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에 대한 세 번째 설교입니다. 1~3장까지 사무엘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서 다뤘다면, 4~6장은 ‘언약궤 내러티브’를 통해서 사무엘상의 중요한 초점인 ‘껍데기 신앙’에 대한 비판을 다뤘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잘못된 모습들을 비판한 것이죠. 이어지는 7장은 사무엘이 지도자로서 활동했던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시대만큼은 전과 달랐음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이 사사로 통치했던 시대는 매우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온 후부터 20년 정도의
시간 동안에 있었던 일이죠. 초점은 간단합니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의 신들과 아스다롯 여신상들을 없애 버리고, 주님께만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삼상 7:4)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과 아스다롯 신상들을 없애 버리고, 주님만을 섬겼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성공은 다른 무엇에
있지 않고 여호와만을 섬기는 그 본질에 있습니다. 여호와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만! 다른 것도 의지하며 여호와도 그중 한가지로 붙들고 사는 것 말고 여호와만! 주님만 섬기는 진실한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지켜주신다는 신앙의 ABC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것을 신앙의 ABC라고 하는 이유는,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주제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된 충성을 보이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이죠. 사무엘이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은 후 하나님께 회개하며 예배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그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삼상 7: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이 블레셋 사람에게 들어가니, 블레셋 통치자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올라왔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거듭해서 블레셋에 패했기에 겁을 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이 전투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에벤에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이것이 이 전투에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런데 그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니,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영토도 회복하게 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도구 삼을 때는 얻지 못하던 것들인데,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니, 그 삶에 뒤따라 오는 것이 샬롬이죠. “예수 믿으면 행복하다.” 때로는
왜 그런지 설명하라고 하면 오히려 난해하지만, 그냥 경험되는 진리입니다. 사랑하면 행복하듯, 어쩌면 신앙은 참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7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 대신 ‘왕’을 요구하죠. 하지만 사사제도가 문제가 있고 부족해서 왕정제도가 도입되어야 했던 것이 아님을 우리는 7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분명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들이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일 뿐, 제도가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제도가 바뀐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태도가 바뀌니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사 사무엘의 통치기 20년은 그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의 일생은 흠잡을 것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거의 유일한 오점 하나가 나타납니다. 사무엘상 8장은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삼상 8:1) 사무엘은 늙자, 자기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다. ‘사무엘이 늙자’라는
표현은 8장이 7장의 사건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기에서 ‘늙다’라는 표현은 부정적입니다. 엘리의 늙음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무엘은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웁니다. 이 또한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사사직은 ‘세습’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습은 사무엘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습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굉장히 민감한 이슈입니다. 한국교회에 세습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고,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목사 세계에서 많이 공감을 얻는 이야기가, 목사의 아들들이 더 믿을만하다, 부교역자로서도 더 사역을 잘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랜 세월 보고 배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격이 부족해서 세습이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가 줄어들고 있는 이 시대에 후임목사를 뽑는 목회지들마다 세습이 자주 일어나니, 목회자의 자녀가 아닌 후배 사역자들이 절망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흙수저 금수저 논란이 신학교
내에 가장 크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미래가 불투명하니 다른 길로 가고, 그것을 지켜본 또 그 밑의 세대는 신학교를 오지 않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목회자 자녀들의 ‘역차별 문제’도 함께 거론됩니다. 세습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피하고자 한다면, 목회자 자녀라는 이유로 사역하거나 자라왔던 교회의 후임 목사로서 배제당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문제는 목회자와 목회자
자녀들이 스스로가 더 불리한 상황을 각오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건전성을 지켜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을 행하면, 하나님이 지키고 돌보신다는 그 평생의 믿음을 삶으로 지켜나가야 하는 일이겠죠. 사무엘이 아들들에게 사사직을 맡긴 결정은 그런 면에서 아쉽고, 그렇게 사사가 된 아들들의 비행은 우려했던 일이 터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삼상 8:3)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서,
치우치게 재판을 하였다. (삼상 8:4)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갔다. (삼상 8:5)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각 지파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가게 된 이유는 2가지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1)
현재 사사로 활동하는 아들들의 잘못된 모습 2) 주변 나라들처럼 왕이 있는 나라가 되길 원하는 마음 이스라엘의 모습은 주변 나라들보다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국력도 강하지 않고, 나라가 크지도 않습니다. 주변 나라에는 강력한 왕들이 존재하는데, 이스라엘에는 그런 강력한 군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즉, 장로들은 그전부터 그런 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도 사무엘의 통치기 동안 평안함을 맛보았기에 참고 있었지만, 아들들의 모습이 사무엘과 같지 않자, 바로
자신들의 야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우리가 잘 고민해볼 신앙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별된 삶의 모습으로 우리의 특별한 존재방식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별된 백성으로 부르셨는데, 정작 이스라엘은 세상의 나라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이 이러하니까 교회도 이러해야 합니다”라는 이야기는 많은 경우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다 이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여러분을 찾아올 때면, 조심스럽게 그 마음을 다뤄야 합니다. 그런 순간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묻고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첫째 - 묻지 않아서이고, 둘째 - 알아도 순종하지 않아서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대부분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죄를 가장 간략하게 정의하면 ‘불신앙과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듯 살아가거나,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 신앙과 온전한 순종’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과 그분의 마음을 깨달아가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 마음과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만 잘 기억하고 살아가신다면 사실 오늘 설교는 더 다룰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오늘 주인공인 사울도 안 나온 상태에서 설교를 마칠 수 없기에, 사울의
삶을 통해 이 주제를 살펴봐야겠죠? 여러분, 사사는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세우시고, 그 일을 하는 동안만 리더십을 갖습니다. 사사는 평상시에 큰 이슈가 없으면 일반인과 똑같이 살아가기도 합니다. 제사장의 역할을 맡았으면 그것을 하고, 아니면 농사를 짓기도 합니다. 즉, 왕이 하나님의 뜻 아래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더가 될 수도 있겠으나.... 왕의 자리에 있다 보면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처럼 여기는 교만에 빠져서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아갈 위험성이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생기면 발생하게 될, 수많은 위험성을 하나님은 말씀해주십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백성들이 왕 때문에 희생당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끝내 다른 나라와 같이 되기를 그들은 요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특성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 나라의 모습과 같이, 삶의 방식과 같이, 가치관을 따라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에 42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선한 왕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왕정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왕정은 한번 도입되면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왕권의 남용은 사사직의 남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폐해가 더 큽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강력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십니다. 왕정으로의 전환은 받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절대 왕정과 다른 ‘신정 안에서의 왕정’을 조건으로 허락하십니다. 왕정이라는
제도가 가진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두신 것입니다. 앞서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왕정이라는 제도가 위험 요소가 크지만, 결국은 그 왕의 태도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사무엘에게 그의 마지막 사명으로 왕을 세우는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사울에게로 넘어갑니다. (삼상 9: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고 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비엘이고, 할아버지는 스롤이고, 그 윗대는 베고랏이고, 그 윗대는 아비아인데, 베냐민 사람이다. (삼상 9:2) 그에게는 사울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었고, 키도 보통 사람들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영화 <관상>의 유명한 대사가 있죠?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성경에서 가장 여기에 합당한 인물을 꼽자면 ‘사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흠모할 외모와 골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딱 봐도 눈에 띄는 청년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집안이 ‘유력’했다는 것은 평균 이상의 가문과 재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일단 저와 여러분이 한가지 선입견을 버려야 할 것은 우리 대부분이 사울의 결말을 알기에 부정적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입견을 좀 벗어버리고 사울을 바라보면, 그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여러 요소를 갖춘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저렇게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임에도 겸손하기까지 한, 소위 잘 배우고 잘 자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자리에 사울이 있으면 우리는 사울을 좋아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느 날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종을 하나 데리고 암나귀를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찾아 헤매다가 사무엘이 거하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과 사울이 만나게 될 것을 이미 사무엘에게 준비시키셨습니다. (삼상 9:16)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여러분도 한번 옆 사람에게 말해주십시오.“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일에 사용하시는 도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이 되기 위해서는 3가지 검증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지명 : 기름 부음 받은 자 2) 군사적 능력 : 군사적 검증을 통해 백성의 인정을 받아야 함 3) 즉위 : 언약을 통한 백성들의 추대 즉위를 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왕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나기드’로 일종의 왕 후보자 신분입니다. 하나님의 임명도 있지만, 그 부르심 앞에서 최선의 순종으로 반응하여,
공동체의 인정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하나님 마음대로 위에서 내리꽂지 않습니다. 왕의 자리가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리인 만큼 백성들의 마음도 존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숨은 1인치의 장면이 있습니다. (삼상 9:22)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초대받은 사람들의 윗자리에 앉혔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서른 명쯤 되었다. (삼상 9:24)
요리사가 넓적다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으니, 사무엘이 말하였다. "보십시오,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앞에 놓고 드십시오. 내가 사람들을 초청할 때부터, 지금 이렇게 드리려고 보관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 사울은 사무엘과 함께 먹었다. 사무엘은 직전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사입니다. 왕이 생기면 정치적 지도자의 자리는 바뀌겠으나, 종교적 지도자는 여전히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의 위치에서 자신의 아들들을 폐하고, 왕을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좋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사울을 만난 후부터, 아직 왕의 후보자에 불과한 그를 윗사람으로 인정하고 대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진 너무나 중요한 모습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감정대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을 받아들이는 겸손과 순종이 있습니다. 모세가 그러했죠. 하나님이 모세에게 사명 주실 때, 약속한 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중간에 출애굽 1세대의 불신앙으로 계획을 변경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 바로 앞에서 모세에게 ‘너는 여기까지’라고 말씀하시죠. 저길 들어가는 역할을 여호수아가 하게끔 해야 여호수아의 리더십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겸손함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보다 뒤늦게 사역을 시작한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말합니다. 사무엘의 이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자기중심적이고, 타인과 비교하여 더
앞서길 바라고, 날 몰라주면 서운하고. 비교의식에 빠져서 우월감과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경우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곧이어 사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 표적들이 나타날 것을 알려줍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표적은 이것입니다. (삼상 10:6) 그러면 그대에게도 주님의 영이 강하게 내리어,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면서 예언을 할 것이며, 그대는 전혀 딴 사람으로 변할 것입니다. (삼상 10:7)
이런 일들이 그대에게 나타나거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증거이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사사기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사사에게 임하며 부르심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이죠. 이제 그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하는 것’, 즉 순종입니다. 여러분, 신약시대 이후 우리 모두에게 ‘성령’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회심한 모든 사람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거하시는 것이죠. 그분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오늘
사울에게 오셔서 하는 일과 같습니다. (삼상 10:9)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켰을 때에,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사무엘이 말한 그 모든 증거들이 그 날로 다 나타났다. 새 마음. 우리의 마음이 아닌 새로운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을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말하지요.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주인 되고 내 뜻대로 행하던 죄의 본성 아래 살던 나는 죽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인 된 사람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함께 하시며, 그 주인 된 삶을 가르치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남 이전의 내 안에는 ‘내 마음’만 있었다면,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내 안에 죄의 본성(옛사람)이
남아서 영적인 주도권 싸움을 합니다. 내 안에 ‘옛사람과 새사람’의 영적 경쟁이 있는데, 성령께서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는 것처럼, 사탄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자극하며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발악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회심 이전의 삶에는 없던 고민이 생깁니다. 성령은 내 신앙의 양심을 일깨우시고, 나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해가시고자 일하시는데, 내 오랜 습관과 옛사람의 본성은 불쑥불쑥 여전히 다 죽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롬 8:5)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롬 8:7)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건 안 믿건 내 삶은 똑같고, 불편함도 없고, 편하기만 한다면... 내가 진짜 회심했는가를 오히려 고민해봐야 합니다. 반면, 계속 내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무엇인가가
느껴진다면, 저는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일하게 되셨음을 깨닫고, 이제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순종의 훈련을 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왕으로 소개합니다. (삼상 10:23) 사람들이 달려가 거기에서 그를 데리고 나왔다.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섰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커 보였다. (삼상 10:24) 사무엘이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뽑으신 이 사람을 보아라. 온 백성 가운데 이만한 인물이 없다."
그러자 온 백성이 환호성을 지르며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이 장면에서부터 이제 우리는 영적 긴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백성들이 왕을 보자마자,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 인간 왕을 높이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이 생겼으므로 진짜 왕인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사울의 인생’에 있어서도 큰 도전입니다. 그는 지금껏 이렇게 특별한 자리에 서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지도자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늘 하나님에게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칭송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사울의 눈에도 하나님보다 백성들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이 위험한 일입니다. 즉 현재 문맥에서 사울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의 왕권을 지켜주시는 것이 하나님임을 실제적으로 믿느냐의 문제 앞에 직면한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왕권을 지키고자 하면 그것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자리에서 그것을 깨우치는 것이 참 쉽지가 않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이 지키시는 왕권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길이고, 이스라엘을 돌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사울을 사용하셔서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고 그의 왕권을 곤고히 해주신 것입니다. 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사울은 온 이스라엘 앞에 공식적인 왕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무엘의 고별연설이
12장에 기록됩니다. (삼상 12:12b)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삼상 12:14)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삼상 12:15)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인간 왕을 주시기로 하나님이 결정하셨습니다. 이제 왕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도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백성들의 신앙적 태도가 변질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백성도 여호와를 경외해야 하고, 왕도 여호와를 따라야 합니다. 왕에게는 왕으로서의 충성의 몫이 있고, 백성들도 백성으로서의 충성의 몫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왕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교회에도 모임에도, 하다못해
가정에도 ‘리더십’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진짜 리더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리더로 세워진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모두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진짜 왕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자리와 역할 가운데 말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을 여러분의 가치관과 뜻에 맞게 대하지 마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좇는 일이 무엇일지 늘 고민하십시오. 그것이 옳습니다. 안타깝게도 공식적인 왕으로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울은 하나님이
중심된 삶을 살아가는 일에 실패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쟁이라는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에 앞서 하나님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제의적 역할은 사무엘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지켜야 하는 하나님이 세운 사역의 범위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에덴의 왕으로 세운 아담에게 하나님이 정해주신 충성심의 경계입니다. 사울에게는 이 일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왕이 된 사울이 교만해진 것일까요? 자기 멋대로 선을 넘고 맙니다. 사사시대의 공식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울은, 제사를 직접 진행합니다. 이것은 사무엘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무시입니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잘못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울도 실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그것이 그의 실체인 것이죠. 그것이 실력입니다. 사울에게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지속적으로 자기 뜻대로 행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백성과의 관계에 집착하게 됩니다. 13~15장까지 지속적으로 사울의
실패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실패의 원인은 3가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정리하여 새기는 것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1) 불순종 : 교만 하나님께서 처음 바라보셨던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무엘을 만났을 때,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상 9:21)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하지만, 왕의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아닌,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법보다 자신이 위에 있습니다. 15장의 아말렉의 전투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시지만, 사울은 스스로 판단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는 전리품 가운데 좋은 것을 진멸하지 않고, 쓸모없는 것만을 골라서 진멸합니다. (삼상 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즉, 사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 변화되어 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2) 불신앙 : 초점의 변질 (삼상 15:12)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누군가가, 사울이 갈멜로 가서 승전비를 세우고 나서, 거기에서 떠나 계속 행진하여 길갈로 내려갔다고 전해 주었다. 그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은 소홀히 하지만,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열심히 합니다. 사무엘이 그를 책망할 때도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해달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그의 잘못을 말하지만, 사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시선이었던 것입니다. 3) 변명 : 회개의 상실 (삼상 13:12) 이러다가는 제가 주님께 은혜를 구하기도 전에, 블레셋 사람이 길갈로 내려와서 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할 수 없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삼상 15:15) 사울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아말렉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이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진멸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상황이 ‘할 수 없이’, ‘더 좋은 일을 위해’ 행한 자기 생각에 옳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수를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조금 더 심각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시지만, 한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 주어진 마지막 순간, 사무엘의 지적 앞에 그는 철저한 회개로 나아갔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회개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상 변명으로 채워버립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도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사울은 변명했고, 다윗은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이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삶의 예배’를 굉장히 많이 말합니다. 내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는 단순히 찬양을 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어떤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에게 사무엘이 했던 것처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낫습니다.” “하나님, 이건 제 뜻대로 하고, 이것 잘 되면 하나님 위해서 무엇을 할게요.”여러분.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지금 그것을 하나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알았다면 그 길이 불안하고 무모해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혹시 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인데 내가 순종하기 어려워서 머뭇거리고 있던 부분이 떠오르십니까? 기회입니다. 순종의 기회. 여러분의 삶이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드려질 기회입니다. 사울과 같은 내 마음을 성령께서 바꾸어 가시려고 하는 그 모든 순간에 저는 여러분이 꼭 말씀이 보여주는 길을 따라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손을 움켜쥐고 내게 오는 것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내 뜻을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손해가 발생할 것이 뻔한 상황, 더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쪽으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야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저는 개척에 용기를 낸 것을 인생에서 가장 위험하면서 행복한 결정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 걸어오면서 자주 외치는 것처럼, “순종의 사람은 방법을 찾고, 불순종의 사람은 핑계를
찾습니다.” 내가 내 뜻대로 이것을 결정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장황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그것을 포기하고 주 뜻대로 살기로 결정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이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간단합니다. 진리는 심오하지만 단순합니다. 복잡한 것은 내 마음일 뿐이죠. 내 마음이 다르니까. 사실 우리의 고민은 많은 경우 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답을 알지만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찾는 나의 방황으로 우리는 헤매고 있지는 않나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도 말해줍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진정한 왕이라면, 그분의 말씀 앞에 순종으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함께 그런 신앙으로 걸어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