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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구원" / 강정규 목사

2023-06-04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부터 우리는 로마서를 다루려고 합니다. 로마서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주석 가운데 로마서 주석이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신학적 토대와도 같습니다. 특히,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로마서 강의>를 1년 반 동안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중세 가톨릭의 문제들을 부수고 파헤치고, 그로 인하여 종교개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루터만 그런가요?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도,

1738년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를 통해 감리교가 시작됩니다. 로마서가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는 어떤 중요한 시발점이 되곤 했다는 것이죠. 로마서 자체가 워낙 바울의 신학적 사상을 잘 드러내어 보여주기에, 로마서에 나타난 것들을 정리하여서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세우게 된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도 있습니다. 그만큼 논쟁도 심한 책이 로마서입니다. 저도 로마서 강해를 들어가면서 ‘신학’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신학이라고 하니,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고 잘 들어보고 고민해주시길 바랍니다. 일단 가장 먼저 우리가 고민해봐야 하는 것은 ‘루터’를 대표하는 단어, 그리고 로마서 하면 바로 떠오르게 되는 단어 ‘이신칭의’입니다. 루터가 로마서를 기반으로 해서 ‘이신칭의’라는 교리를 종교개혁의 기치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신칭의’가 무엇인가 ‘믿음으로서 의롭다고 칭하여진다’라는 의미입니다. 종교개혁 시기, 가톨릭은 선행과 공로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그것을 반대하고 ‘오직 믿음으로(솔라피데)’ 구원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바로 그 루터의 깨달음의 근원이 로마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이신칭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고,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 개신교 신학에서 강조점이 됩니다. 바로 그 대표 구절로 사용된 것이 로마서 1:17입니다. 종교개혁의 깃발은 루터가 들었지만, 당시에 이미 가톨릭의 가르침이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지적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있었고,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을 때, 그러한 가톨릭에 대한 신학적, 정치적 저항의 세력이 뭉쳐서 종교개혁을 완성하게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공로주의나 선행을 통한 구원이 아니기에, 가톨릭의 여러 모습들은 기준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내용,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는 성경의 진리를 바로 세운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후 500년이

지난 지금, 개신교 안에는 다른 의미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기울어져 버린 운동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톨릭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그와 반대된 강조점을 내세운 것은 좋았는데, 그로 말미암아 개신교는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치우친 여러 신앙의 모습들이 나타나서, 도리어 성경의 가르침에서 어긋날 위험에 있다는 목소리입니다. 복음과 구원에 관해서, 우리는 두 가지 지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첫째, 우리의 행위가 구원을

가져온다는 공로주의나 행위구원론에 맞서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결과,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망각한 것입니다. 다른 어떤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맞지만, 믿음의 행위까지 부정하는 것은 성경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간혹 개신교가 강조하는 믿음이, 그저 지적인 동의를 하는 것에 그쳐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든 ‘행위’를 언급하면, 그것이

인간의 자력 구원을 말한다고 여기며 기피하는 현상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개신교인은 그 어떤 종교에 속한 사람들보다 삶이 엉망입니다. 믿음으로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는 고민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새번역)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번역은 의도적입니다. ‘행위’라고 해야 하는 부분임에도 어떻게든 행위라는 단어를 피하려고 ‘역사’라는 표현으로 바꿔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을 보면 ‘work’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너무나 합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를 부정하고 행위 없는 구원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의 구원론에 대해서 김세윤 교수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구원파식 구원론과

큰 차이가 없다. 구원파는 대놓고 말하고 한국교회는 은근히 말한다." 왜 그럼 개신교는 이렇게 구원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다름 아닌, ‘이신칭의’에 꽂혀서 발생한 현상입니다. 특별히 ‘칭의’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칭의는 ‘의롭다 칭하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의로운 것은 아니지만, 의롭다고 여겨주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칭의’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법정적 개념의 이신칭의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칭의론’을 단회적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한번 의롭다고 법정에서 선언되면 끝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번 칭의를 받으면 죽을 때까지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가톨릭은 행위라도 강조하니까 선행이라도 하면서 살았는데, 기독교는 이런 방식의 칭의만 강조하니까, “난 이미 구원받았어”라는 것을 내세우며,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엄청난 방패를 하나 얻은 것입니다. “당신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말하면, 어차피 내가 의롭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니 괜찮다는 논리를 펴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로 ‘도덕 폐기론’에 대한 문제 제기가 늘 있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한쪽으로 치우쳐 버린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그것을 극복하려고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는 루터가 강조한 ‘칭의’ 교리에 ‘성화’라는 측면을 함께 강조하며 균형을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은혜를 주시지만, 성도들도 회심과 동시에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기에,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온전케 된다는 측면이 모두 ‘성화’와 관련된 것이죠. 칭의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측면과 성화라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의 태도가 균형을 이룬다면 이것은 매우 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발생합니다. 후대에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을 신학화 하면서 몇몇 학자들이

‘칭의-성화-영화’라는 3단계 과정으로 구원의 여정을 정리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시간적 순서가 있는 듯 설명하게 되었고, 그런 조직신학이 널리 퍼집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시간 순서적으로, 먼저 칭의가 일어나고, 그 후에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끝내 영광스럽게 되는 영화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으로 구원의 과정을 이해하게 된 것이죠. 그러다 보니 어떤 질문이 생깁니까? 사람들은 최대한 자기에게 편하고 유리하게 해석하기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칭의’의 단계에 이른 후 ‘성화’의 단계에는 못 가고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칭의’ 자체가 의롭다 함을 얻은 상태이니, 구원에는 지장이 없겠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선 ‘칭의’만 확보해놓고 ‘성화’는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그래도 구원은 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든 구원은 받고 싶고, 삶에 주어진 책임에서는 자유롭고 싶은 자기중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를 이렇게 시간 순서로 보는

것 자체가 오류입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 칼빈주의 신학자인 박영돈 교수는 반박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이다. 우리의 논리적 사고에서는 구별하여 설명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즉, 칭의 없는 성화 없고, 성화 없는 칭의는 없습니다. 성화 없이 구원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지 않고, 칼빈도 그렇게 신학을 정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정리한 결과입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칭의 따로, 성화 따로 생각하여, 내 삶의 모습이 어떻든지 구원은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화 없는 칭의를 외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한 칭의만 챙기고, 성화는 내가 해야 할 것이 아닌, 되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내팽개친 것입니다. 특별히 저희 교회가 속한 교단은 ‘성결교’입니다. 성화와 성결은 다르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성결이고 성화입니다. 저는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거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21b)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성결한 삶을 사는 것, 말씀의 요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어떤 인간의 행위, 즉 착하고 선하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믿음의 행위도 부정하고, 성도의

옳은 행실이 없어도 나는 믿으니까 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파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성경적인가의 문제입니다. 정리하면, 가톨릭이 가진 당대의 잘못된 행위적 요소들에 대해서 바로잡고자 루터는 강한 반대적 측면에서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정작 지금의 개신교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루터 입장에서 “내가 이러려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나?” 싶을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행함 없는 믿음 속에서도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의지하는 책이 ‘로마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로마서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이 그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구원이 그것인가? 두 번째 오류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로마서는 결국 복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개신교의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인해, 내가 죄 용서와 구원을 받게 되었고 천국 가게 된 것.” 어떤

분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맞지, 저것이 복음이지. 뭐가 문제가 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성경이 우리에게 소개하는 복음은 이런 것일까요? 로마서를 시작하며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바울은 부르심을 받았고,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약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복음의 주체가 ‘나’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나의 구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복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철저하게 ‘나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봐도

나 중심적으로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을 왜곡시킨다는 생각을 잘 못 합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신가요? 나는 분명 A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B라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도 내가 B라고 말했다고 하는 경우입니다. 그때의 그 억울함이 있죠. 내 의도가 바뀌어 있으니 말입니다. 누가 문제일까요? 내 이야기를 자기 마음대로 B라고 해석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의 복음에 대해서 많은 경우 이렇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아무리 A라고 말해도, 내가 그것을 B로 받아들이고, 성경은 B를 말한다고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말이야 내뱉으면 지나가 버리니, 왜곡이 순간의 실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죠. 여러분이 마음을 갖고 천천히 읽어보고 공부하면 성경이 정말 가르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내가 죄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복음의 목적이 ‘나 자신’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나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사건으로 축소시켜 이해함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군이라 불릴만한 왕이 즉위하게 된 사건을 ‘복음’이라고 칭한다면, 자연스럽게 그의 즉위와 통치로 말미암은 영향력이 백성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백성을 위한 수단으로 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이 ‘우리를 위한 이야기’ 수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여러분이 죽을 뻔했다가 살게 되었다’는 정도의 이야기로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직 ‘예수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복음이시기에 그분을 믿는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지, 여러분을 위해 예수님이 존재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완전히 성경을 자기를 중심에 두고 읽는 것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만연한 두 가지 오류에 대해 제가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오해, 다른 하나는 복음이 내가 죄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구원과 복음에 대한 오해. 이것은 당연히 우리의 신앙과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로마서와 하나님 나라>라는 책을 쓴 안용성 목사는 포괄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돌아보며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할

필요를 절감했다. 우리가 로마서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루터가 로마서에서 발견한 복음이 종교개혁의 성경적 근거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위기 가운데 공유되는 지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다는 사실에 관한 안타까움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보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는 단지 우리가 믿는 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 우리의 믿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의 믿음 자체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낳을 수 없는 불완전한 믿음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분이 던지는 문제 제기가 바로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믿음을 교리에 대한 동의쯤으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그저 하나의 선택사항이라고 여기는 것. 또 그 구원은 지나치게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는 것.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나 가는 곳으로 인식되어, 지금 이 땅은 언제고 버리고 떠나야 할 곳이거나,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사탄의 나라, 죄악의 나라이기에 이곳에서는 최대한 나를 잘 지키며 살아가고, 언젠가 거룩하고 순결한 나라로 도피할 것을 바라보는 소망을 품는 것. 그런 사람에게는 이 땅에 대한 책임감, 이 시대에 대한 책임감, 자신의 현재적 삶에 대한 의미 등이 있을 수 없는 것이죠. 저는 잘못된 신학이 사람들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삶을 낭비하게 만들고, 사명과 책임감 없는 모습으로, 신앙을 열심히 할수록 더 개인주의화 되어가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위기감도 있고,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리가 가져다준 방패로 자신을 보호하며,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경계하며, 그저 내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지키는 것이 순결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의 성도들을 만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결국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진리로 가르치지 않으면 바뀌지 않을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질문을 여러분이 로마서를 묵상하고 읽고 설교를 듣는 내내 기억하십시오. 로마서가 말하는 구원과 복음이

무엇인지, 성경으로부터 그 답을 찾고자 하는 마음 말입니다. 우선 오늘은 로마서 첫 설교이므로 이제 역사적 맥락 안에서 로마서를 소개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로마서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는 누가 개척했을까요?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바울 등의 사역자가 개척한 교회도 많이 있지만, 누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교회들도 더러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확실한 근거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행

2:5)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행 2:9)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행 2:11)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디아스포라’(diaspora)는 ‘흩어짐’이란 뜻인데, 베드로는 이들은 ‘흩어진 나그네’(벧전 1:1)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디아스포라가 생겨나게 된 시작점이 페르시아 시대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왔다가 페르시아로 제국이 교체되고 고향 땅으로 귀환 허락이 떨어집니다. 그때 남유다로 귀환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아갔던 것이죠. 유대인들은 대부분 장사에 종사했고 그 삶의 터전을 두고 귀환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모여 살았습니다. 이들은 해외에서 살면서도 1년에 3차례(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이 중 최소 1차례라도) 명절에 예루살렘에 방문하여 성전에 1년 치 십일조를 바칩니다. 또한 제2의 십일조 개념으로 30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소비를 촉진시켜 예루살렘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어가는 데 역할을 합니다. 오순절에 이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다가, 성령강림 사건과 함께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중에

일부는 예루살렘에 남아 예루살렘교회라는 초대교회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터전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로마로 돌아갔던 사람들이 로마 지역에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AD 30~33년 경입니다. 바울은 56~57년경에 3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서 3개월을 머물며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 바울이 편지한 시점에는 로마교회는 최소 10년 이상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 로마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여 로마교회 안에 이방인들도 합류하게 되었겠죠. 점차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거하는 교회로 자연스럽게 발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척자들은 유대인들이니 교회의 중책은 유대인들이 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49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칙령을 발포한 것입니다. (행 18:2) 거기서 그는 본도 태생인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만났다. 아굴라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 사람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다. 바울은 그들을 찾아갔는데, 칙령은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로마에서 고린도로 오게 되었고, 거기서 바울을 만나서 동역하게 된 것이죠.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이어 네로가 황제가 된 후,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로마를 떠난 후 5년 뒤의 일입니다. 그럼 이 교회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요?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중직에 있었으나, 5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이방인들이 교회의 중심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개척자들인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주도권 논쟁이 있게 됩니다. 그로 인한 갈등이 로마교회에 있었던 것이죠. 바로 이 시기에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있었고, 바울의 선교는 예루살렘 근처로부터 점차 서쪽으로 로마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최종목표는

로마의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표라면, 로마가 부산쯤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는 본래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나, 이제 서쪽의 선교를 위해 로마를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고, 그 이후의 선교를 진행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관련 없는 로마교회에 그 요청을 하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로마교회도 갈등이 있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권면도 로마서에 담기게 된 것입니다. 갈등이 해소되어야 이 교회가 선교사역에 중요한 동역자로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학적인 이야기가 특별히 로마서에 잘 정리되어 담긴 이유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자신도 소개하고, 자신이 믿는 복음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쓰는 편지에는 인사말 부분에 편지 전체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가 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목적 지향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로마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앞에서 문제를 제기했지만, 우리는 복음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우리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없는 단어를 성경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당대에 아주 유명한 개념이었습니다. 로마사회에서 복음을 의미하는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황제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황제에 대해서도 즉위할 때, 탄생할 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한해서 ‘복음’이라고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감히 기독교인들은

그 복음이 로마의 황제에게 붙일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GOD, 데오스)은 신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신의 아들이죠. 당시에 로마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누구에게만 썼겠습니까? 황제입니다. ‘주님(큐리오스)’은 어떤가요? 로마에서 로마의 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황제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복음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가 주님이라는 이 모든 성경의 고백은, 이 땅에서는 로마 황제가 그 단어를 독점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믿기에, 이제 세상의 황제 따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인 예수님께 우리의 충성과 마음을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목숨 걸고 하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것 자체가 단순히 ‘지적 동의’가 아니라, ‘생명을 건’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바울과 베드로, 모두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왜요? 예수가

복음이라고 외치고 전했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당신이 나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이것이 회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의 왕입니다.” 모두 그분과 나의 관계를 바르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분의 통치 아래 살아간다면, 그것이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에서 이것은 내 삶을 누구를 향한 충성의 길에 서서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로마에서 황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다스린다고 표현하는 것은 황제에 관한 반역으로 여겨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정치 권력을 무시하는 의미에서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의 안정감을 어디에 두고, 누구에게 충성함으로 나는 살아갈 것인가? 살아있는 권력인 로마의 힘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인가? 예수님이 복음이라고 말하고, 예수가 우리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이 행위에 대해서, 톰 라이트는 이렇게 비유합니다. “예수의 복음을 가지고 와서 로마 황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세상의 권좌에 앉아 즉위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난 황소가 웅크리고 있을지 모르는 투우장 안으로 붉은 망토를 걸친 채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신칭의는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을 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을 건 신앙의 결단과 고백을 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고백할 ‘주인 됨’은 무엇일까요? 로마 황제에게 바쳤던 충성을 예수에게 바쳤던 성도들의 결단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이 시대에서 어떻게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고백하며 살아야 할까요?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황제는 돈입니다. 이 시대는 돈에 충성하는 것이 안전하고 지혜로운 것이라 말합니다. 결국에는 돈밖에 믿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이 시대의 풍조에 대한 고민과 우리는 싸워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시대에도 로마를 떠나거나 쿠데타를 일으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충성과 내 삶의 안정성을 로마 황제에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내 충성과 내 안정감의 근원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신칭의’가 있는 것이지,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실상은 다른 것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이신칭의’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 성공과 내 이익을 위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버리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에게 ‘이신칭의’를 말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1세기 당시 입에도 올리기 어려운 위험천만한 복음을 선포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이 구절이 루터가 전한 ‘이신칭의’의 근거 구절로 사용되곤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는 우리에게 오는 ‘칭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인해,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이 ‘칭의’ 개념처럼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는 법정적 선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관계적 의’입니다.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의’란 무엇일까요? 만약 집에 강도가 들어서 제 가족을 위협하는데, 저의 선함을 지키기 위해 비폭력으로 대응한다면, 그것은 ‘의’가 아닙니다. 그것이 의로운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입니다. 전쟁에서 군인이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적 약속에 신실하신 것입니다. 관계에 충실한 것입니다. 복음에는 ‘의’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구절은 ‘믿음을 통하여 믿음으로’가 원어에 맞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단어만 보면, 무조건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보다 ‘신실함’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우리도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언약적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늘 최선을 다하십니다. 그럼 남겨진 것은 우리가 그 특별한 관계 안에서 어떻게 신실할 것인가?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께 신실하게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달성하라는 것인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구원을 이룰만한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우리의 연약함 속에도 행하시는 의의 손길 앞에서, 그 은혜

앞에서, 우리는 그 하나님께 우리를 내어드릴 뿐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어떤 선행을 하거나, 어떤 영적인 수행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왕으로 머무시도록, 그래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치하시며 구원을 이루시도록 우리는 내 존재를 계속 그분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문밖에 계신 예수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그분은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삶의 중심을 내어드려서 온전히 주께서 내 삶의 주인 되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현관에 서 계실 뿐입니다. 그분이 내 삶의 보좌에서 나의 진정한 주인으로 영광 받게 하는 것이 내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 드리는 것. 분명 이것은 하루아침의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제 내가 예수님을 중심에 모셨을지라도, 오늘 내가 그 예수님을 다시 현관문 앞에 서 계시도록 하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힘써야 하는 일은 내 삶의 중심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그분에 내 삶에서 온전하게 주인 되어 내 안에 역사하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고, 그 주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채워가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복음이 나의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 복음을 맛보지 못했다고 온 우주적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사건이 무효가 되거나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어주셔서 깨어진 세상에서 회복으로 나아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과 하나님을 잃어버린 각자의 삶 안에서 사탄이 행하던 통치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하시고, 다시 통치권을 회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으로 불리게 된 사건. 성경은 이것이 ‘복음’이라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강력한 통치 속에 찍소리 못하게 누르고 눌러, ‘로마의 평화’를

선전하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로마 우선주의를 전 세계에 퍼뜨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하나님의 때에 예수님을 약속대로 보내어주시고, 그 예수님도 신실함으로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며 우리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신실하게 행했기에 예수님이 신실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 신실하게 행하셨으므로 우리도 신실하게 반응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약속대로 다 행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사건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믿음,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르는 신실함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황제의 통치 속에 주어진 위장 된 ‘힘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마누엘 속에 누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화’, 샬롬이 있습니다. 이 복음을 여러분에게 나눕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