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느덧 로마서 네 번째 설교입니다. 우리는 로마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우리가 로마서를 잘 이해한다면, 성경의 큰 보석 하나를 캐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오늘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성령님께서 일하여 주실 것입니다. 듣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함께하실 것입니다. 로마서는 기본적으로 바울이 편지로 기록한 것입니다. 언젠가 바울이 로마에 갈 것이라는 방문계획과 로마 서쪽으로의 선교여행을 위한 후원을
요청하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죠. 그리고 이 안에는 바울이 전하는 신학적 메시지가 잘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전체의 구조는 그러므로 간단합니다. 삼중 구조로 이뤄졌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편지의 가장 바깥인 1:1-12까지와 16:1-27까지는 편지 형식에 꼭 들어가는 서론(인사말)과 결론부입니다. (롬 1:7) 나는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롬 1:10)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여러분에게로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롬 1:11)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신령한 은사를 좀 나누어주어,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롬 1:12) 이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롬 16:2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루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롬 16:22) 이 편지를 받아쓰는 나 더디오도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롬 16:23) 나와 온 교회를 잘 돌보아주는 가이오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도시의 재무관인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그리고 그 안쪽인 1:13-15과 15:14-33은 로마에 대한 방문계획을 나누며 선교 사역의 동역자가 되어 달라는 목적의 글입니다. (롬 1:13)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가려고 여러 번 마음을 먹었으나, 지금까지 길이 막혀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다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열매를 거둔 것과 같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것을 좀 거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롬 1:14)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롬 1:15)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롬 15:22)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습니다. (롬 15:23)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롬 15:24)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롬
15:31) 내가 유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화를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또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롬 15:32)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안고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중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1:16~15:13까지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 몸통 글 안에서 1:16-17이 주제문처럼
기록된 후, 총 4개의 큰 주제를 갖고 본론을 기록한 것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론을 시작하는 시작에 주제문을 넣은 것은, 여기에 본론 전체를 통해 나눌 가장 핵심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적 약속에 신실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약속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의가 하나님의 주되심 밖에서 깨어진 삶을 살고 있던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도 이제 하나님의 주되심 안으로 들어와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효력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그 안으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고, 이 주제를 4가지 부분에 걸쳐 설명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의 지배와 심판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신실하신 구원 사건을 통해 이제 예수님의 주되심을 따르는 사람은 언약 백성으로 회복됩니다. 로마서를 쓸 당시에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도 율법이 아닌,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처럼,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고 받아들이면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성취는 혈통에 의한 자손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언약 백성은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회심했다면 하나님의
주되심에 속한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성령은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탄 또한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되심’과 ‘죄의 유혹’ 사이에 서 있습니다. 적어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삶은 그 부대낌 안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우리의 옛사람은 죄와 속하여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였으나, 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옛사람의 습관대로
행하며 돌아가지 말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함께하시므로, 성령님을 의지하며 구원의 완성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린 죄에 대해 승리하신 주님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1-8장까지가 복음의 핵심적인 설명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이 언약 백성이 아니라는 이 선언은 충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이 수반됩니다.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면, 유대인은 언약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인가? 이런 부분을 다루는 것이 9-11장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오늘 집중해서 살펴볼 부분입니다. 마지막 단락은 앞서 2부에서 언급한 언약 백성의 삶에 대해서, 신학적 설명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실천적 요구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서신에는 언제나 신학적 설명과 함께 구체적인 실천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곧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가 4부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입니다. 로마서의 큰 흐름을 잘 이해하셨다면, 이제 여러분은 로마서에 대한 굉장히 좋은 렌즈를 착용하신 것입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선물은 이 렌즈를 여러분에게 선명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셔야 할 것은 이 말씀들을 잘 기억하고 정리하며, 또한 이 렌즈를 끼고 이제 로마서를 읽어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워 보여도, 이 분명한 렌즈를 통해서 말씀을 읽다 보면, 로마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잘 보일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을 성경답게 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잠시 말씀 목록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여기 적힌 말씀들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외우거나 혹은 많이 들어본 말씀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5:3b-4)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토록 유명한 말씀이 로마서에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 의미로 주어졌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씩 떼어서 읽으면 그냥 문자적으로 읽혀지는 대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경을 대하기에 성경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단도 성경을 저렇게 한 구절씩 떼어서 이어 붙여서 논리를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 구절씩 보는 사람은 결코 말씀의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력하게 권합니다. 적어도 로마서를 설교한 부분만큼은 꼭 다시 읽으며 이해해보도록 힘쓰십시오. 우리는 이제 로마서의 배경을 알고, 흐름을 알고, 로마서를 이해하는 틀도 갖췄습니다. 이제 이 무기들을 갖고 성경을 읽어가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9-11장의 내용을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우리는 로마서의 배경 가운데 로마의 교회를 설립한 주축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가, 5년간의 추방 명령으로 이방인 중심으로 바뀌었던 사실과, 그 후 다시 유대인이 복귀하면서 혼란과 갈등 속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1:16-17의 주제문에서부터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18-3:20의 폭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모두 그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복음의 소식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이 필요하고, 누구든지 복음 안에서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는가? 네. 변합니다. 주되심을 전적으로 인정하면 누구나 변화됩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안
변할 것이면 우리가 도대체 복음을 왜 전하고 나누겠습니까? 바울은 로마교회의 중요한 문제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힘씁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현실적 경계선 위에 가로막혀 그 갈등에 힘을 못 쓰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그 경계를 뛰어넘어 복음 안에 하나 된 교회를 수립하는 것이 바울의 목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강조했던 것은 그것이 유대인과 다른 모든 민족을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넘쳤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율법 준수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율법 준수 또한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는커녕, 그냥 율법을 갖고 있다는 우월성만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갖고도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던 것이겠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첫 언약을 맺었지만, 새언약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에 의해서 거절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바울도 유대인이죠.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정작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하나님과 가장 먼 위치로 가게 된 것에 대한 아픔이 있습니다. (롬 9: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롬 9: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롬 9:3)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아픔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회복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원에 있어서 누렸던 그 구원의 특권에 대해서 인정합니다. 유대인은 구약에서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백성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롬 9:4)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롬 9: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하나님은 유대인을 부르셔서 그들과 관계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언약과 율법과 약속 등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믿음의 조상들도 대부분 다 유대인들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조차도 유대인의 혈통으로 보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대인을 부르신 것은 유대인만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유대인을 선택하신 이유는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제사장 민족으로 유대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기대는 여러분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수되며 복음이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부르심 안에서 우리를 동역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유대인에게 주어진 부르심은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유대민족으로 태어났거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신실한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약은 언약에 충실한 사람 안에서 작동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보면, 하나님은 항상 아브라함의 가족 중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들을 택하여 일하셨고, 그들을 통해 약속하신 혈통을 이어오셨습니다. (롬
9:7)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다만 "이삭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너의 자손이라고 부르겠다" 하셨습니다. (롬 9:8) 이것은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참 자손으로 여겨지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할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분명히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것은 곧 유대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별해야 할 것은 그 선택이 곧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도 거절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고, 선택받았음에도 실패한 개인의 사례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선택은 응답을 통해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택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자유의지는 이렇게 작동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마치 토기장이가 그릇의 용도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로 보면, ‘달란트
비유’가 적절한 예시입니다.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달란트를 맡기는데 그 크기가 각각 달랐습니다. 그 크기를 정하여 맡기는 것은 주인의 주권적 결정입니다. 다만 그 결정이 그들의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인의 선택에 대한 종의 개인적 순종이 중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오류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섯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자신이 다섯달란트를 받았다고 자만하여 주인의 뜻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땅에 파묻어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또한 주인의 책망 속에 쫓겨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정하심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우리의 반응과 무관하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 반응은 우리의 자유의지 속에서 우리도 최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받았고, 율법도 부여받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들고 있었으나, 율법으로 오히려 망했습니다. 제가 우리 시대의 율법에 비견되는 것은 ‘종교적 행위’라고 했습니다. 내가 어떤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내 구원을 보장하나요? 종교적 행위는 중요하지만, 그 중심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자기만족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직분을 사용하지 않지만, 직분이 우리의 신앙을 보장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직분이 주는 안도감으로 자신의 신앙을 잘 바라보지 못하면 직분이 우리의 신앙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럼, 직분 때문에 망하는 것이죠. 율법이 그와 같습니다. 바울이 경계했던 것이 그것 아닙니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일은 귀한 일이지만, 내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중심을 잃은 겉모양으로만 남게 되면,
그 안도감 속에 오히려 영은 죽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와 같은 목사에게, 또 교회에서 여러 사역을 맡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더욱 내 영의 상태를 잘 살피는 민감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 자리의 모든 예배자 여러분. 누군가는 평생에 한 번 복음을 듣지 못할 수도 있는데, 여러분은 이미 이 예배 안에서 복음을 듣고 있는 대상이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이며,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 중에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되심 속에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도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그 자리에 있었어.” 이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내가 그 예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내 삶의 방향을 바꾸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어.”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매일성경 해설서 : “하나님은 자기 뜻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놓았고, 믿음으로
응답할 자유를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이어진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입니다. (롬 10:12)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롬 10: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신약시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냐면,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고도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하였는데, 놀랍게도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니,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행 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행 10: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행 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렸죠. 회심한 사람, 주되심을 인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주인 되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구원의 보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징표입니다. 유대인 출신의 사도들도 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종하여 이방인을 ‘형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인 된 초대교회 공동체에 나타난 가장 놀라운 일,
당시의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당시의
사회는 인종별, 계층별, 성별로 나뉘어있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상종하지 않고, 종과 자유인이 상종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나눠진 것이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복음은 그 갈등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상도 얼마나 분열되어 있습니까? 국가는커녕 내 울타리를 조금만 벗어난 사람에게도 관심도 없습니다. 빈부의 격차는 극에 달하고, 사회적 지위에 따른 간극도 큽니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갈등도 큽니다. 남자와 여자는 성별로
나뉘어 대립하기 일쑤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양극화 현상이 점점 심화됩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 모든 간극을 뛰어넘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하든 교회 안에는 그저 ‘형제, 자매’ 뿐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바라보며 대립하기보다는, 우리 안에 계신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짜 하나님 나라 공동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감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복음 전도를 위해 자신을 부르셨음을 깨닫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 선교의 대표주자가 됩니다. 하지만 그런 바울의 속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깨닫고 돌아오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외면하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여러분의 삶과 복음 전수를 통해서 누군가는 예수를
받아들이고 삶이 변화되는데, 정작 여러분의 가족은 외면하고 있다면, 이 아픔을 아실 것입니다. 바울의 아픔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곳에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각각 하나씩 전합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첫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럼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결국 폐기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안에도 여전히 ‘남은 자’들이
있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롬 11:2)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엘리야를 두고 하신 말씀을 알지 못합니까? 그가 이스라엘을 고발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롬 11:3) "주님, 그들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주님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나 혼자밖에 없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 찾고 있습니다." (롬 11:4)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내 앞에 남겨 두었다" 하셨습니다. (롬 11:5) 이와 같이, 지금 이 시기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이 마치 엘리야와 같은 외로움과 답답함이 있을 때도, 하나님은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의 의인을 두셨던 것처럼, 바울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실패를
보면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비유가 사용됩니다. (롬 11:17) 그런데 참올리브 나무 가지들 가운데서 얼마를 잘라 내시고서, 그 자리에다 돌올리브 나무인 그대를 접붙여 주셨기 때문에, 그대가 참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함께 받게 된 것이면, (롬 11:18) 그대는 본래의 가지들을 향하여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대가 우쭐댈지라도,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참올리브나무(개역개정:
참감람나무) 가지는 원래 올리브 나무(언약)에 속한 가지들입니다. 유대인들이죠.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였기에 잘려 나간 가지와 같이 되었습니다. 언약 백성임에도 구원에 실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돌올리브나무(돌감람나무, 야생 나뭇가지를 의미)인 이방인들은 원래 언약과 무관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언약에 접붙임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서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롬 11:20)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롬 11:21)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접붙은 가지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탈락한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입니다. 반면 이방인들이 새 언약 백성이 된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믿지 않으면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정하신 분입니다. 이방인들도 구원에 대해서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믿지 않으면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우리의 죄를 봐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려고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정의를 지키시며, 사랑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죄를 봐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분은 대가를 대신 치르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 구원을 하찮게 여기거나, 값싼 것으로 여기며 소홀히 여기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책임과 구원받아 새롭게 된 존재에 걸맞은 삶을 살지 않는다면, 이방인들을 향한 경고가 우리를 향한 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결코 여러분을 불안하게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을 우리는 진실하게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구원받은 이방인을 향해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미 로마서 6장에서도 하나님의 주되심 아래 있으면서도 죄의 유혹 앞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바울은 경고하였습니다. 바울이 왜 자꾸 ‘돌아가지 말라’고 말하겠습니까? 돌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심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자꾸 생기니까 거듭 경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의 문제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놓고도 그분의 생각과 뜻을
따르지 않고, 거부하며 무시한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갖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더 보태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보호해드릴 수도 없고, 우리가 그분을 풍요롭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딱 한 가지를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전심을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갖고 계시지 않은 것. 하나님이 유일하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은혜 주시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 10:9)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롬 10:10)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로마서는 ‘마음으로 믿는 것’,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마음에서도 입에서도 우리는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인격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바울조차도 평생 그러했습니다.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에게 전에는 유익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깁니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자리 잡고 있었던 내면을 비워버리고, 그 비움을 통해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붙잡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다른 것에 대한 관심들로 인해,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가장 존귀한 분이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셨고, 우리 안에는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채우실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와서 한 것은 그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기 위해서 우리를 속인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없어도 충분히 괜찮아.” 그것에 반응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가
비어 있기에, 인간은 무엇을 해도 공허함과 허무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접붙여서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의 주되심 아래 거할 때, 비로소 그 공허함이 채워지고 충만해집니다. 그로 말미암아 다른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나 스스로를 돌보기에도 힘겨웠던 인생에 하나님의 채우심이 임하니, 나는 충만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을 위해 사랑하고 헌신하는 에너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을 섬길 힘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주어지는 평강입니다. 태초부터 주어진 그 평강을 깨었던 사탄은 지금은 쉬고 있을까요? 아니요. 그는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 속에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까 봐, 자꾸 다른 것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네가 지금 공허하고 만족이 없는 것은 ‘이것’이 없기 때문이야. ‘이것’을 얻으면 너 아주 행복할 수 있어.” 성공, 인기, 즐거움, 돈, 안락함
등 세상의 것들을 우리에게 미끼로 던져줍니다. 과연 그것들 안에 영원한 만족이 있을까요? 그것으로 고갈된 여러분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울처럼, 지금까지 내가 붙들고 살았던 것,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나를 만족시켰던 모든 요소를 스스로 내려놓고 배설물처럼 여기며, 우선 내 안에 그 욕심을 비우고, 그 빈 공간을 주님께로 나아가 채움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제가 하는 이야기가 오히려 속임수 같고, 믿기
어려우신 것이라면 그저 고민만이라도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삶의 여정을 통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목마름을 느꼈다면, 이제는 삶의 경로를 바꾸어 이제 정말로 나의 목마름을 근원부터 채우는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 위치, 모습이 다르지만, 우리 모두에게 유일한 생명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우리의 목마름을 채울 영원한 생수, 마르지
않는 샘이기 때문입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