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껍데기는 가라" / 강정규 목사

2022-05-22 · 사무엘상 4-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제가 지난번에 씨줄과 날줄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씨줄이라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어떤 인물이나, 어떤 사건, 좀 더 크게 보자면 어떤 책의 내용과 만나는 것이죠. 씨줄이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이야기이므로 성경의 역사(History)는 그의 이야기(His-story)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죠. 사무엘서를 다루며 한나, 사무엘, 사울, 다윗 같은 인물들을 만나겠지만, 결국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무엘상 초반부의 주인공은 사무엘인데, 오늘 우리가 보려는 본문에서는 주인공이 바뀝니다. 더군다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보려는 이야기는 흔히 ‘언약궤 내러티브’라고 구분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공부하며 ‘언약궤’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증거궤’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하고, 레위기에서는 ‘법궤’라고 부른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에서는 ‘여호와의

궤, 하나님의 궤’ 등으로 부르기도 하죠. 언약궤 위에 속죄소(시은좌)가 올라가 있는 형태이고, 바로 이것이 지성소 안에 보관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상징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읽다 보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갈 때, 물이 마르는 기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에도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갑니다(수 6:4, 8). 사무엘상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없으므로, 가나안 땅 실로에 위치한 성소가 하나님의 집이라

불리게 됩니다. 언약궤 또한 그곳에 있는 상태입니다. (삼상 3:21) 주님께서는 실로에서 계속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3장까지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과 그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다뤘습니다. 그러다가 4장은 1절 전반부에 사무엘에 대한 언급이 나온 후, 언약궤가 전면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삼상 4:1) 사무엘이 말을 하면, 온 이스라엘이 귀를 기울여 들었다. 그 무렵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모여들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나가서 에벤에셀에 진을 쳤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을 쳤다. 사사기 후반부에 이스라엘과 가장 충돌이 많은 나라가 블레셋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합니다. 무려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을 포기할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음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삼상 4:3a) 이스라엘의 패잔병들이 진으로 돌아왔을 때에, 장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그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하신 이유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적어도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나 사사기에서 시종일관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죠. 전쟁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4장 1절 앞에 사무엘이 사역하고 있음이 나왔잖아요. 그럼 사무엘에게라도 물어야 하겠죠. 하지만 묻지 않습니다. 교만이죠. 자신들이 다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저와 같은 목회자의 설교를 듣거나, 저와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것은 제가 여러분보다 더 뛰어나거나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제게 주신 역할이어서 저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저는 이 사역 외에는 여러분보다 많은 부분에서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삶의

지혜는 제가 오히려 여러분에게 도움도 받아야 할 영역이 많습니다. 저도 제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착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도구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말씀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묻지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판단한 그들의 결론이 3절 후반부입니다. (삼상 4:3b)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 저들은 하나님께 전쟁의 승패가 있다는 것을 믿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를 가져와서 전쟁에 승리를 도모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맞을까요? 틀릴까요? 이것은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는 문제입니다. 어떤 때는 실제로 그렇게 해서 이겼어요. 그러나 언제나 그것이 옳은 방법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느끼기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동일한 실수를 저지를 때가

굉장히 많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삶의 기초>에 보면, 재미있는 예화가 하나 등장합니다. 수련회를 가는데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는 일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치느라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있던 한 전도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수련회를 기도로 열심히 준비했는데, 사고 없이 안전하게 도착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빼먹었습니다. 이 기도를 빠뜨렸기 때문에 펑크가 났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느끼시나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목록을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어? 차량을 위해 기도를 안 해?” 이러면서 펑크가 나게 하실까요? 여러분, 그러면 불안해서 어떻게 사시겠어요. 하나님이 우리가 정말 기도하는 것만 체크하시고, 기도하다가 빠뜨린 것은 ‘네 탓이야.’ 이러는 분이신가요? 그러다 보니 그것을 한 번에 해결하려고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라고 덧붙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의 모습을 ‘보험성 기도’라고 말합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기도를 부적과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낸다거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아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나타나는 인간이 신을 대하는 잘못된 태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새벽에 깨끗한 물을 떠놓고 지성으로 빕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면서 정성을 다합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감동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극한 정성을 보인다는 측면에서는 신을 섬기고 모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닙니까? 램프의 지니 이야기나, 드래곤볼 모아서 소원을 비는 이야기에서 인간이 신에게 보이는 태도는 그의 능력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기 원하는 것, 딱 그뿐입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금식기도는 성경에서도 가르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금식기도도 다루죠. 과시용 금식기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혹은 단식투쟁과 같은 금식기도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하는 단식 농성을 금식기도라고 착각하면 오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시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 그 마음이 아이가 어머니 품을 찾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표현은 ‘젖 뗀

아이’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가는 이유가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어머니가 좋아서 그 품에 안기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젖을 먹기 위해 그 품에 안기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런 목적이 없어도 하나님을 찾는 자기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구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 언약궤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언약궤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에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언약궤를 앞세웠으니까요. 여리고성 전투가 가진 진짜 의미와 알맹이는 이해하지 못하고 껍데기만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장로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삼상 4:5) 주님의 언약궤가 진으로 들어올 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땅이 진동할 정도로 크게 환호성을 올렸다. 백성들은 언약궤가 오니까 맹목적인 확신 가운데 기쁨의 함성을 내뱉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것은 블레셋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삼상

4: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면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진에 그들의 신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외쳤다. "이제 우리에게 화가 미쳤다.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다. (삼상 4:8) 우리에게 화가 미쳤는데,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건질 수가 있겠느냐? 그 신들은 광야에서 온갖 재앙으로 이집트 사람을 쳐서 죽게 한 신들이다. 블레셋은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에 행하셨던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 또한 언약궤가 온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온 것과 동일시

합니다. 그리고 더 죽기 살기로 필사의 각오를 갖고 항전합니다. 언약궤를 앞세운 2차 전투,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삼상 4:10) 그런 다음에 블레셋 사람이 전투에 임하니, 이스라엘이 져서 제각기 자기 장막으로 달아났다. 이스라엘은 이 때에 아주 크게 져서, 보병 삼만 명이 죽었다. (삼상 4:11)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이 때 전사하였다. 여러분, 이 결과를 받아들이실 수 있습니까? 언약궤와 함께 실로 성소에서

전쟁터로 온 엘리의 두 아들은 이 전투에서 죽고,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3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더 크게 패배합니다. 그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와 유사한 일들을 겪는 것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가?’ 껍데기 신앙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조종하고자 하는 그 잘못된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잘되도록 도와주셔야 하고, 내 병을 낫게 하셔야 하고, 내 편이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어쩌려고요. 하나님의 뜻은 내가 잘되지 않아서 하나님 바라보게 하는 것이며, 내가 연약함 속에서 자신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잘못된 곳에 서 있는 내 편이 되시지 않고, 나를 바꾸고 옮기어 하나님 편으로 만드시려고 하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설교를 준비하며 보게 된

참고도서에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내 뒤통수를 치시는 하나님을 만나거든 탓하지 말고, 뼈아프더라도 내 뒤통수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라!’ ‘하나님 제가 잘못된 모습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다면, 제 앞길을 막아서라도 저를 혼내주십시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전에 사역할 때 고3 수험생을 모아두고 기도하는 시간에 했던 이야기였습니다. “수능은 정말 중요한 시험이지만, 인생이라는 긴 전쟁에 있는 하나의 전투이다. 최선을 다하여

나아가야 하지만, 전투에 실패했다고 전쟁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도 잃어버리지 말아라.” 언약궤를 앞세워 나갔다가 완전히 패배한 전투.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전투를 실패하는 것보다도, 그것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인생이라는 전쟁이 실패로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엘리는 언약궤를 잃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의자 뒤로 넘어갑니다. 목이 부러져서 죽고 맙니다. 이스라엘을 40년간 대표하였지만,

그의 마지막 죽음은 평안하지 못하였습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았습니다. 아마도 얼마나 의기양양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신? 별것 아니네.’ 그들은 언약궤를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전리품 삼아서 가져갑니다. 고대에는 민족마다 신이 있었으므로, 전쟁에서 승리한 민족이 패배한 민족의 신상을 전리품으로 취하는 것이죠. 이 행위는 패배한 민족들에게는 굴욕을 주며, 그들의 신앙에 무기력함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에는 5대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중 ‘아스돗’이라는

도시에 있는 ‘다곤 신전’에 법궤를 가져다 둡니다. 다곤은 블레셋의 1등신으로서 농업의 신입니다. 셈어 단어인 ‘다그’가 물고기를 의미하기에 한때 다곤신을 물고기 형상으로 이해했으나, 오늘날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 견해입니다. 다곤 신전에 들어간 언약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삼상 5:3) 그 다음날 아스돗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보니, 다곤이 주님의 궤 앞에 엎어져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그들은 다곤을 들어서 세운 다음에, 제자리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다곤에게 바치는 포로와 같이 언약궤를 가져다 두었는데, 오히려 다곤이 언약궤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어져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복종. 재미있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오히려 다곤을 일으켜 들어서 다시 세워둡니다. 사람들이 다곤을 돌보고 부축하는 형국입니다. 그다음 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삼상 5:4) 그 다음날도 그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 보니, 다곤이 또 주님의 궤 앞에 엎어져서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다곤의 머리와

두 팔목이 부러져서 문지방 위에 나뒹굴었고, 다곤은 몸통만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엎어질 뿐 아니라 머리와 팔이 부러져서 나뒹굴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곤을 완전히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패배가 하나님의 패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종종 하나님이 패하셨는가?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있으면 그들은 패하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멀어져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패배가 하나님의 패배처럼 여기는 그 영적인 둔감함이 문제일 뿐입니다. 다곤 신전에서 이런 일이 터진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아스돗을 치십니다. (삼상 5:6) 주님께서 아스돗 사람들을 무섭게 내리치셨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성 종양 재앙을 내리셔서, 아스돗과 그 지역 사람들을 망하게 하셨다. 악성 종양이 무엇인지는 의견이 나뉩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것이 흑사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쥐’에 대한 내용이 뒤에 이어지기에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해석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아스돗을 황폐하게 만드십니다. 블레셋은 이것이 언약궤로 인해 생겨난 일임을 바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옮겨버립니다. 이번에는 ‘가드’로 옮깁니다. 그런데 가드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에그론’으로 옮깁니다. 그러니 에그론이 난리가 납니다. (삼상 5:11) 그래서 그들은 또 사람들을 보내어 블레셋 통치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놓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돌려 보내어, 그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지 않게 해주시오!" 하고 요청하였다. 하나님이 거기에서 그들을 그렇게 무섭게 내리치셨기 때문에, 온 성읍 사람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 큰 혼란에 빠졌다. 여러분. 언약궤 있으면 이기겠지라는 미신적 신앙을 가졌던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패하고,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당황스러운 일이죠. 하나님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그렇게 넘어가다니요. 그런데 그 언약궤는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다시 돌아오도록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도구나 장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때 이스라엘은 완전한 패배하여 블레셋에게 대항할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블레셋 안에서 진멸하고 계신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 군대보다 강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보다 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에서도 계속된 재앙을 당하며 이제 언약궤를 어떻게 자신들의 땅에서 떠나게 할까를 궁리하게 됩니다. 이 시간이 무려 7개월 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블레셋은 인정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긴 시간 동안 고통당합니다. 7개월에 걸쳐 하나님이 블레셋 여러 성읍을 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메시지, 삼상 6:2) 블레셋의 지도자들이 종교전문가와 제사장과 초자연 현상의 전문가들을 한데 불러서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해야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고 이 하나님의 궤를 치워 버릴 수 있겠소? 방법을 말해보시오.” 그냥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이스라엘에서 행하는 속건제 의식을 행하며 돌려보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을 잘못 다루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회개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으로 만든 제물과 함께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출애굽 열 재앙이 그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일에 대한 단서가 된 것입니다. (삼상 6:6) 왜 여러분은 이집트 백성과 이집트의 왕 바로처럼 고집을 부리려고 합니까? 이집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가게 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온갖 재앙을 내리신 뒤가 아니었습니까? 애굽의 열재앙도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을 떠난 후 멈췄던 것처럼, 언약궤에 대하여 전리품이니 뭐니, 더이상 고집 피우지 말고 깔끔하게 포기하고 돌려보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이것이 역사를 보고 제대로 학습한 모습이겠죠. 다만 돌려보내는 과정이 조금 특이합니다. 벳세메스는 레위 성읍에 속한 땅으로 이스라엘 영토입니다. 궤를 그곳으로 보내고자 하는데, 궤를 실을 새 수레를 만들고, 그 수레는 단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않았던 암소 2마리가 끌게 합니다. 그리고 송아지들을 벳세메스로 향하는

반대편 집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삼상 6:9) 두고 보다가, 그 소가 그 궤가 본래 있던 지역인 벳세메스로 올라가면, 이렇게 큰 재앙은 그분이 직접 우리에게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소가 다른 곳으로 가면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연히 그런 재앙을 당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은 끝까지 언약궤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자연적 재앙인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계획인지를 확인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삼상 6:12) 그 암소들은 벳세메스 쪽으로 가는 길로 곧장 걸어갔다. 그 소들은 큰길에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벗어나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면서 똑바로 길만 따라서 갔고, 그 뒤로 블레셋 통치자들이 벳세메스의 경계까지 따라서 갔다. 언약궤를 실은 수레는 속건제물로 바쳐진 금덩이들을 갖고 블레셋을 빠져나옵니다. 소의 본능대로라면 송아지에게 향해야 하지만, 수레를 끄는 소들은 울음소리를 내면서도 길을 따라서 벳세메스까지 간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궤가 다시 이스라엘 영토로 돌아오게 됩니다. 언약궤가 블레셋이 바친 재물과 함께 온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전리품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블레셋에서 심판을 행하시고, 전리품을 받아서 스스로 나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가 돌아오는 일에 있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벳세메스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볍게 대하여 율법을 어겼다가 심판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언약궤는 사람이 임의로 만지거나 임의로 안을 볼 수

없습니다. 성막 건조 시에도 이것은 유념해야 할 수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 건조할 때도 성전 기물을 함부로 대하거나 쳐다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벳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본 것입니다. 이때 죽은 사람의 숫자는 사본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70명이 죽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경솔히 행동하였다가 슬픔에 빠집니다. 이 사건 또한 하나님을 우리 손아귀에 있는 어떤 존재로 대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도

언약궤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들은 기럇여아림에 전령을 보내어 언약궤를 가져가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곳에 전령을 보낸 것은 기럇여아림이 기브온 주민의 성읍으로서 이곳은 언약궤를 두기에 문제가 없는 장소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에서 벳세메스로, 벳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으로 오는 것은 점점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언약궤가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는 후에 다윗 왕이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때까지, 기럇여아림에서 20년을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사무엘상 4-6장에 나오는 언약궤 이야기입니다. 그럼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언약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 이야기는 사무엘상하 전체가 담아내고자 하는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와 일치합니다. 메시지 성경은 서문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삶 이상의 삶을 찾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 미리 짜여 있는 도덕적, 정신적, 종교적 틀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맞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그분의 이야기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부여받는다. 이는 결국 그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도덕 규범을 제시하며 “여기에 맞게 살라”거나, 어떤 교리 체계를 제시하며 “여기에 맞추어 사고하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다” 하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저 우리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초대할 뿐이다. “이 안으로 들어오라.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살아라. 이것이 인간의 삶이다. 한 인간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성경의 계시를 무엇인가를 얻어 낼 목적으로, 혹은 단조로운 삶을 다채롭게 할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그런 태도는 일종의 ‘장식용’ 영성을 낳는다. 하나님을 장식물이나 보강재로 취급하는 것이다. 사무엘서 이야기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읽고 읽는 바에 따라 살아가다 보면, 우리 이야기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우리 이야기가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앙은 껍데기로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본질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껍데기만 바꾸려 합니다.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녀의 특권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내 중심을 가장 잘 아십니다. 우리에게 진짜 변화가

나타난 것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구의 자전에 대하여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이 진리임을 깨닫는 전환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것은 내 눈으로 확인하여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지구가 어떻게 동그란가? 그럼 반대편 사람들은 다 떨어져 죽지 않나?” 이것이 인간이 가진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라고 달랐을까요? 그러나 내 눈으로 보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이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본래 진리는 나보다 깊고 나보다 높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가 그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다가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모든 질서가 무너집니다. 신의 섭리 안에서 자연법칙을 통해 완전하게 조율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곁에 두고자 할지라도, 그것은 언약궤를 가져와 전쟁에 이기려는 이스라엘의 오만이나, 여호와 하나님을 전리품 삼아 장식하려는 블레셋의 죄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동행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사무엘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신앙의 요소입니다. (삼상 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메시지 : 어린 사무엘은 성소에 있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자라갔다. 사무엘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자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삼상 3:19) 사무엘이 자랄 때에,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무엘의 삶은 그러므로 형통합니다. 앞서 나눈 것처럼, 하나님께 드려진 삶, 하나님이 붙잡고 사용하실 수 있는 삶은 하나님의 승리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를 하나님의 품 안에 맡겨서 살아가는 것도 동행이고, 하나님을 내 삶으로 가져와 내 삶의 한 요소로 두는 것도 그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하게 다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진실한 동행이 무엇인가? 부적과 같은 신앙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일까요? 내 삶에 신앙이라는 어떤 요소를 더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내 삶의 플러스 알파로 하나님을 두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참된 신앙입니까?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 내 삶의 전부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내 삶의 방향과 태도와 기준이 정말 바뀌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전제 가운데 살기로 다짐하는

것인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속한 삶으로, 주인이 바뀐 삶으로, 거듭난 삶으로 진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플러스 알파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전부가 바뀐 사람이나 때로는 비슷해 보입니다. 모두 신앙인이라는 겉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껍데기 안의 진짜 신앙은 자신만이 알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스스로를 위해서 내 모습을 진단하십시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어떤 강요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강요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택은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이 신중하게 여러분을 위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방 민족 블레셋조차도 애굽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하며, 또한 레위기의 제사법을 기억하며 자신들의 삶의 태도를 결정했던 것과 같이... 저는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기록한 성경의 진리를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해 나누어, 여러분이 지혜로운 판단을 하도록 돕고 싶은 것입니다. 아직 판단이 어려운 분들의 삶에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 깨닫는 기회들을 더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유한한 만큼, 저는 그 고민이 짧을수록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삶의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내게 정말로 하나님이 필요함을 아시고 고백하는 분들이나, 잠시 망각했으나 오늘 말씀의 진리를 통해서 내 신앙이 바르게 교정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질에 충실한 신앙으로 나아가길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축복합니다. 껍데기는 벗어버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분들이라면 오늘 말씀을 부여잡고 결단하며,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런 여러분의 갈망하는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경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껍데기는 가라. 형식만 갖추고 흉내만 내던 껍데기 신앙은 벗어버리십시오. 껍데기로 계속 나아갈 바에는, 차라리 오늘 여호와 앞에 고꾸라진 다곤이 되십시오. 차라리 박살이 나 있으면 여호와께서 그런 여러분을 치유하시고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그 마음들을 하나님은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 깊은 곳까지 잘 아시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오셔서 그 삶을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드렸던 마음과 같이 그 아버지의 품으로 진실하게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