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까요? 어느 정도로 안전하면 우리의 불안함이 모두 극복되어 행복할까요? 예수님은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을 행복을 쫓다가 오히려 더 큰 불행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행복이 세상의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부를 쫓고, 성공을 쫓고, 안전을 쫓다 보면 그만큼 여러분이 쫓지 못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제자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습대로 살면서 제자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라는 그 고백처럼, 이전과 다른 삶의 모습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을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내어주고, 연약한 자를 돕기 위해 힘쓰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는 삶이 오히려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삶이 나를 성공하게 하기 위한 삶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성공하게 해 주기 위해 힘쓰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의 삶이잖아요. 예수님이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서 하신 일이 뭐가 있나요?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 앞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한 행동을 다 거부하십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여 다른 사람을 회복시켰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실 정도로, 세상의 안락이나 물질적 유익을 누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 할 때, 곧바로 피하셨습니다. 제자라면

스승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죠. 예수님은 늘 타인의 성공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타인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의 회복을 돕고,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나로 인하여 누군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필요가 아니라 타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이 제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와서 타인의 어떤 부분이 회복되거나 온전해질 수 있다면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며,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어 새로운 소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제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원하는 삶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참된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27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세요.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세요. 28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주세요. 여러분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29 그대의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쪽 뺨도

대어 주세요. 그대의 겉옷을 가져가는 사람에게는 통옷도 마다하지 마세요. 30 그대에게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라도 주세요. 또 그대의 것을 가져가는 사람한테, 돌려 달라고 하지 마세요. 31 남들이 해 주기를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똑같이 남들에게 해 주세요. 32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여러분이 사랑한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칭찬감이 되겠어요? 죄인들도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거든요. 33 여러분에게 좋은 일을 해 주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좋은 일을 해 준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칭찬감이 되겠어요? 죄인들도 바로 그렇게 합니다. 34 여러분이 무엇이든 돌려받을 것을 바라면서 빌려준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칭찬감이 되겠어요? 죄인들도 죄인들에게 빌려준 만큼 되돌려받을 생각으로 빌려줍니다. 35 여러분은 오히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세요. 좋은 일을 해 주세요. 아무것도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빌려주세요. 그러면 큰 보상이 여러분에게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딸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악한 사람들에게도 너그러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6 마음 따뜻한 사람이 되세요. 여러분의 아버지도 마음 따뜻한 분이신 것처럼요.” ‘판단과 정죄의 태도에 대하여’ 37 “남을 심판하지 마세요. 그러면 여러분도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죄 있다고 판결하지 마세요. 그러면 여러분도 죄 있다고 판결받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용서해 주세요. 그러면 여러분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38 남에게 베푸세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누르고 흔들어 차고 넘치게 여러분 품에 부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갖다 대는 잣대를 거꾸로 여러분에게도 갖다 대실 테니까요.” 41 왜 그대는 형제자매의 눈 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 안에 있는 나무 막대는 알아채지 못합니까? 42 어떻게 그대가 형제자매에게 ‘그대! 가만있어요. 그대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빼 줄게요.’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대의 눈 속에 있는 나무 막대는 보지를 못하면서요. 겉 다르고 속 다른 그대,

먼저 그대의 눈에서 나무 막대를 빼 버리세요! 그러면 그때에 똑똑히 보고 형제자매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예수님의 삶을 기억해 보세요.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지 묵상해 보세요. 지금 이곳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그분은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늘 이렇게 성경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지 않기에 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해니까요. 어려우니까요.

그러나 제자는 어려워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6장 마지막은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행함의 열매’를 보고 우리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삶은 제자가 아닙니다. 둘째, 말씀을 실행하는 삶은 바위 위에 지은 집이고,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흙 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입니다. 무너진다는 것이죠. 말씀을 듣지만, 그에 대한 반응으로써

전혀 다른 삶으로 구별이 된다는 강조점입니다. 팬과 제자의 차이가 그와 같습니다. 팬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박수를 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따라서 살 생각도 못 합니다. 저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선을 긋고 회피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스승의 모습을 보고 따라 살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삶에서 스승을 닮아갑니다. ‘몸부림’이라는 단어를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는 간혹 제자가 완성품으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제자도는 지금

당장 완벽하게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 예수를 따르기로 진실한 결단을 했기에 계속 일어서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니 기어서라도 따라가겠다는 몸부림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내 삶에 어떻게든 담아내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진짜이고, 그 삶이 진짜라면 제자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열매 하나가 맺기 위해서라도 1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나는 열매가 없네” 하며 좌절하기보다, “나도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나아가십시오. 바로 그 믿음의 결단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 애쓰지만, 결국 제자의 길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의 순종 위에 은혜로 역사하실 것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의 여정에서 ‘팬’의 모습과 ‘제자’의 모습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와서 구경하는 팬’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함께 동역하는 제자’로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마주한 오늘,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태도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솔직히 돌아보길 바랍니다. 단순히 소비자로서 즐기는 ‘팬’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진지하게 배우고 따라가는 ‘제자’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첫째, 작은 것부터 순종해 봅시다. 베드로처럼, 말도 안 된다 싶어도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는 결단을 내려보십시오. 그 작은 순종에 담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경험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스승의 삶을 자주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타인을 살리는 삶에 전부를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내 상황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실지를 떠올리며, 한 걸음씩 따라가 보십시오. 셋째,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십시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완벽해지는 게 아니라, 넘어져도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점점 스승을 닮게 됩니다. 결국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눅

6:44)는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은 행동과 삶의 변화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흘려보내는 팬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실행하는 제자도의 길에 초대받으셨습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도 이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나는 과연 팬인가, 제자인가?”를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베드로처럼 다시 한번 그물을 던져보십시오. 내게 손 내미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함께 걸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결단 위에 역사하셔서, 성령으로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