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난주 말씀을 통해 사울 왕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람들의 기대, 또한 하나님의 기대를 안고 왕으로 등극한 사울의 시대는 안타깝게도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세워지기 전, 즉 왕정시대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셨습니다. 그것이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던 이유였습니다. 백성들이 보이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으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왕을 원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르기에 그들의 영적 수준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맞추어, 눈에 보이는 왕을 주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쁘면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죠. 내가 여러 개로 분리되어 여기저기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내 마음을 정말 잘 알고,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그 일을 해줄 수 있는 나와 마음이 꼭 맞는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한 부분을 맡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역할이 그것이죠. 만약 이스라엘의 왕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마음, 이심전심이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왕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처럼 하나님 뜻에 맞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왕정사회로 전환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고심하셨을 문제는 그런 왕을 찾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듭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사무엘이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죠. 왜 사무엘에게 왕을 시키지 않으셨을까?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선 왕정 사회로 전환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가 사무엘의 통치 때는 아예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아들이 지도자가 되고 난
후, 왕정 요구가 들어왔습니다. 즉, 사무엘의 통치기에는 왕이 없어도 될 만큼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요구가 생겼을 때 사무엘은 이미 연로하였고, 그렇다면 곧 그의 아들들이 다음 왕이 되어야 할 텐데, 그의 아들들이 사무엘의 뒤를 이어 왕을 할만한 모습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은 연로한 사무엘의 마지막 임무로 왕을 찾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신 것이죠. 하나님 눈에 들어온 1순위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을 보시며 하나님은 그런 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으셨죠. 우리가
종종 사울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가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울이 실패할 것을 알지 못하셨나요? 제가 성경을 가르치다 보면 제법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비슷한 질문을 여러 형태로 참 많이 받습니다. 요점은 같습니다. 이런 질문은 대답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전제를 어떻게 두느냐가 어렵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함께 생각해볼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 수습할 예정입니다. 한번 같이
잘 생각하면서 들어보십시오. 제가 설명할 수 있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 이야기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으실 때, 그녀가 뱀의 유혹을 받고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도록 하는 역할을 맡기기 위해 창조하셨을까요? 그렇다면 말 그대로 아담의 변명이 진실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하와 때문에 제가 이렇게 먹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도록 각본을 짜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기대는 아담이 에덴이라는 최초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하나님과 합한 마음으로 그곳을 잘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그 일에 실패한 것이죠.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도록 계획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멋지게 구출해야겠다는 시나리오를 쓰고 그들을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시나리오대로 엇나간 일이 발생한 것이죠. 아담의 NG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수용하시어 새로운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쓰십니다. 우리는 인간의 예측 못 할 돌발행동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변질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흐트러진 상황까지도 사용하시고, 그 안에서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길을 내시는 분이시죠. 만약 우리의 실패로 인해 하나님도 실패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당이 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제국들의 흥망성쇠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지금도 우주의 모든 것과 하늘의 나는 새도 돌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 속에서도 일하시고, 실패를 통해서 또 다른 작품을 만드시는 분이시죠. 그것이 제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너는 나를 믿으면 된다.”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요. 제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울의 실패는 아담의 실패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 창조하실 때도 딱 한 가지만을 당부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명령.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께는 순종하는 ‘종’의 자리에 있을 것. 그것이 선악과라는 나무를 주신 이유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적 의미와 자리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선악과는 하나님이 주신 너무나 소중한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이 죄를 지을만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류가 죄에 빠지도록 하셨느냐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악과’로 인하여 죄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제 말을 이해하시나요? 자, 여러분. 선악과를 보고 마음에 없었던 충동이 생긴 것입니까? 마음에 생긴 충동을 갖고 선악과를 본 것입니까? 후자입니다. 뱀의 거짓된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품고 그 나무를 다시금 보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는 그 전날까지도 매일 볼 수 있는 동산 정중앙에 있는 나무입니다. 보고 깨달아야 하니까.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나무가 왜 유독 그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보였을까요? 해답은 간단합니다. 사탄이 하와의 마음에 있는 그 중심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흔들린 중심을 갖고 바라보니 모든 것이 그렇게 보였더라는 것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 참 이렇습니다. 연애의 심리도 그렇죠. 옆에 항상 있는 남사친 여사친도 가만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인데, 다른 이성이 나타나서 관심을
보이면 갑자기 내 마음에 소유욕이 생깁니다. 그 친구는 늘 내 옆에 있었어요. 평소에는 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가도, 그런 마음의 변화를 겪은 후 바라보면 ‘이 사람, 갖고 싶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죄는 늘 중심의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동은 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일 뿐입니다.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동’이 수반되었을 때만 그것이 죄라고 여기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죄는 행동의 수반으로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즉,
행동하지 않아도 죄입니다. 말씀을 보시죠.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살인은 미워해서 나타나는 행동의 가장 극대화된 모습입니다. 그 앞에는 폭력이나 욕설 등이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성경은 욕설을 내뱉지 않아도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미워하는 감정을 품는 것도 죄의 근원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 본성대로 나온 결과입니다.
즉, 죄의 본질은 내 본성과 성령의 마음 사이의 충돌에서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근원입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도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변함이 없어서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이 탐욕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3단계입니다. 그 첫 단계가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흔들리는 문제입니다. (요일 3:9)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 중심의 문제입니다. 이 중심은 감정이나 마음의 상태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 중심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으면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그 중심의 주도권 문제를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그 태도에 대한 근원적인 공격입니다. 그의 거짓말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굳이 하나님께 속하여 살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왕입니다. 그는 거짓된 말로 우리의 중심을 흔들어서 내 존재적 자리를 박탈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벗어나도 된다고 여기는 태도를 갖도록 하는 데 성공합니다. 여기서 사실 이미 싸움은 끝난 것입니다. 탐욕이나 선악과를 먹는 행동은 그에 따른 결과일 뿐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이 날마다 초점을 두고 싸워야 하는 것은 이 첫 싸움입니다.
첫 싸움을 내어주고 둘째, 셋째 싸움을 하려고 하면 100전 100패입니다. 창조주를 벗어나 버린 피조물. 나무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온 가지와 같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내게 속하여 살아야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가르치셨지만, 그 말씀보다 사탄의 거짓말을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고,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진리를 주셨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성경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에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원래 처음에는 다 그렇다고 치고 한번 열어보는 것입니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보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시작인 창세기 1,2,3장. 왜 성경은 창조와 타락 이야기를 가장 먼저 기록하고 있을까요? 결국 그 문제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나? 나는 스스로 있는 존재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나?’ 이런 수많은 질문들이 모든 인간에게 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여러 방면에서 답을 찾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 밖에서 그 답을 찾으면 무신론적 입장도 만나게 되겠죠. 여러분, 오히려 과학이 밝혀낸 정답이 있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든 것이 그냥 우연히 존재한다고 여겼어요. 그런데 오히려 과학을 통해서 우주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과학은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음을 밝혀냈고, 그것은 우주에 시작점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팽창하고 있으니, 팽창하기 전 최초의 상태로 시간을 거슬러 계산하면 시작점이 생기는 것이고, 과학에서
그것을 ‘빅뱅’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에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줍니다. 신의 존재를 제외하고 그것을 설명하면, 그 모든 것은 우연입니다. 어떤 물질에서 인간은 우연히 발생했다는 것이죠. 진화해서 지금의 형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은 목적도 없고, 우연의 연속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허무합니다. 우연히 생겨난 존재에게 무슨 목적이 있겠습니까?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 내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어요. ‘아메바’나 ‘인간’이나 우연의 차이일 뿐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도 목적 없이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찾아야 하죠. 허무해지지 않기 위해.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그 시작과 우리의 존재 목적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까지 다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작이 하나님께로부터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감정과 모든 지성까지 주셨고, 우리의 삶의
존재와 목적, 진정한 가치와 행복도 그분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의심해봐야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나? 특히 창세기 1~2장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을 보고 너무나 좋았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을 보면서 고민이 생기죠. 지금 내 삶이 정말 하나님이 가장 걸작품으로 창조한 것이라고? 이게 최선인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이죠.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 창조하시며
주셨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죄로 인해 깨어진 것을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이 처음 주신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좋은 소식, 우리에게 들려진 희망의 소식 말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제 인생이 가진 고민에 대한 원인과 해답의 가능성을 정리했을 때, 곧장 이런 질문이 들었어요. 그럼 정말
회복될 수 있는가? 회복되면 정말 행복할 수 있는가? 인생의 허무함,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정말 다른 길이 있고, 그것이 진짜로 우리의 삶을 바꿀까? 이 질문에 대해 20살의 저는 그럴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으로 그냥 걸었고, 25살쯤에는 그 실제적 가능성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을 보내며 지금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확신합니다. 즉, 여기에 필요한 것이 ‘경험’입니다. 믿음은 ‘시간’과 함께 성숙해간다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 자라갑니다. 교회에 등록된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 그분과 함께 하는 실제적 경험들 말입니다. 장황한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하나님은 사울이 타락할 것을 알지 못했는가? 시간적으로 미리 알았냐는 질문이면 아셨습니다. 우리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개념은 인간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그보다 크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므로 미래의 모든 일들도 아십니다. 그러나 조작하여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결국 그 안에서 모든
선택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두십니다. 즉, ‘실패한 왕’의 역할로서 사울을 택하고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 처음 보였던 모습에서 변질되지 않았다면, 혹은 변질되는 순간에도 회개의 기회에 돌이켰다면 성경의 뒷이야기는 바뀌었을 것입니다. (삼상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주님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삼상 15:10)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삼상 15:11)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주님께 부르짖었다. 2) 죄는 자기중심성의 문제이다. 아담에게 선악과 사건이 그러했고, 사울에게는 왕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는 순종해야 하는 일이 그러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중심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왕인지의 문제가 가장 근원적인 죄의 문제입니다. 나무에 속한 가지가 아니라, 스스로 나무가 되겠다고 하나님이라는 나무를 버린 것이 아담의 문제였고, 동시에 사울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누릴 수 있는 줄 알았던 아담의 생명력은 사라졌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으며, 자신의 힘으로 지키고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던 왕권은 하나님을 떠나자 곧 잃어버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 문제를 날마다 기억하기 위해, 선악과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욱 바르게 잘 보이는 곳마다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선악과를 스스로 심고 그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표현대로, ‘오늘을 우리의 영적 식목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인간의 실존 문제의 해답이 성경에 있다. 천동설 지동설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판단이나 감정의 문제를 뛰어넘는 문제였던 것처럼, 인간의 시작과
끝, 존재의 목적과 가치는 인간의 느낌이나 보는 것으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문제는 성경의 그 진리를 믿어볼 만한가의 선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시간’에 답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믿고 따르는 자가 그 이후로 시간 속에서 ‘경험’해가며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반드시 시간 속에서 ‘축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삶에 무의미한 것은 없는 법입니다.
실패도, 좌절도, 다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경험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만나는 사무엘상 16장은 사울의 실패 이후 이야기입니다. 낙심한 사무엘을 하나님이 일으켜서 대안을 찾기 위해 보내십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실패를 보면서 인간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후회하실 정도이니, 사무엘의 마음 또한 그랬겠죠. 어쩌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무엘서 첫 설교를 통해서 다뤘듯, 하나님께서 내미신 손에 ‘하이파이브’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다른 대안을 찾는 일은 사무엘에게 조심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좌를 차지한 사울에게 반역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을 찾는 일을 숨긴 채, 제사를 지내려는 목적으로 이새의 집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이미 다윗을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대로 제사를 열고, 그 제사에 다윗의 아버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초청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자신을 초청해주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요? 집안의 경사인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두 준비하는데, 딱 한 사람만 제외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만나기 위해 이 일을 계획하시지만, 정작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다윗은 이런 자리에 설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들의 관점이 이토록 다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매력 만점의 왕이었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함께 할 수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판단은 언제나 틀릴 수 있습니다. 이새가 데려온 7명의 아들들이 차례로 사무엘 앞으로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무엘도 인간의 시선을 가졌기에, 외형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는데 그의 빼어난 외모를 보고 사무엘은 기름 부으려고 합니다. 마치 지난번 사울처럼 ‘왕이 될 상’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둘째 아비나답도,
셋째 삼마도 아니고 일곱 명 모두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굉장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왕을 세우신다고 하셨는데 왜 모두가 아니라고 하실까? 사무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새에게 확인하며 묻습니다. (삼상 16: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우리는 요새 막내가 굉장히 귀합니다. 저도 막내였고 나름 귀하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합니다. 이스라엘 시대에 ‘말째’라는 것은 막내라는 뜻과 동시에, 하찮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성경 처음에 ‘다윗’이란 이름으로 소개되지도 않고 그냥 말째로 소개됩니다. “제게 하찮고 이런 자리에 초대하지 않아도 될 막내가 하나 있는데, 걔는 이런데 올 애가 아닙니다.” 이게 이새의 대답인 것입니다. 다윗이 이새의 몇 번째 아들입니까? 8번째 아들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완전수 ‘7’ 밖에 있는 자로서, 전혀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또 양 치는 일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진 피터슨의 글에 의하면 이 당시의 양 치는 일은 매우 영향 없는 일이었습니다. 뭔가 집안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조금 잘못해도 괜찮은 하찮은 일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웃집 아이 봐주기나 슈퍼마켓 장보기 등의 일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서 기대하는 아들에게는 농업이나 관직을 준비시켰다고 합니다. 다윗은 무언가 대단한 일을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상황이 아닙니다. 그가 너무나도 하찮은 존재, 내놓기 부끄러운 존재이기에 이런 자리에 데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 눈에 ‘걔는 내가 알아요. 걔는 제외시켜도 돼요.’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다윗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세상에서 내가 무시 받는다고 너무 무너지지 마십시오. 사람의 시선에 너무 마음 두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충분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한 번 다윗의 마음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사무엘이 자신의 가족을 초대한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다윗도 아버지를 따라 형들과 같이 그 초대에 같이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예배에 가기 위해 형들이 꾸미고 준비할 때 다윗도 얼마나 같이하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양을 치러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양을 치러갑니다. 불공평한 상황 속에서,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아버지께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순종도 훈련입니다. 한순간에 순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에도 성숙의 시간이 있는 법입니다. 또한 온전한 순종의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 즉시 2) 온전히 3) 기쁘게. 우리는 보통 어쩔 수 없이 순종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하면서도 온갖 감정을 다 쏟아냈을 것입니다. 근데 성경에 보면 다윗이 자신에게 맡겨진 이 일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상 17:34) 그러나 다윗은 굽히지 않고 사울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의 종인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삼상 17:35)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 내곤 하였습니다. 그 짐승이 저에게 덤벼들면, 그 턱수염을 붙잡고 때려 죽였습니다.” 다윗은 양을 칠 때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순종했습니다. 그냥 억지로 불평 가운데 권위에 눌려서 하는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어진 일,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성실함이고 진실함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모습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눈여겨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죠. 그리고 아담과 사울에게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을 기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선악과를 세워 주셔서라도, 눈에 보이는 사무엘을 곁에 두셔서라도, 그 마음 지켜가길 바라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무도 보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목자의 사명에 목숨 걸고 최선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 주목하고 있던 분이 하나님입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때, 그 모습을 하나님은 눈여겨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사실 어렵습니까? 저에게도
솔직히 사람들이 봐줄 때 더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뭔가 해서 그로 인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다윗이었으면 저렇게 못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다윗이 겪고 있는 이 ‘불공평’과 ‘불합리함’의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 훈련의 시간으로 그의 삶에 작용합니다. 그것이 미처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죠. 다윗은 이 시간 더욱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보내었고, 그것이 다윗의 영성이 됩니다. 사무엘은 다윗을 불러오도록 하여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부음 의식은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하므로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게 이 일이 행해졌을 것입니다. 다윗 또한 이 일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왕이 되는 것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기름부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일이 17장에 기록이 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투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블레셋에는 가드 사람인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민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수 11:22)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네피림은 당시의 사람 중에서 체형이 남다른 족속인데, 아낙 자손들이 그들의 후손입니다. 여호수아서 기록을 보면 아낙 자손이 가나안 땅에는 남지 않았고, 블레셋 영토인 가드에 남아있다고 나옵니다. 블레셋에 있는 가드 출신의 장수 골리앗은 아낙 자손으로 보기에 충분합니다. 고대
전쟁에는 양쪽의 대표 전사가 나와서 1:1로 싸워 승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좋아하는 삼국지에도 자주 나오는 장면입니다. 관우가 조조의 술을 받은 후, 대표 전사로 나가서 적장 화웅의 목을 베고 술이 식기 전에 돌아와 마시는 장면이 유명하죠. (삼상 17:10) 이 블레셋 사람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내가 오늘 이스라엘 군대를 이처럼 모욕하였으니, 너희는 어서 나에게 한 사람을 내보내어 나하고 맞붙어 싸우게 하여라." 이런 골리앗의 도발
앞에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습니다. 이 전장에 마침 다윗의 7명의 형 가운데 1~3호기 형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 형들에게 도시락을 전해주러 전장에 오게 된 것이죠. 다윗은 전장에서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자신이 나서겠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가서 다윗의 결전 의지를 사울에게 전하니까 다윗을 오게 합니다. 아마도 사울은 누군가 나선다는 이야기에 내심 기쁨을 갖고 불렀을 텐데, 다윗을
보자마자 허탈해합니다. (삼상 17:33)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그만두어라. 네가 어떻게 저 자와 싸운단 말이냐? 저 자는 평생 군대에서 뼈가 굵은 자이지만, 너는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니냐?" 이때 다윗이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경험했던, 축적된 시간에서 나온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삼상 17:37) 다윗은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님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울이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렇다면, 나가도 좋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길 바란다." 사울이 다윗에게 갑옷을 주지만, 평생 갑옷이란 것을 입지 않은 다윗은, 늘 하던 대로 목자의 막대기와 물매, 그리고 돌 다섯 개를 들고 싸우러 나갑니다. 아마도 다윗이 목자로서 맹수로부터 양을 보호하던 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모습에 골리앗이 자존심이 상합니다. 막대기를 들고 오는 모습에 골리앗은 다윗에게 말하죠. “네가 나를 개로 여기는
것이냐?” 그때 다윗이 말하죠.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이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강타하고, 쓰러집니다. 다윗은 다가가서 골리앗의 칼을 빼어 그의 목을 벱니다. 다윗이 이긴 것입니다. 우리는 17장을 읽으면서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에 있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다른 기회, 다른 상황이 그들을 가른 것이 아닙니다. 같은 기회를 받았고, 같은 자리에 있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는 언제나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 중에 골리앗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외적 조건을 갖춘 것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 또한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위에 있었으니, 이스라엘 중에는 가장 큰 키와 용맹스러운 외형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의 기대는 사울과 같은 이에게 있었고, 다윗은 부모조차 기대하지 않고, 형들은 그에게 면박 주기 일쑤였지만, 그에게는 하나님과 다윗만이 알고
있는 깊은 사귐, 세상이 주는 외로움 속에 오히려 성숙해버린 그의 영성이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미운 오리야, 괜찮아’입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다들 아시죠. 특이하게 생긴 오리가 있었죠. 그는 오리 세계에서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합니다. 처음에는 어미 오리가 다독여주지만, 나중에는 어미 오리마저 그 새끼 오리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한탄합니다. 그렇게 미운 오리는 상처받고 집을 떠납니다. 그 이후에도 순탄하지
않습니다. 고양이와 닭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도망치는 삶의 연속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봄이 오죠.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날개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날개로 하늘을 날게 되죠. 못생긴 오리로 여겼던 자신의 존재가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다윗의 삶이고, 이것이 신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리냐, 백조냐 이것은 외형이 아니라 내면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백조의 마음은 당대의 오리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오히려 사울은 오리 세계에서 인기가 제법 많았습니다. 가장 오리다운 마음이었으니까요. 신자의 삶은 때론 세상 가운데 미운오리새끼와 같을 것입니다. 나의 존재, 나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른다면, 내가 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납득이 안 될 것입니다. 왜 나는 오리처럼 살면 안 될까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됩니까? 오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백조가 오리와 달리 하늘을 나는 존재인 것처럼,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적 숙명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는지 묻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정말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고 새로워졌다면, 더이상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는 어려움, 세상이 주는 어려움에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존재가 바뀌었으니, 그 존재에 맞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 여러분을 조금 세상이 외면해도, 조금 타박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무고한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연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보인 모습이 남들과 달랐던 이유를 잊지 마십시오. 그가 가졌던 경험이 그를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그곳에 서게 한 것입니다. 신앙은 진리를 삶에 내면화하면서 성숙해갑니다. 다윗이라고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그도 양을 치다가 위기의 순간, 도망가야겠다는 인간적인 마음부터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51:49의 마음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다 보면, 그다음에는 더 쉬워집니다. 또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다 보면, 더 큰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하며 시간 속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 경험의 시작은 ‘회심’입니다.
정말 내가 내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바꾸고 그분이 주인 된 삶을 살아가겠다는 진실한 믿음 안에 살아가다 보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시간들’입니다. 다윗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내면이 단단해졌던 것은, 그와 하나님만이 아는 깊은 사귐, 훈련되어 성숙한 신앙이 그에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아졌으니, 이제 그의 삶을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승리는 첫 번째 싸움에서 결정됩니다. 신앙은 결국 중심의 문제입니다. 내가 아무리 겉을 번지르르하게 포장해도, 결국 내 내면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가 본질입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이 내 내면에 늘 자리 잡고 계시면 우리는 100전 100승입니다. 병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병이 무엇인지 결정됩니다. 소주가 들어가는 소주병이고, 기름이 들어가면 기름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