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상처가 죄는 아니지만

2026-01-08 (올린 날짜) · 창세기 4장 1-8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 수요 기도회 어 2022년 1월까지는 저희가 수예배를 드렸었는데 그 이후에는 수예배가 공다가 아주 오랜만에 수요일 날 다시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늘 매일 성경 본문이 창세기 4장이잖아요. 오늘이 본문을 가지고 제가 여러분과 함께 어느 정도 짧게 말씀을 좀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네. 네. 창세기를 우리가 묵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세상과 인간의 시작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도 보여주지만 모두 보여주냐면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어, 창세기를 보면은 굉장히 디테일해요. 예를 들어서 죄 이전의 사람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안에 있었습니다. 그때의 특징이 어떻게 나오냐면 두려움이 없었어요. 수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기 전에는 숨을 이유가 없었고 서로에 대해서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감출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세계를 몰라요. 왜냐면 우리는 죄가 들어온 이후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우리의 즉 모든 본성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어 분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사람은 가장 먼저 나타난 모습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부부조차도 아담과 하와조차도 서로를 온전한 하나로 보지 못한 채 이제는 아이 사람은 나의 타인 밖에 있는 존재처럼 느끼면서 수치를 서로에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뭐냐면 위기가 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위기가 오니까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죄로 인해서 달라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모습들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너무 자주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아주 오래 전에 쓰여진 문서이지만 오늘 여전히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관계는 왜 이렇게 복잡한지 정확히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아담과 하는 자신들이 저지른 하나님에 대한 배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결과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게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비록 그들을 징계하시지만 죄를 징계하는게 제가 느끼긴 사랑하는 거거든요. 죄를 징계하지만 하나님은 그러나 징계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셔서 내가 여전히 너희를 보호하는 존재하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뭐냐면 그들이 죄 이전에 받았던 사명, 창조 사명,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온 세계에 전파하며 나를 대신해서이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라. 이런

사명을 죄가 지은 죄지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에게 주신다라는 사실입니다. 한번 말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한 장 넘겨 주시겠습니까? 한번 읽어 볼게요.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상에서 그를 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알게 하시니라. 네. 여전히 하나님께서 원래 그에게 주셨던 사명이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을 관리하는 거였잖아요. 경작하는 거. 동동산직이었어요. 이제는 에덴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해서 청지기적 사명을 다하는 것을 어 죄 이후에도 명령하십니다.

또한 홍수 심판이라는 그 끔찍한 사건 이후에도 창세기 9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여호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명하고 건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네. 창세기에 창조 때 주셨던 사명이 여전히 노아 홍수가 끝난 뒤에도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냐면 사명은 중단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이루고 싶은 꿈을 버리지 않으셨다. 다만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그 방식이 달라졌다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오늘 보는 창세기 4장은 자녀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에덴 밖에서 살아가는 보편적인이 세상 가운데 놓여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담의 가족들은 비록 에덴에서 추방되었지만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살아가고 있냐면 예배하며 살아가요. 그렇죠? 예배 살아가는 삶을 세고 있습니다. 가인은 뭐였습니까? 가인은네 농부였죠. 그리고 아벨은 예 양치기였습니다. 그게 그들의 생업이었어요. 너희가 생육한 권성하여 땅에서 너희에게 주어진 이 하면

살아라. 그들의 직업이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수고했고 청지기적 삶을 살았다면 그 수고의 결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는 거예요. 이게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하게 된 거예요. 오늘 본문 보면. 근데 아벨과 그의 재물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고 가인과 그의 재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예배 세미나에서 나오는 얘기지만 여기서 사람의 이름이 먼저 어 재물보다 언급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주목하면은 사실입니다. 즉 아벨과

아벨의 지사 가인과 가인의 지사니까 그 예배자가 어떠했는가가 굉장히 중요하다. 예배는 어떤 재물인가 보다. 그 예배자의 태도가 중요하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있는 거 중요하다. 분명히 주목하려면 포인트예요. 근데 재물 또한 잘 봐야 됩니다. 왜냐면 아벨의 재물을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냐면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입니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한 것은 내 거 다 쓰고 남은 거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였다

얘기예요. 첫 번째 새끼와 기름 가장 좋은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예배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즉 아벨의 예배는 우선순위가 분명한 예배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이 가인의 재물은 뭐라고 하냐면 그냥 곡식입니다. 곡식을 드리는 거 자체는 잘못된게 아니에요. 왜냐면 가인은 뭐예요? 농부였으니까요. 예. 레위기에서도 소재를 드리게 돼 있습니다. 소재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예요. 가능합니다. 다만 여기서

아벨의 재물과 차이점은 뭐냐면 여기는 가인이 농사 짓고 첫 소산을 들었다거나 가장 좋은 것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배는 드렸지만 어쩌면 삶의 중심을 내어들이지 않은 예배였을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의도적으로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우선 순위는 어 바뀌지 않은 예배는 해야 되니까 하지만 그러나 아벨과 같은 우선순위 갖고 있지 않은 가인의 예배였을 수 있다는 거죠.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는 있지만 나아가지만 여전히 통제권은 내가지고

있는 그런 가인의 예배였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세요. 인격적이라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가 인간관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거보다 어쩌면 더 우리와 친밀하게 교재하시고 우리 잘 아신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하다못에 우리가 누군가와 교재를 인간이 하더라도 누가 나에게 선물을 줘도 혹은 같이 밥을 먹어도이 사람이 진짜 나하고 같이 함께 하고 싶어서 사는 건가 아니면 어떤 마음을 하고 있는 건가 우리도

느끼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아벨의 예배와 가인의 예배를 보면서 하나님이 당연히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아벨에게서는 아 진짜 아벨은 나를 예비하기 기뻐하는구나. 가인에게는 어쩌면 아 얘는 약간 억지로 하는구나. 해야 되니까 하는구나. 기꺼이 드리는 예배와 조금은 억지로 드리는 예배 아마 그 차이를 하나님이 느끼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것을 가인의 비례를 받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가인의 마음이 어떻게 돼요? 불편해집니다. 4장 5절 후반절 한번 말씀 한번

앞에 읽겠습니다. 시작. 가인은 몹이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하나님이 예배를 안 받으셨다는 사실에 가인은 화가 났어요. 왜 화가 났을까요? 아벨권 받았어. 내 건 안 받았어. 비교. 뭐 나도 그래 나름 곡식 저기서 해서 갖고 왔는데 억울함, 질투, 상실감 다 통통 말하면 쉽게 말해. 지금 가인은 상처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인의 상처를 공감해요. 상처받을 수 있다. 가인이 잘했다라는게 아니라 가인이 충분히 상처받을 수도 있겠다. 누구냐에 따라서

분명히 조금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가인의 모습. 또한 아벨보다 형인데 어쩌면 동생은 막 잘했는데 자기는 예배를 어쩌면 실패한이 상황 거기서 충분히이 상황에 대해서 불편했을 수 있겠다. 하나님은 이 가인의 상처를 아시죠? 그래서 가인의 상처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와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야, 왜 화를 내냐? 죄가 문 앞에 엎드어 있으나 너는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세요. 한번 다음 장 넘겨 주시겠습니까? 한번 읽어 볼게요. 시작. 너희를 만져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야, 지금 네가 오케이. 너희만 알겠어. 근데 너 지금 굉장히 조심해야 돼. 내가 말을 너 지금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너 죄가 너를 집어삼킬 수 있어. 그건 안 돼. 너 그거 다스려야 돼. 이 얘기해 주시는 거예요.이 얘기 왜 하시겠어요? 사랑하니까 하는 거예요. 저는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를 안 받으시는 것도 이해가 돼요. 왜냐면 잘못된 예배 드렸는데 그냥 계속 그렇게 방치하게

되면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도 하나님이 하실 하신 거예요. 아 근데 가인의 섭섭함도 이해가 돼요. 그럴 수 있어요. 근데 중요한 건이 상황이 뭐냐면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 가인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가인아 너 이거 조심해야 돼. 여러분, 가인이 받은 상처까지는 죄가 아닙니다. 상처가 죄는 아니에요. 그거는 우리의 약함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모두가 상처받진 않을 거예요.이 상황에서. 근데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거는 그냥 가까이 가진 약함일 수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뭐 크고 크든 작든 살며 상처를 받습니다. 근데 이 상처라는 것이 같은 말을 해도 같은 상황에 처해도 때로는 나는 같은 사람인데 내 마음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서 어떤 때는 상처를 받고 어떤데 안 받아요. 그 이게 참 누구 잘못이 말하기 어려울만큼 복잡해요.이 이 문제는 내 마음 상태에 따라서 때로는 이렇게 들리기도 하고 저렇게 들리기도 하고 아마 내가 살면서 상처를 하나도 안 받으려고 하면 아마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와도 관계맺지 못할 겁니다. 그까 저는

그냥 상처가 바이러스 같은 걸 생각해요. 그리고 무균실에 있지 않는 한 우리에게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고 괴롭힐 수 있어요. 여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세상 살면서 어쩌면 견뎌야 되는 걸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뭐냐면 상처가 죄에게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상처의 모든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고 미워하기 시작하면 내가 갖고 있는 약함은 악함으로 변질됩니다. 어 저도 당연히 상처받습니다. 아마 상처받을 만한 일을 겪는 걸 생각하면 아마도

꽤 높은 순위의 직업을 제가 갖고 있다고 전 생각해요. 상처받을 수 있죠. 그런데 그것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저도 부단히 애쓰고 있어요. 약함은 주님께 내어놓고 악함이 틈타지 못하도록 우리는 늘 잘 살펴야 돼요. 그래 나 약할 수 있지. 근데 약함을 주님께 내어놓고 악함이 나를 집어 상키지 않도록 내가 날 대비해야 됩니다. 가인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할 수도 있었어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더 나은 예배를 배울 수도 있었어요.

하나님이 어쩌고 그걸 원하셨을 거예요. 그럼 그는 그냥 기분이 상해 있었습니다. 기분만 상해 있었어요. 하나님께 기분이 나쁜데 하나님을 공격할 수 없으니 이제 그의 분노는 가장 약한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여러분 원래 분노는 그렇습니다. 내가 뭐에 분노가 쌓이면 내가 이제 그 터트려야 되는 상황이면 내가 가장 안전하게 느끼는 대상이나 가장 약한 내상에게 쏟아놓게 돼 있어요. 이게 저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보통 아빠가 밖에서 뭐 아주 기분이 안 좋으면 괜히

와서 엄마한테 백 이러고 엄마 또 기분 나쁘면 엄마는 또 아들한테 맥 이러고 그럼 괜히 첫째는 셋째한테 그러면 셋째는 집에 방에 가서 장난간 집어 던지고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이게 우리의 방식이라고요. 아, 근데 이게 당연히 좋은 방식은 아니에요. 왜냐면 이렇게 되면 상처가 상처를 낳는 거예요. 상처가 또 다른 사람의 상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이 함께 더 아파지고 함께 더 나빠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가인아 죄를 다스려야 돼.

하나님이 가인에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 하시는 겁니다. 근데 가인이이 분노를 가장 만만한 대상인 아벨에게 향합니다. 사실 이게 이렇게까지 해야 될 일인가? 살인까지 해야 될 일인가? 아니에요.이 상처를 묵상하고 감정을 묵상하고 분노를 다스지 못해서 결국 이게 엄청난 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상처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어요. 그 사람의 마음이 그만큼 힘겹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사람 마음이 지금 많이 아프기

때문에 상처를 더 다스리지 못할 수가 있어요. 특별히 그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괜찮으면은 그래도 하나님의 공급을 받으면 괜찮은데 그것도 안 될 때는 더 어렵습니다. 그럼 우리면 더 연약해져서 상처도 더 잘 받고 스스로 해소하는 방법을 잘 못 합니다. 취약해져요. 그러면 우리도 의도하지 않더라도 내가 취약해지면 죄로 향하기 쉽습니다. 죄에 먹잇감이 되기 쉬워요. 가인처럼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거나 자기 자신을 너무 미워해서 스스로 끝없이 자기 비하에 늪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는 에덴을 떠난 보편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가 어쩌면 한 순간에 그 분노라는 감정 하나에도 이렇게 망가지고 무너지고 어 망가 그 깨워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만큼 인간은 어쩌면 불안전하고 연약합니다. 우리 말하는 인간은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과 관계 깨어진 인간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너무 많은 감정이 찾아와요. 그 감정들 자체는 때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감정들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감정을 하나님께 가져가지

않고 혼자서 그 감정을 묵상하고 침묵으로 방치하면 상처는 점점 분노로 분노는 왜곡된 판단으로 더 심한 왜곡은 관계의 파괴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원하시는 것은 내가 널 알고 있어. 그니까 나에게 가져와. 내가 너 도울 거야. 가인의 모습 보면서 가인처럼 가면 안 돼.라고 라고 말하고 있다고 좀 생각합니다. 사랑 여러분, 우리도 어 저는 세상을 살아가는 거 자체가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연약함의 폭탄 사이를 걸어가는 것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어요. 제가 봤을 때 현대인들이 전보다 더 감정에 취악합니다. 그만큼 아픔이 많아요. 그래서 살다 보면 난대없이 여기서 펑서 펑자가 받은 상처가 어느새 옆에 있는 사람을 찌르는 일이 정말 비일비지합니다. 상처 입은 세상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어요. 기독교 신앙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원래 우리도 그렇지만 복음이신 우리의 그 삶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이제 전과 다른 존재로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이전에 나는 어쩌면

가인과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을만큼 약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 나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나는 이제 다른 길을 갈 수 있어. 이렇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 저는 우리 안에 모두가 조금씩이라도 가인이 있다고 봐요. 우리 안도 가인의 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은 나이고 이제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이 수요 기도에 온 것도 우리가 그 하나님과 함께함을 더욱더 힘 있고 누리기

위해서 오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의도적으로 더 붙어 있고 하나님의 지혜를 더 구하고 하나님 뜻에 합하여 살아갈 때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식들이 생겨나서 그것이 우리를 치유하고 자리잡아 갈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상처 입은 마음을 아시고 다가와 치유하기 원하시고 때는 어떤 부분에서 알려주기 원하시고 바꿔오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예배로 불러 주셨습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주님과 교재하면서 나아갈 때 우리의 연약함은 주님이 일하시는 공간이 되고 우리의 삶은

복음이 변화시켜 가는 아름다운 열매가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 그런 마음으로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