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14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2편의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현재성’과 그 현재적 구원의 실제적 현상인 ‘치유’에 대해 나눴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복음의 내용을 설명해달라고 말한다면, 가장 짧게 전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시작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것은 그분께 속해있습니다. 그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정적이고 평안하며 가장 충만합니다. 그의 생명이 우리에게
흐르고 우리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충만함을 온 세상과 피조물과 특별히 인간에게 주셨고, 인간은 그분 안에서 창조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 속함-주되심) 둘째,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유가 있다면 스스로가 주인이 되고 싶은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인 됨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괜찮은 존재라고 스스로를 여겼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사라진 죽음과 어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림 / 죄-자기중심성) 셋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닥친 고난과 결핍, 그 깨어짐의 현상들을 바라보시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방법을 만들어주십니다. 그를 위해, 예수님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고, 그분을 통해 구원이라는 회복의 길을 내어주십니다. 그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올 유일한 길이 생겼습니다. 그분이 깨어진 세상과 깨어진 삶에 오신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 구원-예수님) 넷째,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구원의 길에 대해서 받아들인 사람,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된 삶을 다시 결단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다시 받아들여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과의 온전하고 풍성한 관계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로 회심 /
믿음-주되심) 주일에도 살펴봤듯이 ‘하나님 나라’는 결국 그분의 통치, 주인 됨, 주 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전적인 순종의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시는 성령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치유와 회복입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시 그분의 생명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이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이며, 다시 내가 하나님 안에 속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러한 사귐이 ‘영생’이며, 우리는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유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라고 불리는 아들은 원래 아버지께 속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아버지 밑에 사는 것이 자신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여겨서 불편해합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를 떠날 마음을 먹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아버지, 유산을 미리 주십시오.” 이것은 아버지가 그에게 필요 없다는 의미이며, 이제 관계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아들이 가진 권리대로 유산을 줍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선악과 먹는 결정도 존중하셨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선택도 존중하십니다. 우리는 선택할 권리가 언제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삶이
좋아 보이면 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게 됩니다. 아들은 자기의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을 떠난 그곳은 깨어진 세상이었습니다. 그곳이 결코 아버지의 품만큼 따스하지 않았으며, 깨어진 세상에서는 서로의 아픔과 상처와 죄악들이 서로를 찌르기에 그 고통에 아들 또한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깨어진 세상에서 살면서 만신창이가 됩니다. 그 결핍이 극에 달하여 주변에 도움을 청합니다. 비참한
삶은 더욱 궁지로 몰립니다. 유대인으로서 가장 부정한 돼지와 함께하는 삶을 삽니다. 돼지가 먹는 열매라도 먹으며 배를 채우고 싶을 위기 속에서도 그에게 그것조차 주어지지 않는 깨어진 세상의 실상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제야 그가 깨닫습니다. 내가 한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염치가 없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께 가서 매달려야겠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한 일을 생각하면, 더 이상 나는 아들이 될 자격은 없으니, 아버지의 집에 종이라도 시켜주신다면 그거라도 감사하리라.’ 그가
회심한 것이죠.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아버지께로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실 그를 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가온 것을 보자마자 달려 나가 그를 끌어안고 맞아줍니다. 그리고 그의 돌아옴을 기뻐합니다. 그를 ‘아들’로 맞아줍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이 이야기는 제가 앞서 설명한 깨어짐과 회복의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우리도 그냥 내 뜻대로 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난 것과 같습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리라는 우리의 기대는, 죄악 된 세상 속에서 무참히 깨어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 삶 자체가 이미 아버지 안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심판의 상황입니다. 절망과 아픔이 가득합니다.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봐도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아들이 유일하게 잘한 것은 아버지께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용기 하나입니다.
우리도 회심 이전에 삶이 부끄러운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킨 용기가 가장 잘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면, 내 지위와 내 상처의 회복은 아버지가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현재적 구원’과 ‘치유’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 구원인 이유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치유되고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죽음 이후에 가는 천당과 같은 곳 정도로 이해하는 신앙에서는 이 부분을
자꾸 다른 부분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뭐가 좋은데?” “나중에 죽으면 천국에 가.” “그게 다야? 지금은 뭐가 좋은데?” “음... 복을 받아.” “무슨 복?” “잘 돼. 부자 돼. 30배, 60배, 100배.” 이처럼 현세 기복적 신앙에 빠져버리거나, 그저 내세의 천국 가는 것 정도만 중요한 일로 받아들이면, 십자가의 강도처럼 삶의 마지막쯤에나 구원만 챙기려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는 현재적 열심을
끌어내려고 ‘차등상급론’이라는 이상한 미끼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복음과 진리에 대한 오염입니다. 이런 이해로 어떻게 참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또 얼마나 억울할까요? 이미 성경에 다 쓰여 있는데, 그 진리를 놓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빌 3:21)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의 시민’이 되는 것의 의미는 이 땅에서의 일을 끝내고 죽음과 함께 하늘로 은퇴하여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우리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하늘은 이 땅과 구분된 하나님의 신적 영역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부터 이 땅으로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언젠가 그분이
있는 하늘로 가서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육체에 생명을 주실 것이라 말합니다. 육체는 죽을 뿐이고 영혼에 대하여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구원은 결코, 영에 대한 것이나, 내세에 대한 것으로 한정 지을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삶에서 시작되는 생명의 역사이고, 지금으로부터 미래까지 이어지는 소망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전에 그랬다시피, 여러분 주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천국’은 ‘구원’을 얻기 위해 가는 장소를 의미할 것입니다. 심지어 ‘구원’의 의미가 ‘사후 천국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신학적 틀이 너무 견고하게 굳어져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틀로 성경을 보면, 그 틀 안에서 다 해석하려고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그분의 청취자들이 의도하고 이해했던 바에 우리가 다가서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늘’은 하나님에 대해 공손하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며, ‘하늘의 보화’란 그저 ‘하나님의 현존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저는 나중의 천국에 가서 그곳에 쌓아둔 보화를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하늘의 보화를 제 삶 안에서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그 보화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복이라.’ 이것이 진리인 이유는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에게 필요한 것은 영양분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다시 붙어서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지’에게는 나무가 복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복입니다. 우리는 헌신하고
헌금해서 복을 받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내가 같은 꿈을 갖게 되고 하나가 되었기에 나의 몸도, 나에게 맡겨진 모든 것도 주님의 뜻 안에서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정리가 되어야만, 우리의 신앙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저장되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래의 그 목적이 머물러야 하는 궁극적 장소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늘에 가야만 그 목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은 그 목적이 땅에 실현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장소이다. "자네를 위해서 냉장고에 음료를 넣어두었네"라고 말한다면, 그 의미는 그 음료를 마시려면 냉장고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미래에 주실 유산, 부패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에서 살 새로운 육체는 이미 안전하게 보관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하늘로 가서 새로운 육체를 입는 것이 아니라, 회복된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태어나기 위해 하늘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서 ‘구원의 현재성’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현재적으로 구원이 임하였을지라도, 후에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이 땅에 시작하여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표가 우리의 삶에 대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 목표는 더욱 온전하게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포기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들어왔던 것처럼, 우리의 몸도 사라지고, 이 땅도 불타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육체와 세상에 대해서 벗어버려야 할 것, 오염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미래적 구원은 차차 우리가 나눌 것입니다. 그 이전에 우리가 명확하게 정리해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임한 구원 이야기입니다. 우리 중 누군가에게는 이미 일어난, 또는 누군가에게 이제 일어나기 시작한,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이제 곧 일어날 구원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구원 초청에 응답하여 회복된 삶이 시작된 사람이 있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일어날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에 대해서 성경이 어두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임을 이해시키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이기에 하나님을 떠난 삶은
생명이 결핍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입니다. 떠났다고 처단하셔서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산소 호흡기를 떼버린 것과 같습니다. 죽음은 형벌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떠난 삶에 일어나는 수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데, ‘깨어짐’이라고 ‘양육 교재’에서는 주로 표현하는 것이죠. 깨어진 세상이 주는 고통은 아픔이지만, 다른 말로 바꾸면 통증입니다. 통증은 아프지만, 통증이 있어야 우리에게 문제가 있음을 깨닫기에 통증은 감사한 신호이기도
합니다. 통증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통증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모를 뿐입니다. 탕자는 깨어진 세상에서 아픔을 직면하면서, 자신의 통증을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삶에 대한 고민을 일찍부터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주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아픔도 경험하면서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고 싶었던 최선의 공동체인가? 더 나은 모습이 가능하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언제나 우리가 스스로 일구어내는 노력의 결과보다 더 뛰어난 주님의 일하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가지 비유를 김세윤 교수는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라고 표현하는데, 땅에서 뿌리 뽑힌 나무에게 영양제를 주고 물을 주는 것보다 더 필요한 일은 대지에 다시 뿌리내리고 땅의 공급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주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며 손을 내밀고 계신다는 것이 ‘은혜’요, 그 은혜를 알아보고 손을 붙잡고
하나님께 안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강해 중 중요하게 다룬 ‘프토코스’도 이 개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프토코스란 절대적으로 가난한 자를 의미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할 수 없는 상태,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의존한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토코스란 깨어진 세상과 자신의 깨어진 삶에 대한 자각과 같습니다. 탕자가 바로 프토코스의 마음을 가졌기에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추구하고 소망했던 세상에서는 자신이
행복하지도 안전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삶의 생사여탈권을 아버지께로 맡기는 결정을 한 것이죠. 바로 그 결정 때문에 그가 다시 아버지의 자녀로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이 깨어진 세상 속에서 답을 찾던 사람이, 이곳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합니까? ‘다 팔아’ 그 나라를 얻기 위한 결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이 내 삶에 가장 중요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처럼, 내 삶에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저울질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서 다른 것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하여 살아갈 수 있는 비법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깨닫고도 그 나라를 얻지 못합니다. 이유는 여전히 세상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자 관원과 삭개오의 차이였습니다. 부자 관원은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알고 그를 따르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는
세상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삭개오는 달랐죠. 그는 다 버리고 예수를 택하는 결정을 합니다. 이유가 있다면, 그는 깨어짐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가던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하고 지치는 것인지를 깨닫는 사람은 방법을 찾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과정에서 느낀 나의 아픔도 고난도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절망감과 무력감과 아픔을 겪지 않았더라면, 자칫 나는 이 세상이 주는 작은 행복에 만족하며
살아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어떤 분들에게는 세상은 그저 좋은 곳일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행복한 가정이나 관계들 속에서 외로움이 채워지고, 사회생활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적당한 선행을 통해 인정과 자기만족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그 요소들이 사실 나를 갈급하지 않게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충분히 만족할 상황 속에서도 자기 내면에 해결되지 않는 갈급함을 통해, 진리를 찾아 나선 용기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는 치유되어 갑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궁금증을 갖고 찾아왔던 ‘찾는이’였다면, 요한복음 7장의 니고데모는 바리새인과 함께하는 중에 있었으나, ‘예수님을 위한’ 발언을 하고,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의 장례’에 참여하며 예수를 따르는 자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의 삶은 겉으로 치유가 일어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겉으로는 크게 망가져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몰랐기에
‘거듭남’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어둠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답을 찾았고, 결국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을 되뇌며 그 안에서 진리를 보았고, 끝내 빛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자각(自覺)’입니다. 자각 : 현실을 판단하여 자기의 입장이나 능력 따위를 스스로 깨달음. 복음은 통증 속에서 자각하고, 구원의 현재적 필요를 깨달은 사람에게만 복음입니다.
나중에 필요하다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복음’은 그렇게 급하지 않거나, 현실성이 없는 신화 같은 이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자각하지 못한 삶은 착각 속에 살 뿐입니다. 우리는 급하지 않은 일이나,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다 팔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보면서도 누리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벧전 1: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벧전 1:9)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했던 이유는 바로 그 앞에 나옵니다.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시험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진리에 순종하고 영혼을 정결하게 하며,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는 그 성도들의 바라보며, 그들을 그렇게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에 경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이 무엇인가? 그것은 때로는 불로써 연단 했을 때 드러납니다. 꽃길에서 찬양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사람이면 다 합니다. 내게 선대하는 사람에게 나도 선대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마땅한 반응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는지는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고난 앞에서 달라진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내 안에서 나를 바꾸시는 분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천대와 미움 속에서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려는 새로운 마음이 나에게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들어와 싹이 나고 열매 맺기 위해 일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를 바꾸는 것은 나의 결단이 아닙니다. 나를 새롭게 하신다는 그분의 다스림을 내가 받아들일 때, 하나님 나라는 내게 임하여,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로 나를 새롭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전의
나라면 하지 못할 것도 하게 하시는 그분을 의지하며 순종할 때, 나는 고난 속에서도 찬양하고, 천대 속에서도 선대로 바꾸어 돌려주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내 무너진 영을 새롭게 하고, 내 깨어진 부분을 치유하며, 내 삶을 주님의 향기 나는 삶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주님이 약속한 결과이지, 여러분의 힘과 노력과 애씀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나에게 오셔서 내 안에 새로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달라진 나의 삶의 모습으로 그분의 영광이 되며 그분을 세상 앞에 자랑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현재로부터 시작된 이 놀라운 구원 사건 앞에서 스스로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을 것은, 이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 때입니다. (벧전 1:23)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을 정말 믿습니다. 깨어진 세상에 살면서도 그것이 깨어진 줄 모르고 그 안에서 깨어진 세상의 요구대로 경쟁하고, 성공을 위해 달음질하고, 나를 위한 삶이 지혜로운 삶인 것처럼 속으며 살아가던 우리를.... 현실을 보게 하고, 일깨워주고,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살아가게 하는 힘이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거짓된 것으로부터 진리의 자유함으로 말입니다. (마 11:28)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마 11: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수고하고 무거운 세상의 짐, 그것을 벗은 채 살아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지 않으시죠.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고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며 살라고 말합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의 마음을 치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심을 잠시 비우는 것일 뿐, 그것이 영원한 치유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심 없이 빈 마음이 아니라, 진리로 채워진 마음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6:4)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고후 6:5)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고후 6:6)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고후 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고후 6: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고후 6:9)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고후
6:10)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기에 당당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면,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분을 품었습니다. 그분과 동행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시 84:10)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