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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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1 · 요한복음 14장 17-18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내 평생 사는 동안 / 말씀하소서 / 하늘소망 은혜로다 /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 / 주님의 시선 + 은혜로다 기독교 신앙을 현대적 언어로 설명하는 두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도 저는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에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성경의 언어를 최대한 쉽게 전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매우 도전을 받으며 읽었던 책 가운데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안수현’이라는 이름의 한 의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33세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책은 안수현의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동료 의사들, 그와 만났던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 병원의 청소부 아주머니, 식당 직원, 침대 옮기는 분까지 수많은 사람이 그의 장례식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안수현’에 대해서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수현이 썼던 글과, 그를 경험했던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간증이 어우러져 책이 되었습니다. 즉, 안수현이라는

사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두 갖게 된 어떤 특별한 경험이 그들을 엮어주었던 것이죠. ‘기독교 신앙’도 이와 유사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통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함께 공감하고 묶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실 책의 종교가 아니라 경험의 종교입니다. 성경 안의 인물들은 자신의 삶 안에서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각해 본다면, 처음부터 성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글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바로 그 경험의 기록이며, 그 이후의 모든 사람은 성경을 통해 배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안수현’처럼 눈에 보이는 존재라면 그 경험은 일차원적이고 지극히 보편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우십니까?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눈으로 보고 만져야 하는 우리 차원 안의 존재일 경우에는

좋은 점도 있지만, 좋지 않은 부분이 훨씬 더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선 어디나 계실 수 없겠죠. 또한 영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 안에서 거하시며 말씀하시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또한 우리 차원 밖에 계신 신이어야 우리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이해가 잘 안되었던 것이 예수님이 떠나시며 하셨던 설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더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보고 만졌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사실에 불안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경험을 가장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성령이 오시는 것이 유익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육신으로 거하신 예수님은 영원토록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 안에서 사역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영적 존재’입니다. 영적 존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초월적 존재,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차원의 존재는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만 만나고 누리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라고 표현하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가 이 세상에 오셔도 그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무신론 연설가인 ‘로버트 인거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는 링컨 추도 연설을 했을 정도로 당시 그의 연설 능력은 최고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그 재능을 무신론적 입장을 대변하고 기독교 신앙을 조롱하는 데 사용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신 없어도 충분히 도덕적이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라는 주장을 했던 대표 인물입니다. 인거솔이 공개 강연 가운데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내가 지금 여기서 그분을 모독하는 이 순간, 10분

안에 나를 벼락으로 쳐 보시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 그리고 온갖 조롱과 저주를 하나님께 쏟으며 모독합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벼락을 맞았을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더욱 의기양양하게 외쳤습니다. “봐라.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 청중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때 한 기독교인이 일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오. 내가 보기에 오늘 당신의 연설은 ‘신의 무존재’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신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오.” 어쩌면 이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이 했던 말씀의 맥락과 딱 맞는 것이 아닐까요? 인거솔이 속한 깨어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합니다. 당연히 경험도 없죠. 그래서 그들에게 신은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말 모두에게 신은 이렇게 없는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없는 존재를 예배하고 있지 않습니다. 훗날 로버트 인거솔의 장례식에 대한 전승입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성경 구절은 읽히지 않았고, 부활의 소망도

없었고, 다시 만날 것이라는 말도 없었고, 오직 침묵과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이런 말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다.”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냐? ‘신과 연결되는 것,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것, 현재와 영원이 연결되는 것.’ 저는 연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거솔은 하나님을 증명하라고 요구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연결을 요청하십니다. 신은 번개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스스로 증명할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합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겠다고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보여줍니까? 아닙니다. 이름을 부르고, 대화하고, 손을 잡는 ‘연결’을 통해 존재를 확인합니다. 인격적인 존재는 증명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증명되지 않아서 사라지는 분이 아니라, 연결되지 않아서 경험되지 않는 분입니다. 정말 감사하고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이 연결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연결을 제가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원래 우리와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죠.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의 차원과 자기의 눈높이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애초에 전제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여러 번, 인간은 같은 질문을 하고, 하나님도 몇 번이나 당연한 이 존재적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셔야 했습니다. 욥기라는 책이 있죠. 욥기의 주제가 ‘고난’이라고 생각하면 배경에만 너무

집중해서 책의 전체 주제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욥기는 “인간이 하나님을 심문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묻는 책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하나님을,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가?”를 묻는 책입니다. 그래서 욥기에서 하나님이 침묵 속에 주시는 대답은 “나와 너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욥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우리가 욥기를 읽으면서 만약

기분이 나쁘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어린 자녀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아이와 상의하지는 않습니다. 회사의 문제를 상의하거나, 대출의 문제를 상의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의 세계는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부모의 판단과 세계 전체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부모가 아이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존재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 55:8)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모세는 이렇게 요청합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8) 그런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0) 이것은

거절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기 싫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의 세월을 함께 지내시며 무엇보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선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8: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알 수 없는 어떤 사실을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계시의 책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고자 하신 사실이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창조’입니다. ‘창조’를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존재적 차이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민족마다 신이 있고, 그 신을 개념화해서 필요에 맞게 대우하고 사용하는 것을 인간은 즐긴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에게 역할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성주신’이라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역할을 하는 신인지 아십니까?

집을 지키는 신입니다. 이사하거나 집에 문제 생기면 먼저 찾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집이 잘 돌아가면 신경을 안 씁니다. 문제가 생기면 “성주신이 노했다”고 말합니다. 집이 잘될 때는 생각하지 않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잘 다루는 비법이 ‘종교’라고 생각하고, 그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 ‘영험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출산은 누가 담당합니까? ‘삼신할머니’가 담당합니다. 아이를 낳을 때면 삼신할머니를

절실하게 찾습니다. 그런데 출산 끝나면 관심도 없습니다. 바다의 담당은? 용왕이죠. 산마다는 산신령이 있습니다. 이렇게 역할과 한계를 구분하고, 개념화해서, 사람들은 필요에 맞게 신을 사용하는 것을 즐깁니다. 이것이 신을 이야기하지만 철저하게 인간중심의 종교 모습입니다. 이게 똑같이 현대화된 표현이 이런 것입니다. “요새 마음이 힘드니까 종교가 필요해. 요새 어려움이 많아서 기도해야겠어.” 이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과 관계를 맺고

사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할 때 호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시작되는 것은 신비와 같아서, 그릇된 동기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끝까지 머물면 안 됩니다. 성경을 통해 바른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지 못해서 망가진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다신론’은 모든 신을 다 인정하는 것이고, ‘단일신론’은 그중에 우리 신이 최고라고 믿는 것입니다. 뭐가 맞습니까? 둘 다 틀렸습니다. 성경은 유일신을 말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여호와를 잘 믿었어요. 필요에 맞게요. 그들은 특별히 여호와를 마치 사막의 신이나 전쟁의 신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담당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정? 풍요? 이쪽은 하나님보다 더 담당자가 있을 것 같은데…. 농경사회로 넘어가면서, 자신들의 주된 신인 여호와 하나님도 챙겼지만, “그래도 재정은 바알이 낫지 않아?”, “하나님만 믿고 의지한다고 농사도 잘될까? 그것은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아?” 마치 오늘날 누군가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일단 주된 신으로 하나님은 믿고, 예배하며 최소한의 보장은 들어놓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다 해결되나? 그래도 내 사업이나, 자녀의 문제나, 이런 것들은 다른 데서 대안을 찾아야 하지 않아? 필요하면 뭐든, 혹은 유능한 사람이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지.” 이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창세기의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매우 의도적인 책입니다. 하나님을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책입니다. 자꾸 우리가 은근슬쩍 하나님을 낮게 본다니까요. 하나님이 나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수호천사쯤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해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감격과 놀라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일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우리와

존재의 격이 다르기 때문에, 원래라면 그분의 존귀함을 볼 때, 그분은 절대 날 위해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세계에 자신을 내어줄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내가 함부로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함께하고 싶다고 함부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것이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우리가 진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것입니다. 나

중심적인 신앙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신이라면 그게 하나님이든, 그것이 수호천사든, 그것이 뭐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여기가 조금 더 능력이 있는 것 같으니 기독교 믿다가, 기독교가 막 욕먹으면 “이 집이 아닌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기독교를 아예 모르기 때문입니다. 창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나는 시작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나에게 속했다는 메시지입니다. “빛도 나에게 속했다. 하늘과 땅도, 시간의 구분도 다 나에게 속했다.”

의도적으로 당시 고대인들이 가장 숭배했던 ‘해와 달’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습니다.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 그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속한 것이라고 정리해 주는 선언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위치와 하나님의 위치를 아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연결’입니다. (창 1: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모든 것은 하나님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그대로 두시지만, 유일하게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한 존재로 지으시고 자신의 뜻과 우리를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에게 주어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크고 높은 존재이시지만,

우리에게 성큼 다가오셔서 함께하기를 원하셨던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결국은 이 연결성 안에서 우리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풍요롭고, 가장 충만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본값이었기 때문에 사람은 우리에게만 주어진 이 특별한 연결성을 복으로 누리고 살아가도록 세팅되어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영적 존재’라고 부르는 것이죠. 우리가 알다시피 이 복된 연결이 끊어지면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며, 결국 기독교 말하는 복음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기본값을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더 자세히 다루어갈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연결의 관점에서 오늘의 메시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잘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연결 의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져서 하나님을 놓치게 되었을 때도 그가 먼저 다가오셨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세대에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결국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깨어진 세상이 갖게 된 유일한 희망이며, 여전히 유효한 우리의 믿을 구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 안에는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 세상의 어떤 소리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땅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현실의 어려움은 종종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커 보이고 힘이 있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예배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잘 연결되어 있어야, 우리는 세상의 거센 풍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 속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과의 가장 강력한 연결이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예배 안에서 그분과 깊은 연결을 누리십시오. 마음을 열고 “주님, 저도 주님과 연결되고 싶습니다.” 그 진실한 마음을 드리며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방법입니다. 오늘 이곳에 아직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서 그 연결이 흐릿하거나 혹은 너무 가혹한 세상의 삶 가운데 하나님과의 연결을 놓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너무 두려워하거나 스스로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정죄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다시 연결하시려 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 그분이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임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연결이 깊어지면,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것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이 깊어지면, 그때 나를 괴롭히던 공허함과 부정적인 마음들과,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상의 것에 함몰되어 있던 나의 시선과 생각을 오늘 말씀의 진리로 재해석하고, 하나님께 연결되기를 소망하며 나아가십시오. 주께서 반드시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만드신 시간 이전의 존재,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믿으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제 찬양과 기도를 사용하여 그분께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