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대한 15번째 설교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을 제가 이해하면서 저에게 성경과 신앙에 대한 오랜 궁금증이 해결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제가 이번 하나님 나라 시리즈 첫 번째 설교 때 언급했듯이 ‘구원’에 대한 부분입니다. 저와 같이 '좋은 주일학교'(?)를 나오고 신앙적 조기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일찍부터 ‘구원’에 대해서 교육을 잘 받습니다. 그만큼 ‘구원의 확신’도 빠르게 배우죠. 일찍 구원을 이미 소유했다고 얻은 저의 삶은
그만큼 허무해집니다. 저는 천국행 열차에 탑승할 수 있는 ‘구원’이라는 티켓은 얻었는데, 열차에 언제 탈지 모르는 막연한 기다림에 빠진 것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 이해 속에서 ‘천국’은 죽은 후 가는 곳이고, ‘구원’은 그곳에 가기 위한 조건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했기에 초등학교 시절 이후로 저의 삶은 막연한 기다림 속에 멈춰 섰고, 제게 주어진 이 세상은 온통 떠나고만 싶은 기다림 같은 공허함이었습니다. 저에게 이런 구원과 천국에 대한
깊은 오해가 해결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깨닫게 된 이후입니다. 지금 제가 이해하는 ‘천국/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속하는 것입니다. 좀 더 풀어 설명하면 하나님의 통치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계획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질서 안으로 다시 회복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에나 해결될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구원이 죽음 이후가 아니라, 현재적 이야기로 이해되면서부터,
이제 제 삶은 구원을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구원을 누리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저의 현재적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시작했고, 그분과의 회복된 관계 안에서 저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고자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고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안 한다고 해서 제가 태만했다고 혼난다거나, 제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이 아님을 저는 압니다. Being Useless. 쓸데없이 존재해도 괜찮다는 믿음이 저에게 있습니다. 마치 제 자녀가 때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아도 저에게 그 존재 자체가 소중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부모에게는 자녀가 성장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큰 기쁨이죠. 어린 시절에는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랑하지만, 점차 무엇을 해내는 것도 자랑스럽습니다. 특별히 이제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가 꿈꾸는 것을 함께 꿈꾸며 동참할 때, 어느새 함께
걷고 있다고 느끼면 그 자체가 함께함의 기쁨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와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회복해주신 소중한 삶의 시간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함께하며 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님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꿈과 비전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그 크신 대의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잘 모르겠으나, 제가 하나님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함께 가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관계라는 것은 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관계든, 우정의 관계든, 충성과 의리의 관계이든. 좋은 관계는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함께 그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말 그대로 함께함의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삼국지에도 보면, 영웅들의 아들들은 다 장성하면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에 저도 끼워주십시오.” 아버지들이 말릴 때도 있습니다. “이 일이 애들이 장난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아들들이 말합니다. “저도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선택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승낙하여 함께 싸우러 갑니다. 어쩌면 저는 이 부분이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생겨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구원이 목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는, 내 구원이 유지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매일 같이 회개를 통해서 내 구원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하는 행위가 되곤 합니다. 매일 같이 벌레 같은
날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다고 눈물 흘리며 고백하면서, 죄인으로 한 주간을 살던 내가 다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예배를 통해 확인하는 정도에 머뭅니다. 그래서 매주 죄인 되었다가 의인 되었다가 하는 삶을 반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그것만 반복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배에 오면서부터 회개할 준비부터 하면서 들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이제 습관이 되어서, 예배 시간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가야만 마음이 평안합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바른 신학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바른 신학이 바른 신앙을 만듭니다. 바른 신앙관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소중한 삶의 시간을 허비하기 쉽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이 같은 시간도 하나님 안에서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하여 아버지의 뜻을 나도 바라보며, 그 마음을 헤아려드리고, “제가 힘이 되어 드릴게요” 말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실제로 내가 하나님께 전혀 힘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그 마음 자체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이제 나를 구원시켜 주는 존재로, 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며, 내 초점을 나에게서 하나님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아마도 이제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복음’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려는데, 혹시 여전히 복음, 믿음, 구원, 영생, 등이 이해가 안 되는 상태라면, 이 시리즈의
앞부분부터 천천히 다시 공부해오시면 됩니다. 제가 나름 차근차근 잘 설명을 해왔습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아는 척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뤘고, 이제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는 것인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믿는
우리가 붙들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꿈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1~2장과 계시록 21~22장을 통해서 시작과 완성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 나라 시리즈 설교도 첫 설교가 ‘하나님 나라의 설계도’라는 이름으로 창세기 1~2장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설교는 계시록에서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미래적 소망이지만,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을 보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비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질문을 받아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왜 만드셨을까? 우리에게 기대하신 무엇이 있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확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창 2:15)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 안에서 무엇을 하는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동산을 돌보는 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임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우리의 창조 목적이 ‘예배’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예배’가 무엇인지는 중요합니다. 저는 예전에 이 예배를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이런 예배’를 의미한다고 여겨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을 때는, 천사들처럼 24시간 찬양을 하는 것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2:1-2에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예배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모두 예배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우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시 148:3) 해와 달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빛나는 별들아,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시 148:4) 하늘 위의 하늘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위에 있는 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시 148:7) 온 땅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바다의 괴물들과 바다의
심연아, (시 148:8) 불과 우박, 눈과 서리, 그분이 명하신 대로 따르는 세찬 바람아, (시 148:9) 모든 산과 언덕들, 모든 과일나무와 백향목들아, (시 148:10) 모든 들짐승과 가축들, 기어다니는 것과 날아다니는 새들아, (시 148:11) 세상의 모든 임금과 백성들, 세상의 모든 고관과 재판관들아, (시 148:12) 총각과 처녀, 노인과 아이들아, (시 148:13) 모두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 이름만이 홀로 높고 높다. 그
위엄이 땅과 하늘에 가득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자연 만물,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자연 세계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런데 자연 세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원리에 따라 존재함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산은 산으로 존재함을 통해’ 산을 만드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별은 별로 존재함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파도는 파도치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예배는 궁극적으로 어떤 것이 예배입니까? 인간은 ‘인간 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다움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창조의 관계와 그 질서 안에서, 우리의 자리와 위치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럼,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 질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예배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창조 질서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즉,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거하는 것이 예배하는 것이고, 그에게 맡겨진 세상을 돌보는 사명을 다하고 있다면, 그것이 아담의 예배입니다. 또한 창조 세계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아담의 예배는 다른 자연 만물과 상호작용을 합니다. 아담은 동산을 돌보고, 동산은 아담에게 생명을 위한 양식을 공급합니다.
이것이 창조 질서에 맞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질서에 순응하여 살아갈 능력을 모든 피조물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는 날 수 있고, 바다의 물고기는 나름의 방법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인지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세상을 돌볼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맡겨진 세계 안에서, 세상과 상호작용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모든 만물과 함께 예배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사명은
이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다시 눈여겨볼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과 땅이 상호관계 속에 살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창 2:5)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즉, 에덴동산은 사람을 기다리며 조성되었습니다. 자연적 현상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인간이 참여해서 돌보는 곳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필요합니다. 인간을 통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시편 말씀도 각 존재의 사명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시 104:21) 젊은 사자들은 먹이를 찾으려고 으르렁거리며, 하나님께 먹이를 달라고 울부짖다가, (시 104:22) 해가 뜨면 물러가서 굴에 눕고, (시 104:23) 사람들은 일을 하러 나와서, 해가 저물도록 일합니다. 사자는 먹이를 위해 사냥을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렇게 살아갑니다.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가축에게는 풀을 선물로 주셔서 그것을 먹고 살아간다면, 인간에게는 땅을 경작하여 얻는 것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든 사명을 담은 성경 말씀이 창세기 1:26-28입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무신론’을 배격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진화주의’를 부수는 그런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속에서 인간은 어쩌다가 진화하다가 생겨난 하나의 종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 매우 특별한 사명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 가운데 하나의 종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 매우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시 8:5)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시 8:6)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시 8:7)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시 8:8)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일컬어 우주적 통치자이신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인간의 돌봄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역개정 성경 이전에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시편 8편 5절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아십니까? (시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그런데 번역이 바뀌었습니다. ‘엘로힘’은 천상적 존재인데 천사로도 번역이 되고, 하나님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개역한글 번역 때만 하더라도 감히 우리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고 말하기 어려워, 천사보다 못한 존재라고 했었는데, 성경의 신학으로 보면 천사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탄의 기원을 천사의 타락으로 많이 보는데, 천사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사람을 매우 특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형상’과 ‘모양’이라는 표현은 창세기의 독자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였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주요 신마다 그 신에게 바쳐진 성전 안에는 나름의 형상이나 제사용 신상이 있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그 형상을 통해 제사장들이 중재하는 가운데 각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제의용 신상이
신의 형상을 드러내거나, 혹은 지상에 있는 존재 가운데서는 왕을 신의 형상으로 보았습니다. 신전의 신상과 같이, 지상에서는 왕이 신들의 임재와 뜻을 드러내는 공식적 중재자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이 땅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만물 안에서 드러내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 세계가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곳이 되도록 하는 고귀한 사명을 가진 것입니다. 인류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주에 대한
창조자의 주권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대하여 왕 노릇 하리라 표현한 것과 연결됩니다. 다스리라는 사명 또한 그렇습니다. 다만 성경이 특이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특별한 한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십니다. 매우 뛰어난 한 사람을 택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스라엘에는 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뛰어난 한 인물을 왕으로 세우고 따르는 것을 필수적이라고 여겼지만, 이스라엘만큼은 달랐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복을 땅의 모든 족속에게 전달하는(창 12:3) ‘제사장 나라’ 또는 ‘거룩한 백성’(출 19:6)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 전체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왕과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정리해보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질서에 맞게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에 의한 땅의 발전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온 인류의 사명입니다. 제가 오늘 나눈 내용은 ‘리처드 미들턴’의 표현 방식을 빌려왔는데, 그는 우리의 사명을 ‘창조주의 목적에 따라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문화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원래 주님이 내게 주신 ‘존재와 관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그 자리에서 무엇하는가? 24시간 흰옷 입고 예배하는가?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에 부여한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현세적 삶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과 가치에 맞는 방식으로 돌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향상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의
머릿속에서 오늘의 이 설교는 풍삶초의 네 가지 도표 가운데 ‘세상과의 관계’라는 부분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 성경은 우리의 교과서이기에 답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책임과 사명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기독교인은 상당히 오랜 기간, 이 사명과 전혀 반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계에 대한 책임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은 이 땅을 죄악 된 세상으로
규정하고, 우리는 가급적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할 사람처럼 스스로를 생각해왔습니다. 이 세계는 죄악으로 오염되었기에, 폐기 처분하고 떠나야 할 어떤 장소처럼 여기곤 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 세상을 등지고 저 세상을 꿈꾸게 되고, 이 땅이 없어질 것처럼 여기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문자적 해석에 의존하여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베드로후서 3:10-13에 대한 오해가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본문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있는 종말의 소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모든 세계가 불에 타 없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에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즉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10절에 나오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드러날 때를 위하여 ‘거룩한 행실, 경건한 삶’을 갖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불에 타는 목적은 이 땅을 멸하는 요소가 아니라, 창조 세계 내의 모든 악한 것을 태우고 파괴하여, 우리가 사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 질서를 정화시키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드러나고 폭로되어서, 악한 자들과 그들의 모든 행위들이 더 이상 숨거나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톰 라이트)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새창조와 관련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새로운 만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것을 다 부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당연히 이 세상 안의 악한 것은 모두 정화됩니다. 그러나 이 세계가
사라지고 우리는 다른 곳으로 유유히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만물을 새롭게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심판하고 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세상을 맡기셨으며,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시작되고 이 땅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표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땅과 하늘이 있는 곳. 우리는 우주 속 어딘가 구름 위의 어떤 장소로 떠나서 불타 없어질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반드시 완성됩니다. 성경에 일어난 수많은 예언의 성취를 보면서 우리가 확신해야 하는 것은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이뤄지리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을 바르게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시작하셨고, 이 땅의 갱신을 통해서 새창조를 완성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이 세계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소중하게 지켜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으로 보면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세상의 모습에 아파하며, 그것이 회복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 만물을 바라보며 그분의 통치를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도 그분의 질서대로 각각의 자리에서 존재하는 자연 만물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경축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죄악된 세상의 유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작품이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설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적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땅에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매우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그런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납니다. 먼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내 옆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다한다면, 작은 불꽃이 모여서 세상을 밝히듯, 모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빛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빛은 그냥 빛이면 됩니다. 빛은 빛이면 그냥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삽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중하게 살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