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부터 5일까지 디도서가 소나기 같이 지나갔습니다. 이미 매일성경 묵상은 예레미야로 넘어갔지만, 이번 주가 디도서를 설교할 6년 중의 한 번 있는 유일한 기회이므로 디도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즉, 다른 말로 오늘 설교만 잘 들으면 디도서를 알 수 있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서신을 대할 때는 일단 ‘왜 편지를 보내야 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용도 에너지도 많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안부를 묻기 위해 편지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디도의 관계, 디도가 사역했던 그레데섬의 상황, 그 특성이 무엇이었는지를 우선 살펴봐야 합니다. 아무래도 여러분에게 디도서에 대한 사전 정보가 많지 않을 듯하여, 오늘은 제가 디도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영상으로 디도서의 배경을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이블 이펙트 – 디도서> 크레타섬 : 거친 지역 / 용병 많은 유대인 이민자 거주. 크레타
유대인들 중 일부가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경험.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심. 크레타에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남.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있음.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이 크레타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무질서) 몇몇 유대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 바울은 크레타 교회를 방문한 후, 그들을 도울 사람으로 ‘디도’를 낙점. 디도는 믿을만한 동역자. 그리스 출신으로 이방인을 잘 이해. 바울의 동반자로서 유대인 성도를 이해. 크레타를
떠난 후,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를 보냄. 교회를 직접 이끌기보다 성도 리더십을 성장시킬 것 : 제멋대로 아니고, 율법적이지 않은 리더. 성숙한 성품을 가진 자를 찾아 세우라.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변화를 도울 수 있다. 1. 바울의 동역자 바울이 성경에서 ‘아들’이라고 부른 사람이 몇 명이 있었을까요? 3명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디모데’가 있었고, ‘디도’에게도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도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3인칭으로 불린 것이라면, 직접 그 상대방에게 ‘아들’이라는 호칭과 함께 편지를 쓴 것은 디모데와 디도입니다. (딛 1: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와 디도 가운데는 디도가 조금 더 연장자로 보입니다. 디모데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알지만, 사실 디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디도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바울서신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중에 디도가 어떤 인물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고린도교회 이야기입니다. 우선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사역했던 교회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교회였는데, 또 문제가 가장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3번 방문을 하고, 떠나있을 때도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포함하여 5편 정도의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먼저 쓴 편지가 있었고(고전 5:9), 두 번째로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이 여러 경로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접했기에, 고린도전서를 쓴 것이고 디모데가 고린도교회로 가져가서 전달합니다(고전 4:17). 그런데 바울이 쓴 편지, 고린도전서를 디모데가 들고 가서 낭독합니다. 그런데 반응이 싸늘한 것입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의 권면도, 현장에서 디모데의 목양도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직접 갑니다. 원래 고린도에 들렀다가,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고린도교회를 가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직접 갔을 때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고 냉담하고 적대적인 태도로 대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의 리더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선동으로 교회 전체가 혼란에 빠졌던 까닭이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태도에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에 갔다가 차마 고린도로 다시 가지 못하고 에베소로 돌아오게 됩니다. 에베소에 돌아온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굳은 결심을 갖고 세 번째 편지를
쓰게 됩니다. 학자들은 이 편지를 ‘눈물의 편지/혹독한 편지’라고 부릅니다. (고후 2:4) 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 번째 편지는 아마도 바울이 아프지만 매우 강경한 어조로 썼을 것입니다. 바로 이 세 번째 눈물의 편지를 누구에게 맡기는가? ‘디도’에게
맡긴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보기에 ‘디도’는 가장 믿을만한 동역자요, 목양자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이 편지를 들려서 고린도로 보낸 후, 디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드로아 항구에서 디도의 소식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므로, 답답한 마음에 육로로 마케도니아 빌립보까지 갑니다. 거기서 고린도교회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디도를 만납니다. 그런데 디도가 바울의 편지와 마음을 잘 전달했고,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대적자들을 잘 치리하고, 정상화되었다는 디도의
사역 보고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난 후, 쓴 네 번째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그 후, 바울이 다시금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해서 로마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보자면, 디도는 굉장히 강직하고, 강단 있고, 또한 믿을만한 바울의 동역자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디모데는 조금 더 공감 능력이 풍부하고 온유한 사람이었다면, 디도는 그와 성격이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디도가 크레타섬(그레데)에 대한 사역을
맡게 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크레타섬은 디모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에서 투옥되어 로마로 이송되게 됩니다. 그 후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나고 전도여행을 하게 됩니다. 이때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자신의 동역자이자 후배 목회자들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각각 편지를 씁니다. 이때 디모데는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었고, 디도는 그레데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죠. 그 편지가 각각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로 남습니다. 그 후, 바울이 다시 투옥되어 이제 순교를 앞둔 시점에서 쓴 편지가 디모데후서로서 바울의 가장 마지막 편지로 남아 있습니다. 바울에게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디모데와 디도는 ‘믿음의 아들’이라고 부를 만큼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매우 특별한 바울의 동역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동역은 ‘같은 성령’에 의한 것입니다. (고후 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하나님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결코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도 동역자가 필요하고 몇 년 전부터 저의 간절한 기도 제목은 ‘도원결의’를 맺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맞고 비전이 같고 서로에게 진실한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사귐의교회에서 여러분이 함께 꿈을 갖고 잘 훈련되어 섬김을 배우며, 사랑을 배우며 성숙해간다면, 저는 시간이 갈수록 헌신
된 사람들이 아름답게 일어설 줄로 믿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늘 하나님이 찾으시는 때에 응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동역자이고 싶습니다. 이 일을 위해 누군가가 가줘야겠는데,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물으실 때, 언제든지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 마음을 곱씹으며 살아갑니다. “순종의 사람은 방법을 찾고, 불순종의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 저는 늘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이고 싶고, 저는 저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삶을
헌신하며 살아갈 사람들로 여러분이 성장하는 것을 돕고 싶습니다. 목사의 사람이 되실 필요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저와 함께 헌신하는 사람은 꼭 되어주십시오.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의 사람들로 겁 없이 담대하게 세상에 철들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2. 그레데의 위험 요소 사도바울은 2년간 로마에서 구금되어 있었고,
그 사이에도 그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당시 로마의 법은 18개월 동안 원고가 나타나지 않으면 죄수가 석방됩니다. 바울을 기소한 사람들은 유대인 강경파들인데, 아마도 로마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석방된 바울은 다시 옥에 투옥되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4~5년간 선교여행을 합니다. 정말 바울의 열정은 미친 열정입니다. 아마도 그가 최종목적지로 삼았던 스페인을 가게 되었다면 이때였을 것입니다. 마지막 선교여행의 경로는 학자마다 다른데, ‘로마
– 스페인 – 크레타(그레데) - 소아시아(터키) - 그리스/마케도니아 – 로마’ 정도를 돌아봤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레데(크레타섬)는 지중해에서 매우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이었습니다. 고린도, 에베소, 그레데는 위치상 정삼각형을 이룹니다. 바울이 고린도/마케도니아 지역에서 많은 사역을 담당했다면, 소아시아의 에베소에는 디모데를, 그리고 그레데에는 디도를 파송한 형국입니다. 오순절 사건을 기록한 사도행전 2장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목록에는 ‘그레데인’(행 2:11)이
등장합니다. 즉, 오순절에 복음을 받아들인 디아스포라 유대인 신자들이 그레데섬으로 와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예배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비했습니다. 바울과 디도는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던 그레데섬으로 와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상으로 활발히 선교사역을 진행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레데에 여러 가정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바울은 또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야 하는데, 이 신생교회를 위해 디도는 남겨놓고 갑니다. 디도가 이들을 잘 도와서 어느
정도 성장하면, 다시 바울에게 돌아와 함께 동역할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딛 3: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디도는 정말 바울이 아끼고 믿었던 동역자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레데는 매우 악명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용병으로 살았기에 거칠었고, 항구도시이므로 폭력과 성적 타락이 빈번한 도시였습니다. (딛
1:12) 크레타 사람 가운데서 예언자라 하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먹는 것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다" 하였습니다. (딛 1:13)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중히 책망하여, 그들의 믿음을 건전하게 하고, (딛 1:14) 유대 사람의 허망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것에 ‘그레데’라는 섬의 깨어진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레데라는 작은 세상입니다.
그럼, 바울은 그곳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요? 우선은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옳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방법입니다. 먼저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세상에 속한 삶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삶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깨어진 삶을 살고 있으나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삶의 방향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이 길이 유일한 길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 뭐 다 그렇지”라고 하며, 자신의 인생이 지금 망가져 가고 있음에도 계속 걸어갑니다. 그레데인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항상 들어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세계관이고 신앙관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에게 하나님은 제우스와 같은 분입니다. 그레데 사람들은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를 그레데 출신으로 믿고 있었기에 제우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제우스는 어떤 존재입니까? 여자를 밝히고 거짓말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기에,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레데 사람들도 거짓과 음행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제우스와 다른 인격과 태도를 가지신 분임을 가르칩니다. (딛 1:2) 나는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해 두신 영생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거짓이 없이 진실한 분입니다. 또한 그분은 언약에 신실한 분입니다.
그 언약에 따라 하나님은 메시아를 주셨고, 메시아를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다. 제가 영생이 무엇이라고 설명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죽음 이후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게 된 것이 영생입니다. 그 생명은 지금 우리의 삶에 주신 것이고, 지금 우리는 그분을 통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대부분에 있었던 유대 출신 거짓 교사들이 그레데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 등의 율법적 행위를 강요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혼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딛 1:10) 복종하지 아니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특히 할례를 받은 사람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딛 1:11)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고,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을 가르치면서, 가정들을 온통 뒤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누구에게나’의 의미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더 이상 세상의 어떤 것으로 우리가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지는 못합니다.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는 자. 우리의 주인을 바꾸는 그 고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행위는 거부하지만, 믿음의 행위는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는 생명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그레데 사람들은 거짓 진리 가운데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의 가치관과 교회 안에 존재하는 이단적 가르침을 분별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지금 여러분을 둘러싼 그 두 가지 위협과 매주 싸우듯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레데에는 그리스 신화가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면, 지금은 맘몬(재물) 사상이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레데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제우스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맘몬’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계관에 영향을 받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DTS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는 삶’이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훈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훈련으로 제시되는 것이 ‘재정과 권리포기’에 관한 훈련입니다. 결국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다음에는 삶에서 마주하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항하여 살아가는
법을 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권리포기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반응한 것이 ‘세습하지 않겠다’였습니다. 그것이 제 삶에서 하나님 외에 의지할만한 것으로 저는 느껴졌고, 그것이 주는 안정감을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도전이 제 안에 강력하게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스라이팅 하고 있는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세상은 날마다 여러분을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다른 것에 초점을 두고 살도록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별해야 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사탄이 첫 사람 아담에게 했던 선악과의 유혹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게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변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이전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따라 살겠습니다.” 3.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로 설득하는 과정은 늘 동일합니다. 그것은 ‘모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모델이 되어주셨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복음 들고 나아갔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사역 간사로 훈련 중인 예진 자매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진아, 목회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 우리는 실험용 쥐야. 우리는 기꺼이 임상
대상자가 되어 먼저 부딪혀서 보여주는 사람들이야. 무너질 것 같은 다리 앞에서 먼저 건너가며 괜찮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야.” 제가 예진 자매와 풍삶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다음 날 박안수 형제님과 풍삶기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다시 나눴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한걸음 더 앞서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 4:9)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태도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먼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동일하게 바울은 권면합니다. (딛 2:1) 그대는 건전한 교훈에 맞는 말을 하십시오. (딛 2:7) 그대는 모든 일에 선한 행실의 모범이 되십시오. 가르치는 일에
순수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딛 2:8) 책잡힐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대자도 우리를 걸어서 나쁘게 말할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딛 2:15) 그대는 권위를 가지고 이것들을 말하고, 사람들을 권하고 책망하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바울은 목회자로서 교회의 리더로서 디도가 우선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칩니다. 언제나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목회자나 교회의 리더들만
떠오르겠지만, 사실 하나님이 교회보다 먼저 세우신 공동체는 가정입니다. 그리고 가정의 리더들은 이곳에서 예배하는 여러분입니다. 그레데는 특별히 거친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위엄 있는 태도, 권위 있는 선포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태도는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먼저 누리고, 사랑하기에 나누는 것일 뿐, 결코 복음은 부끄럽거나 어리석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디도서는 목회자로서 디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또한 교회의 리더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나눕니다. 그리고 회심한 신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각 대상별로 나눠서 가르치지만,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큰 핵심은 그레데 문화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같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구별이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교회의 리더에 대한 기준으로 언급되는 내용 중에 주목할 것은 ‘쉽게
성내지 않고, 술을 즐기지 않고, 폭행하지 않는 것’ 등입니다. 이것들이 그레데에서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다 그래!”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바뀌는 것이 우선이고,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그렇게 살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줄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삶에 대한 보편적 가르침에도 주목할 것이 많습니다. ‘나이 많은 남자’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심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나이 많은 여자’는 ‘젊은 여자’를 잘 훈련하여 성장하도록 도움을 줘야 한다는 점을 권면합니다. 특별히 디도서 안에는 술, 폭력, 온전한 가정생활에 대한 권면이 많은데, 그만큼 그레데 안에는 성적인 유혹이 많았고, 그로 인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므로 무너진 가정의 모습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명령은 그레데를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레데 안에서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떠나고 거리를 두어서 구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끝으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으로 인한 변화가 세상에 대한 모든 질서를 무시하는 어떤 혁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딛 2:9) 종들을 가르치되, 모든 일에 주인에게 복종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고, 말대꾸를 하지 말고, (딛 2:10) 훔쳐내지 말고, 온전히 신실하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모든 일에서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교훈을 빛낼 것입니다. (딛 3:1)
그대는 신도를 일깨워서, 통치자와 집권자에게 복종하고, 순종하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시오. (딛 3:2) 또, 아무도 비방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관용하게 하며,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게 대하게 하십시오.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는 것을 배웠다고 하여, 직장에서도 위계질서를 무시한다거나, 사역 안에서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모두 잘못된 적용입니다. 평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질서를 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꾸로 된 나라, Upside-down Kingdom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피라미드와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뒤집힌 가치관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는 외적인 혁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인이 종을 대하는 방식이 세상과 달라지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세상과 달라지며, 종이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방식이 세상과 달라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살아가는
외적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내면의 태도와 동기, 이유에 있습니다. 겉 사람의 모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목사 가운을 입고 교회 밖에 다니더라도, 제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한 손에 성경책을 끼고 살거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산다고 하여도, 그것이 외적인 구별뿐이라면 도리어 위화감만 줄 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볼 때는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은 여러분에게서 느껴지는 내면의 거룩함으로
인한 궁금증입니다.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미혹을 당하고, 온갖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 하고, 악의와 시기심을 가지고 살고, 남에게 미움을 받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딛 3:4) 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나타내셔서 (딛 3:5)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원리는 늘 하나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하나님이 주인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밖에 있을 때도 그래야 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님을 느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외형은 세상 사람들과 비슷해 보여도 됩니다. (고전 9:20)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복음을 위하여 때로는 세상과 닮아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겉모습이 목사로서 구별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제 삶이 목사답고, 제 생각이 목사답고, 제 중심이 목사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도 이 예배 후에 세상으로 파송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여러분의 크레타섬으로 보냅니다. 그곳에서
세상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흩어져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죠. 그러나 한가지는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결코 그곳에 여러분 혼자 있지 않습니다. (딛 3:6)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딛 3:7)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있는 그곳에 성령님도 함께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그곳에서 문화적 충돌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화되어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지혜롭게 참여하되, 악한 것은 거절, 선한 것은 수용함으로 여러분이 머무는 곳에 그리스도를 전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역할은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흩어져 살아가되, 하나님이 영생으로 초청한 사람들 안에 있는 놀라움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주어, 그들에게 주님을 궁금하게 하는 삶의 모델이 되어주십시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은 이 세상 안에서, 그렇지 않은 삶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시는 이유입니다. 주를 따라 살다가, 함께 만나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