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신앙의 abc

2026-01-04 · 사무엘상 3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2026년부터는 2018년 이후 처음으로 매일성경 본문을 벗어나서 주일설교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사실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7년간 나름의 루틴과 같은 일이었고, 매일성경을 따라 66권을 설교하면서 정말 많이 공부했고, 정말 많이 배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약 설교자로 살지 않았다면 성향상 이렇게까지 성경공부를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있기 때문에 제가 더 열심히 하고 싶게 만들고, 저도 성장하고 여러분도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매일성경은

6년마다 일독을 하는 사이클이라서 2026년부터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에 매일성경으로 메시지를 나눌 것이고, 공식적인 모든 모임에서, 혹은 비공식적인 모임에서도 가능하면 저는 묵상을 할 것입니다. 저에게 말씀 묵상이 이렇게 소중하지만, 주일설교는 이제 다른 주제들을 다루어가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한 고민 때문입니다. 크게 2가지 생각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교회가 말씀을 참 깊이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깊이가 누군가에게는 문턱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제법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또 여러 교회에서 말씀도 전해보지만, 우리교회 만한 곳이 별로 없습니다. 설교자도 설교할수록 더 깊어지고, 청중들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귐의교회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합니다. 우리교회를 찾아온 분들의 가장 큰 이유는 대체로 ‘설교’였다는 것도 여러 데이터를 통해서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족하고 찾아오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생각해 보면,

대체로 신앙의 경력이 있는 분들이나, 지적 호기심이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즉, 기존 주일설교의 특징은 더 좋은 신앙을 위해서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성경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듣고 싶은 분들에게 맞는 설교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일성경으로 한번을 더 돌아가면, 더 깊은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꽤 멋지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 저에게 ‘찾는이 중심의 설교를 하고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고민이 찾아왔습니다. 주일예배는

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오는 예배이죠. 가장 기본적인 교회의 문턱입니다. 여기서 더 깊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설교를 해나간다면, 우리는 기존 신자들에게는 더 큰 유익과 만족을 줄 수도 있겠지만, ‘찾는이’를 위해서는 그들에게 맞는 설교를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성경 중심의 설교는 수요일에 하면, 수요예배는 조금 더 신앙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이 모이기에 더 맞을 것입니다. 묵상을 훈련하는 분들에게도 더욱 알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깊은

헌신자들을 위한 메시지는 언약가족 예배에서 나눌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설교는 신앙의 경험이 없거나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도 2026년의 설교부터 하나씩 듣는다면 신앙을 배우고 차근차근 세워갈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둘째, 우리가 오늘부터 다루어갈 내용이 사실 신앙의 가장 기본기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것이 신앙의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도 ‘강점 조사’를 함께 해봤지만, 저의 첫 번째 강점이 ‘배움’입니다.

저는 가뜩이나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큰 사람인데, 근래 5년 사이에 가장 제가 많이 팠던 사람이 김형국 목사님이었습니다. 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많이 갖고 계신 선배님이었습니다. 이분이 굉장히 지적이죠. 좋은 대학 나왔고, 미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신학 계열 학교에서 신약학으로 박사를 했으니까요. 그러면 보통 ‘학자’ 냄새가 나고, 학자로서 배울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강의는 책에 머물러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강의가 지식 전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치열하게 투쟁한 그 시간과 시행착오와 대안이 들어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분이 사랑의교회에서 옥한흠 목사님과 함께 동역하다가, 1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와서 나들목교회를 시작했죠.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교회니까, 나름 그 안에서 잘 훈련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양육하고 제자로 세워가기 위해 가장 먼저 만든 양육 과정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풍성한 삶의 기초>(풍삶기)였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하나복>에 함께

하지 않더라도, 지금 한국교회에서 이 책은 정말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대 교회는 모두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풍삶초)를 기본 양육교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저희가 해보려는 교회 밖 사역 가운데 하나가, 양주에 있는 군부대에 가서 풍삶초 이끄미를 해주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보다 무엇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꽤 까칠한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봐도 ‘풍삶기’ 책은 정말 잘 만들어진 교재입니다. 이것 정도만 자기 삶에서 온전하게 내면화해도,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생긴다고 저는 봐요. 그런데 ‘풍삶기’로 그들을 양육해 봤더니, 그 가르침이 삶에 영향을 전혀 못 주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변해가는 사람들도 있죠. 그런데, 누군가는 분명히 내용은 아는데 변하지 않고, 도리어 어떤 면에서는 더 교만해지기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를 분석해 보니, 사람들 안에 신앙의 가장 기초라고 여겼던 부분들이 정리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진단하게 된 것입니다. 김목사님 생각에서는 “이

정도야, 다 알겠지~” 신앙생활을 수십 년을 한 사람들도 있고, 나름 다 한가락씩 했다고들 하는데, 우리가 이것까지 다시 가르쳐줘야 하나 싶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정리하고 가르쳐주기 위해 만든 과정이 ‘풍삶초’인 것이죠. 즉, 현장에서 부딪히며 나온 책이 ‘풍삶초’였습니다. 우리교회에서도 ‘풍삶초’를 모두와 합니다. 반응이 모두 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다 아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사실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대충 봤을 때는 아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실제로 그 하나하나가 본인에게 작동되고 있지 않거나,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아서 꺼내쓰지 못하는 경우를 저는 제법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잘 정리가 안 된 부분들이 있다 보니, 제가 조금만 캐물으면 대답이 바뀌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의 abc를 제대로 배우지 않습니다. ‘풍삶초’라는 책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나름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그 책에 담겨 있지 않은 기본적인 신앙 기초들도 꽤 많습니다. 나에게 작동되고 있지 않은 진리는 진리로서 힘이 없습니다. 나에게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신앙이 진짜 작동되게 하는 가장 첫 단추, 그 신앙의 abc를 함께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내 신앙의 기초는 안전한가?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나에게 진리로 작동되고 있는가? 사무엘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한번 살펴봅시다. 어린 사무엘이 실로의 성막에서 주를 섬길 때의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곁에서 봉사하며, 성막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무엘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이 두 번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갑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난 너를 부르지 않았다. 가서 다시 누워서 자거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다음 부분을 한번 말씀으로 읽어봅시다. (삼상 3:7) 이 때까지 사무엘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삼상 3:8) 주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째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소년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삼상 3:9) 사무엘에게 일러주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삼상 3:10) 그런 뒤에 주님께서 다시 찾아와 곁에 서서, 조금 전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삼상 3:11a)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7절을 보면 사무엘이 주님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때 사무엘이 10세 정도는 되었다고 봅니다. 아직 제사장은 아니지만 성막에서 훈련받는 훈련생입니다. 사무엘이 정말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지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경험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성막을 섬기는 방법들은 배우고 있지만, 정작 그가 배워야 할 가장 기초적인 부분은 놓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반면,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는 적어도 사무엘을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사실과 어떻게 그 하나님께 나아가 소통해야 하는지 알고 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사무엘상 3장은 그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

3:1)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삼상 3:2)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1절부터 미루어볼 때, 엘리 제사장은 육체적인 눈만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워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1~2장에서 엘리는 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자기 아들들이 죄를 짓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멈추지 못합니다. 멈출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결단하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엘리 제사장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고 밝히는 것이 사무엘상 3장입니다. 이 세대교체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다만 사무엘에게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듣는 방법, 그것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했어요. 그것이 없으니,

사무엘도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게 뭐 대단한 것입니까? 아니었어요. 다음에 주님이 다시 너를 부르면, 날 찾아오지 말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리렴.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뭐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저도 예전에는 이런 본문을 보면 놓쳤는데, 저는 지금 사무엘에게 ‘회심의 고백’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의 언어로 말하면

“주인님.” “Boss.”입니다.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 저에게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당신의 종으로 듣겠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사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제대로 시작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나’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은 대대로 기도의 민족입니다. 예수님을 알기도 전부터 원래 기도를 많이 하던 민족입니다. 정월 초하루 새벽에 산에 올라가 기도했어요. 아이가 없으면 기도했고, 대학가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사업이

안되면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무슨 일을 시작하면 ‘고사’부터 지내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입니다. 기도가 삶의 곳곳에 있는 민족입니다. 이런 민족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었습니다. 엄청난 파급력이 생기게 된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인들의 영성을 좋아합니다. 저는 제대로 믿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기독교의 옷은 입었지만, 그 중심축이 바뀌지 않은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토속신앙의 기도는 “이걸 주세요.” “이걸 막아주세요.”

“이만큼 했으니 응답해 주세요.” 이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생각하는 기도의 abc입니다. 이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대상만 바꾼 것입니다. 그전에 여러 토속 신앙적 신에게 구했던 것을, 기도의 모습을 갖춘 후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구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토속신앙의 기도에는 “신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라는 질문이 없습니다. 기도의 회심이 필요합니다. 회심을 제가 다시 쉽게 정의해 드릴게요. “회심은 중심축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중심축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이 한순간도 앞으로 제대로 나아갈 수 없어요. 나를 중심으로 그냥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 뿐입니다. 그러니까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풍삶기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머리로는 따라올 수 있어도 삶에 내면화가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뭘 들어도 내가 주인이고, 내가 중심인데, 내가 원하는 것만 하려고 하는 것이죠. 오히려 판단의 눈만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안 바뀌고. 제자훈련 백날 해도 회심하지 않으면 안 바뀝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를 대부분 생각해 보면, 회심하지 않아도 아무런 걸림돌 없이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정말 충격받았던 영상이, 제가 우리교회에 세례식을 준비하려고 유튜브에서 다른 영상들을 보는데, 담임목사님이 세례자에게 세례를 주기 직전에 “어, 너 아직 세례 안 받았던가?”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회심의 결단을 확인하고 일생에 한 번 세례를 베푸는 자리인데, 저 집례자가 세례자와 교육은커녕 이야기도 한번 안 나눠보고 그냥 세례를 주는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삐딱하죠. 그런데 세례조차도 그렇게 준다면, 사실 그 이후에 우리의 신앙에 어떤 점검의 시간들이 있겠습니까? 저는 한국교회 안에 목사님들 중에도 회심 안 한 사람도 있을 거라고 봐요. 교회의 중직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어떤 이들이 하는 모습들을 보면, 회심 안 한 것 같습니다. 회심을 했으면 어떻게 저런 마음으로 교회를 대하고 사람을 대할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할 수도 있고, 연약함이 툭 튀어나올 때도 있죠. 회심해도 훈련은 평생이기 때문에

연약함들이 묻어난다고요. 그런데 결정적 차이는 성찰이 되는가, 안 되는가? 성찰의 기준이 무엇인가? 나인가, 다른 사람의 평가인가, 하나님인가. 다윗과 사울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입니까? 중심축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도 기도 하루에 3시간도 합니다. 그런데 기도 내내 어떤 내용을 기도하고 있겠어요. 나를 중심에 두고 내 뜻 이뤄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히 기도하지만,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욕망에 가득 차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렇게 배우셨죠?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누구를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나한테 맨날 뭔가를 요구만 해요. 만날 때마다 자기의 뜻을 나에게 어떻게든 관철하려고만 해요. 그러면 그 사람 기쁘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교회가 사귐의교회잖아요. <사귐의 기도>라는 책의 영향인 것도 아시죠. 제가 20대에 그 책을 읽고 ‘사귐’을 신앙의 키워드로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사귐의 기도>가 말하는 내용이 이 부분입니다. 기도를

내가 뭔가를 얻어내야 한다는 투쟁으로 하나님께 어떤 떼를 부려서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이 사귐인가? 기도가 대화라면,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분과 잘 사귀면서, 우리가 그 앞에 머물수록 더욱 그분의 영향을 받아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신앙이죠. 만약 내가 예배를 하면서도, 예배를 해드렸으니,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 뭘 해주실까? 하는 기대만 있으며... 만약 내가 찬양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나만을 위로하고

있으며... 만약 내가 설교를 듣고 있는 이 시간조차도, 내 안의 기준이 너무 확고해서 들을 수 있는 마음의 모습조차 없다면... 우리의 신앙이 어떤 열매와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abc를 놓친 것은 아니겠습니까. “기도 응답은 원하는데, 말씀의 간섭은 싫다.”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지만,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지는 않는다.” 이것은 기도의 문제라기보다는 회심의 문제입니다. 중심축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은 시작도 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 영적 탄생은 ‘회심’입니다. 회심을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그 고백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회심을 글로 배운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 3:13)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 죄를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집을 심판하여 영영 없애 버리겠다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삼상 3:14) 그러므로 나는 엘리의 집을 두고 맹세한다. 엘리의 집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도 영영 씻지 못할 것이다. 엘리는 누군가의 회심을 도울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려 줄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중심축이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자기 자식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편에서 그들을 꾸짖지 않습니다. 엘리의 중심축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이랬다고 엘리를 버리셨는가. 아닙니다. 이미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엘리에게 경고하시고 돌이키도록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해 왔습니다. 왜요? 회심의 마음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abc가 무너지면, 그 뒤에 무엇을 이룩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무엘은 어떻습니까? 그가 이제 하나님께서 주인 된 그 삶으로 신앙의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삼상 3:19) 사무엘이 자랄 때에,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 (삼상 3:20) 그리하여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께서 세우신 예언자임을 알게 되었다. (삼상 3:21) 주님께서는 실로에서 계속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셔서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먼저 다가와 손 내미시고 말 거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이 그에 응답하여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점차 그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그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아지니, 그의 모든 선포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이 됩니다.

당연히 그의 선포는 다 이뤄지게 됩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뜻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기에도 사무엘은 하나님이 중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계속 함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그리고 예배자 여러분. 오늘 메시지의 초점은 명확합니다. 여러분의 중심축은 지금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중심축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 경고이자 희망입니다. 기름 부음 받았던 사울 왕이었지만, 그의 중심축도

어느새 자신이었고, 사람들의 평판이었습니다. 그러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궤도 이탈을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중심축을 오늘 우리는 바르게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해야 합니다. 기도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 중심된 삶을 어떻게 세워갈 수 있을지 점검해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십시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주님이 기뻐하실 것을 해보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내 행동이 될 때, 그것이 변화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오늘 예배에서, 사무엘이 배운 그 한 문장을 그냥 따라 해보며 마칩시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중심축이 혹시 조금 뒤틀렸다면 다시 바르게 세워지고, 오늘 이 예배 안에서 또 나의 중심축을 바꾸기로 결단하는 그런 모든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