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설교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언급해 드린 것처럼, 저희는 이미 마태복음 설교를 다룬 바 있습니다. 특히 매일성경을 따라 설교를 시작했던 2019년에도 14주에 걸쳐서 마태복음을 다뤘습니다. 이번에는 가급적 그때 설교하지 않았던 본문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1~3장의 내용을 설교했고, 마태복음 4장 전반부는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을 물리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2019년에 설교했습니다. 아마 찾아보시면 예수님의 시험 사건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핵심은 이것은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당하신 사건이 아니라,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을 물리친 이야기라는 측면입니다. 바로 이 사건까지가 예수님이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이제 본격적인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의 시작을 알립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마침 금요일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국(하늘나라)이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이유는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조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늘’이라는 완곡법으로 대체합니다. 제가 이것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에게 익숙한 ‘용안’, ‘용상’, ‘용포’ 등 왕에 대한 표현들입니다. 이것은 한국인이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의 의미를 모른 채 외국인이 이 단어를 번역한다면 상당한 오해가 생겨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용안을 ‘Dragon Face’라고 번역을 해버린다면, 영어권 사람들이 그것을 읽으며 떠올리는 이미지는 왕의 얼굴이 아니라, 용의 얼굴일 것입니다. 그들이 용안을 보며 용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나, 우리가 천국(하늘나라)을 보며 공중(하늘)에 있는 어떤 장소를 떠올리는 것이나 비슷합니다. 즉 용안이라고 써도 왕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맞는다면, 천국이라는 단어를 볼지라도 우리는 그 참된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해하십시오. 천국 →
하늘나라 → 하나님의 나라 → 하나님의 왕 되심(통치) 제가 지난주에 ‘엘리야’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신호탄과 같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 전에 나타나서 그 역할을 한 것이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고, 그 나라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었음을 이제 우리 성도님들이라면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럼 이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의 상태, 즉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상태였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죄로 인해 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소외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비유할 때,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말라갑니다. 바로 그 상태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가지는 그대로 두면 죽습니다. 이런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러므로 회복하는 나라요,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깨어진 관계에서 회복된 관계로의 전환입니다. 그 나라는 어디 여행 가서 입국심사 받고 들어가서 사진 찍고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 성경은 이것을 ‘구원’이고 ‘영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럼, 깨어진 관계에서 회복된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이것을 ‘회심’이라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하는 것은 회심은 회개 이후의 지속적인 삶을 조금 더 강조하는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과정적이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즉, 그를 통해 우리의 삶이 사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우리 삶의 주도권이 세상의 왕 사탄에서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이것을 너무 종교적인 이야기로 듣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이 이야기가 사탄 숭배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이 표현을 다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늘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것을 재물이라고 표현합니다. 돈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것으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죠. 우리가 흔히 4p라고 풍삶초에서 다루는 그것들 말입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 하나님보다 나를 즐겁게 하는 삶을 선택하고 쫓는 삶. 주말에는
하나님보다 여행 다니고 캠핑 다니는 것이 좋고, 불금에는 하나님보다 클럽이 좋고, 내 삶의 우선순위가 나의 취미, 운동, 쇼핑이 좋고. 그저 재미있고 즐겁게 사는 삶이 내게 더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런 인생. 인기를 얻는 삶.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더 좋은 것. 사람들로부터 얻는 에너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채워지는 에너지보다 더 큰 인생. 지위와 성공. 점점 주목받고, 힘이 있고, 힘과 권력이 있는 삶을 쫓는 것.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을 얻으려는
삶. 그리고 재산. 부자가 되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버린 삶. 하나님을 잘 믿는 부자가 되고 싶은 삶. 하나님도 얻고 싶지만, 그렇다고 내 가치와 욕심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삶. 이런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워낙 많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가 이 부분은 하나님 나라 설교에서 이미 자세하게 다뤘으니, 오늘
이 내용을 다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얼마나 버느냐의 문제가 아닌, 그것이 내게 정말 맡기신 것으로 믿고 행하느냐의 소유권의 문제라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이유는 마태복음에서는 제가 하나님의 나라 대신 무엇을 쓴다고 했죠? ‘천국’입니다. 왜요? 완곡법으로.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딱 4번, 아주 강력한 경고와 깨달음을 줄 때 ‘하나님의 나라’라고 대놓고 씁니다. 그럼 유대인들이 깜짝 놀라겠죠.
그만큼 그들이 충격을 받고 깨달아야 할 이야기를 할 때, 하나님 나라를 대놓고 말하는데, 그중에 한번이 부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택할 것인가, 세상 나라를 택할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우리 삶의 태도와 삶을 건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신 후,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4:17에서 이때부터 비로소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며,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이것인데,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리로 넘어오라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 속한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어부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릅니다. 이것으로도 충격적인데, 마태복음 비슷한 사건을 한 번 더 적습니다. (마 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마 4: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아마도 여기부터 긴장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물까지는 이해했는데, “배와 아버지를 두고 예수를 따르다니....” 이제부터 기독교가 패륜이 될 것인가, 고민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자적으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가족과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여전히 가족들과 교제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기도 하시죠. 또한 제자들의 집과 배도 사역을 위해 사용되곤 합니다. 즉,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결단들을 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중요한 삶의 관계들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부르시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깨어진 세상으로 나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며 회복시킵니다. <메시지 성경 _ 4:23-25> 예수께서 거기서부터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예수께서는 회당을 집회 장소로 삼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분의 주제였다. 바로 지금,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질병과 잘못된 생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 전 지역에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정신 질환, 정서 질환, 신체 질환 할 것 없이 아픈 사람이면 누구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쳐주셨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행렬이 끝이 없었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삶이 마주하는 깨어진
세상의 그 고통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세상을 깨어졌다고 말할까요? 그것은 회복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과연 지금의 세상은 이것이 최선일까요? 이것이 정상일까? 저는 가끔 의문이 듭니다. 여러분. 초등학생들에게 장래희망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무원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건물주를 적은 아이들도 많습니다. 공무원은 좋은 직업이죠. 그런데 공무원이 장래희망
1위라는 부분에서 과연 그것이 아이들의 꿈일까요? 그들의 뒤에 있는 부모들의 바람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요? 공무원의 이미지는 가장 안정적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불안하다는 증거이며, 하고 싶은 것을 꿈꾸기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기 원하는 현실적인 마음이 반영된 것일 테지요. 공무원에 대한 소명과 사명이 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바람직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깨어진 세상에서 그나마 잘 살아남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학습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이 꿈꾸기에는 너무 현실적입니다. 건물주는 어떤가요? 아이들이 정말로 자기들 스스로 건물주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을까요?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한데.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사실상 극도의 불안감을 모두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무원과 건물주. 가장 안정적인 직업과, 가장 안정적으로 부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삶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5~10년 내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는 비율이 77%, 없다는 비율이 23%였습니다. 이루고 싶은 꿈(목표)’은 구체적으로 ‘원하는 만큼의 목돈 만들기’가 53%로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은퇴 후 여유롭게 살기’ 45%, ‘현재 일/공부 분야에서 경력 쌓기’ 23%, ‘자격증 따기’ 22% 순이었다. 상위권에 랭크된 대부분이 ‘돈’과 ‘경력’ 쌓기에 초점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럼 이루고 싶은 꿈이 없다는 사람은 왜 그렇게 답했을까가 궁금하죠.
‘어차피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 어려움’(37%), ‘목표를 세우고 싶어도 실행할만한 경제력 부족’(31%), ‘아직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름’(25%) 등의 이유였습니다. 그중 30대에서 ‘어차피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 어려움’을 절반(50%)이나 꼽아 ‘청년들의 삶의 고충’을 드러납니다. 우리의 삶이 참 너무나 힘겹습니다.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살아보기 위한 투쟁,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포기. 그것이 우리의 삶의 단면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당시 로마제국 사회의 가장 변두리에 있었죠. 로마가 강남이라면, 이스라엘은 변방인데, 거기서도 예수님은 유대지역도 아닌 갈릴리.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메시아의 사역이 로마제국 핵심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속국에서도 힘겨운 삶을 사는 터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메시아는 큰 나라, 영향력 있는 나라, 세상의 피라미드 정점에서 내려오는 힘의 논리에 의한 복음이 아니라, 가장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깨어진 세상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회복과 치유’를 일으킴으로, 변방의 아주 작고 힘없는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삶이 변화되는 고백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힘 있는 사람, 여유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종교를 가지고 그 종교로 기뻐하는 것은 고상한
깨달음과 지식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장 하루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삶을 건 결단이고, 그 삶을 하나님이 받으셔서 치유하고 회복하며 행복으로 바꿀 때, 그들의 삶의 모습은 그것 자체가 복음인 것입니다. 어떻게 저들이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저 환경에서도 저렇게 남을 배려할 수 있는가? 어떻게 저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하며 삶을 살아가는가? 그 이야기가 삶이 절망으로 뒤덮여 있던 당대의 수많은 깨어진
삶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그들이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마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그런데 메시지 성경은 5:1을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으로 인해 큰 무리가 몰려드는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 배우고, 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도 함께 올라갔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제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는 종교를 취미로 삼는 자들이 아니었어요.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은 예수께 인생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절망해서, 너무 아파서, 공허해서... 수많은 이유로 고민하다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그것에 삶을 걸어보기로 한 사람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다짐하고 결단한 사람들. 그들에게 이 말씀이 주어집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제가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제자도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8개의 복에 관한 것이죠. 여기서 복은 ‘내가 좋아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 복권이 당첨되고, 내가
집을 사니 값이 오르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헬라어 ‘마카리오이’ 번역하면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팔복은 인클루지오입니다. 첫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은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즉, 팔복이 말하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 현재형입니다. 즉 지금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팔복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팔복의
앞 부분은 그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삶의 모습이고 뒤는 결과입니다. 정작 그들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것은 좋은 것만 있지 않아요. 즉, 이들이 자신에게 닥친 실존적 상황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행복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지금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고, 긴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깨어진 세상이 우리에게 주었던 다양한
어려움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며 정말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이 땅의 시선으로 볼 때, 전혀 달갑지 않은 것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 애통하는 상태, 목마른 상태 등입니다. 이것이 너무 와닿지 않으시죠. 메시지 성경에서 번역한 현대적 개념으로 제가 팔복을 읽어보겠습니다. 1)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2)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3)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4) 하나님께 입맛이 당기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분은 너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다. 5)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6) 내면세계, 곧 마음과 생각이 올바른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바깥 세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7)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될 것이다. 8)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박해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모습이 여러분의 삶에서 실천되고 있습니까? 팔복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 그러시다면 그것이 진짜 행복임을 아십니까? 나는 왜 무고한 고난을 당하고 있냐고 속상해 하고만 있는 삶은 아닙니까? 세상은 우리를 자꾸 가르치고 세뇌합니다. 벼랑 끝에 서지 말고 안정적인 것을 추구해라. 잃어버리지 않게 꽉 쥐고 살아라.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꾸며진 모습으로 경쟁하는 인스타 사회.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 것을 소유하려고 입맛 당기는 삶, 남은 신경 쓰지 말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이 지혜롭고 똘똘한 것이라고 말하고.
내면세계의 어떠함보다는 영혼을 끌어와서라도 외면 세계를 확장하려는 욕심. 경쟁사회이니 네 옆은 모두 잠재적 경쟁상대라고 말하는 피라미드 구조.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고, 그로 인해 박해를 받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우리의 모습.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이 측면도 봐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의 상황이 어떤지 설명했잖아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축복이고 위로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의 축복기도를 해주거나, 우리가 원하는 위로를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며, 어쩌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어떤 것을 각오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왜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그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누리는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꺼이 불편할 용기입니다. 기꺼이 고난당할 무모함입니다. 세상에 속한 삶으로는 가기 싫어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를 그래도 자주 듣다 보면,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좌절하고 낙망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사람들이 박수 쳐 주는가? 아니요. 오히려 욕하고 핍박하기도 합니다. 선을 행하고 칭찬받아도 힘든 경우도 있는데, 선을 행하면서 무고한 욕을 먹고, 이해받지 못하고, 고난 당하면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제부터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잘 가고 있구나.” 제가
개척을 한 이유를 말씀드렸죠. 성경적 교회를 꿈꾸게 되었는데, 그것이 결국 담임목사가 되어야 시도해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세습을 해서는 결코 그런 새로운 꿈에 진짜 동지를 얻지는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아무리 무모해도 개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말리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개척이 웬 말이냐.” 아버지가 목사님이셨으니까, 아버지 주변에서도 제가 개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 무모하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고집을 부리니까, “그냥
개척해보라고 하세요. 해보면 나중에는 힘들어서 지가 두 손 들고 들어오겠다고 할 거예요.” 실제로 개척하고 한참을 성도 10명 정도 모이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거든요. 저는 평일에 일하느라 바쁘고. 아버지가 그런 제가 너무 안쓰러워 보이셨는지 “정말 후임으로 올 생각이 없는 거야? 만약 네가 20명이라도 데리고 목회를 하면, 내가 더이상 들어오라는 이야기는 안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받아쳤죠. “제가 10명을 데리고 평생 목회하더라도 저는 안 갑니다.
제가 목회를 안 했으면 안 했지, 저는 모교회로는 안 갑니다.” 제가 일하면서 목회하는 삶을 5년 반 동안 했습니다. 솔직히 쉽지 않은 순간도 많았어요. 저를 가장 괴롭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개척하고 제일 힘들었던 싸움은 남들과 비교하는 스스로의 싸움이었습니다. 소신 있게 패기 있게 개척을 시작했지만, 고된 날이 많았죠. 특별히 비슷한 시기에 개척했던 사람들의 삶과 제 삶을 괜히 비교하는 스스로의 시험에 빠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는 분립개척을
해서 많은 성도를 데리고 시작한 사람도 있었고, 지교회로 지원을 받아서 그래도 조금은 좋은 형편에서 시작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저와 달리 일을 하지 않고 목회만 하고 있었지요. 저는 매일 일터로 향해서 새벽까지 일하고 집으로 들어올 때면,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이 맞나?’ 고민이 들기도 했습니다. 남들은 지금 다 교회에서 부대끼며 뭔가를 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는 평일에 텅 비어 있고, 나는 일터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고... 힘을 내서 하다가도
문뜩문뜩 지치더라고요. “정말 이 길이 나에게 맞나?” 왜 이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어느 날, 그런 실의에 빠져 있는 저에게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정규야. 너 만약 평생을 지금 있는 성도들과 이 정도 규모로 목회를 해야 해서, 지금처럼 매일 일하면서 목회를 병행해야 하면 할 수 있겠니?” 잠시 고민을 하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네. 감사하며 해보겠습니다.” 그게 제게 맡겨진 길이라면, 몇 명의 사람이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평생
해나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진심이었고, 지금 보면 그것이 하나님이 저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고 믿어요.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사람들을 하나 둘 보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현실적으로 저희 교단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교회가 되었어요. 저도 신기합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교회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정말 많이 달라졌고, 많이 부흥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좋기도 해요. 일단 이제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고, 사례비도 받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고, 교회의 역량도 커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강의도 하고, 또 많은 목회자들이 찾아와서 탐방도 합니다. 나눌 수 있는 이야기도 생겼어요. 감사하죠.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그 광야와 같은 시간에 하나님과의 소중한 추억이 참 많이 쌓였고, 그를 통해 제가 많이 자랐습니다. 개척하는 결심보다, 개척 후 버티는 상황에 더 믿음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늘 경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잊지 않으려고요.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요. 어떤 사람들은 소위 이중직 목회를 하는 목회자가, 이중직을 하지 않고 목회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을 ‘성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성공했네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일하는 목회자의 성공은 이제 목회만 하게 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삶을 최선으로 살아내고 있다면 그 자체가 성공입니다. 저는 제가 지금도
하루 14시간씩 일하면서 목회를 하더라도, 그리고 제 삶의 끝까지 10명도 안 되는 성도들과 함께 목회하더라도, 그 삶에 최선을 다한 것이 저의 삶이라면 그 삶을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교회에 대한 그 사명 앞에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작은 공동체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는 목회자들을 존경합니다. 한 명의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교사를 존경합니다. 빈 좌석을 바라보며 최선의 예배를 드리는 예배팀을 존경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지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 길을 대하는 나의 태도이고, 그 길에서 내가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로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신앙인으로서의 가장 큰 성공은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순종’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배신하지 않는 것. 저도 계속 배워가고 있고, 애쓰고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많이 지나왔지만, 또 다른 힘듦이 우리 삶에는 다 기다리고 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는 일 안 하면서 목회하면 더 나을 줄
알았는데, 목회를 하다 보니 그 이상의 어려움들도 자꾸 옵니다. 계속 오겠죠. 더 크게 올 수도 있겠죠. 그래도 저는 주님 따라가기를 포기하지 않고 싶습니다. 아마 여러분의 삶도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늘 고된 싸움일 것입니다. 안 봐도 그러실 것입니다. 어쩌면 목회를 하는 저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큰 비바람을 맞으며 사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따라 살다가 당하는
시련 앞에서 조금만 아파하시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길이 주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이고,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라는 증거입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깨어지고 상한 내 삶에 임하셔서 그것을 회복하고 치유한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예배가 바로 우리가 그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음을 누리고, 경험하고, 드러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명선언문 Mission
Statement 사귐의교회는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날마다 추구한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경험하고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