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교회가 지키는 달력인데, 교회력에 따라 절기의 날짜가 정해집니다. 예를 들어,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등은 매년 차이가 있죠. 성탄절처럼 날짜가 변하지 않는 교회력도 있습니다. 오늘이 교회력에 따르면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제가 블로그에 주중에 글을 하나 썼습니다. <맥추감사주일은 어떤 날인가?>라는 글인데, 작성 4일 만에 조회가 2000건이 넘더라고요. 그만큼 맥추감사주일이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어떤 날인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싶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맥추감사주일’은 성경의 ‘맥추절/칠칠절/오순절’과는 날짜로 보자면 다른 날입니다. 한글성경에 ‘맥추절’이라고 기록한 이스라엘의 절기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밀에 대한 첫 수확’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보리 추수’를 의미하는 ‘맥추절’이 되었는가? 한국에서는 ‘보리’가 가장 먼저 추수하는 농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밀 추수를 기념하는 성경의 맥추절은 5월이지만, 한국의
보리 추수는 6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미로 보자면 처음 추수한 것에 대해 감사를 돌린다는 점에서 같지만, 엄밀히 말해서 한국교회가 지키는 맥추감사절은 성경의 맥추절을 한국의 환경에 맞게 변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지키는 맥추절을 다른 표현으로 칠칠절/오순절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의 ‘칠칠절’이 유월절로부터 50일이 지난 날을 가리키는데, 이날이 마침 맥추절과 겹치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표현으로는 이날을 50일째를 의미하는 ‘오순절’이라고 불렀고, 이때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사건이 있었기에, 맥추절/칠칠절/오순절/성령강림절이 모두 같은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리 추수를 기점으로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며, 우리에게는 맥추감사주일보다 앞서 5월에 오순절(성령강림주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개념에 대한 설명은 드렸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럼 우리에게 있어서 ‘이날의 의미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입니다. 여러분도 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상의 생일이 다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생일을 어떤
의미로 기억하고 보내는지가 더 중요하겠죠. 맥추절이나 맥추감사주일이나 모두 삶의 배경이 ‘농경사회’일 때입니다. 농경사회 이전의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았죠? 광야의 유목민인 시절에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하나님이 공급하셨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분이 있나요? 그럼 만나가 언제까지 내리는지 알고 계십니까?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까지요?”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농사를 시작해서 첫 수확물을
거둔 다음 날, 만나가 그칩니다. (수 5: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한 후로는 이제 일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땅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기에 이제 땅의 소산물을 통해 이스라엘을 공급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먹이시는 방식을 바꾸신 것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소산물을 받으면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그것을 감사로 기념하며 예배했던 것입니다. 다시 시대가 변하여, 농경사회가 산업사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의 소출을 통해서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 일한 대가로 월급 혹은 다양한 형태의 재정적 수입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 하나님은 농경사회 이후로는 은퇴하고 쉬고 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지키시고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철저하게 그 마음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고 계시며, 내 삶을 지켜주시며, 나로 하여금 경제활동을 통해서 생활을 해나가도록 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믿고 있다는 징표로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드리며, 양과 소나 땅의 소출로 예배했던 믿음의 조상들처럼 우리도 예배하는 것입니다. 저는 늘 하나님의 주되심은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진짜 우리의 삶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면, 우리의 삶의 실제적인 부분들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시간, 물질, 에너지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입니다. 이것을 제가 법으로 정하여 이렇게 하라고 하면 율법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주되심을 가르치고 그것에 대한 각 사람의 믿음으로 일어난 변화는 신자로서의 순종이 됩니다. 저는
하나님이 가르치신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여러분과 그 삶을 함께 살자고 말하며 나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광야에 있지 않지만, 농경사회가 아니지만, 지금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신실함’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절기를 가르치고 예배를 가르치신 것이 우리를 괴롭히려고 우리를 근심케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신 것은 그것에 순종하는 우리의 삶이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백하듯 예배는 우리의 특권이고, 헌신은 우리의 특권이고, 사실 헌금도 우리의 특권입니다. 우리만 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만 기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저의 이런 이야기가 여전히 부담이고, 또 싫을 수 있습니다. 헌금에 대한 가르침은 늘 가르치는 자에게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대해서 당당하게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헌금과, 이방 선교를 위한 자신의 사역에 물질로 후원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성장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들의 반응이 두려워 이것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면 직무유기라고 생각합니다. 헌금생활, 십일조 등은 사실 신자가 훈련해야 할 재정의 첫 번째 기본원칙이고,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재정의 주인이 하나님이 될 때, 정말로 우리가 청지기가 될 때, 사탄이 여러분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말 주되심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 물질을 통한 유혹은 늘 여러분을 향하여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닮고 싶은 신앙의 선배 가운데, 이 부분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가지는 꼭 약속하겠습니다. 저도 제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주님의 뜻 안에서 사용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에 여러분이 꼭 저와 같은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로마서 마지막 설교의
본문 주제도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로마서의 진리, 그 복음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실제적인 삶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 달 동안 다룬 로마서의 복음이 정말로 나에게 일어난 일임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밖에서 살아가던 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존재로 접붙임 되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런 믿음이 정말 있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실제적인 변화들이 동반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로마서
12장에 대한 <매일성경 해설서>의 배경이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에서 신자의 삶은 두 영역 설명 틀을 전제로 ‘이미와 아직’의 과도기와 이중 정체성을 배경으로 설명한다. 신자는 이전에 어둠의 영역에 속해 있었지만,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옮겨와 하나님/예수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자다. 그러나 아직 구원의 완성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구원 영역에 속한 자이지만, 여전히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다. 그렇기에 신자 삶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세상에 대응하며 사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이 예전에는 이런 글을 읽으면 “뭔 말이야?” 했을지도 모르나, 이제는 아마도 선명하게 이 글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하나님 나라의 도표가 정확하게 이것을 보여줍니다. 개개인의 삶에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여러분이 속하게 된 순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을 주인이 바뀌고, 여러분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육체는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 안과 밖이 모두 어둠이기에 불편함도 없고 이질감도 없었으나, 이제는 내 안이 어둠에서 빛으로 변했기에, 부딪힘이 생깁니다. 부대낌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안과 밖이 같은 가치관 안에 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안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있고, 밖에서 나에게 날마다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가 있습니다. 금요일이 되면, 안에서는 예배하러 오라고 하는데, 밖에서는 친구, 가족, 애인이 나를 부릅니다.
주일에도 안에서는 하나님이 교제하자고 하는데, 밖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것이 나를 부릅니다. 때로는 직장이 부르고, 때로는 사람이 부르고, 때로는 잠이 나를 부릅니다. 예수 안 믿으면 차라리 편하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편안함이란 어두움에서 어둠과 벗하여 살아가는 편안함이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평안’은 없습니다. 세상의 편안과 주님의 평안은 다른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의 가사 가운데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신의 편안 버리고 우리게 평안 주셨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사망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고, 우리를 어둠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 살게 할 수 있습니다. 그 평안을 주시려고 예수님은 오셨고, 그렇게 사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렇다면, 이제 이곳에 있는 우리가 ‘회심’을 했고, ‘주되심’을 고백한다면, ‘주님이 가르치는 방향으로’ 삶도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돈을 좋아하고, 세상 것을 추구하고, 본능에 충실한 것은 당연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왜 그것을 거슬러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이길 힘도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릅니다. 달라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내 존재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존재를 주님이 십자가 보혈로 나를 죄로부터 건져오셨고, 이제 나를 주님의 것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결혼만 하더라도 내 소속이 바뀌었기에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바뀌는데, 주님께 소속된 우리가 여전히 그전과 같은 삶을 산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의 알리라’고 표현합니다. 내 존재가 바뀌었는지는 나에게서 나오는 열매를 보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열매가 대단하지 않을 수 있고,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속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안에 진심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따른다고 다짐했다고 말하면서, 주님이 명하신 것을 따를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복음에 관해서
설명한 것처럼, 정말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금요설교를 요약하면서 표현했지만, Being(존재의 변화)이 바뀌었으므로 우리의 Doing(삶의 변화)이 바뀌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사실 세상의 종교들은 다 인본주의적입니다. 내가 어떤 깨달음의 반열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고, 많은 종교가 고행과 수행과 특별한 어떤 행위를 통하여 존재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나’에게는 ‘가망 없음’입니다. 나의 힘으로 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죽은 나의 존재가 접붙임 받아 생명을 얻은 새로운 존재로 바뀌었으므로, 이제 열매 맺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면 열매 맺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달라졌으므로,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삶의 모습이 주님께 영광이 되기에 우리의 삶도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롬 12:1)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롬 12: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새로운 존재 안에 먼저 변화된 특성은 이제 더 이상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새번역의 표현대로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주되심의 문제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어떠함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나에게 중요한 것이 생겼습니다. 이제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때로는 자연스럽지만 때로는 결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적 관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사랑이 막 쏟아질 때도 있지만, 그것이 되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기억하며 서로의 특별한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헌신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을 때만 서로를 위해 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면, 그것은 언약적 관계에 신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도 그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스러울 때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떠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도 날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나올 때도 있죠.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추구하기로 나는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신실함입니다. 신실함은 곧 믿음이죠. 신실한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로마서
설교 중에 이야기했지만, 사탄은 아직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여러분을 다시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를 여러 방법으로 유혹하고 속입니다. 아직 우리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매우 실천적인 삶의 방식은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선 세상의 소리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직감적인 것에 먼저 반응하기에, 내 마음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내 귀에 들리는
세상의 소리가 더 빨리 들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위해서는, 우선 세상의 소리를 걸러서 버린 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라.’ 이런 이야기를 이제 듣는다면,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물어야 합니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주님이
만약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을 외면했다면, 과연 우리에게 기회는 있었겠는가? 그럼 그렇게 긍휼과 사랑으로 행하신 주님께서 살려주신 나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교회는 사람 보고 오는 게 아니다’, ‘사람 믿지 마라, 사람 안 변한다더라’, ‘교회에서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고, 너무 멀리 지내지 말라’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그것인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뜻과 성경의 가르침이 서로 다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성령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과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20대에 DTS라는 예수전도단에서 하는 훈련을 받았는데, ‘예수제자훈련학교’입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토대라면, DTS 영성의 토대는 ‘하나님 음성 듣는 삶’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이 소위 ‘음성 듣는 법’을 배우러 DTS를 가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기대를 갖고 6개월의 시간을 헌신하여 제주도와 몽골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도 그곳에서 함께 훈련받은 동기입니다. 그럼, 제가 DTS에서 ‘하나님 음성 듣는 법’을 마스터했을까요? 못했을까요? 했습니다. 저는 정확히 마스터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제가 수백만 원과 6개월의 시간 동안 청춘을 헌신하며 배운 그 비법을 알려드릴게요. 첫째, 하나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마음에 주신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찾아오면 반드시 분별하여 듣는다. (분별법 : 지속성, 평안함, 성경과 일치) 셋째, 분별한 말씀에 대하여 믿고 순종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면 안 될 것 같지만, 막상 따르기로 결정하면 마음에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분별을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이 내게 주시는 음성처럼
다가올 때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로고스가 레마가 된다’고 표현합니다. 로고스는 기록된 글자로서의 말씀입니다. 레마는 들리는 음성으로서의 말씀입니다. 글자가 내게 주시는 음성이 되는 순간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저에게 말합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은 너무 저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어요.’ 그런데 어떤 주간에는 한두 명이 아니라 몇 명이 저에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저는 도대체 누구를 염두하고 말씀을 전했을까요? 저는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도
듣고 전했을 뿐입니다. 다만 성령께서 그것을 각 사람에게 말씀하여 주시기 때문에,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습니다. 다만 여러분을 찔리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저를 의심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그저 늘 저에게 맡기신 말씀에 충실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처럼 다가왔다면, 이제 그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중에 성령님은 무엇을 하실까요?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삶은 말씀과 가까이하는 삶입니다. 예배와 가까이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적 욕구 충족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충만하게 받들어 순종하며 내 삶 속에서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자주 이야기하던 것이 있었는데, “내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꼭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습과 태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나오는 그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질 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시절 활동했던 동아리가 기독교 합창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컨티넬탈 싱어즈’ 찬양을 많이 했었는데, 그중에 제가 참 좋아하던 곡이 ‘창문’이라는 곡이 있었습니다. 2001년에 나온
곡이니, 벌써 20년도 넘었네요. 가사가 이렇습니다. 어둠의 사람과 주님 사이 벽이 서 있네 사단의 거짓으로 세워진 벽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둠을 물리치네 우리가 그 벽의 창문이 될 때 우린 창문 우릴 통해 세상이 예수를 보네 우리를 부르셨네 우린 창문 우릴 열어 그 사랑 세상에 전해 그의 빛을 밝게 비추리 우린 창문 세상을 향한 어딘가 슬픔 속에서 한 아이는 울고 어딘가 어둠 속에 형제가 있고 어딘가 영원히 햇빛을 못 볼 자매도 있네 우리는
빛을 그들 마음에 전해 우린 창문 우릴 통해 세상이 예수를 보네 우리를 부르셨네 우린 창문 우릴 열어 그 사랑 세상에 전해 그의 빛을 밝게 비추리 우린 창문 세상을 향한 모든 외로운 영혼 공허한 마음 상한 감정 가지고 우리를 통해 예수를 볼 때 그들은 찾으리 우리는 창문 우릴 통해 세상이 예수를 보네 우리를 부르셨네 우린 창문 우릴 열어 그 사랑 세상에 전해 그의 빛을 밝게 비추리 우린 창문 세상을 위한 우릴 통해 세상이 예수를 보네 사실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은 그냥 이 찬양이 담아내는 원리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먼저 회복된 빛이 되었다면, 이제는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창문이 되어 우리 그들이 우릴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삶 말입니다. 그때 우리를 통해, 슬픔 속에서 울고 있는 아이나, 어둠 속에 있는 형제나, 어쩌면 영원히 어둠의 그늘 아래 있었을 자매나... 모든 외로운 영혼 공허하고 상한 감정 속에 깨어진 삶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회복된 삶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하는 것처럼, 복음은 여러분을 살리고, 여러분에게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복음의 종착지가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정류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예배로 드리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선 예수님 안에서 한 몸 된 교회가 함께 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하고,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뽐내기 위함이 아니라 섬겨서 온전한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 (롬 1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할 것이요, (롬 12:7)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롬 12:8)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쓸
것이요, 나누어 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마다 은사가 다릅니다. 새번역은 은사를 아예 ‘선물’이라고 번역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각기 주신 것이 다릅니다. 몸의 기능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저에게 가르치는 은사가 있음을 알아요. 저는 그것으로 여러분을 지금도 섬기는 것이죠. 그런데 저에게도 남들보다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 중에 교회를 정말 잘 돌보는 분들도 있고요. 또 음식을 잘 만들어서 여기저기 나누고 섬기시는 분들도 있고요. 남을 재미있게 해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은사가 있는데 ‘참여’의 은사가 있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츤데레’의 은사가 있어서 표정만 보면 절대 안 올 것 같고, 협조하지 않을 것 같은데, 늘 와서 봉사하고 섬기고 말로는
'아멘'을 안 하는데 몸으로는 '아멘'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내게 주신 힘으로 서로를 섬기며, 주님의 몸을 아름답게 세워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롬 12: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롬 12:16)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롬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우리가 공동체의 지체들을 각기 은사로 섬기는 일은 ‘1단계’입니다. 하나님이 그다음 우릴
통해서 기대하시는 ‘2단계’는 우리에게 그렇게 좋지 않은 관계들에 대한 것입니다. 나를 박해하는 사람, 나와 격이 맞지 않는 비천한 사람, 나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 같은 사람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과도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한 번에 이걸 할 수는 없죠. 그러나 우리는 나와 친밀한 사람들과 사귐에만 힘쓰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경우에 대해서 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하나님의 음성 듣는
삶에 관해서 이야기했지만, 음성 듣는 삶에 순종할 때 우리가 항상 쉽고 기쁘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적 신실함에 대한 이야기처럼 ‘결단’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고전 9: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갈 5:2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때로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키는 것이고, 내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왜 ‘기도’를 우리에게 주셨는지 아시나요? 기도는 내 욕망을 이뤄달라고 요청하는 통로가 아닙니다. 사실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미워죽겠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보셨나요? 기도가 되던가요? 기도 안 됩니다. “하나님, 저놈을 죽여주세요.” 이게 솔직한 기도입니다. 이 마음이 들면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마음은 죽이고 싶은데 거짓말로 선하게 기도하는 것도 위선이죠. 처음에는 저주하고 욕하고 해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도 그렇게 해야죠. 그런데 계속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내 기도를 조금씩 바꾸어 가십니다. 그래서
저주로 시작한 기도도 하나님이 기도 중에 내게 말씀하시며, 그것을 그 사람을 향한 긍휼함으로,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위한 중보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기도 안하고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선함으로 누군가를 품고, 누군가를 용서하겠습니까? 신앙은 “나는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주인 되시고, 내게 명하시므로 제가 하겠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주인의 명령을 종이 다 거부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종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주되심은 개념이 아니라 내 삶의 실제적인
행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과정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와 행함으로 나아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안 바뀔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안에서 내가 바뀝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나를 변화시키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를 얻는가? 그렇지 않아요. 내 존재 자체가 복음인 삶을 살아도 여러분에게 찾아오는 것이 여전한 박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삶 속에서
사실 하나님은 나를 바꾸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12~15장까지는 이러한 신앙의 원리에 서서 우리가 변화된 삶으로 감당해야 하는 여러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13장에서 나오는 ‘권위에 대한 복종’은 모든 권위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임을 인정하며 따르는 주되심의 문제입니다. 내가 속한 국가 및 공동체 안에서의 질서에 대한 수용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권위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명백하게 어긋났다고 여길 때, 우리는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독일의 나치 체제에 대항하여 히틀러 암살에도 가담했던 본회퍼 목사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그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되심’으로 분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되심의 영역은 나 자신에 대한 것, 이웃에 대한 것, 세상의 대한 것 등 모든 영역에 확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깊고 보편적인 메시지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롬
13:9)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결국 하나님의 모든 통치의 핵심은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웃을 사랑하는 기준은 ‘나를 사랑하듯’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단순히 사랑하는 기계요 통로가 되기 이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 치유되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로마서 13장의 이
말씀을 참 좋아하는데요.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이 이야기는 바꿔 말하면, 우리는 ‘사랑의 빚’은 지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다른 사람에게 값없이 제 사랑을 내어주어 누군가가 저에게 사랑의 빚진 자가 되도록 하며 살고 싶습니다. 모든 자녀가 부모로부터 내리사랑을 받고, 사실 그 사랑은 내 부모에게 다 갚지는 못합니다.
부모도 그것을 다 돌려받으려고 사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또 자녀에게 내리사랑을 하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 하나님 안에서 받은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 내리사랑으로 흘려보내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기준에 근거하여 로마서 14장은 서로를 판단하고 비판하기보다 이해하고 용납할 것을 말하고 있고, 15장은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고 그 약점을 감당해줄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서로를 판단하고 비판하기보다 하나님의 주되심 안에,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므로 세워져 가고, 이 안에서 작동되어야 할 기준은 신앙 안에서의 성숙함과 미성숙함에 대한 이해입니다. 특별히 성숙한 신앙을 가진 분들이라면, 아직 연약한 사람들을 잘 품고 성장을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갈등 속에 있는 교회에게, 그 갈등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한 목적도
더하여 로마서를 썼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삶에서 실천된다면 그 사람의 삶과 그 사람의 공동체는 아름다울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곳은 정말 세상에 없는 공동체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며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롬 15: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롬 15: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우리의 뜻이 같게 되는 유일한 힘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함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은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창문이 될 것입니다. 이 창문은 우리가 삶 속에서 보이는 순종으로 열리게 됩니다. 나를 내어주는
것이죠. 저는 매일매일 우리의 창이 세상을 향해 열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로고스가 레마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