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는 16장밖에 안 되지만, 너무나 중요하고, 또 복잡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로마서를 어떻게 열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지난주에 나눈 로마서 첫 설교는 고민 속에 준비하여 전한 설교였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신학적 이슈를 2개 던졌는데, 첫 번째 이슈는 ‘이신칭의’로 대표되는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입니다. 신앙의 양극단이 존재합니다. 한쪽은 ‘행위 구원론’이고 다른 한쪽은 ‘도덕 폐기론’입니다. 그 양극단은 잘못된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은 행위 구원론으로 치우친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 등의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종교적 행위’가 아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중심을 잡기 위해 반대쪽으로 잡아당긴 것입니다. 그러한 종교개혁의 반작용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다른 염려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모든 ‘행위’를 다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믿음’조차도 행할 것이 없는 개념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 폐기론’으로 오히려 치우친 경향도
보입니다. 특히 ‘칭의’라는 표현을 법정적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강조함으로 더욱 그러한 오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이후로, ‘칭의’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성화’라는 측면이 같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게 됩니다. 우리는 양극단이 아닌 중심을 잘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신앙도 이 중심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믿음과 삶의 조화. 두 번째로 생각해봐야 할 신학적 이슈는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를 격하시킨다는 점입니다. 복음을 단순히 ‘내가 죄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복음의 목적이 ‘나 자신’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나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에 관한 관심을 두지 않고, 복음을 나의 삶에 대한 것으로만 적용하면 성경의 비전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복음의 효력은 여러분에게도 미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관계 없이도 복음은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안 받아들인다고 복음이 영향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복음은 여러분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특별히 과거에는 로마서를 바울의 신학 논문 수준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신학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면서, 바울의 서신이 모두 당시의 상황성에 깊이 연관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성에 비추어
볼 때, 로마서의 모든 표현들은 지적인 학문적 언어로 갇히는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언어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이라는 단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 ‘주님’이라는 표현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당시에 어떤 의미였고, 이 단어를 쓴다는 것이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를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로마서를 진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모르고 성경을 읽으면 하나도 와닿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고백’ 자체가
목숨을 건 행함이었습니다. 로마시대의 그런 배경을 이해하면 우리가 ‘믿음’을 오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로마서의 시작을 다시 보시죠.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롬 1:3)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롬 1:4)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의
인사말 속에는 이 언어가 다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죠. 황제가 복음이라고 말하는 시대에, 이 세상에 진짜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복음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황제를 신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시대에, 구약을 이끌어오신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은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주인이라고 추앙받는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도, 온 세상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약이 기다린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 “예수가 바로 메시아다.” 그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이것이 바울의 복음 전부입니다. 이미 그는 로마서 편지 인사말에서 다 말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 고백을 하고, 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습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이죠. 이런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하나님도 신실하신 의로움으로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기
백성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통치이냐, 하나님의 통치이냐?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존하는 그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한 삶을 살 것인가? 로마의 심장부에 살고 있는 교인들에게 바울은 편지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과 신학 안에서 여러분이 로마서를 읽으면 이제까지 읽으면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롬 1:7) 나는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이죠. 이 복음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들, 즉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 그러므로 바울은 이들을 형제라고 여기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주님’이며 ‘메시아’인 예수로 인한 은혜와 평화(샬롬)가 있기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신비는 어디에 있냐면, 복음의 신비는 세상의 흐름과 역행한다는 측면에 있습니다. 복음은 초월 세계로부터 전해진 소식이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이 땅에 내려와 로마의 가장 변방에서, 가장 은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메시지 성경의 로마서 서문을 보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약 30여 년 전, 역사를 ‘그 전’과 ‘그 후’로 나눠지게 하고 세상을 바꿔 놓은 한 사건이 일어났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광대한 로마 제국의 한 외딴 귀퉁이, 팔레스타인의 유다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사람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일, 부산하게 돌아가던 권력의 도시 로마에서는 분명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그런 사건이었다. 이 편지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도 극소수의 사람들만 읽었을 뿐, 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읽지 않았다. 로마에는 읽을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글들은 결국 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는 그 로마
작가들이 쓴 책들 전부를 다 합쳐 놓은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여러분, 저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시대를 떠올립니다. 이 시대에 성경이 인기가 있나요? 아닙니다.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을 꺼내 들어도, 종교는 한가한 것, 혹은 종교는 나약한 이들이나 의지하는 것, 종교는 지식 없는 사람들이 기대고 붙잡는 것 정도로 취급받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 중 대다수가 주목하지 않고, 부산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기 있는 책은 모두 세상을 잘 사는 비법에 대한 것들 뿐입니다. 이 시대도 휴대폰만 가지고 있어도 보고 들을 것이 넘쳐납니다. 이 성경의 진리는 한 외딴 귀퉁이의 외침에 머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 외딴 귀퉁이에 진짜 진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세상 중심에서 권력자를 통하여 힘의 논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에서 가장 극형에 처하는 범죄자 처형법이 십자가형입니다. 가장 낮고 천한 자로 죽이는 것입니다.
로마의 한쪽 끝의 식민지 땅에서 태어나 십자가형으로 죽은 예수님이 ‘복음’이고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것은 당대의 시대를 완전히 뒤집는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주변에서 여러분이 믿는 바에 대하여 무시하고 조롱하고 하찮게 여겨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누가 인정해서 진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변호할 필요도 없고, 보호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신 진리의 힘은 무엇인가? 진리는 진리이기에, 그 힘으로
우리를 바꾸고, 변화시키고, 보호합니다. 세상의 거짓된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해내고, 세상의 거짓된 추구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당당하게 합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2박 3일간 <하나복 교회세우기 세미나>를 몇몇 성도님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2박 3일간 그곳의 프로그램은 1시간 30분 정도의 강의를 12번 듣고, 하루에 3~4번씩 조모임을 하면서 깨달은 것을 나누는 것이 전부입니다. 먹고 자는 것 외에는 강의, 예배, 나눔만 3일 내내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 시간이 우리를 가슴 뛰게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은 지쳐 있던 저에게도 다시 무엇을 위해 삶을 살아야 할지 일깨우며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2년 전에 먼저 이 강의를 들었습니다. 당시 2021년 6월이었는데, 당시에도 저희 교회에 성도들이 제법 많이 등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코로나 기간임에도 한 해 동안 40명이 넘게 등록했으니, 소위 주목받고 목회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하는 시기였죠. 그런데 제 마음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조금
더 무너졌으면, 목회 자체를 고민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어디 가서 힘들다고 하는 것이 참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했습니다. “내가 지금 네 상황이면….”이라고 말할 만했으니까요. 당시 목회 5년 차였는데, 여러 가지 일들도 계속 생기고, 갑작스럽게 교회가 커지는 것이 목회적으로 저에게 어려움도 계속 안겨주고, “목회가 왜 이렇게 힘들까?”를 계속 고민하면서, “내가 이 일을 계속 기쁨으로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한창 하고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나누는 이곳에 2년 전, 처음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도 동일하게 2박 3일간 수많은 강의를 들으면서 깨달음이 있었어요. “목회가 왜 힘들까?”라는 제 질문 속에는 “목회를 하면 힘들지 않고 행복해야 해”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제게 주어진 깨달음은 “목회는 원래 힘든 것이다”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목양은 아픔이었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안 힘든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목회는 원래 힘든 것인데, 중요한 질문은 ‘왜 그 힘든 일을 해야 하는지’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니까,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이 바뀌었어요. “목회가 왜 힘들까?”에서 “목회는 원래 힘든 것이구나,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이니까.” 그러나 무엇을 위해 그것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니, 그 힘듦을 위해서도 기꺼이 내 삶을 드리고 싶은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소망의 근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 그리고 참된 복음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기꺼이 ‘목숨 걸고 힘들 용기’가 제게 주어진 것입니다. 제가 사귐의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가장 큰 행복은, 저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의 길을 가는 제 후배 목회자들에게도 저는 제가 한 것을 따라 같은 방법으로 개척하라는 말을 못 합니다. 제가 지난 6년 반 동안 살아왔던 삶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 후배만 만나도 반가울 것 같습니다. 남들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제가 가진 한계 안에서는 벼랑 끝에 저를 세우고, 배수의 진을 치고, 이중직 삼중직을 해가며 목회를 하고, 내 소유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주님께 드려진 삶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길을 걸어가는 목회자들에게도 ‘너도 나처럼 해’라고 말하기는 미안해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을 보면, ‘참 우리교회에는 미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아요. 제가
우리 사역 간사님들과 나눔을 종종 하는데요,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박안수 형제님 정도 나이에 있는 분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슴이 뛴다는 이야기 하는 것을 처음 들었습니다.” 저랑 지금 풍삶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 안수 형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하세요. “가슴이 뛴다.” 그리고 저보고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요. 저는 그런 이야기 들으면 다 알죠.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그 이야기가 이분도 가슴 뛰게 하는구나.’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이죠. 하나님의 비전이죠. 저는 그것을 잘 나눴을 뿐이죠. 제 가슴도, 우리 성도님의 가슴도 하나님이 뛰게 하시는 것이죠. 제가 다 예화로 들지 않지만, 지금 그런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저는 너무 뭉클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신기합니다. “나는 목사니까 그렇다 치고,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지?” 복음을 선명하게 받아들여도, 힘든 것은 힘들어요. 안 먹으면 배고프고요. 욕먹으면 아파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때때로 지쳐요. 그런데 능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것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님을 알거든요. 사실 내 영을, 내 삶을 더 죽이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나의 삶 속에 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었다는 것을 알거든요. 아무리 열심히 돈벌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아무리 즐기며 살아도 만족스럽지 않은 나의 삶,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불안한 나의 내면, 자꾸 열등의식 속에 빠져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자존감, 옆 사람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이 사실 우리를 붙들고 있었는데....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니, 조금 지치는 것쯤은 감당하며 또 힘내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제가 지금 자꾸 나누는 요점이 무엇이냐면,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추상적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정말 이 복음이 자신을 살게 했다고, 그리고 누구나 살게 하는 실제적인 것이라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복음을 너무 ‘종교적 언어’로 만들어버려요. 우리가 오히려 자꾸 ‘복음은 복음’이고 ‘삶은 삶’이고, ‘예수는
예수일 뿐’이고 ‘내 삶은 내가 사는 것’이고. 이런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저의 꿈이 무엇인지 아세요? 여러분에 진짜 행복한 삶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이 우리에게 그런 힘을 발휘한다고 믿어요. 교회 크게 만드는 것은 정말 저에게 관심이 없어요. 때로는 근심만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는 여러분들이 복음 안에서 회복되는 것은 저의 기쁨이에요.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는 영혼들을 품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힘들어도 해야죠. 저는 정말 여러분
삶에 제가 맛보고 있는 복음의 삶을 함께 누리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롬 1:15)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롬 1: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으로 삶이 회복되면, 이것을 전하지 않고 견딜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전한 복음으로 다른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정말 생명이 탄생하는 기쁨입니다. 자녀가 태어나는 것 같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 같아요.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리고 우리는 이제 함께 자라가며 서로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녀가 이제 부모를 때로는 지켜주듯, 복음으로 낳은 사람들이 나중에는 서로 지켜주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계속 생명을 낳고 기르고 함께 살아가는 곳. 그런데 복음을 아무리 나누고 싶어도, 복음을 절대로 나눌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음과 거리를 둔, 복음과 담을 쌓은 내 삶이 잘못되었음을 분별하지 못하고, 상황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깨어짐 안에 갇힌 삶, 예를 들어, 폭력을 생각해봅시다. 아버지의 폭력. 그런데 그 폭력의 세계에 저항조차 하지 않고, 그것이 당연하듯 살아가는 것. 그 삶은 망가지게 되고, 동시에 그 삶을 배우고 답습합니다. 깨어진
세상을 살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불의하고, 안타깝고, 무언가를 놓친 채 살아가는지 모르고, 이 세상의 어두움 속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면, 복음을 들어도 반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과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관심과 이해가 있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무지한 사람이 신을 찾고 종교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찰이 되는 사람이 세상의 한계와 허무함을 발견하고, 대안을 찾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롬 1: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롬 1: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롬 1:22)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해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으려는 우리를 막으시는가? 아닙니다. 내버려 두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못 움직이게 막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통하여 진리로 우리를 부르시지만, 듣지 않으면, 세상에 속하여 자기 뜻대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1:18~3:20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죄의 모습들입니다. 여기에 ‘동성애’ 문제도 나오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동성애는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죄입니다. 육신의 욕망대로 행하는 죄의 모습 가운데 동성애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동성애만 유별난 죄는 아닙니다. 욕망대로 행하는 죄의 한 모습이죠.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이런 말씀을 종종 하세요. ‘한국교회는 동성애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이성애로 망하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으세요? 가정이
깨지는 것이 동성애로 깨집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동성애는 죄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죄는 아니고, 사실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보다 더 큰 것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더 피 흘려 경계하며 싸워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는 돈, 권력, 섹스입니다. 동성애 반대 집회도 좋고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다른 문제들, 재정의 비리, 권력의 문제, 교인들의 가정마다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나 민감한가도
고민해 보셔야 합니다. 동성애라는 다른 이의 문제 이전에, 자기 자신에게 더 가까이 있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그만큼의 울분이 있는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남자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혹은 ‘남의 가정사에는 깊이 관여하는 것 아니야!’ 하면서, 동성애에 대해서만 열을 올리는 것은 비겁한 것이죠. 저는 동성애가 가장 나와 무관한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그것에 더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롬 1:28)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습니다. (롬 1:29)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롬 1:30)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롬 1:32) 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알면서도, 자기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동성애, 다뤄야 합니다. 회개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아니 각자의 삶에 더 밀접한 죄에 대해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수군거리며 뒤에서 뒷담화하는 교인, 시기하는
교인, 자랑하는 교인, 아니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모든 죄에 대해서 민감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시면, 사람들의 본성이 나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32절처럼 반응해요. “이게 당연한 거예요.” 그런 사람을 서로 두둔한다고요. 자기들이 옳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건 교회에서나 통하고 세상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해요.”, “이게 맞아요.” 바울은 2:1에서 ‘그러므로’라는 연결 접속사를 사용해서, 그렇게 불의한
사람을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 핑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살면서도 당당한 사람들은, 그 선택과 태도의 값을 하나님 앞에서 치르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롬 2:6)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롬 2:7)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롬 2:8)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은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려주셨지만, 그것을 듣고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다’. 이방인은 그럼 핑계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뜻 몰랐어요.” 이에 대해,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메시지) 하나님의 법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직관에 따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렇다’와 ‘아니다’에, 그분의 ‘옳다’와 ‘그르다’에 공명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렇다’와 ‘아니다’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응답했는지는, 하나님께서 모든 남녀들에 대해 최종 심판을 내리시는 그날, 온 천하에 다 공개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1:18~3:20까지 복음과 무관한 삶, ‘그리스도가 없는 인류’, 즉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기중심성으로
삶을 사는 깨어진 세상과 깨어진 삶을 보게 합니다. 자기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채 살아가는 자기중심성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의로운 진노를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빛을 잃어버린 어두움에 속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절망’ 뿐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롬 3: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롬 3: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롬 3: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롬 3: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롬 3: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깨어진 세상의 실상이고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입니다. 우리에게는 최후의 심판도 있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삶 자체가 생명을 근원을 잃어버린 삶입니다. 물이 끊어진 논의 메마름처럼,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공허하다고요. 그런데
그 논이 스스로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의 목록을 말하는 것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고, 구원이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그리고 그 땅의 소망 없음과, 우리에게 다른 길이 주어져 있음을 알아야 우리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자체만 보면, 우리의 깨어짐을 극복할 힘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이 깨어진 세상에도 없습니다. 반복된
절망뿐입니다. 허무하고 공허한 삶의 달음질 뿐입니다. 그런데 대반전이 21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롬 3: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깨어진 세상에 틈을 내고 빛이 들어와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3장 20절까지 바울이 말하고 싶은 핵심은,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지배, 그 깨어짐, 그 결핍과 고통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늪과 같아요. 우리가 빠져있지만, 우리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식물이 빛을 봐야 하는데, 위에 판자가 덮여 있어서 어둠 속에 다 죽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에 틈을 내고 빛이 들어오면, 그 빛 앞에 식물은 생명력을 얻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은 이 빛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반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복음이죠. 절망의
삶에 찾아온 기쁜 소식.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신실하시기에, 구약에서 예언하셨던 그 약속에 따라, 메시아를 보내어 우리가 살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에게 오신 우리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예수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수이신 그분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면 메마른 우리의 심령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상으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속에 소망으로, 우리의 갈급함에 해결책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내어주는 능력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롬 5: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저는 정말 이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삶에는 모두 ‘전과 후’, ‘Before/After’가 있습니다. 나 혼자 살던 삶과 예수님이 함께하는 삶이 바로 그 본질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새로운 능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합니다.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첫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도록 지음 받은 우리지만, 아담의 죄를 따른 우리 모두는 아담이 경험한 깨어짐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존재로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롬 5:17)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여러분이 믿어야 하는 복음의 진리는 이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깨어짐 안에 살던 나에게, 다시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유일한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따른다면, 내 힘이 아니라 그분에게로부터 나에게로 오는 생명의 능력을 통해서 내가 모든 깨어짐의 현상들을 극복하고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것입니다. 그가 하신 일을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하여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이것이 율법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지금으로 보자면 종교적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믿음 없이 행하는 어떤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을 어르고 달랜다고 하나님이 속으십니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우리의 마음은 그런 경건의 모양들에 있지 않습니다. 그 예시로 드는 것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아브라함입니다. 4장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진짜로 믿고, 그분을 목숨 다해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롭다는 선언’은 율법과 상관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도 불순종과 불신앙의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셨고,
실패한 삶에도 깨어진 삶에도 긍휼함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거두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분을 통해 새롭게 살아갈 기회,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갈 기회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복음은 그래서 본질상 은혜입니다. (롬 3:22)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 이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바울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서신에서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때면, ‘피스티스 예수 크리스투’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faith of Jesus Christ’입니다. ‘크리스투’라는 헬라어는 ‘예수님’의 소유격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피스티스’는
‘faith’ 혹은 ‘faithfulness’로 번역할 수 있기에 이 표현은 ‘faithfulness of Jesus Christ’로도 직역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한글로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면, 무조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번역하려면 목적격으로 바꿔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원어의
형태가 소유격이기에, 이것을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이라는 목적격으로 바꿔서 해석하는 것이 맞는가? 이런 논의가 예전부터 많았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피스티스’를 ‘믿음’보다는 ‘신실함’으로 해석하고, 예수님에 대한 소유격을 그대로 반영하여, 이 구절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울의 고백에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구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신실함
사람에게 그 은혜가 주어졌다”는 이야기로 봐야 합니다. 바울이 3장 20절까지 계속하고 있는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하나님은, 구약에 나타난 인간의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그 약속을 지키셔서, 그로 말미암아 예수를 메시아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또한 신실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셔서, 죽음과 부활까지 이루셨기에, 그분을 통해 우리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우리도 신실하게 살아갈 존재로 바꿔주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질상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태아가 엄마의 탯줄과 연결되어 있을 때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함이 우리의 복이고,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삶이 수없이 헤매며 갈망했던 그 행복을 찾았고,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은 배설물처럼 여기며, 이제 그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가장 보배로운 것이라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나누기 위해 복음 들고 산을 넘으며, 그의 모든 삶을 예수 전하는 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바로 이 복음이 우리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주인을 주님으로 고백한 진실한 사람들에게, ‘이미’ 시작된 놀라운 일이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역동적인 일이며, 그리고 ‘앞으로’ 소망하며 기다리는 그 구원사건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복음의 소식을 전합니다.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을 맛보아 살아나십시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함께 거하여, 빛 가운데 충만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가 복음 안에 새로워지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