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하나님이 또 아프셨다

2026-01-15 (올린 날짜) · 창세기 11장 1-9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말씀은 창세기 11장 1절부터 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술 메일 성경 본문은 10장인데 목요일 본문이 11장입니다. 어느 목상 본문이 10장을 보면 노아의 새 아들인 샘함에게서 70에 70개의 민족이 퍼져 나오는데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대로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미 10장을 보면 그들이 나누어서 흩어져 있고 각자의 땅과 언어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근데 10장은 왜 흩어졌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즉 10장이 앞에 기록되었지만 11장이 그 사건에

발단이 되었던 어 그런 일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으로 보자면 11장이 10장보다 앞서 사건입니다. 그러므 11장의 말씀에 이해할 때 10장에 나오는 그 흩어짐의 이유와 그 신학적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우리이 말씀을 실제로 한번 읽어 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했었다. 사람들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신할 땅 한 들판에이어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말합니다. 신날은 바벨론니아 평야를 말하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는 가나안 땅보다 훨씬 오른쪽에 있는 남부 메소타미아에 위치한 수메르 평에 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에서 동쪽으로 갔다라는 의미는 어떠한 어 상징을 좀 갖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입구가 동쪽이에요. 입구가 동쪽란 얘기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들어온다는 얘기죠. 성막도 위치가 정해져 있는데 성막의 입구도 동쪽입니다. 즉 동쪽 입구를 통해서 서쪽으로 들어오는 구조입니다. 그 반대로 동쪽으로 더

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신하 평야족 즉 동쪽으로 향하던 무리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어떤 꿈과 자신의 어떤 계획과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 무리들이었다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과 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원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도를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알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우리가 바벨탑 사건을 이해할 때 잘못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탑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경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엄밀히 말하면 여기 보면 도시를 세우는 거예요. 도시를 건설한 프로젝트고 거기에 어쩌면 랜드마크처럼 탑을 쌓는 것입니다. 수메르 지역은 기원전 4,000년 경 후기 우르크 시대부터 가마의 구운 벽돌를 만들어 건축에 사용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즉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볼 때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도시화가 막 진행되는 시기였던 것입니다. 고대의 도시는 대체로 신전 복합체의 어떤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그 중앙에 있는 어이 건축물을 탑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다만 이 탑은 우리가 한국에서 보는 뭐 다보탑이나 석가탑 같은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절대 다수의 신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여기서 말한 바벨탑이 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지구라트라고 불리는 그 건물이라고 봅니다.

이게 지구라트입니다. 지구라트는 어 일반적으로 어 비슷한 모양을 갖고 있는데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신전의 의미로 건축된 것입니다. 지구라테는 이렇게 보면 계단이 많죠. 계단이 매우 중요했는데 바로 이 계단으로 신들이 자유롭게 올라오락 내력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신과 연결되는 또 신이 머무는 그런 통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이 지구라트의 건설은 신의 세계에 닿기 위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에덴 동산에 다시 얻고자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원래의 그 충만한 임재를 상실하게 되었죠. 풍성한 삶이 끊겼습니다. 즉 이거에 대한 공허함이 생기잖아요. 풍성한 삶에 대한 어떤 인간의 욕망은 그로 인해서 어떤 본능 같은 것이었고 홍수 후에도 인간은 이제는 지구라트 걸립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신 그때 당시에 새로운 문명의 힘을 이용해서 신과의 연결 풍성한 삶을 스스로 획득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에게 닫기를 원했고 자신들이 만든 계단을

통해 신이 오가 수 있도록 함므로 자신들이 만든 그 구원의 길에 신을 참여시키고 혹은 신을 묶어 두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또한 인간이 신을 길들이고자 하는 그 마음에서 시작된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명백히 바벨의 도시와 탑을 건설하고자 하는 이 사람들의 목적이 두 가지가 나오고 있는데요. 우리의 이름을 알리자. 그리고 온 땅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이름을 알리는 것과 온 땅에 흩어지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바벨를 건축하는 사람들이 얻고자 했던

것은 스스로 이 자력의 구원의 길에 돌아다는 명성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해서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지는 그 생명의 삶을 다시 얻는 일에 성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흩쳐지지 말자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홍수 심판을 경험한 이후에 그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겠죠. 아, 그러니까 심판을 경험한 건 되게 두려움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신에 의해서 통제 당하지 않을 만한 스스로 힘을 키우고 그런 욕망을 중심으로 우리는 뭉쳐서 강해지자 자신들이

신적 영향력을 어쩌면 넘어서서 그것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내는 그런 힘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애덴을 쫓겨났지만 그에 대한 회개와 순종으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신의 영역에 도달하여 다시 신적인 삶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잘 따를까가 아니라 하나님조차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세상을 주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홍수의 이후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이었다는 거예요. 홍수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경고한 성을 쌓고 그 안에 스스로 안전을 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벨의 도시와 탑을 만들려는이 시도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 중심성이 강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을 조종하고 싶은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어떠셨나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기대가 있으셨어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이렇게 이름을 부르셔서 그 어떤 창조의 그런 사역 때 해 나갔단 말이에요. 근데 이 사역을 나중에 아담에게 맡기십니다. 아담이 모든 생명책에 이름을 주도록 함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 또 하나님의 통치 세상에 한 그 다스림 안에 거룩한 동반자로 초청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내어서 하나님 없어도 되는 그런 삶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시면서이

세상의 곳곳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로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기를 원하셨어요. 흩어져라. 그러나 인간은 반대로 여기서 흩어지지 말고 모여서 우리의 뜻을 구현하자. 하나님의 뜻이 뭐가 중요해? 우리 뜻이 중요하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삶을 꿈꿨던 것입니다. 즉 바벨타 사건의 죄가 뭡니까? 이것은 이들의 문명, 기술의 죄가 아니고 도시를 만들려고 죄가 아니에요. 다만 하나님이 없는 자기 스스로의 안정성, 자기가 중심이 된 삶을 꿈꾸는 그 시도가

죄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스스로 이름을 내려는 시도였던데 반에 하나님은 이 사건 바로 이후에도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내가 너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셔서 같이 나와 함께 일하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 이름을 드려내려 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고 복주시며 창대케 하십니다. 결국 바벨탑의 이야기는 이처럼 다른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계속 발생하는 주권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그의 이름을 알아 주시고 함께하기 원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이 없는 삶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홍수 심판을 하신 이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인간을 향해서 너는 나의 형상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전히 생육하고 번성할 땅의 충만한 말씀을 노아의 후손에게 사명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시 어 살만해지자 어느새 자신의 왕국 자신의 주권을 꿈꾸면서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삶 혹은 하나님을 내 뜻대로

통지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온몸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인간이 어떤 높은 탑을 쌓은데 하늘에 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비행이만 타고 봐도 아무리 높은 탑도 지면에 붙어 있는 작은 건축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그들의 탑은 하늘에 닿기는 커녕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기

위해서 한참 내려오셔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우리의 간극을 자주 까먹습니다. 우리의 어떠함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우리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다고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운 일을 그만두었다. 주님께서 거기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곳에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결국

주님은 그들의 언어를 섞으셔서 그들이 함께 모여 악을 도무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십니다.이 조치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분은 홍수 심판을 지나가시며 조금 더 참아야겠다. 조금 더 참아 주시기로 결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바벨탑 사건에 대한 조치는 레드 카드가 아닌 옐로우 카드로 넘어갑니다. 이제 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살아가느냐 이제 이의 이야기가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벨의 죄에 결국 분열을

낳습니다. 죄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죄는 그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죄인끼리 함께 연대하려는 성격에 강합니다. 그러나 죄는 결국 서로를 상하기 때문에 끝내 분열합니다. 바벨탑은 언어와 함께 나뉘어진 사건입니다. 그 훗날 사도 2장을 보면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이 있죠. 성령교 임하시니까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은 각기 민족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인데 함께 복음의 일을 소통한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은 바벨탑으로 인한 그 분열를 능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바벨의 죄, 왕고한 고집, 높아지려는 마음,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죄성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발견된 악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예배 때마다 그것 점검하고 잘라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 안에서 그 죄가 자라서 나를 삼키고 주변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악한 나의 것을 다시 한번 비워내고 성령님으로 다시 채워서 내가 할 수 없는 사랑 연합 온전한 삶으로 이끌어 가시는 그 능력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오늘 기도하면서 주님 없이도 괜찮다고었던 나의 밥에 내가 싸온 나만의 안전한 성을 주님 앞에 하나씩 내려놓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