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복음의 핵심 : 주 되심" / 강정규 목사

2023-06-18 · 로마서 5-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부 설교 중 서론 부분 영상 (2부 설교시 생략된 부분) 저희가 최근에 ‘새가족 환영회’를 두 번째로 진행했습니다. 이번에 진행팀에서 오신 분들에게 몇 가지 설문을 했는데, 이 내용이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새가족 설문 : 참여 (20명) 1. 오게 된 경로 1) 지인 소개7 2) 인터넷 검색4 3) 간판1 4) 유튜브 설교4 5) 기타 (현장 참여3, 부모님 따라2, 외부의 지인이 추천1) 2. 등록을 결정한 이유 (중복

선택 가능) 말씀이 좋아서19 2) 분위기가 좋아서12 3) 가까워서3 4) 젊은교회라서3 5) 기타2 3. 다니면서 가장 좋은 점 말씀9 / 교제(사랑)9 / 분위기8 / 참된 삶3 / 사역 강요 없음1 / 성장1 / 자유로움1 / 풋풋함1 4. 적응하기 어려운 점 공동체에 진입4 / 무엇이든 함께함2 / 무엇이든 진심1 / 주차1 / 어떻게 날마다 감동을 주는지?1 / 학적인 분위기1 5.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의 이해가 깊어짐8 /

교제(사랑)5 / 영의 회복3 / 섬김의 공동체2 / 뜨개질1 / 다양한 행사1 / 양육1 / 무직분1 / 나눔1 / 모두 새롭다1 내용들 속에서 그래도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고, 목회자로서 더 고민해야겠다고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 설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에 오는 분들이 등록하게 되는 가장 큰 동인이 ‘말씀’이라면, 우리가 이 공동체에서 회복하고 성장하는 데는 ‘말씀 +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말씀을 통해 성장하는

것에 있어서도, 공동체 안에서 그 말씀을 다시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실 우리교회의 힘은 말씀을 끊임없이 붙들고 살고자 하는 것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 이번 주가 신대원 마지막 강의였고 주제가 ‘설교’였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던졌던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설교를 전하고 나면 끝인가?’ 많은 사람들이 전하는 것까지를 역할로 봅니다. 그러나 저는 목양자입니다. 저는 제가 설교를 전하는 것까지가 끝이 아니라, 그 설교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에 대한 나눔을 하며 소화해내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도 ‘좋았다’라는 느낌으로 끝나버리면 삶은 그대로 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 중 많은 분들이 설교를 ‘다시 듣기’ 합니다. 저조차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를 한주에 2~3번, 어떤 분은 5번씩 다시 듣는다고도 합니다. 이 정도면 씹어 먹겠다는 것이죠. 설교를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떠나서, 내가 받은 말씀을 얼마나 깊이 상고하는가?

이것이 여러분의 삶을 지켜줄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 설교 시간에 정말 잘 듣고 잘 이해하시는 분이, 제가 전하고자 하는 바의 70% 정도를 한 번에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듣고 싶은 것 위주로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한 번 더 설교를 들으면, 못 들었던 것이 들립니다. 그렇게 이해의 깊이가 깊어집니다. 저도 저에게 맡겨진 ‘말씀 선포’의 사명 앞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러분을 만족시키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아마도 제가 전하는 설교의 어떤 부분은 여러분도 저도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바르고 성실하게 나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약속입니다. 저는 오늘 1시간 동안 복음을 최선을 다해 설명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도 약속해주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의 시간에 잘 듣고, 이것을 삶으로 가져가 삶 속에서 묵상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다시

듣고, 말씀을 붙잡고 살려는 노력입니다. (행 17:11)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이것이 사도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말씀이 삶 속에서 역사하는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시도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것이 삶이 되도록 하는 노력 말입니다. 물론 바울이 설교를 할

때도, 졸려서 졸다가 떨어진 사람도 있고, 바울이 너무 설교를 못 한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놀랍죠? (고후 10:10)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가족 환영회 때, 누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설교 시간에 조는 성도 괜찮나요?” 그날 오신 분은 들으셨겠지만, 제 대답은 ‘누구냐에 따라 다르다’였습니다. 한 번씩 어쩌다 졸

수도 있죠. 그런데 그게 반복되는 사람이 ‘교회의 리더’이면, 저는 불러서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직 초신자이거나, 자라가는 단계에 있다면, 와서 졸아도 예쁩니다. 피곤하다고 안오는 것보다 와서 조는 것도 그가 하는 최선의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신앙이 성숙해간다는 것은 주일을 준비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위해서 토요일 밤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중요합니다. 특별한 사역 때문이 아니라면, 저는 토요일에 밤늦게까지 교회에 있으면 집에 부지런히

보냅니다. 주일 준비는 토요일 저녁부터 사실 시작하는 것이죠. 좋은 컨디션으로 주일을 보내기 위한 노력도 저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주일에 대한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이 소중한 예배를 여러분이 잘 지키셔야 합니다. 우리의 설교를 우리가 살아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자 선교여행을 합니다. 그러나 결코 복음을 선포만 하고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항상

다음 선교를 할 때, 그전에 복음이 선포된 곳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목양자라는 증거겠죠. 말씀 선포만 하고 끝! 이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성장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돌보는 것 말입니다. 저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사역 속에서도 그러겠지만, 이 설교 속에서도 여러분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오늘이 로마서 3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두 편의 내용이 잘 연결되시나요? 솔직히 말해서 로마서가 내용을

연결해서 읽기에 쉽지 않습니다. 반복과 심화가 필요해요. 우리가 로마서를 보면서 계속 시도해야 할 것이 로마서가 하나의 편지로 기록되었음을 이해하며 읽는 것입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는 것처럼, 로마서도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연결해서 이해할 때, 비로소 바울이 이 편지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가 드러나죠. 우리는 로마서 첫 설교를 통해 로마서의 배경과 로마서 1장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지난 설교에서는 다시 로마서 1장부터 연결해서 5장까지를

큰 틀에서 나눴습니다. 오늘도 앞 부분의 내용을 짚으며 연결하여 8장까지의 내용을 보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로마교회는 바울과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성도들입니다. 오순절에 회심한 사람들이 로마로 돌아가서 교회를 이뤘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지금 유대인 그룹과 이방인 그룹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교회를 세웠으나, 5년 정도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상황인데, 그 사이에 로마교회 공동체는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적 가르침이 아닌,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앙 공동체로 분위기가 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돌아와 교회가 이상하게 변했다고 느끼는 상황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죠. 로마제국의 심장에 있고,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새로운 교두보가 되어줘야 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자신을 소개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믿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서두부터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첫 설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종교개혁 이후로 대다수 개신교인은 복음의 핵심을 ‘십자가 속죄’, 즉 우리가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것, 이신칭의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이신칭의 복음 자체가 그 초점이 ‘내가 의인이 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게 된 것’은 그 복음의 결과 중 하나이지, 내가 살게 되었으니 ‘좋은 소식이다’ 말한다면, 말 그대로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가장 먼저 그 이야기를 편지 첫 부분에 담는 것입니다. (롬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롬 1:3)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롬 1:4)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인데, 이 복음은 구약에서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복음’이라는 단어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익숙한 단어입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복음은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만큼은 진짜 복음은 구약부터 약속한 메시아에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심 유대인들은 그 메시아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그런 통치자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지금 로마제국 아래에서는 황제에게 복음이라는 표현을 어쩔 수 없이 쓰지만, 유대인이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구나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갈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메시아가 그들에게는 진짜 기다리는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 것이냐면, 그 복음이 약속대로 우리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복음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 언약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유행과 같은 용어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누구나 이 말의 뜻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어보면 모호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분명히 이해되지 않은 채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정작 모호하게 이해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공간적인 곳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 되심, 하나님의 주되심,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이 중에 우리에게 현대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은

‘주 되심’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는 삶 말입니다. 그것이 곧 통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언급된 ‘좋은 소식’,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은 평화와 구원이 임하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곧 ‘복음’입니다. 그의 통치 아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치유되고, 회복되는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공간에

따라 구분되지 않습니다. 내가 장소적으로 어디에 있느냐, 머물고 있느냐가 아니라, 정말 ‘내가 하나님의 주 되심 안에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제가 쉽게 드는 예로, 미국 대사관은 한국에 주소가 있어도 그곳은 미국의 통치권 아래 있기에, 위치와 상관없이 미국 땅입니다. 미국 법을 따릅니다. 미국 법을 따른다는 것은 그 땅의 주인이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있어야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인

것입니다. 통치는 현재적 삶에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기에 죽음 이후의 하나님 나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종종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입니다. 과거에는 ‘천국’이라고 하면, 죽음 이후에 가는 어떤 장소적 개념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을 너무 좁게 해석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교는 금요일에 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시리즈를 꼭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교회 성도라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해야 모든 설교가 들릴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 살고 있어도, 내가 하나님의 주인 됨을 따르고 있다면, 하나님의 주되심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것이고, ‘누가 당신의 진짜 주인이냐?’가 하나님 나라의 핵심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인 상태가 회심입니다. 즉, 왕 되심, 주인 됨이 핵심입니다. 회심은 주인을 바꾸는 문제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내 주인은 로마 황제입니다’ 말하면 로마 시민이고, ‘내 주인은 예수입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 나라 시민인 것입니다. 누구를 진짜 따를 것인가? 동일하게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주인 됨’ 아래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요, ‘다른 사람’이 나의 주인이거나, ‘내’가 나의 주인 이거나, ‘물질’이 가장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로마서의 시작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복음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바로 그 약속을 성취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4절 마지막 부분의 표현을 헬라어 원어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시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이며, 우리의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저 사실에 관한 인정, 교리에 관한 인정이 아닙니다. 주인 되심을 믿는다는 것은 주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믿음은 꼭 회개를 전제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기 이전에도 무언가가 나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제껏 나의 주인이 다른 무엇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주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을 따르는 백성이 되는 것, 그 온전한 관계를 이룬 상태를 성경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그 구원의 관계를 위한 길이 열렸다는 소식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면, 곧 우리에게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작이라고 말한 것은 중요합니다. 구원은 시작과 완성이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주되심’이 시작되지만,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하나님의 주되심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시작한 후 완성을 소망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개념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계속 이야기하는 여러 오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잘못된 신학이 신앙과 삶을 망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통해 ‘믿음’과 ‘구원’을 ‘하나님 나라 복음’에 따라 정의할 때,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꾸 믿음은 믿음으로,

삶은 삶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분리되면 절대 신앙으로 인해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참된 복음과 진리 위에 서 있으면 회복과 변화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님이 되시는 삶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 이후 ‘믿는 대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오류입니다. 믿는 것은 곧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믿는 것은 곧 내가

그 주인 됨 아래 사는 것이지, 말로만 주인이라고 하고 그분 안에 살지 않으면 그것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되심을 진정으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삶에서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은 세상 모든 영역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전체에서도, 여러분의 관계 전체에서도, 인간세계뿐 아니라 자연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주되심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를 위해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을 따르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안용성 교수>의 <로마서와 하나님 나라>를 참고한 것인데,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신앙의 영역이 된다. 예를 들어 경제 행위를 통해서도 우리의 신앙이 표현된다. 우리가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쓰는지,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전부 신앙의 문제다. 어떤 정치가나 정당을 왜 지지하고 반대하는지, 투표장에 가서 누구에게 표를 던지는지도 신앙의 문제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을 어떻게 대하며 가르치는지를 통해 하나님의 주되심이 실천되고, 학생이 어떤 자세로 학업에 임하는지를 통해서도 신앙이 표현된다. 직장에서 동료들을 어떻게 만나고 직급상 위아래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다. 물론 환경 문제도 하나님의 주되심에 연관된 신앙 문제다. 따라서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경계선이 신앙과 비신앙을 가르는 경계선이 될 수 없다.’ 저는 이분의 글을 보면서, ‘풍삶초/풍삶기’의 도표가 계속 떠올랐어요. 우리의

네 가지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주되심으로 확장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풍성한 삶이 곧 구원의 삶입니다. 회복의 삶입니다. 원래 우리에게 주신 그 삶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믿음과 구원이 과정적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회심이 점진적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의 결혼이 혼인 서약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과 같습니다. 평생 함께하면서

완성합니다. 믿음과 구원이 그렇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시작하신 주도적 은혜입니다. 나를 살리시겠다는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주되심에 나를 날마다 내어드릴 뿐입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하나님의 주되심을 확장해 나가며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내 삶의 현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오실 수 있도록, 우리는 날마다 그분 앞에 우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릴 유일한 것입니다. 이 일은 평생의 과정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외치는 복음은 이 주님에 대한 것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그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 가운데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 사건, 속죄의 죽음, 부활을 통해 신실하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구원이 되었고,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에게 외친

복음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행 2:33)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일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 2: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 보좌에 통치자로

앉게 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죄의 지배와 사망을 이긴 승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죄악과 사망의 세상에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 생명의 능력은 각 사람에게 임하는 성령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어주셔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우리 안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설교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태어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메시아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그가 왕이 되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 승리하심으로 이제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원한다면 그의 나라로 와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를 바울도 로마서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거부한 아담의 죄와 같이, 그 결과 그가 맞이한 ‘죽음’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죽음’ 앞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이기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맞이하는 것은 결핍과 메마름과 결국의 죽음입니다. 모든 인생이 처한 현실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1:18~3:20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되심을 거부한 사람들의 여러 모습입니다. 죄는 뿌리로부터 시작하여 죄의 열매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를 비롯한 각종 죄의 모습들이 그 주되심을 벗어난 결과적 모습, 즉 열매들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열매를 제거한다고 이것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죄의 뿌리,

근원, 즉 ‘누가 주인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이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메마른 땅이 스스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깨어진 세상에서 하나님께 회복할 구원자로 보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로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 주님으로부터 누리는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혜, 기회를 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로마서가 하는 것은

이 이야기입니다. 5:1의 ‘믿음’이라는 단어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실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신실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입니다. 이것은 표로 정리해보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A로 말미암아 B가 되다 롬 5:1a 믿음(신실함) 의롭게 됨 롬 5:1b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림 롬 5:9a 그의 피 의롭게 됨 롬 5:10a 그의 아들의 죽으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 A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 예수님에 대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믿음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한 이유입니다. 즉, 예수님의 신실하심, 그가 이루신 십자가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제가 십자가를 설명할 때면, 자주 언급하지만, 십자가의 속죄는 구약의 대속죄일 신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식을 보면,

피의 절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언약식 제단에 뿌리고, 절반은 백성에게 뿌립니다. 그것은 피로 맺은 언약을 의미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그렇게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로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의 피로 인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제단 혹은 성소’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1년에 하루, 대속죄일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해결합니다. 이날만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성막 내부의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성소에 뿌립니다. 이스라엘과 성소가 언약 안에서 하나이기에, 1년간 이스라엘이 죄를 지으면 그만큼 성소가 부정해진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일에 성소를 정결하게 하면, 곧 이스라엘 백성이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의 제사는 예수님과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해결합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죄까지 다 사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자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 다른 말로 회심한

자들에게는 ‘성령’께서 오셔서 주인 되어 주십니다. 이것은 실제적입니다. 주 되심을 고백했다면, 주인께서 오셔서 거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입니다. (고후 1:22)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였다면,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순종’을 보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과 순종은 하나입니다. (롬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롬 16:26a)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은 순종하는 삶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되시기 전까지, 우리는 죄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5~7장은 죄의 지배 아래 거하는 육신과 그로부터 해방시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성령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롬 5:17)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롬 5:21) 그것은,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를 통하여 사람을 지배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5장에서 아담으로 인해 시작된 죄의 지배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왕 노릇을 하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바실류오’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바실레이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통치적 표현을 5~8장 사이에 수없이 사용하면서, 두 가지 통치가 우리에게 있음을

대조해서 설명합니다. 5장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에 대해서 설명했다면, 이어지는 6장에서는 그러므로 ‘죄의 지배로 돌아가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옛 사람의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통치’와 반대되는 단어 ‘종노릇’입니다. 옛사람의 특징은 죄에게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롬 6: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표현도 ‘바실류오’로서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왕 되심이기에, 더이상은 죄가 여러분의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손을 잡을 것인가? (롬 6:16)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롬 6: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롬 6: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롬 6:22)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6장 전체가 ‘하나님의 주되심’과 ‘죄의 지배’가 대조됩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의 삶을 택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충성이 어디로 향하는가? 이어지는 7장은 죄의 끊임없는 저항이 우리 안에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상태로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싸움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종교적 행위와 율법에 근거해서 의를 얻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깨어진 내 내면에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롬 7: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롬 7: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롬 7:23)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롬 7: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구원을 ‘믿음의 고백’으로 단번에 얻는 무엇이나, ‘영접 기도’를 통해서 단번에 얻는 무엇이라고 이해하면, 그 구원의 티켓 들고 천국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의를 이해한다고 하여, 죄가 우리를 쉽게 놔주지 않습니다. 격렬하게 저항하며 죄가 지배권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이 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싸우고 있지만, 예수님은 이미 죄의 최종적 열매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리하심 속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며, 그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면 그가 죽음을 이기고 얻은 생명을, 그의 통치 안에 있는 모든 자들과 나누십니다. 이 두 가지 일이 모두 실존임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죄의 지배도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실존이고, 예수님께서 승리로 주신 하나님 나라도 실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죄의 지배는

패망이 결정되었으나, 여전히 죄의 지배의 유혹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이미 이긴 승리 안에 속하여 있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세상을 바라보면,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죄의 지배로 돌아가려 할 때가 있습니다. 불안함을 주고 세상처럼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유혹합니다. 손짓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존적 고민과 충돌 속에서 우리가 이것을 이기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유일한 가능성과 힘이 있다면, 그것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해답입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성령님을 바르게 의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의 완성까지 소망과 인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회심한 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시는 이유입니다. 그는 보혜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보호의 실체입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신 하나님입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따르면(성령께 순종하면), 우리는 사탄의 통치,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사탄은 우리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가 회심 이전에 내 삶에 대하여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속이고, 여전히 우리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그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며, 진리로 주장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심 이후에도 우리 안에는 주님을 다시 현관으로 내몰고,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살고 싶은 옛사람이 꿈틀거립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주님이 우리 안에 하신 새로운 일을 기억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롬 8:7)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롬 8:8)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롬 8: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성령님께 우리를 내어 맡길 때, 이 싸움은 우리의 것이 아닌, 그분이 주도하시는 승리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못 이길 싸움이 없습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되심을 진정으로 선언하며, 결단하며, 새로운 삶을 향한 회심을 하였다면, 이제 이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싸움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옛 친구 ‘죄’와 다시 손을 잡지 말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며 다시 돌아서지 않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내 삶에서 쫓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분을 빼앗겨 억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워진 삶을 살지 못하게 자꾸 와서 우리를 정죄하고 고발합니다. 우리 옛사람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주님과 새 출발 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에게 계속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때론 넘어질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주되심을 추구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을 끝까지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소망함을 이해하기 쉬운 비유가 ‘야구’ 비유입니다. 주님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홈런을 치셨습니다. 끝내기 역전 홈런 말입니다. 공이 넘어갔고, 이제 주님이 1루, 2루, 3루를 돌아서 홈으로 오면 우리의 이 경기는 공식적으로 끝납니다. 승리가 선언됩니다. 공이 넘어갔기에 우리가 주님의 편에 끝까지 함께하면,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하고

계신 일과 약속하신 일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가 있는 홈으로 오고 계시는 주님을 소망하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배신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를 떠나지 않으면, 우리의 편입니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